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87
10월23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 주일)/연중 제3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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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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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tb3qZDhV2M4 (송영호 안토니오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7047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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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한 명의 선교사가 파견되면>
가끔씩 해외선교를 꿈꾸는 형제들을 만납니다. 그럴 때마다 “너무나 좋은 생각이다. 꼭 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같이 노력하자.”며 용기를 불어넣어줍니다.
얼마 전 이 세상의 가장 오지로 파견된 한 형제가 기억납니다. 이제야 막 사제로 서품된 형제입니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풋풋한 젊은이입니다. 가족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선교지에서 겪게 될 갖은 고초가 손에 잡힐 듯이 떠오릅니다. 물설고 낯 설은 이국땅, 풍토병, 지독한 더위, 입에 댈 수조차 없는 음식, 외로움, 무엇보다도 끝까지 괴롭히는 언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를 쓰고 선교사를 지망합니다. 저희 입장에서도 사실 아깝습니다. 오랜 기간의 수도자 양성 끝에 이제야 ‘써먹을 사람’ 한 사람 생겼는데, 한 번도 써먹지 못하고 고스란히 넘기자니 허탈합니다.
그러나 ‘한명의 해외 선교사가 파견되면 열 명의 성소자가 들어온다.’는 말을 굳게 믿으며 아깝지만 기꺼이 파견합니다.
오늘 모든 교회는 전교주일을 맞아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합니다.
우리 한국교회 역시 해외선교사들로부터 너무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분들의 헌신과 노고는 오늘 우리 교회의 소중한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한 형제가 해외로, 그것도 가장 낙후된 오지로 파견된다는 것,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한 형제의 마음 안에 선교사로서의 꿈이 생겨난다는 것,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선교사들이 오직 복음 때문에 이역만리 머나먼 땅에서 ‘쌩고생’들을 하고 계십니다. 복음의 힘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새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정된 기반을 기꺼이 포기하게 하며, 불확실한 미지의 생활로 투신하게 하며, 결국 목숨까지 바치게 하는 복음의 매력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예수님의 권고를 따라 보다 많은 젊은이들의 마음 안에 선교사로서의 열망이 활활 불타오르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 땅에 오셔서 청춘은 물론 평생을 헌신하신 선교사들을 바라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가뭄에 콩 나듯이 고국에 한 번씩 들르시지만 워낙 오래전에 떠나왔기에 아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그쪽에서도 이방인입니다.
이 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이쪽에서도 어쩔 수 없는 이방인입니다.
어쩌면 그분들은 영원한 이방인, 영원한 타향살이를 계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그들의 노고를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들의 사무치는 외로움을 다 보고 계실 것입니다. 그들의 복음을 향한 열정을 다 파악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수백 배, 수천 배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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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3-8VnifNU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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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마음이 불안한 사람이 사랑한다고 하면 믿어야 할까?>
얼마 전에 어떤 자매가 자신과 결혼하자는 어떤 형제와 결혼해도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야 하니 기도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아버지라면 나의 딸은 절대 그런 사람에게 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사람은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배우 이창훈 씨 딸 효주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 TV에 출연하여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효주는 공부하면서 계속 어딘가를 응시하였습니다. 그렇게 바라봐야 공부할 힘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그 바라보는 곳에는 5만 원권 지폐 모형이 달려있었습니다. 심지어 금주머니 열쇠고리, 골드바 자석, 금전운을 부른다는 돈나무 그림도 붙어있었습니다. 아이의 꿈은 무조건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의 마음은 그래서 편안할까요? 아이는 불안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혼자서는 쓰레기를 버리러 밖에 나가지도 못할 정도입니다. 물론 엄마와 분리되면 안 되는 불안증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집착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집착은 다 자기 생존을 위한 것입니다. 모든 욕구는 다 ‘생존’이란 두 단어로 집결됩니다. 다 살자고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이가 불안하다는 말은 부모가 자기 생존을 책임져주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안한 사람이 사랑할 수 있을까요? 누구나 다 자기 생존을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불안하면 그 대상이 가족이라 할지라도 가족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용하게 됩니다. 딸의 이 불안함은 이창훈 씨의 가족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창훈 씨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세상에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어머니가 계셨지만 5남매 중 유일한 아들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이창훈 씨를 보호하기 위해 학교 앞으로 이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보호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어머니가 함께 있어 주지 않을 때는 하교하다가 나쁜 일도 많이 당하곤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그리고 보호해주지 못할 것, 왜 자신을 낳았는지 부모에 대한 원망도 들었습니다.
그에게 불안을 해결하는 방법은 돈과 인기였습니다.
