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집요한 유령들의 향연

[bhlee]

소들에게 풀을 뜯어먹게 하고 나서 나는 커다란 잎사귀들이 달린 나무 밑 풀밭에 누워 맨발로 허공을 휘저으며 몇백 년이 아니라 몇천 년 전의, 내게는 새롭고도 선정적인 옛 책의 매혹적인 악인전을 읽기도 하고, 또 장차 어떻게 훌륭한 박사가 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말로써 다른 사람들을 제압할 것인가를 공상하기도 했다. 이런 때에는 한쪽에는 부헝, 다른 한쪽에는 닭살이가 누워 곤충을 비롯한 모든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었다.

그들이야말로 얼마나 충직한 친구들이었던가! 짐승에게 영혼이 없다고 주장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듣는다는 것은 매우 큰 불행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매우 영리한 개들은 내가 아는 어떤 벙어리나 둔한 인간, 무감각한 인간보다 더 훌륭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원숭이 역시 영리하다고 말하지만, 난 그들과 친해질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러나 닭살이나 부헝과는 서로 완전하게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여기서 나는 내가 아는 대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표정, 동작, 우스꽝스런 춤, 으르렁거림과 짖는 소리와 눈물을 통해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영혼, 이러한 영혼을 그들은 갖고 있었다. 바로 그 눈, 코 밑의 그 죽 찢어진 입, 그 귀와 꼬리를 흔드는 버릇, 이런 것들이 나에게 분명히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저 기계적으로 이해될 뿐, 보다 심오한 방법으로 영혼에 도달함으로써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면, 언어가 뭐 그리 훌륭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인 것이다.

불가사의한 인간의 마음은 수많은 동양 작가들을 자못 열중하게 한 주제다. 인간에 대해서 우 리가 제아무리 잘 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며 그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당황케 할 따름이다. 수많은 동양인들이 바로 이 끔찍한 수수께끼 같은 인간의 마음 때문에 자살했다. 이것은 로드 호크턴이 그의 시 <그래도 낯선 사람>(Stragers Yet)을 쓰게 한 주제다. …… 마르셀 푸르스트는 이런 주제로 그의 유명한 소설 15권을 쓰지 않았던가? 또한 이것은 전인류적인 체험이라고 생각된다. 나의 부친은 중국의 옛 글에서 이런 글을 인용하곤 했다. ……

내가 이런 글을 이해하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말 못하는 개의 단순하고도 이해하기 쉬운 면을 인간과 비교해놓은 시(詩)임을 이제는 알고 있다. 가끔 나는 닭살이와 부헝의 목에 바구니를 매달고 그들과 함께 딸기를 따러 산을 헤매 다녔다. 내가 그들에게 아무리 딸기는 나 혼자만 먹을 거라고 말해주어도, 그들은 딸기를 몹시 먹고 싶어했다. 끝내 그들은 아무 보람도 없이 바구니만 매달고 다녔으니, 참을성이 대단한 놈들이었다.

닭살이와 부헝을 데리고 나는 걸핏하면 삼림의 울창한 숲속을, 솔숲의 거치적거리는 가지들 사이를 걸어다녔다. 그리고 내가 송진을 찾아 나무 위로 올라가면, 두 마리의 개는 밑에 서서 짖어대며 나를 지켜보았다.

“웡! 웡! 양! 양! 조심해! 그쪽으로는 가지 마. 그건 너무 가늘어!” 이렇게 그들은 나를 주의시켰다. 사람처럼 부헝은 두 발로 서서, 귀와 꼬리는 허공을 휘젖고 혀는 쭉 빼문 채 걱정스럽게 헐떡거렸다.

우리는 다 같이 흰 눈을 좋아했다. 또한 우리는 비를 좋아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집 안에 틀어박혀 있을 때 우리 셋은 송전치의 질척하고 쓸쓸한 거리를 맨발로 돌아다녔으나, 털가죽 외투를 입은 두 마리의 개와 도롱이를 걸친 나는 여름 소나기에도 젖지 않았다. 닭살이와 부헝은 나와 함께 자연의 끊임없는 기적을 느끼는 것 같았다. 목욕탕의 샤워처럼 바위에서 바위로 떨어지는 계곡 물은 나의 혈관에서처럼 그들의 혈관에서도 약동하였고, 또 그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구름과 나무들을 머리에 이고 살았다. 즐거움, 기쁨 그리고 배짱 등 그들의 가슴에는 없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랫동안의 가뭄 끝에 산악에서 겪는 태풍은 매우 무시무시했다. 벼락과 번개가 세상을 쪼개놓을 듯할 때, 우리의 가슴이 크게 두근거리고 말조차 나오지 않을 때, 소들은 크게 겁을 집어먹을 때에도 개들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달려왔다. 나는 어찌나 두려웠던지, 부헝을 끌어안고는 포효하는 폭풍에서 나를 구해달라고 그에게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은 반드시 나의 친구만은 아니었다. 나와 부헝은 성난 우주에 함께 맞닥뜨렸다. 나는 곧 속이 텅 빈 나무 속이라든지 큰 바위 밑에 피신해서, 물방을 뚝뚝 떨어지는 도롱이와 우산처럼 커다란 삿갓을 쓴 다른 소몰이들 옆에 끼여 앉았다. 그러면 삿갓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순식간에 생겨난 섬광 속으로 타들어갔다.

