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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일제때 고지도-공주시 유구읍
훈풍 이중강 추천 0 조회 83 20.01.07 11: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919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5만분의 1지형도를 들여다 봤다.

이 지도는 우리 국토를 등고선 등으로 나타낸 최초의 지형도 란다.

 

구계리 일대다.

구계동 이라 불렸던 모양이고 , 이때는 구계리가 사곡면 지역이었던가 보다. 

법화단맥상의 고개인 구재가 '구치(鳩峙)'라 표기되어 있다.

구재할때 구자는 아홉구(九) 혹은 거북구(龜)를 쓰는줄 알았더니 오늘보니 비둘기구(鳩)자를 쓴다.

 

노동리 일대다.

금북정맥상의 장학산도 보이고 , 야광고개도 야광현으로 표기돼 있다. 

관불산과 천봉은 해발고도까지 표기돼 있다.

관불산 좌측에 표기한 저곳이 아마도 가는골 일게다.

 

녹천리 일대다.

녹문 , 하장천 , 상장천 , 고치(고재)등은 귀에 익은데 성주리 라는 지명은 생소하다.

지금의 차동고개는 차령(車嶺)으로 표기돼 있는데 당시에도 큰규모의 고개였나 보다.

고재 또는 고치는 높다하여 높을고(高)자를 쓰는줄 알았더니 오늘보니 옛고(古)자를 쓴다.

태봉산은 비록 산명은 표기되지 않았지만 403m로 해발고도 표기가 돼있다.

 

내고향 덕곡리다.

여러차례 다뤘다시피 덕암이란 마을과 , 당골이란 마을에서 한자씩 따서 덕곡리라 하였다.

덕암초등학교 라는 교명은 덕암이란 마을에서 유래된거다.

극정봉은 420.4m로 표기돼 있고 , 금북정맥 너머 예산쪽의 소거리는 우명리라 표기돼 있다.

어쨌거나 소거리는 소와 관련이 있는 모양이다.

 

동해동 일대다.

내동(內洞)은 안동해동을 , 두동(杜洞)은 두멍골 혹은 두문동을 , 진전(陳田)은 묵은논을 , 소마전(小麻田)은 작은삼밭골을 , 대마전(大麻田)은 큰삼밭골을 이르는 말인거 같은데 , 개전(開田)은 글쎄다.........

 

만천리 일대다.

옥녀봉은 두어차례 올랐던 곳이고 , 만년동과 이천동의 지명은 귀에 익은데 소동은 첨들어 본다.

 

명곡리다.

명우리의 명(鳴)자와 이곡리의 곡(谷)자가 합쳐져 명곡리가 됐을게고 , 조산소는 조(趙 )씨의 산소가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라는데 조씨라면 아마도 풍양조씨를 말하는 걸게다.

 

백교리. 

 

석남리.

 

추계리와 세동리.

추동의 추(秋)자와 계봉의 계(鷄)자가 합쳐져서 추계리가 되었단다.

이 지도상으로는 계봉은 지금의 벌뜸 지역으로 보여진다.

금계산도 보이고 , 법화산도 보이며 , 금계산 중턱의 용목동도 보이며 , 내기동 이란 지명도 보인다.

몇가지 특이한건 문금리 할때 금자는 비단금(錦)잔데 , 금계산 할때 금자는 쇠금(金)자다.

난 여태 한자가 쇠금(金)자로 같은줄 알았다.

그리고 용목동 할때 목자도 나무목(木)자를 쓴다.

여태는 풍수상 형태가 용의 목(neck)에 해당되거나 지형적으로 그와 닮아서 붙여진 지명이려니 했더니 아녔던가 보다.

아마도 용을 닮은 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거나 , 용이 오른 나무가 있었다거나 뭐 그런식으로 해서 붙여진 이름인가 보다.

세동리는 저렇듯 구탱이에 작게 나올 뿐이다.

 

신달리다.

달동은 달월을 이르는 말일게다. 

 

신영리다.

신대나 신리는 귀에 익고 , 팔십리는 여드니를 이르는 말일텐데 익히 들어왔던 동부실과 서부실은 동모리 , 서모리로 표기돼 있다.

동모리 할때 모(牟)자는 보리를 뜻하는 글자라 하니 동보리실 , 서보리실로 보면 될듯하다.

 

연종리 다. 

내가 마곡사의 주산으로 보는 국사봉이 우뚝하다.

근데 한가지 눈에 띄는게 있다.

무성지맥을 타며 국사봉 우측으로 내려서면 기름재가 나온다.