공황장애를 겪으면서도 일하였습니다. 늦은 나이에 어린 신부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자 인기가 떨어지고 수입도 줄었습니다. 이것이 다 아내 탓이라고 하여 혼자 우울증 걸려 방황하였습니다. 임신한 아내는 이 모든 고통을 혼자 감내해야 했습니다. 매일 이혼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사랑하려면 먼저 ‘불안’이 해결된 상태에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감정이 자녀에게 갑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도 선교하라고 하시며 당신께서 함께 계시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라고 하시며, 또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하십니다. 이 힘을 바탕으로 사랑하고 선교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선교만큼 큰 사랑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선교는 먼저 죽음까지 이기는 하느님의 권능을 지니신 분이 나를 보호해주시니 불안할 필요가 없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불안은 하나의 ‘믿음’입니다. 만약 쥐의 꼬리 같은 것을 보았다고 합시다. 쥐일 수도 있고 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먼저 불안해합니다. 확인한 뒤에 불안해 할 수 없습니다. 쥐면 안심하고 뱀이면 싸우든 도망치든 결정해야 합니다. 불안은 그것이 보이지 않을 때의 믿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불안증을 없애기 위해 운동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명상을 하는 것도 좋지만 믿음 차원에서 해결하려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이 믿음만이 진정 불안에서 우리를 해방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배우 정은표 씨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가족도 재정적으로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정은표 씨 부부는 자녀들에게 불안함을 품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아이 공부도 방해합니다. 하지만 지웅이는 서울대에 당당히 합격하였습니다.
구글에서 창의력이 가장 높은 부서의 특징을 조사하였습니다. 결과는 소통이나 아이큐나 학벌 등에 있지 않았고 그 부서의 ‘심리적 안정감’(Psychological safety)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심리적 안정감이 아이들 공부도 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불안하게 하면 외우는 기계밖에 되지 못합니다.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날입니다. 먼저 가족이 복음화되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민족들을 복음화시킬 수 있을까요? 나 먼저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확실하게 믿기 위해 성령을 받는 기도 시간을 꼭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자녀를 위한 가장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그런 믿음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우리 가족부터 복음화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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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동창 신부님과 지내면서 같이 산보를 다녔습니다. 동창 신부님은 걸음이 빨랐고, 저는 약간 느렸습니다. 동창 신부님은 저의 걸음에 맞추어서 조금 느리게 걸었고, 저는 동창 신부님의 걸음에 맞추어서 조금 빨리 걸었습니다. 동창 신부님의 걸음에 맞추려고 했으면 저는 힘들었을 겁니다. 저의 걸음에 맞춰달라고 했으면 동창 신부님은 답답했을 겁니다. 캐나다에 있는 후배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작년에 교포사목으로 부임했다고 합니다. 코로나의 여파로 공동체가 많이 힘들어졌다고 합니다. 후배 신부님은 공동체를 위해서 매주 성경공부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강론도 열심히 준비했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열정에 잘 따라주는 교우들도 있지만 교포 신자들의 사정을 모르고 너무 부담을 준다는 교우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3시간씩 긴 면담을 기꺼이 해 주는 신부님의 열정과 관심을 알아주는 교우들이 있고, 신부님도 교우들의 입장을 잘 알고 있으니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방향으로 나가리라 생각합니다.