그렇다, 극도의 공포는 즉시 사라졌다. 그리고 해가 나와 푸른 하늘에서 눈부시게 빛날 때에는 산, 소 그리고 소몰이 모두가 소나기를 흠뻑 맞았다는 것을 금방 보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물을 닦아낼 수건이 없었다. 소몰이들은 짧은 베옷을 벗어 모닥불에 말렸다. 나도 그렇게 해보려 했지만 번번이 옷을 태웠다. 타버린 옷들은 검누런 색깔로 변했다. 나는 그것을 만져보아야만 비로소 그것이 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럴 때, 손가락이 가 닿는 곳은 모조리 구멍이 났다. 나는 옷이 더 망가지지 않게 하려고 아주 느리게, 천천히 걸어서 집으로 갔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나는 타버린 베옷을 살그머니 갈아입고, 바구니 속이나 수건 밑에 숨겨두었다.

8월 하순에는 의외로 긴 가뭄이 닥쳐 어른들을 걱정하게 했다. 그 뒤를 이어 1주일 동안은 궂은 비가 쉼 없이 내렸지만, 천둥이나 번개는 따르지 않았다. 소몰이들은 산에는 가지 못하고 아침마다 소들을 집 근처에 매놓았다. 비가 머리 위 초가 지붕에 예스런 비가(悲歌)를 들려주는 동안, 나는 미치광이 숙부의 서재에서 고서를 읽었다. 내 발치에서 부헝이 짖기 시작했을 때, 나는 옛사람들의 지혜에 깊이 몰두해 있었다. 나는 부헝이 밖으로 나가고 싶어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문을 열어놓았지만, 녀석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안타까워하는 기색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부헝, 나가!” (나는 책을 다시 보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그러자 부헝은 몹시 낑낑대면서 강 쪽으로 달려갔지만, 얼마 안 되어 다시 그가 문간에서 짖는 소리를 들었다.

“웡! 워어웡!”

그는 “빨리 와! 빨리 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뜻을 이해했지만, 비 속에서 함께 놀아주기를 바라는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나는 머리를 내저었다.

“싫어, 부헝!”

세 번씩이나 부헝은 내게 되돌아왔다. 그때마다 그는 번번이 흙탕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때에야 나는 정신이 들어 책을 덮었다. 강가의 버드나무 숲에 소를 매어놓은 것이 생각났던 것이다. 명주를 바른 창문의 조그만 유리를 통해 나는 비에 젖은 바깥 풍경을 내다보았다. 나는 급히 도롱이를 걸치고 달려나갔다. 산에서 내려온 급류 때문에 불어난 강물이, 성난 야수처럼 설치며 전속력으로 강 유역을 휩쓸고 있었다.

내 소는 강물의 두 줄기 사이에 있는 낮은 땅에 단단히 매어놓았다. 강물의 그 두 줄기는 이미 한데 합쳐졌고, 나는 그 가운데에서 마치 크게 넘실거리는 홍수 속에 있는 듯안 내 소를 보았다. 보이는 것은 소의 등허리와 코뿐이었다. 녀석은 울부짖으며 자신을 매어놓은 밧줄과 싸우고 있었다. 격류라든지 소까지의 거리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 나는 물 속으로 뛰어들어 개구리처럼 다리를 휘저었다. 개구리는 항상 이런 일을 썩 잘해내지만 나로서는 잘 되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소를 구출해내려 했다. 나는 차츰 기진맥진해졌다. 이윽고 내가 물속에 잠기기 전에 가장 마지막으로 본 것은, 내 소가 나를 맞으려고 헤엄치는 모습이었다. 녀석은 용케도 밧줄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동시에 한쪽 둑에서는 나의 개가 나를 향해 멋지게 물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나는 정신을 잃었다.

나는 익사자들의 영혼이 방황하고 있을 법한 신비한 허무의 세계에서 깨어나, 강가의 버드나무 숲에 있는 모래투성이 돌들 사이에서 정신이 들었다. 비는 그쳤지만 강물은 여전히 세찬 소리를 내며 흘러가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소리였다. 논 위의 붉은 저녁놀조차 무섭게 보였다. 벼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해는 황량한 호수 위로 지고 있었다.

잠시 후 나는 더욱 친근하고 더욱 사랑스런 모습들을 찾아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나의 소가 누워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성난 물과의 싸움 끝에 다시 침착한 모습을 되찾아 마치 껍을 씹는 듯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지쳐 떨어진 부헝은 내 옆에서 헐떡거리고 있었다. 나를 구해준 것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강물 속에서 소의 목에 팔을 감았던 것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그래서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개를 껴안고는 소에게 다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