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형한테, 9점 깔고 바둑 둘 때가 1970년 代 初니까, 아마 16살 때쯤일 게다.
그 형은, 9급 언저리였는가 싶은데, 두고 나면 복기를 통해 배우는 게 아 니라 마냥 두기만하니까 판수만 늘어 갈 뿐이었다.
바둑, 두는 자체가 워낙 재밌으니까 골목이고, 대청마루고 바둑판을 깔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 형을 얼추 따라잡을 때쯤인 여름 어느 날, 느티나무 아래서 어른 들이 부채를 부쳐가며 바둑 두는 걸 목격했다.
뒤에, 앉아 관심 있게 구경하면서 들리 는 소리가, 5급 두는 아저씨가 이 동네에서 제일 잘 둔다는 거였다.
어느 핸가는, 동구 밖 동네에서 제일 강한 아저 씨가 이 동네로 건너와서는 누가 더 센지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내심, 저 아저씨를 이기면 동네를 평정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시간 나는 대로 동네 형하고 더 열심히 뒀다.
그, 다음해에 그 5급 아저씨를 이겨 동네를 평정하고 이제는, 동네 가 아닌 부천역 뒤에 있는 기원 을 일요일마다 나가게 되었다.
우물 안, 개구리로서는 넓은 세상을 알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부천에서, 하나밖에 없는 그 기원에는 2 급 정도 두는 사람이 제일 센 거 같았다
4급, 정도 두는 나는 원장님하고 예 의상 한 판 둔 다음, 고수들의 대국을 지켜보면서 서로 주고 받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따로,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으니 저 들의 대화에서 뭔가를 얻어내 야 했다.
실력이, 늘어감에 따라 인천, 영등포, 청계천, 신촌 기원을 찾아 나 섰다.
당시는, 전철이 없던 시절이라, 버스로 가면 왕복 4시간이상 걸렸다.
그, 지역의 기원에서 뭔가를 얻을 게 있을 것 같아서였는데,기원 을 찾으러 다니다 시간만 축내 고 헛걸음만 남긴 날도 부지기 수다.
한번은, 인천 이일선 프로 사범님이 운 영하는 기원을 들어갔는데, 한 자로 쓴 바둑격언이 벽에 나붙 어 있지 않은가.
웬, 횡재냐 싶어 종이에 다 적어 와서 밤새 외운적도 있다.
영등포, 기원을 찾아간 날은, 아마강자 사범들의 진검 승부가 펼쳐지 고 있었는데, 그 광경을 관전하 면서 얼마나 뿌듯해했는지 모 른다.
이런, 노력으로 약한 1급 소리를 듣 던 1979년,월간 바둑 승.단급 시험에 응모하여 3단을 인허 받았다.
그, 3단 인허라는 것이 어디까지 나 이론적인 것이고, 전국 강 자사범들에게 부딪히며 실력 을 연마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전국바둑대회에 참가한 게 1980년 初다.
오늘날, 많은 사범들하고 교류가 있는 까닭은, 그때 그 전국바둑대 회에서의 인연 때문이다.
당시, 관철동 한국기원 3층에는 기 원을 운영했는데 일요일이면 펜들을 위해 김수영 사범님, 전영선 사범님, 김인 국수 등 이 강의를 해주고 있었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다싶어 자 주 이용하는 사이 ‘관철동 시 대’, ‘올인’ 의 노승일 작가, ‘ 귀천’의 천상병 시인 등 수많 은 유명인을 목격하게 된다.
그때, 한국기원 일반실에서 기우회 를 결성할 테니 1급(아마제도가 없었던 때라 전국강자는 강1급, 동네 강자는 약1급으로 칭해 1급끼리 3점 놓는 시절) 되는 사람은 모이라 고 광고를 냈다.
했더니, 청계천 방직회사 사장님, 고 등학교 선생님, 초등학교 여 선생님, 경제기획원 사무관, 직장인 등 13명이 모여들었 다.
크리스마스, 징글벨이 거리에 온통 울려 퍼지던 1982년 겨울이었다.
초대, 기우회장을 맡아 토요일마 다 리그전을 벌여 1등한 회 원은 상품을 조금 준 뒤, 프 로 사범님에게 지도받을 기 회를 줬다.
잠실, 성내동에 양상국 프로사범 님이 운영하는 기원으로 찾 아가 기우회에서 우승한 회 원과 3점 지도바둑을 둔 다 음, 공개 해설을 들었다.
다음달, 우승한 회원은, 영등포 연흥 극장 뒤 어느 기원에서 지도 하고 있는 장수영 프로 사범 님에게 3점으로 대국을 받은 다음, 공개해설을 들었다.
당시는, 프로 사범님에게 지도 한 번 받을 기회가 많지 않던 시절 이라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니, 회원들이 서로 우승 한번해 서 프로사범님에게 지도 받 으려고 열성적으로 공부하 고 참여하니 기우회가 활성 화 될밖에.
거기에, 승패도 좋지만 한판 정도는 선별해서 공동으로 검토를 하기로 했다.
