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보 다리 밑의 아뽈리네르
‘미라보 다리’란 시가 너무 좋아 꼴깍 넘어간 적이 있다. 그게 언제인지는 나도 모른다. 시를 읽지 않을 때였다. 그 시의 첫 소절을 읽다가 반해 버린 걸 보니 남녀 간의 사랑이 첫눈에 불이 당겨지듯 아마 그렇게 ‘미라보 다리’도 내 안으로 들어온 것 같다.
기욤 이뽈리네르(1880, 8, 26~1918, 11, 9)는 로마에서 태어났으나 모나코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 안겔리카 코스트로비츠카는 지금은 벨라루스 영토인 나바후르다크가 고향인 폴란드 귀족 출신이다. 아버지는 이름이 알려지기를 싫어하는 고관이거나 아니면 시를 중얼거리며 돌아다니는 거리의 허렁뱅이였는지 어머니는 알고 있겠지만 아들은 모른다.
아뽈리네르는 사생아란 신분으로 프랑스에서 지낼 때 출처가 불분명한 이방인 신세로 문필활동을 했다. 그렇지만 그는 시인으로 성장하여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국보급 시인으로 칭송받고 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지금도 대표 시를 꼽으라면 서슴없이 ‘미라보 다리’를 앞세우고 있다.
아버지 없이 자란 시인과 비슷한 운명을 타고난 또 한 사람의 프랑스 화가도 있다. 모리스 위트릴로라는 화가는 매춘부 출신으로 나중 화가가 된 수잔 발라동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몽마르트 거리를 떠도는 무명 화가였다. 위트릴로는 사생아의 설움을 그림으로 이겨내 거리의 건물들을 한결같이 흰색으로 색칠한 백색 화가란 호칭을 얻은 화가다. 위트릴로란 성씨는 어머니와 친한 스페인에서 이민 온 미구엘 위트릴로에게 부탁하여 그의 아들로 입적시켜 겨우 얻은 것이다.
나는 ‘미라보 다리’란 시를 접하고 시의 원문을 구해 엉터리 프랑스 발음으로 중얼거리고 다녔다. 오십여 년 세월이 지나 지금은 맨 앞 문장 한두 마디만 혀끝에서 맴돌 뿐 나머지는 잊어버렸다. ‘술 레 봉 미라보 꿀르 라 센느/ 에 노 아모르’(Sous le pont Mirabeau coule la Seine/ Et nos amours) 복습하는 심정으로 한글로 ‘미라보 다리’의 전편을 적어 본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내린다/ 아 기억해야만 하는가/ 우리들의 사랑을/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는 것/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머무네/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하자/ 우리들의 팔과 다리 아래로/ 영원한 시선의 지친 물결이/ 흘러가는 동안/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머무네/ 사랑은 흘러간다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은 흘러간다/ 인생은 얼마나 느리고/ 희망은 또 얼마나 강렬한가/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머무네/ 하루 하루가 지나가고 세월이 흘러간다/ 가버린 시간도/ 우리들의 사랑도 돌아오지 않으리/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머무네”
아뽈리네르는 이 시를 서른두 살에 썼다. 4년 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다. 사망하기 2년 전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지만 젊은 시절 내내 프랑스 사람으로 살았기 때문에 국적에 대한 의미는 없었다. 그는 피카소, 브라크, 막스 자콥, 앙드레 살몽, 블라맹크 등 이른바 화단의 전위파 들과 끈끈한 친교를 맺고 있었다. 당시 유행이었던 상징주의 황혼기에 서서 초현실주의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20세기 초의 시대정신을 가장 강하게 펼친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생전에 네 명의 여인과 사랑을 나눴다. 20대 초엔 영국 처녀 애니 플레이든과 사귀면서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를 썼다. 1차 세계대전 중에 만난 루(Lou)와는 진한 에로스적인 사랑을, 마들렌 파레스와는 약혼까지 했으나 결실은 맺지 못했다.
