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물기행 김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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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물기행 김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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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8. 21:57조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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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특수성’주목한 경제사학자 김광진(1902~1981)
80년대 후반 학계의 최대 관심사였던‘사회구성체 논쟁’을 주도한 박현채 교수(조선대)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이 논쟁은 잊혀진 이론적 전통을 복원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이‘잊혀진 이론적 전통’의 한부분은 한국 사회를 아직 자본주의가 전면화하지 못한‘식민지반봉건사회’로 파악하는 흐름이었고, 그것은 북한학계가 일제하의 전 조선 및 현재까지의 남한을 평가하는 잣대로 쓰인 역사발전 단계론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비단 근·현대뿐만이 아니라 고대부터의 한국 역사 전체를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으로 바라보는 이런 시각은 북한사회 발전방향을 잡아나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이론적 토대로 작용해왔다.
북한에서 이런 토대를 만드는 데 가장 핵심적인 이론가의 한사람이 바로 김광진(1902~81)이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연구가였지만, 잠시 발을 들여놓은 정치분야에서는‘민족주의자’로 인식될 만큼 한국 사회의‘특수성’에 주목한 경제사학자엿다.
김광진은 1902년 평남 성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관계나 생활 정도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는데,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상과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비교적 유복한 집안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김광진의 대학 선배 중에 백남운이 있는데, 이 선후배는 훗날 마르크스주의 연구방법론을 이용한 경제사학계의 주요한 두 흐름을 뚜렷하게 세워낸다. 그러나 당시 재일 유학생의 상당수가 사상운동, 특히 사회주의 운동의 앞줄에 서게 된는데 유학시절 김광진에 대한 일제의 감찰기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그는 실천운동보다는‘학업’에 몰두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학업을 통해 당시 지적 분위기로 보아 자연스레 사회주의사상에 접했을 가능성이 크며, 이것은 귀국 뒤 보성전문 교수로 자리잡으면서 보여준 학문활동에서 역으로 확인된다.
1929년 유학을 마치고 조선에 돌아온 김광진은 경성제국대학 출신의 유진오·박문규 등과 함께 31년 9월 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결성하여 학문할동을 벌이는 한편, 경성제대 연구실 조수직도 함께 맡았다.
유학뒤 보성전문 출강
1932년 김성수가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뒤 이 학교 시간강사로 있던 김광진은 유진오·오천석 등과 함께 전임교수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39년 교수직을 박차고 야인으로 나설 때까지가 그의 학문활동의 1기라고 볼 수 잇다.
34년 <청년조선> 10월호에 기고한‘과학의 당파성=역사성’이라는 글에서 그는 학문의 계급성을 주장하고 있는데, 자신의 학문적 방법론이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임을 분명히 하고 조선사회의 경제사적 분석을 통해 그 적용을 모색했다.
그가 보전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 <보전학회론집>이나 <동아일보> 등에 경제평론이나 조선경제사 관계논문을 발표하고 각종 강연회의 강사로 활동했다. 그 가운데 조선후기 화폐재정사를 다룬‘이조말기에로부터의 조선의 화폐문제’나 고구려 사회의 사회구성체를 분석한‘고구려 사회의 생산양식-국가의 형성과정을 중심으로’ 등은 당시 탁월한 논문이라고 평가받았다. 특히‘고구려..’에서는 한국에서의 노예제 단계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봉건제에 대한 연구에서부터 조선경제사의 출발점을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입장은 백남운 류의‘원시공동체-노예제-봉건제’단계론과는 대비되는 것으로, 이후 김광진이 북한에서 활동하면서 한국사회 시기구분 논쟁에 뛰어들 때도 그대로 견지되고 있다.
1939년 봄 김광진은 보성전문학교 교수직을 사임한다. 일제의 식민지 황민화 교육이 강화되던 상황에서의 이 돌연한 퇴직은 자신이 강단에서 최소한의 역할마저 할 수 없다는 인식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전문학교 교수직이 최대의 혜택일 수 있었던 당시에는‘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퇴직뒤의 그의 행적은 다소 불분명하다. 그와 함께 보성전문에 봉직했던 유진오의 회고록 <양호기>에 따르면 41년 무렵 그는 평양에서 못을 만드는 조그만 회사에 다녔고 그뒤에는 역시 평양에서 고무공장을 경영했다.