이인삼각 경기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한발씩 줄로 묶고서 달리는 경기입니다. 한 사람이 빨리 가려고 하면 넘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호흡’을 같이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빨리 달릴 수 있는 사람이 늦게 달리는 사람과 호흡을 맞추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외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주셨고, 사람의 모습으로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느님과 사람과의 이인삼각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인삼각 경기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바라는 대로 상대방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를 기꺼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지고 가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을지라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부가 이인삼각 경기를 호흡을 맞추어서 잘 하면 가정은 화목하기 마련입니다. 자녀들은 그런 부모에게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정치도 여당과 야당이 이인삼각 경기를 호흡을 맞추어서 잘하면 국정이 원활하게 유지됩니다. 그런 정치인들이 있으면 국가는 발전하고, 국민은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교회도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교우들이 이인삼각 경기를 호흡을 맞추어서 잘 하면 하느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그런 교회는 예수님 말씀처럼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인삼각 경기가 흔들리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보여주었던 독선과 위선입니다. 그들이 보여주었던 교만과 욕심입니다.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지적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남에게 지우려고 하는 게으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서 남들도 따르지 못하게 하는 그릇된 마음입니다.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과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고가신 십자가와 죽음 그리고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고, 그분은 우리를 ‘죄, 악,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꼭 갖추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봉사’입니다. 예전에 체험사례를 발표하셨던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매님은 아직 신앙을 갖지 않았던 새댁에게 자주 찾아가서 살림살이의 요령을 알려주고, 바쁘면 시장에 가서 장을 봐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꾸준하게 도움을 주니까, 결국 새댁은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둘째는, ‘열정’입니다. 전교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꾸준히 해야 합니다. 조금 선교를 하다가, 힘들면 포기해서는 선교를 잘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용산 성당에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요셉 형제님은 냉담하는 분들의 주소를 찾았습니다. 매 주일 주보를 보내고, 이사를 가신 분들은 이사 간 주소로 주보를 보냈습니다. 결국 그분의 노력으로 냉담 중인 많은 분들이 다시 신앙을 찾았습니다. 셋째는, ‘인내’입니다. 꾸준히 인내를 가지고 선교를 하면, 결코 마음을 열 것 같지 않았던 사람들도 성당에 나오는 것을 봅니다. 제가 알던 자매님은 결혼 생활 17년 동안 시부모님과 남편을 극진하게 섬겼다고 합니다. 신앙을 갖지 않았던 남편이 결혼 17주년 선물로 가져 온 것은 ‘예비자 교리 신청서’였다고 합니다. 남편은 극진한 마음으로 시부모님과 남편을 섬기고 자녀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아내가 고마웠고, 아내가 가장 좋아할 것 같은 선물은 같은 신앙을 갖는 것이라고 하면서 ‘예비자 교리 신청서’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자매님은 남편의 말을 듣고 하느님께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천년도 주님의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다고 합니다. 우리가 충실하게 살면, 언젠가는 축복이 찾아 올 것입니다.
우리는 미사 때 이런 말을 많이 듣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응답을 합니다.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들과 함께 계셨는지 생각합니다. ‘가난한 사람, 장애인, 죄인, 이방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은 주님께 대접을 할 것도 별로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들에게 보답을 받으신 것도 없었습니다. 사제들도 바로 주님께서 함께 했던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 신자들도 바로 주님께서 함께 했던 사람들과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민족들의 복음화입니다.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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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전교주일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복음선포이다. 복음선포를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음화되어 하느님 안에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의 변화를 이룩하기로 하는 날이다. 더욱이 우리는 분단의 현실을 갖고 있다. 오늘, 이 미사를 통해 온 민족의 염원인 평화적 통일을 기원하며 민족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겠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선교 2항). 선교야말로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확실한 이유임을 분명하게 천명한 선언이다. ‘본성상 선교해야 하는 교회’라는 말 안에는, 교회는 “믿지 않는 만백성의 빛이 되고 구원이 되기 위해 파견된 자”임을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 내포된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교회는 예수님과 열두 사도들의 복음 선교 활동에서 생겨났고, 그 활동의 당연한 결과요, 그 활동이 원한 것이며, 그 활동에 가장 가까울 뿐만 아니라 그 활동에서 볼 수 있는 결과가 교회인 것”이다(현대의 복음 선교 15항). 이처럼 교회는 예수님과 같은 사명 완수를 위해 예수께로부터 파견되었으며, 「떠나셨지만 머물러 계신」 예수님의 새로운 현존에 대한 명백한 표징으로 계속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성령의 인도 아래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 세상에서 계속 수행하기 위해 불린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파견의 연장(延長)이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니 이것은 성부의 계획을 따라 교회가 성자의 파견과 성신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는 성부의 구원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의해 파견되며, 궁극적으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신 성부의 「샘솟는 분출적 사랑」을 파견의 최종 근거로서 인식하며, 마르지 않고 끊이지 않는 샘물인 이 「원천적 사랑」에서 끊이지 않고 활력과 열성을 길어내는 것이다.
“선(善)은 자기 확산성(自己擴散性)을 지닌다.”(Bonum est diffusivum sui). “샘 같은(원천적)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이 끊임없이 자신(사랑)을 확산시켜 나가기를 바랄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왜 성부의 “원천적(샘 같은) 사랑”이 선교의 최종 근거가 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지 않은가? 조금 더 들어보자. “선은 자기를 확산시킨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선하면 선할수록 자신을 더욱 확산시켜 나가야 마땅하다.
따라서 하느님은 선의 최상의 결과를 위해서 자신을 최대한으로 확산시켜야 했다. 그런데 하느님이 할 수 있는 선의 최상의 결과는 무엇일까? 인류의 구원사업이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최대한으로 쏟아부으며 최상의 결과를 기대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하느님의 자기 확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자기확산인 선교는 <선=사랑=하느님>에 너무 잘 어울리고, “기원을 갖지 않으시는 기원”이신 성부의 사랑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귀속되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선교의 최종 근거는 결국 성부의 자기 확산적인 “분출적 사랑”에 귀착된다.
