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23-25 이삭이 거기서부터
이삭이 가족과 종졸들과 함께 그랄 골짜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인고의 세월을 보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 은혜로우신 인도하심을 따라서 브엘세바로 올라갑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를 나타내시사 이삭과 그의 교회를 위로하십니다. 이삭은 이때로부터 외부적으로는 아무런 침해를 받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1. 본문 23절은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입니다.
이제 이 부분에서는 보다 풍부한 하나님의 위로가 나옵니다. 이 경건한 사람 이삭의 마음을 진실로 새롭게 소생시키는 사건이 주어집니다. 이삭은 그 우물을 조용히 향유하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보여주신 은혜라고 감사했습니다. 이삭은 이때로부터 외부로부터는 아무런 침해도 받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 한마디가 수많은 재물 축적보다 더 신앙인을 좌우한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이삭은 수천의 감미로운 강물보다도 하나님의 신탁 통치를 더 즐겁게 받았을 것입니다. 참으로 모세는 이 은혜로운 사건을 장중한 말로 기념하려고 기록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으로 그를 친히 격려해 주셨다고(24절) 하신 사실을 여기서 배웁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은사에 대해서 그분에게 온당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한편, 그 분께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어버이 같으신 사랑의 증거에 대해서도 항상 찬양을 올려야 합니다. 음식, 의복, 건강, 평화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이익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음미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친히 우리에게 다정하게 말씀을 걸어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아버지시라는 것을 공표 해 주십니다. 그렇게 하실 때는 정말로 우리 모두가 만족한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모세는 이삭이 자기 조상들이 정들었던 땅, 브엘세바로 이사하는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아마 블레셋인들은 여전히 이따금씩 그를 괴롭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잠들 줄 모르는 그들의 악의에 지쳐서 멀리 이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진실로 그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볼 때에 이삭은 슬픔과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그 첫날밤에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그렇다면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었다는 사실을 이전에 종종 말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 경건한 사람이 걱정을 하고 있었거나 어떤 미결정의 불안에 사로 잡혀 있었거나 거의 지쳐 있어서 하나님의 손길이 그분의 필요에 따라 적절한 시기에 작용함으로써 악이 그를 침몰치 못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여러 가지 재해로 지치고 상심한 이삭의 원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2. 본문 24절 첫부분은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입니다.
이 환상은 이삭으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을 보다 주의 깊게 듣도록 준비시킵니다. 또 자기와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신케 하려는 것입니다. ‘음성’ 만으로는 별로 힘이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자기 말씀에 대하여 신임과 존경심을 나타내시기 위해 나타나셨습니다. 환상이란 일종의 하나님 현존의 상징이요, 그 사람이 하나님의 면전에 있다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조상들의 마음 속에 자기들에게 지금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인가 하는 의심이 일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환상이 있습니다.
물론 사단도 마치 하나님을 흉내 낸 모습, 곧 광명한 천사로 나타나서 기만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같은 증거는 충분치 못한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고 뚜렷한 징표가 하나님의 환상 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신앙인들은 거짓된 환상을 능히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앙을 더 이상 의심에 사로잡히지 않게 된다는 점이 있습니다. 또 분명한 것은 사단은 잠깐동안 기만할 뿐이요 우리를 오직 암흑으로만 유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서 그 같은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들의 눈으로 자기 빛나는 모습을 보게 해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을 이 거룩한 조상들에게 완전히 표현한 것은 아닙니다.그들의 능력에 맞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그런 정도로만 표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엄위는 무한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정신으로는 다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광은 온 세상을 그 속에 흡수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면 그대로 되었던 방식으로 모든 우주의 피조계 위에 높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인간들은 연약하여 하나님 존전에서는 완전히 소멸되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방식으로 적절한 현현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말 뜻은 하나님이 그분의 본래적인 본질과 위대성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보고도 견딜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친히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환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하기 위한 신성의 증거라는 사실은 문맥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현현이 무언극이 아니고 그 직후에 무상의 선택과 구원에 대한 신앙을 이삭에게 확증해 주는 말씀이 뒤따라 나오기 때문입니다.
3. 본문 24절 둘째 부분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입니다.
이 선언은 전에 있었던 모든 약속을 새롭게 상기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또 이 선언은 이삭의 마음이 전에 아브라함에게서 맺어졌다가 다시금 전승에 의해서 그의 후손에게도 남겨져야 할 영구적 계약에 쏠리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자기가 아브라함에게 처음에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시작합니다.
그것은 이삭이 현재 주시는 말씀과 이전 계시의 신탁을 구별해서 선을 긋고 나누어서 절단해 버리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자들에게 자기 은총의 증거를 종종 되풀이 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꼭 같은 방식으로 다시금 새로운 지원을 통해서 그들의 신앙을 붙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들을 선택한 근거였던 그 첫 계약에 항상 그 신앙이 기초를 놓고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 점을 염두에 두어서 하나님의 약속이 뗄 수 없이 연관되어 있으므로 종합적으로 묶어서 보는 습관을 배워야겠습니다. 하나님은 무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로우신 방식으로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역시 우리에게 그분의 은총을 자비롭게 약속해 주신다는 사실을 제일 원리로 삼아서 항상 기억나게 하여야 합니다.
