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누리길 화석정과 반구정
(2017년 5월 20일)
瓦也 정유순
경기관광공사가 주관한 평화누리길 걷기 행사인 ‘2017 평화누리길 걷기행사 in 파주”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바람을 가르며 율곡습지공원으로 길을 나선다. 오늘의 걷기 코스는 율곡습지공원을 출발하여 임진강 철책선을 따라 장산전망대에 거쳐 화석정을 들렸다가 다시 율곡습지공원으로 돌아오는 행사로 슬로건은 “참 좋은 봄날, 평화누리 길에서 만나자”이다. 그리고 행사가 끝난 후 덤으로 문산읍에 있는 임진강역에서 반구정까지 걸을 계획이다.

<평화누리길 걷기 행사 코스 안내도>
율곡습지공원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의 버려져 있던 습지(濕地)를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생태공원(生態公園)으로 만든 곳으로 봄이면 유채꽃이 화사하고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하늘하늘 거린다. 그 코스모스가 필 자리에는 청보리가 이삭으로 푸른바다를 만들어 꽃양귀비를 그 바다 가운데에 아름답게 띠운다. 율곡(栗谷)이라는 이름답게 밤나무 숲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쉼터를 제공한다.

<율곡습지공원 보리밭과 꽃양귀비>

<율곡습지공원 밤나무 숲>
소망광장에는 풍요와 건강을 기원하는 솟대와 장승, 소원을 빌어주는 돌탑, 부부화합과 다산을 상징하는 남근석(男根石) 그리고 항아리 탑이 광장을 메운다. 저수지에는 연(蓮)이 여름을 성큼 기다리고 애기부들과 줄풀 등 수생식물들이 습지를 살찌운다. 율곡습지공원은 평화누리길 8코스의 종점이며 9코스의 시작점이고, 임진각평화누리공원까지 생태탐방로도 조성되어 있어 도보여행 코스로도 좋다.

<율곡습지공원 돌탑>

<율곡습지공원 솟대>

<율곡습지공원 장승>

<율곡습지공원 옹기탑과 남근석>
준비된 식장에서 군악대 연주 등 식전행사가 끝나고 두 명씩 짝을 지어 경계병의 점검을 받으며 임진강 철책선 안으로 들어간다. 평소에는 군인들이 철통같은 경계를 서는 지역이라 민간인의 접근이 통제된 지역이었으나,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오늘의 행사를 위해 특별히 문을 열었다고 한다. 푹 쉬어야할 시간에 행사를 위해 고생하는 국군장병들이 한없이 고맙다.

<임진강변 철책길>
지금은 북한 땅인 강원도 법동군 두륜산에서 발원하여 244㎞를 흘러 한강으로 흘러드는 임진강(臨津江)은 약65%가 북한에서 흐르다가 겨우 휴전선을 넘어와서도 대부분이 철책에 갇히어 그저 바라만 볼 뿐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멀다. 옛날부터 삼국시대에는 국경분쟁이 잦았던 지역이었고 한국전쟁 이전까지 배가 다녔던 고량포는 한양(서울)과 개성의 물자가 교류되는 임진강의 최대 교역항으로, 당시 경기도 연천, 강원도 철원, 황해도 금천 등 인근지역에서 생산되는 농·특산물의 집산지였다.

<철책 안의 임진강>
그렇게 화려했던 임진강은 처음에는 더덜나루(다달나루)라고 부르다가 한자로 표기하면서 ‘더덜’ 또는 ‘다닫다’라는 뜻의 ‘임(臨)’자와 ‘나루’라는 뜻의 ‘진(津)’자를 써서 임진강(臨津江)으로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군사분계선으로 사람의 접근이 통제되어 섬진강과 함께 바다와 소통이 되는 하천으로 토종 민물어종이 풍부하고, 민물참게와 황복(黃鰒) 등 귀한 어류자원의 보고로 비교적 자연생태계가 양호하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된다.

<임진강>
임진강 주변의 경계는 미군 제2사단이 맡아오다가 한국군에 이관된 지역으로 1971년 철책이 가설되고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44년 만인 2015년에 생태탐방로가 조성되어 안보체험과 동시에 야생 동·식물을 직접 볼 수 있는 탐방로를 만들었다. 하늘에는 환영 퍼레이드라도 하듯 접경지역을 순찰하는 헬기가 철책을 따라 오르내리면서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이들을 호위하듯 하늘을 경계한다.