복기, 라는 게 본시, 저마다 기풍 이 다른지라 설왕설래하기 일쑤다.
그 중에, 내가 얘기하는 게 제일 일 리가 있고, 이해도 잘된다 는 평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가씨 3명이 기 우회장인 날 찾아왔다.
당시, 한국기원 5층에서 직장 인들을 상대로 프로 사범 이 화,목요일 강좌를 열고 있던 때였는데, 강의 수준 이 너무 높아 7급 언저리 에 있는 자기들로서는 도 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것 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10급 언저리부터 1급까지 2~30명이 한꺼번에 수업 을 받는 마당이니, 아무리 능력 있는 강사라 하더라 도 어느 장단에 맞춰 강의 할 것인가.
수준별로, 2개 반으로 나눠 수업하 면 좀 나은데, 운영상 그 러지 못하는 어려움도 있 을 테다.
여하튼, 누가 그러는데 기우회장 님이 이해 잘 가게 가르친 다는 소문을 듣고 왔으니, 자기네들이 내는 수강료 (25,000원X3명=75,000원)로 그룹지도 해달라는 부탁 이었다.
난생처음, 받는 제안이라 당황스럽 고, 신기하기도 하였지만, 부수입으로 아주 적지는 않았기에 일단 승락했다.
주3일, 직장에서 퇴근하는 7시 부터~9시까지 가르치다 보니 저녁 먹을 시간은 없고 우유 한 잔만 마시 고 시작했는데, 나에게 주어진 고마운 기회여서 그런지 배고프기는커녕, 시간가는 줄 모르고 신이 났다.
너무, 이해가 잘 간다며 즐겁게 수업하는 사이, 실력은 늘 어가기 마련이었다.
나는, 그때 바둑 가르치는 게 적 성에 맞는다는 것을 알아 차리고, 전국바둑대회 나 가는 대신 지도하는데 매 진하기로 했다.
지도란, 배우는 사람의 실력에 한 두 단계 위에다 놓고 가르 치는 능력이 중요하다.
7급, 두는 사람을 1급 수준으로 가르치면 어려워 하고, 10 급 수준으로 가르치면 발전 이 더디다.
어려우면, 재미가 없고, 흥미가 떨어 지면 실력을 올리기는커녕, 그만 두기 십상이다.
많은, 사범들이 지도 일선에서 가르치고 있지만, 대부분 오래가지 못하고 끊어지 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계단을, 오를 때 한두 계단은 잘 밟고 올라갈 수 있지만 한 번에 네,다섯 단계는 불가능하지 않는가.
수준에, 맞는 지도법이 노하우 인데, 재미있다보면 실 력은 절로 향상될 수밖 에 없다.
요리사가, 주방에서 음식을 주무 르는 건 똑 같은데 왜, 어느 식당은 맛 집으로 손님이 들끓고 어느식 당은 파리만 날릴 것인가.
나는, 지금까지 5000명 이상을 바둑지도하고 있지만, 힘 들다기보다는 내 스스로 즐거움을 느낀다.
성인바둑강좌 강의 내, 가르침으로 배우는 분이 무릎을 치면, 흥이 절로 나다못해 전율이 일 정도니 가르치는 일이 천직인지도 모른다. 청소년 수련관 이사님을 3년 개인지도 게다가, 배우는 사람이 바둑대회에 나가 가끔은, 트 로피를 들어 올릴 수 있어야 지도 능력을 인 정받는다. 2002년, 히딩크 감독이 한국축구를 세계 4강에 올려 놨으니 인정받는 거고, 박항서 감독이 베트 남 축구를 반열에 올려 놓으므로써 영웅대접 을 받았던 거다. 한국기원 프로기사 대상으로 '어르신 바둑'에 대한 강의
하여, 여성 3명을 6개월 그룹지도 하여 한국여성연 맹에서 주최하는 바둑대회 을조에 출전해 3 위, 병조에 참가해 준우승하는 쾌거를 시작으 로 나의 지도자 길은 탄탄대로로 접어들었다.
트로피를, 받아온 그 여성들이 친구나 회원들을 끊임없 이 소개해줬기 때문이다.
한번은, 기원에서 가르치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 대상선 부장님이 지도를 제안했고, 손님중에 도 한두 급만 올려달라며 차례를 기다리기도 하였다.
결혼을, 하고 직장을 부천으로 옮겨져서는 학원 수학 강사, 경기은행 차장님, 중소기업사장님 등 을 지도하게 되었고, 인천으로 직장이 옮겨 졌을 때는 퇴근하여 부평에서 다년간 지도가 이어졌다.
그러던 중, 한국기원에서 1990년부터, 여류 프로를 매년 2명씩 뽑는다는 발표가 있자, 이어 오던 성인 지도는 일제히 접는다.
셋방집에다, 추석보너스 받은 돈으로 바둑판과 벽걸이 강 의자석판을 구비해 놓고, 집으로 퇴근해 6시 ~7시까지 가르칠 테니 오라는 전단지를 전봇 대에 붙이고 다녔다.