하느님은 만선의 근원이요 사랑 자체이시다. 지선(至善)하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그 본성상 선과 사랑을 확산시키지 않을 수 없는 분이시다. 선과 사랑은 합일시키고 합성시키는 힘일 뿐 아니라 동시에 자신을 확산시키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최고선이요 최고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자기확산의 일환으로 하신 최상의 사업이 바로 “만민 구원”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만민 구원”은 하느님의 “샘 같은 분출적 사랑”에서 나오고, 하느님은 당신 사업의 성취를 위하여 최고의 방법으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시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파견이 이루어지고, 이로써 하느님은 ‘선교하는 하느님’이 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라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확산시키는 일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우리와 같이 아버지로 부를 수 있도록 확산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한 형제요, 자매로서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복음: 마태 28,16-20: 모든 사람을 내 제자로 삼아라.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갈릴래아에 나타나셔서 만민에게 세례를 베풀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침으로써 만민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세상 끝까지 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구약에서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셨듯이, 이제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느님의 새 백성인 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1,23)이시다. 그러기에 교회는 모든 민족을 주님의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우리가 처한 위치에서 자기 자신의 본분과 책임, 의무를 다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시기는 그것이 더 필요한 때이다. 특히 오늘 우리의 삶과 신앙의 현주소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며 복음화의 소명을 새롭게 하도록 하자. 이러한 모든 은총을 주님께 청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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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송영호 안토니오 신부님]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로마 10, 14)>
제게 믿음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생각해 봅니다. 가난했지만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때로는 다리 아프다며 엄마 등에 업혀 성당에 오가던 시절, 꾸백꾸백 졸며 묵주기도 봉헌하시던 어머니 모습, 성당 친구들과 즐거이 뛰놀던 시간들, 주변에 늘 열린 마음으로 함께해 주셨던 수녀님과 신부님들, 스스로 하느님 공부하며 노력했던 시간들 모두 하느님께서 제게 믿음을 심기 위해서 보내 주신 천사들이었나 봅니다. 주님 없이 살 수도 있겠다 싶겠지만 주님 없으면 어찌 살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 크게 작게 하느님은 항상 제 결에 당신의 천사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선을 행하고 악율 미워할 힘을 주셨습니다. 늘 사랑할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칠레 이키케 교구에서 선교사로 살던 때의 기억 하나가 떠오릅니다. 60여 세 되어 보이는 소위 술주정뱅이가 사제관 앞에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슬그머니 나가보니 이 형제가 술기운에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습니다. 1시간쯤 지나니 다리도 아프고 줍기까지 했습니다. 사막의 밤은 춥습니다. 우리는 쪼그려 앉아서 계속 대화했습니다. 3시간쯤 지나니 이 친구가 큰 소리로 하하하 웃으며 저에게 말합니다. "내 평생에 처
음으로 주님의 천사를 이곳에서 보았네." 저는 예수님 때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이 형제의 말을 세 시간 동안 들어준 것뿐입니다. 그러나 구걸한다고 더럽다고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았던 이 형제의 눈에는 제가 천사로 보였나 봅니다. 때로는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참으로 계시고 늘 내 주변에 천사들을 보내시어 보호하고 계심에 감사하고, 믿음과 인내로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환 때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예수님의 이 명을 수행하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복음 선포의 사명에 동참합시다.
현재 전쟁과 코로나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83개국에서 천 명이 넘는 신부님. 수녀님, 평신도 선교사들이 가난한 지역에서 현지인들에게 회망을 주고 예수님의 벗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분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주님의 기도, 성모송 한 번만이라도 바쳐주십시오. 하느님나라, 복음은 세상 끝까지 선포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20)고 약속하셨으니 예수님과 함께 갑시다. 사랑과 구원의 북음을 집집마다 세상 끝까지 선포합시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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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우리는 전교 주일을 지냅니다. 교회 본연의 사명은 무엇보다 세상에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일, 곧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인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복음화 사명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에서 비롯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신앙의 길로 먼저 초대된 이들은 그 신앙을 자신들의 전유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은총으로 얻게 된 믿음을 모든 시대와 장소의 사람들에게도 전해야 할 의무가 생기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일’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교회가 끊임없이 수행해야 할 본질적인 임무입니다. 그런데 선교는 매우 험난한 여정이기도 합니다. 이천 년의 오랜 역사가 증명하듯,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거부하고 조롱하며 심지어 박해하는 이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숱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교회가 복음화 여정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의 현존 때문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오 복음서의 시작(1,23)과 마침(28,20)에서 장엄하게 선포되는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걸어가는 선교 여정의 시작에서 마침에 이르기까지 늘 든든한 동반자로 함께하십니다.
