셰에라자드의 혀를 가진 하마
이윤훈 내가 아끼는 컵은 하마를 닮았어요 입이 곧 몸이랍니다 말만 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아요 팔다리, 눈코귀를 감추고 입만 벌린 모습을 보면 웃음이 나와요 그러다 살짝 안쓰러워요 아무래도 외로운 모양이에요 연둣빛 혀를 키워 모스크의 아라베스크 무늬처럼 온몸을 덩굴로 덮었으니 말이에요 천 일 동안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요 밖을 향해 자꾸 소리를 벋으려 해요 누군가에게 닿고 싶은 거겠지요 저 자신을 휘감을 뿐이지만요 뭉크보다 더 크게 입을 벌리고,고 말을 하지만,만 그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아요 프리마 돈나가 아리아를 부르다 입을 벌린 채 멈춘 텔레비전 화면처럼요 물을 마시고 나면 말을 향한 더 심한 갈증 자신의 목소리를 찾으려 탁자에서 쿵쿵 뛰려 하고 고양이가 말랑말랑 걷는 소리 오후 세 시의 접시들이 동글동글 하품하는 소리 누군가 삼킨 흐느낌마저 흉내를 내려 해요 하마를 물끄러미 보다가 우리의 귀는 진실만을 듣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새삼 알았어요 수려하게 말솜씨를 부릴 수 있는 것은 치명적인 행운이에요 우리의 귀는 귀꿈치를 들고 덧없는 구애라도 듣고 싶어 하거든요 각설탕 이를 가진 거짓말이라도 발설은 아름다운 병이에요 내 하마도 사랑의 이야기를 밤새워 이어가고 싶어 해요 천 일, 또 천 일 오늘부터 하마의 천일야화를 들어줘야겠어요 그 불치의 병을 사랑하고 자주 목을 축여줘야겠어요 요즘 종종 거울 앞에서 입을 벌리다 깜짝 놀라요 내 하마를 닮아가는 나를 보고요 그것이 원래 나라는 걸 알고 오늘 더 놀랐어요 행복하게도 속수무책이에요 내일 다시 이야기를 덩굴덩굴 늘어놓을게요 들리지 않아도 귀를 열어 두세요 ―계간 《문학과 사람》 2024년 봄호 ---------------------- 이윤훈 / 1960년 평택 출생. 아주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로 등단. 시집 『나를 사랑한다, 하지 마라』 『생의 볼륨을 높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