<헬기>
아카시 꽃과 찔레꽃의 향이 온 몸을 휘감고 철책선 밖으로 나갈 때는 탱크저지선이 접경지역을 더 실감나게 한다. 포장된 길을 걸을 때는 철책선 안의 땅을 밟고 걸었던 길이 갑자기 그리워진다. 아스팔트에 복사되는 5월의 태양을 더 뜨겁게 달구어지고, 나무 그늘 아래를 따라 올라선 곳은 장산전망대이다.

<아카시 꽃>

<탱크저지 시설>
너른 평지 위에 작은 너와정자에는 이미 사람들이 가득하여 들어갈 자리가 없다. 이 전망대는 탁 트인 임진강의 흐름이 한눈에 들어오고, 강 건너 멀리로는 도라산, 개성공단, 가정동마을, 송악산, 대성동마을, 마식령 산맥줄기까지 관찰할 수 있는 임진강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는 숨은 명소이다. “우리는 통일을 염원하기 때문에 후손들에게 통일된 조국을 물려줘야할 의무가 있음”을 다짐하면서 반환점을 돌아 나온다.

<장산전망대>

<장산전망대 정자>

<장산전망대에서 본 임진강>
화석정으로 가는 길목에는 “큰 경사가 있을 징조”라는 채운(彩雲)이 일직선으로 하늘을 수놓는다. 때맞춰 “부처님 머리를 닮았다”는 불두화(佛頭花)가 화사하게 맞이하고 임진강도 덩달아 무지개처럼 휘어진다. 아까 장산전망대에서 다짐했던 통일이 이루어 질 것 같은 마음이다. 채운은 태양광선의 회절현상(回折現想)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서운(瑞雲)이라고도 한다.

<채운>

<불두화>
화석정(花石亭)은 율곡 이이(栗谷 李珥)가 자주 들러 시를 짓고 명상을 하며 학문을 연구하던 곳으로,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임진강이 굽어보이는 강변의 절벽위에 위치하고 있다. 세종25년(1443년)에 율곡이 5대 조부인 이명신이 처음 지었으며, 성종9년(1478년)에 이숙항이 화석정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화석정>
이이(1536∼1584년)는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출생했지만 아버지의 고향인 이곳 율곡에서 성장하고 학문을 익혔다. 그래서 고향 이름 율곡(栗谷)을 따서 아호로 삼았다. 8세 어린나이에 지었다는 시(八歲賦詩)가 눈에 띤다. 오래오래 장수하여 명석한 두뇌로 임금을 잘 보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숲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어드니(林亭秋已晩 임정추기만)
시인의 시정은 그지없구나(騷客意無窮 소객의무궁)
멀리 물빛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遠水連天碧 원수연천벽)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을 향해 붉구나(霜楓向日紅 상풍향일홍)
산에는 둥근 달이 솟아오르고(山吐孤輪月 산토고륜월)
강은 멀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江含萬里風 강함만리풍)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塞鴻何處去 새홍하처거)
울고 가는 소리 저녁구름 속으로 사라지네(聲斷暮雲中 성단모운중)
<화석정 시(팔세부시 八歲賦詩)에서>

<화석정 시(팔세부시)>

<560년 이상된 느티나무-화석정>
화석정 아래 철책 안에 있는 임진나루는 임진강유역의 대표나루로 관북과 관서지방으로의 분기점이 되는 곳이다. 조정에서는 총융청(摠戎廳)소속으로 임진진(臨津鎭)을 두어 관리하였으며, 옛날 한양에서 송도를 거쳐 의주로 가는 교통이 빈번한 곳이었다. 또한 임진왜란 때 도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른 선조를 위해 화석정에 불을 질러 임진나루의 뱃길을 밝혀 주었다고 한다.

<철책 안의 임진나루>
그 후 80여 년간 빈터만 남아 있다가 1673년(헌종14)에 증손들이 복원하였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 현재의 화석정은 1966년 파주의 유림들이 복원하였고, 1973년 정부가 실시한 율곡과 신사임당의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단청을 하였으며 주위도 정화되었다. 건물 정면의 현판은 당시 대통령인 박정희가 쓴 “花石亭”이 걸려 있다.

<화석정 정면>
논 마다 모내기가 한창이고 논으로 물을 대는 수로(水路)도 바쁘다. 율곡습지공원으로 되돌아와서 공식행사를 마무리하고 파주시 문산읍에 있는 임진강역으로 이동한다. 임진강역은 경의선의 운천역과 도라산역 사이에 있는 역으로 2001년 9월에 개통되어 새마을호와 통근열차가 운행한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파천(播遷)하였던 선조가 이곳 임진강 백사장에서 제를 지내고 충신들의 명복을 빌며 통곡하였다고도 전해진다.