92년 10월 1일 내 자식을, 포함해 8명의 아이들을 처음으로 가르친 기념 비적인 날이다. 1998년 12월 11일. 신림동 노영하기원에서 누구를 지도하고 있 는데, 기원문을 밀며 6살 먹은 아이와 엄마가 날 찾아왔다.
성형외과, 의사님의 아들이라고 밝혔는데 소문 듣고 배 우러 왔다는 것이었다.
내가, 당부하길, 계획을 세워 가르쳐야 하니 3년을 맡길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걱정 말라고 하 셨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치는데 이해도 잘하고 바둑에 도 재능을 보였다.
9개월 지도한 뒤, 이제는 점검해보려고 부천시장배 유치부에 처음으로 참가했다.
준결승에서, 막히는 바람에 3위의 트로피를 들어올렸는 데, 그 부모님이 너무 기뻐하면서 개봉에 사는 장인. 장모까지 불러내려 맛있는 고기 대접을 받았다.
7세때, 1학년부로 점프해서까지 우승을 하는 바람 에 그 부모로부터 지도 능력을 인정받아 병 원장님 아들, 치과의사님 딸, 은행차장님 자녀, 엘리베이터회사 사장님 아들, 유명 스 포츠화 만드는 회장님 아들 등을 소개 받게 된다.
이 아이가, 훗날, 고등학교 때 세계 로봇경연에 참가해 우승을 차지하여, 로봇천재가 된다.
그로 인해, 오늘날 까지 27년간 개인지도를 이어 오는 행운을 안고 있는 중이다.
신뢰받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한 번 인정받으면 연속 이어지게 마련이다.
1998년 6월. 제1기 초등지도 자격증을 받아 포리초등 학교 방과후 바둑지도를 처음 나간 날이다.
이후, 수많은 초등학교에서 2013년 2월까지 15 년 동안 약 3000명의 아동을 지도 했다.
그런 계기로, 2015년 3월~2017년 2월까지 바둑특성화 시화초등학교에서 선수반을 지도하게 되 어, 많은 아동에게 트로피를 안겨준 바 있 다. 왼쪽 교장선생님 2번째가 선수반을 지도하고 있는 나. 오른쪽이 지도사범 나, 유재성프로, 우승한 학생부모. 교장선생님, 이준기이사.
2008년 4월. 건강보험 바둑강사로 ‘어르신 바둑강좌’를 처음 개설하여, 2024년 2월까지 16년 동안 1000명이 넘는 어르신들을 지도 했다. 16년동안 진행한 '어르신 바둑강좌' 2005년 5월. 문화센터에서 ‘성인바둑강좌’를 개설한 이 후로, 지금까지 20년 동안 지도하고 있는 중이다. 2000년. 코로나가 극성을 부리는 시기에 교실을 개설 하여 아이들을 지도중이고 보면, 가르치는 일 은 하늘이 내려준 천직이 아닌가 싶다.
김은선6단과 페어바둑 대회에서 탄탄대로가, 아닌 이리저리 휘어지고 울퉁불통한 길을 걸어오는 과정에서, 나에게 바둑을 배워 지나간 분들이 5,000명 넘는 형국에 이르 러서는,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나도 존재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부천시장배 시상식후 가운데(빨간모자), 뒤가 윤명철 부천바둑협회장 현재도, 오전에 성인바둑강좌를 2일 진행하고, 개인 지도도 이어지고 있으며, 오후엔 서울로 올 라가 교실에서 아이들을 즐겁게 가르치고 있 으니 얼마나 복 받은 길인가.
바둑과 사람 신년회에서(김종화 치과원장,정민효 부천 바둑협회전무, 나. 홍맑은샘 프로, 박휘재 사범. 윤명철 부천바둑협회장)
‘바둑지도자의 길’로, 들어서 버리는 바람에 전국 강자사범님들과 부딪혀 실력을 키워보려는 애당초 목표는 실 현되지 못했지만, 대신 바둑지도자의 길로 한 획을 그었음에 만족하고 있다.
그리하여, 내 일생 일대 최대 행운으로 남기고 싶다. 다음은, 땀과 열정이 배어있는 나의 바둑지도 40년의 기록이다.
바둑지도 5000명의 기록 ☻1883년 : 여성3명 난생처음 개인지도 시작 ☺1992년 10월 1일 : 셋방집 초등8명 처음 지도시작 ☻1998년 6월~2013년 2월 : 초등 방과후 지도 ☺2011년 3월~2013년 2월 : 어린이집 지도 ☻2014년 : 정명고등학교 수업지도 ☺ : 중학교 특별활동 6년지도 ☻2015년 3월 ~2017년 2월 : 시화초등 선수반 지도 ☺2008년 4월 ~2024년 2월 : 어르신바둑강좌 ☻1998년 12월~ : 개인지도 현재 지도 진행 중 ☺2005년 5월~ : 성인바둑강좌 현재 지도 진행 중 ☻2000년 1월~ : 교실 아동 현재 지도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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