4. 본문 24절 끝은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 입니다.
여기 나타남이 너덧 말씀에서 몇 가지 교훈을 받습니다.
1) 맨 먼저는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신자들의 마음의 동요를 진정시킬 목적으로 친히 그분의 입에서 내시는 음성으로 말을 거신다는 점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없어지면 신앙인들은 필연적으로 위축되고 불안에 떨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호와의 입에서가 아니면 다른 어느 곳에서도 평화를 얻을 수 없다고 말하게 됩니다.
2) 다음에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을 상대로 하여 맺으신 하나님 자기 언약을 위하신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자기 언약을 어기시는 법이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이 같은 언약에 대한 재론 방식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방식입니다.
3) 그 다음에 “내가 너와 함께 있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생일 뿐이어서 연약과 부족과 심한 결핍이 있는 우리에게 구체적이고도 깊은 은혜요 위로이며 격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자신이 바로 우리 구원의 주권자이시라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는 아무런 공포도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모든 상황을 신앙이 충분히 진정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4)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네게 복을 주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기 사랑에 대한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여기서 증거 되는 하나님 자신의 복은 일찍이 말씀하셨던 말씀을 총체적으로 표시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의 방패요 상급이다’ 는 뜻입니다.
5)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삭에게 구체적으로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심으로써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을 자기 교회의 중심축에 놓으신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도 같은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 여기 기록된 이삭의 역사를 보면 성도에게 임하는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생활 안정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복으로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5. 본문 25절 앞부분은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입니다.
1) 이 구절에서부터 모세가 말하고 있는 것은 공중예배 입니다.
하나님 말씀 자체는 제단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또 특별한 장소를 지정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어디서 살든, 예배를 드렸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충고와 교훈이란 사람들 앞에서의 증거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제단을 세우고 성별한 다음 자기는 참되고 유일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라는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교도들의 타락한 의식으로부터 자신을 구별시켰습니다.
2) 또 그가 제단을 세운 것은 자기만이 아니라 자기 집 식구들 전체를 위해서였습니다.
거기서 그 집 식구들 모두가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나아가 이 제단은 신앙의 외적 표현을 위해 건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을 불렀다는 표현은 모세가 말했던 것같이 이삭이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삭이 자신의 신앙을 증거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가시적 예배는 어떤 점을 정확하게 드러내고 보여주는 용도도 있습니다.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더욱이 그때 이미 제사가 명령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아무렇게나 황급히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가 예배할 때마다 신앙의 법칙을 준행 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예배할 때면 하나님의 말씀만 지키려 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비슷한 방법을 명령하시지 아니한 이상 우리가 조상들의 본을 따라가는 것은 얼마나 불합리하고 어리석은 일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모세의 말은 이 점을 분명히 말해줍니다. 신앙인들이 행하는 모든 신앙의 행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부르기 위한 목적에서 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의식과 예식은 이 점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 경건한 조상들은 자기들이 천막을 치는 곳곳마다 제단을 쌓는 것이 습관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문맥을 살펴 볼 때에 하나님께서 먼저 그의 종 이삭에게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다음에 그가 하나님께 큰 은혜를 입습니다. 다음에 그가 은혜 입은 표로서 제단을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 본문 25절 끝은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입니다.
이미 이 지역의 이름이 거기에 파져있던 우물에서 유래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이삭은 거기서 다시금 물을 구해야 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특히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과 자기 후손들을 위해서 그 우물의 권리를 왕에게서 샀었다는 데서 더욱 그러합니다. 더욱이 우물을 계속해서 파야 하는 작업 자체가 어렵고 고된 일이었습니다. 모세가 그 후에 종들이 이삭에게 와서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라고 말하게 하는데는 어떤 의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지역 전체에 물의 기근으로 인해서 이삭이 쫓겨나게 만들려는 공모가 퍼져 있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래서 이 “세바”(맹세) 라는 우물도 협잡으로 막혀버리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또 이 거룩한 족장의 첫 관심사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모세가 우물에 대한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제단 건립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거룩한 조상들이 끊임없이 투쟁해야 했던 커다란 역경이 어떤 것인가를 관찰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들이 우리들과 같이 감미로운 생활을 멀리 떠나지 않았던들 결코 그 같은 역경을 극복하거나 견딜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포도주가 풍성치 아니해도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을 생각하면 물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감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범을 보고 인내심을 터득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언제고 음식이나 그 밖의 필수품이 떨어지면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유업 속에서 목말라 애태우며 방황했던 이삭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이분들에게는 적어도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앞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순종하여 섬기는 일들이 앞세워져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사는 자들의 모습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은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고난도 안정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수단으로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여 예배에 임하고 일상도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