그러나 1907년에 만나 5년 뒤에 헤어진 화가 마리 로랑생과는 열렬히 사랑하면서 프랑스 국보급 명시 ‘미라보 다리’를 남겼다. 아뽈리네르는 그림을 배운 적 없고 길거리에서 통행세를 받던 말단 세관원 출신인 가난한 화가 앙리 루소와 친했다. 그는 루소의 생계에 도움을 주기 위해 자신의 연인인 마리 로랑생과의 커플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그림값으로 시중 시세보다 엄청 높은 5만 프랑을 지불했으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연인인 로랑생조차 “그림 속의 내가 나를 닮지 않았다”며 입을 삐죽거렸으나 아뽈리네르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마리 로랑생은 세느강의 이쪽에 살고 아뽈리네르는 강 저쪽에 살면서 아름다운 아치형 미라보 다리를 건너다니며 사랑을 속삭였다. 사랑의 끝은 이별이듯 둘은 헤어졌고 강물은 세월을 싣고 정처 없이 흘러가 버렸다. 추억은 미라보 다리 밑에 머물러 있고 시인은 돌아올 가망 없는 연인을 기다리지만 사랑은 흘러가는 강물처럼 허망한 것. 아뽈리네르는 사랑하는 마리 로랑생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아뽈리네르는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를 훔친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4일 만에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는 친구 샤갈의 아틀리에에서 주위의 냉대와 실연의 아픔 속에 신세 한탄을 하면서 술을 마셨다. 해 뜰 무렵 세느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가다 문득 떠오르는 연인의 환영을 보고 ‘미라보 다리’라는 명시를 지었다. 영국인들은 템스강을 ‘흐르는 역사’(Liquid history)라고 부르지만 프랑스인들은 세느강을 ‘사랑스런 강’(Lovely river)이라고 부르고 있다.
아뽈리네르는 세계대전 종전 3일을 앞두고 천재 예술가들이 흔히 그렇듯 38세의 이른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승에선 세느강의 ‘미라보 다리’에서 시를 썼지만, 저승에선 은하의 ‘미리내 다리’에서 누구를 기다리며 시를 쓰고 있을까.
첫댓글 아뽈리네르가 사귄 친구들이 부럽네요
사랑하고 술을 마시며 지나던 다리
미라보 다리 난간에 걸터앉아 연인의 이름도 찌질하게 불렀겠지요.
젊은 시인의 짧은 생은 시가 남아 괜찮겠지요.
미라보 다리 밑을 흐르는 세느 강은 신천 만한 강인데, 물이 엄청 많이 흘렀는데 물 속도 보이지 않는 흙탕물이었고, 몽마르트 언덕은 청라언덕 비슷한 길인데 가난뱅이 화가들이 관광객의 초상화를 그려 주는 것으로 밥 벌이 하는 그런 곳이었지요. 몽마르트 언덕을 가다가 오토바이 탄 두 명의 날치기 꾼에게 일행 중 한 분이 핸드백을 날치기 당했는데 핸드백 빼앗기지 않으려고 움켜쥔 여성 분이 오토바이에 질질 끌려 가는 것을 보고 제가 달려가서 고함을 질렀더니 놓고 달아 났는데, 도로에 끌려가면서 온 몸에 상처가 낫는데도, 프랑스 가게 주인들은 한 X 도 도와주지 않았어요. 그때 중국계 상인의 가게에서 주인이 나와서, 머큐롬 같은 것을 발라 주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화가 난 저는 귀국해서 프랑스 한국 대사관에다가 프랑스인의 불친절을 성토한 편지를 보냈는데 아무런 답장도 없었어요. 프랑스 문화는 별로라는 생각 ~^^
미라보 다리도 상상처럼 아름답지도 않아요. 그냥 쇠로 만든 다리. 그래도 아뽈리네르 덕분에 세계적인 명소가 되어 청춘남녀 관광객은 엄청 와서 유람선을 탐.
강화도를 침략해서 외규장각 도서나 훔쳐간 아주 고약한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