정안서 마곡사 들어갈때 내문리를 지나 유룡리로 넘는 고개다.

혹은 지름재로 불리기도 하는 고갠데 한자 표기가 어째 이상하다.

'유치('油峙)'

기름재 할때의 기름을 oil로 해석했다.

내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산행을 하며 많은 고유지명들을 접하다 보니 척하면 착하고 답이 나오는 지명들이 있다.

이 기름재 같은 경우가 그렇다.

여기서 기름재란 고개가 길다는 뜻에서 길은 고개 - 길은재 - 기름재로 변한걸거다.

지름재도 마찬가지다.

질은 고개 -  질은재 - 지름재.

그러니 굳이어 한자화 한다면 장치(長峙)가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한다.

또하나 이상한게 있다.

기름재의 한자를 유치(油峙)로 표기하고 그옆에 가타카나로 음운을 표기한게 있는데 'キルムチエ'라 표기하고 있다.

내가 일본어를 아예 모르니 가타카나를 찾아 그대로 옮겨보니 '기루므치에' 정도로 읽히는듯 하다.

아마도 '기름치'라 쓰고 싶은데 가타카나로는 표현할 방법이 없으니 저리 비슷하게 쓴게 아닐까 한다.

근데 이상하다.

그들도 분명 기름유(油)자를 읽는 그들만의 음운이 있을텐데 왜 저리 우리가 읽는식으로 표현하려 애를 썼을까?

찾아보니 그들의 음운은 'アブラ(아브라)' 다.

혹시나 해서 뒤져보니 여기 말고도 더있다.

아까 동해동에서 대마전(大麻田) 역시 'クンサムバシ' 라 표기했다.

역시나 가타카나를 그대로 옮겨보면 '쿤사무바시' 정도가 될게다.

어쨌거나 '큰삼밭골'을 표현하려 애쓴 흔적이 보인다.

 

유구리 다.

산명은 없지만 뱅이산도 표기돼 있고 , 농기도 보인다. 

 

입석리 다.

이 지도가 제작되고 약 30년후에 근현대사의 비극을 함께했던 곳이다. 

 

탑곡리 다.

지도 윗쪽으로 좀 짤렸는데 그위로 봉수산과 탑산이 있다.

소곡은 소릿절을 이르는 말일텐데 탑입리는 생소하다.

봉수산 오르기전에 금북정맥 상에 느닷없이 구만봉이란 봉우리가 있더니만 그게 송악쪽의 구만리에서 유래된 모양이다.

각흘고개 자리엔 밑도 끝도 없이 '각흘(角屹)'이라 표기돼 있다.

 

문금리.

문금리는 문암의 문자와 금천의 금자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거란다.

아까도 얘기했듯 문금리의 금자와 금계산의 금자는 다르다.

검단이 입구의 적바위는 적암으로 표기했다.

 

불당골은 불당동으로 , 용수골은 용세동으로 표기했다.

 

아까 기름재와 큰삼밭골 그리고 작은삼밭골의 음운에 대해서 좀 찾아봤다.

일제는 지형도를 제작하며 표기는 한자화 하되 , 그 음운은 우리가 읽는 그대로를 표현하려 노력했단다.

저들이 지도를 제작하며 얼마나 정확성을 기했는지 알수있는 대목이다.

일각에선 일제의 이런 행위를 미화하기도 하더라.

그들의 덕으로 순수 우리식 지명이 기록되어 전해지게 되었으니 감사해야 된단다.

저들은 우리국토에 도로를 깔았다.

철도도 놨다.

때문에 저들은 일제 식민지 기간 조선을 근대화 시켜줬다고 주장한다.

어떤 엘리트는 일제의 지배가 축복 이었다고 헷소리를 짓꺼리기도 했었다.

어떻게든 저들의 침략을 정당화 하고 미화하는데 혈안이 되어 이유를 찾으려니 뭔소린들 못할까?

아무튼 확실한건 저들은 저들의 목적을 위해서 도로를 깔았고 , 철도를 놨다.

이 지형도도 마찬가지다.

식민지 조선의 자원을 수탈키 위한 방편의 하나였을 뿐이지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또하나 분명한건 조선은 그리고 조선인은 그들에게 도로를 깔아달라고 , 철도를 놓아 달라고 혹은 지형도를 그려 달라고 한적이 없다.

저들의 논리대로 라면 저들이 원던 원하지 않던 우리의 군대가 도쿄에 입성해서 국방을 책임져 주겠다면 그게 일본에겐 축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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