어쨌든 39년 퇴직 뒤 해방 이후 짧은 정치활동기간까지 그는 학문연구를 거의 중단했다.
평남지부 건준위원 맡아
1945년 8·15를 김광진은 평양에서 맞았다. 그리고 1년 남짓한 기간을 그의 평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치에의 외도로 보낸다.
8·15 직후 서울에서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결성되자, 평양에서도 같은 해 8월 17일 건준 평남지부가 결성되었다. 건준 평남지부는 조만식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했는데 김광진을 여기서 김병연·한근조 등과 함께 무임소위원으로 뽑혔다. 그 열흘 뒤인 8월 27일 건준 평남지부는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와 합작하여 평남 인민정치위원회로 재편되었고, 여기에는 조만식 등 민족주의 계열 인사 16명과 현준혁 등 공산주의 계열 인사 16명이 동수로 참가했다.
특이한 것은 그가 공산주의 활동이 없었기 때문인지 민족주의 게열 16인의 한사람으로 포함된 것이다. 그는 이 위원회에 경제학교수, 경영인이었다는 경력으로 상공위원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당시 공산주의계열 16인의 한사람이었다가 훗날 전향애 북한을 비판한 <김일성을 고발한다>라는 책을 쓴 한재덕은 김광진이 8월 17일 결성된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의 재정부장 또는 경리부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평남 인민정치위원회의 실제 구성은 공산주의 계열이 17대 15로 우세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광진이 8·15를 전후해 공산주의 조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이후의 활동으로는 민족주의 계열 대표로 선출된 것과는 무관하게 공산주의 계열에 섰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정약용 실학경제 등 연구
1947년 그는 1년반 정도의 정치활동을 끝내고 다시 연구자로 돌아와 김일성종합대학 교수가 되었고, 10여년의 공백을 깨고 <조선역사연구논문집>에‘농민전쟁으로서의 홍경래란’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그뒤 52년에는 과학원 후보원사, 경제법학연구소장을 거쳐 61년에는 과학원 상무위원, 조국 평화통일위원, 62년 마르크스·레닌주의 방송대학 정치경제학부 강좌장 그리고 64년에는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일제시대 강단 학자였고 민족주의계열로 분류된 사람으로서는 순조로운 행로를 밟아나간 것은 그의 이론적 입장에 기인한 바가 컸다고 볼 수 있다. 해방이후 그의 연구초점은 조선후기와 일제 식민지 시기의 경제사·민족해방운동사 및 정약용의 실학경제사상이었다. 북한학계가 조선후기 실학파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도 그의 연구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63년 김광순·변낙주 등과 함께 지은 <조선경제사상사>에서 그는 정약용을“봉건통치에 맞서 자본주의를 예감했으며, 인민의 관점에서 애국적·선진적 사상가였으며 농민전쟁의 이데올로그”로까지 칭찬하고 있다.
김광진이 조선 후기와 일제 식민지 시기의 경제사를 집중적으로 다룬 50년대 후반~60년대 초의 연구들은 이 시기 북한의 협동농장화와 1차 경제개발계획의 이론적프로그램으로 작용했다. 그는 일제하의 조선사회를 자생적인 자본주의발전의 길이 저지된 채 봉건적 형태가 잔존하고 있고 일본이라는 제국주의 세력의 이식된 공업자본주의가 각기 분리되어 존재하는 이른바‘식민지반봉건사회’로 분석했다. 그리고 이‘특수성’에 대한 주목은 북한이 6·25전후 파괴된 경제현실에서‘자본제적 생산양식’이나‘소상품 생산양식’의 범위가 극도로 적기 때문에 곧장 사회주의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협동농장화’와‘중공업우선’의 노선을 채택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로 작용했다.