<모내기한 논>

<농수로>

<임진강역>
임진강역에서 반구정까지 이정표 상 2.5㎞를 다시 걷는다. 언제쯤 남북을 가로 막은 철조망이 걷히고 북녘 땅 평양과 신의주를 거쳐 고구려의 혼이 서린 압록강 너머 만주 땅까지 마음 놓고 갈 수 있을까? 바람도 구름도 새들도 자유로이 넘나들며, 철길은 북으로 쭉 뻗어 있는데 달리고 싶은 철마는 보이질 않고, 제3땅굴 표지판만 외롭다.

<북으로 뻗은 경의선-임진강역>

<제3땅굴 표지판>
반구정(伴鷗亭)은 조선 초기의 명재상 방촌 황희(厖村 黃喜, 1363∼1452)가 87세의 나이로 18년간 재임하던 영의정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보낸 곳이다. 반구정은 임진강이 내려 보이는 기암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다. 푸른 물이 아래로 굽이쳐 흐르고 송림이 울창하여 좋은 풍경을 이룬다. 한국전쟁 때 불타 버린 것을 후손들이 복구하였으며, 1967년 6월 옛 모습으로 다시 개축하였다. 맑은 날 정자에 오르면 멀리 개성의 송악산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반구정>
반구정은 고려의 유신(遺臣) 황희가 조선이 개국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은거(隱居)하였으나 태조 이성계의 간곡한 부름으로 다시 조정에 나와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태종 때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에 극구 반대하여 귀양을 가기도 했다. 적당히 시대와 타협을 하며 세상을 살아가기도 했으나 자신의 원칙과 소신에 따른 강직한 성품으로 영의정을 18년간 봉직하며 조선 초기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데, 크게 기여한 후 여생을 반구정에서 지낸 곳이다.

<황희 동상>
조선의 많은 선비들은 안분지족(安分知足)을 생활의 제일의 덕목으로 삼았다. 아마도 청백리(淸白吏) 칭송을 받는 방촌 황희는 “자기 분수에 맞게 생활”하기 위해 임진강변 오지에 반구정을 지어 갈매기를 벗 삼아 안분지족하며 여생을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돈과 권력에 노예가 되어 한없이 욕심을 채워나가는 현대인들에게 그 의미를 되새겨 보는 반구정이 되었으면 한다.

<방촌기념관>

<방촌선생 영당>

<방촌선생 영당 내부>
그리고 율곡 이이가 1583년 병조판서 재직 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바치며 십만양병설 등 개혁안을 주장하였으나, 당시 반대파의 “당쟁을 조장”한다는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이듬해인 1584년 정월에 4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시무육조에는 “창업(創業) 보다 수성(守成)이 더 어렵고, 수성 보다 경신(更新)이 더 어렵다”고 하며 개혁의 방법과 시기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율곡의 정신이 깃든 화석정에 가끔 들러서 시대를 개혁하는 마음을 다짐해 보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화석정 전경>
첫댓글 제가 발도행을 좋아하는 이유, 카페에 자주 머물며 길벗님들의 후기를 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네요.
평화누리 9길에 대해 참 진지하고 깊은 감회가 서려 있어 비장함이 느껴집니다. 후기마다 깊은 감동을 주시네요^^
후기를 정독하고 다음 도보는 찬찬히 살펴 보며 걸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와야님~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보고 느낀대로 기록하였는데
특급사랑님께서 감동을 받으셨다니
워낙 졸필이라 좀 쑥스럽네요~~
격려해 주시는 말씀을 마음으로 받으며
더 정진하겠습니다.
진행하다보니 앞만 향해 가는데 젖어버린 습관을 고쳐야함을 새삼 느낍니다 .다녀온길 다시
한번 되새겨 봅니다. 감사합니다.
구경님~~!
그 많은 인원 속에서
우리 회원들 챙겨 가면서
진행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항상 감사한 마음입니다.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공부하는 학생의 자세로 푹 빠져들었네요
수고하셨습니다~^o^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공부하는 마음으로
지나온 여적을 적어 봅니다.
경주 걷기여행을 쓰신 김영록 작가님이 " 걷기는 한눈팔기이다 "
라고 하셨는데 좀 더 그 말씀을 새기면서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아야겠네요
자세한 설명 고맙습니다 .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끔은 한눈도 팔아야 하고
해찰도 해 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