‘역사 5단계설’ 반박
북한 사회의 이러한 발전 방향과 관련해 1950년대 말에 개최된‘해방전 조선사회경제구성의 특성’에 대한 토론회에서 그는 식민지 조선사회가 봉건사회로부터 자본주의 사회로의 과도기라는‘전자본주의설’을 주장하여 전석담·최윤규 등의‘근대사 후기 자본주의설’에 맞서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발전 단계의‘특수성’에 대한 접근방식은 그의 가장 주요한 이론적 업적인 한국 고·중세사에 대한 성격과 시기구분이라는 경제사학분야 연구에서 가장 첨예하게 드러났다. 북한에서 50년대 중반 역사학 논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그의 저서 <삼국시대 사회구성에 관한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56년)에서 그는“조선의 경우 원시공동체사회에서 노예제를 거치지 않고 곧장 봉건제사회(삼국시대)로 넘어간다”는 노예제 결여론을 주장했다.
남한서 80년대 중반 소개
이 주장은 공산주의 계열의 정통적인 역사 5단게설(원시공동체-노예제-봉건제-자본제-사회주의)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김광진은 고구려의 예를 중심으로 들면서 원시공동체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성격을 크게 수용하고 거기에서 곧장 봉건제사회(고구려의 경우 4세기)로 이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주장은 당시 도유호·이능식 등 북한 사학계의 중진들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았으며, 이들과의 논쟁은 <삼국시기의 사회경제구성에 관한 토론집>이라는 책으로 묶여 나왔다.
일부에서는 이 논쟁이 50년대 중반, 당시 소련 등이 발전단계를 근거로 들면서 동구 같은 ‘인민민주주의적’ 성격의 경제형태를 요구하고 있는 데 대해“정통 5단계설을 서구 중심의 역사관”이라는‘자주’노선의 이데올로기적 항의를 지녔던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의 노예제 결여론은 70년대 들어서 삼국시대보다 앞선 고조선·부여·진국(마한)등이 노예제 사회로 규정되는 것이 학계의 통설로 되면서 비판을 받지만 그즈음 김광진의 연구 초점은 봉건시대와 자본주의 초기로 이동하고 있었다.
70년대 중반 이후 그의 저작은 알려진 것이 없다. 이미 70대의 고령에 접어든 탓에 연구 일선에서는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81년 그가 80세로 죽을 때까지 그는 모두 4권의 저서(공저 포함)와 수십편의 논문을 남겼다. 그리고 그가 죽은지 채 10년이 못된 80년대 중반에 남한에서 북한 역사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비로소 그의 연구업적 등이 하나 둘 소개되기 시작했고, 한국의 근대와 노예제를 논의하는 자리에 중요한 각주의 하나로 이 땅의 연구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88년 남한에서 그의 주요 저작인 <조선에서의 자본주의관계의 발전>이 처음으로 원문 출판된 데 이어 <한국경제사상사>(원제 <조선경제사상사>)와 <삼국시기의 사회경제구성에 관한 토론집>이 속속 출판되었다.
현대사 연구가 임영태씨는 김광진을 두고“북한 경제 사학계의 핵심인물”이며“식민지반봉건론의 주요한 구성자” 중의 하나로 꼽았다. 크게는 주체사상이라는 흐름의 한 부분으로, 작게는 역사학계의 태두로서 그의 연구 성과는 북한 사회를 떠받치는 주요한 밑바탕의 하나로 기능한다고 볼 수 있다.
북한학계 지적 흐름 대변
60년대 말 이후‘주체 노선’이‘사상·철학화’의 경향을 밟으면서 변화하기 이전까지 그가 보여준 논의들은 전문적인 역사연구의 한 부분으로서만이 아니라 북한의 발전단계를 바라보는 북한 학계의 방법론과 지적 흐름을 대변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그는 한반도의 잊혀진 반쪽을 바라볼 때 제일 먼저 투시경을 들이대야 할 하나의 주춧돌이 아닐 수 없다.
[출처] 김광진|작성자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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