혹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어떤 특별한 훈련을 거친 전문가들이나 하는 것쯤으로 여기면서 그들에게 선교의 책임을 떠넘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진실로 체험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밖으로 나아가 그 사랑을 선포하는 데에 오랜 준비나 긴 시간의 훈련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사랑을 만난 그리스도인은 모두 선교사입니다.”(「복음의 기쁨」, 120항) 우리는 모두 선교하는 제자들입니다. 우리가 체험한 하느님 사랑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나누게 될 때 비로소 그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 사랑을 전하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전교 주일을 맞아 과감히 그럴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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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홍금표 미카엘 신부님]
<“교회와 우리 자신부터 복음화하자”>
「적이 사라진 시대의 증후군」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탈냉전 시대에 찾아온 몸살과 같은 혼돈을 말합니다.
이 이론을 내놓은 올리히 백에 의하면 냉전의 논리가 지배했을 때 서유럽은 평온했다는 것입니다. 공산독재라는 적의 존재가 분명했고 적과 맞서기 위해 요구된 내부의 통제가 외견상 질서의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산독재라는 「분명한 외부의 적」이 사라지면서 냉전의 시대가 종식되자 이제는 인종과 지역 종교 등과 관련된 내부의 분쟁들이 오히려 더 혼돈적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서유럽의 국가들은 이러한 혼돈을 극복하기 위해 사라진 적을 대신할 만한 새로운 적을 찾아 나서는 역설적인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모습은 유럽만의 상황뿐 아니라 우리 개인 안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내는 이러한 사고방식, 즉, 한 집단과 자기 자신만의 가면적인 삶의 의미를 가지기 위하여 끊임없이 대립적인 상황을 고착화 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본능의 자연적인 모습으로 돌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 같은 모습은 변화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성숙을 방해할 수 있기에 힘들지만 포용과 조화의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면서 전교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교회가 전교주일을 지내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신자들의 본연의 사명인 선교의식을 일깨우고 전교 사업에 종사하는 선교사나 전교 지역의 교회를 정신적 물질적으로 돕고자 함입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교회에서는 「선교」라는 말은 굉장히 생소한 단어였고, 「선교사」 하면 개신교에서만 사용하는 용어 정도로 이해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더 이상 반대만 하는 운동권 정신으로 유지되던 선교의 시기가 지나 예비신자의 급속한 감소와 함께 쉬는 교우의 증가 문제가 대두되자 교회는 위기감 속에서 선교 문제를 뒤돌아 볼 수밖에 없었고 새로운 선교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아직도 타 교회에 비하면 신자들의 의식과 열성, 교회의 선교에 대한 마인드와 예산 문제 등 모든 면에서 뒤쳐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선교 사명」을 교회의 근본 사명으로 재인식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선교사명의 반성을 통해 「복음화」의 개념을 재정립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커다란 의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에서의 발현사화로써 복음서의 대미를 장식하는 부분입니다. 내용은 만민에게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내용입니다.
여기에는 복잡한 신학 언어들이 포함되어 있기에 해설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만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세례 베품과 예수님 계명 선포를 통해 「이 세상 모든 민족」을 예수님의 가르침 아래 하나로 묶는 단일한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라는 내용입니다.
물론 이 말씀에 대해 여러 가지 이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의 계명이 우선되는 공동체의 건설은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으뜸 사명이 되는 것이고, 아마 오늘 교회가 전교 주일을 지내면서 선교 의식을 재확인 하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과 함께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복음화의 사명은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이 아니라 사람과 환경의 조화 속에서 완성될 수 있는 사명이라는 사실입니다.
평신도 교령 5항에 보면 『그리스도의 구원 성업은 본래 사람들을 구원할 목적을 가졌지만 현세 질서를 개선하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사명도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의 은총을 사람들에게 전할뿐 아니라 현세 질서에 복음 정신을 침투시켜 현세 질서를 완성하는 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생활환경을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활동도 복음화의 중요한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계획에 반대되는 인간의 판단 기준과 가치관, 사상과 생활양식을 바로잡고, 복음의 근본정신이 각 민족 문화의 근원에까지 생명력 있게 스며들 때 복음화의 사명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과거의 포교 사업처럼 복음화의 대상이 되는 환경과 사람들을 적대시하는 우리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착은 안된다는 사실과 복음화의 대상에서 우리 교회와 우리 자신을 우선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칫 선교의 대상에서 교회와 교회안의 문제를 배제할 때 복음화는 단지 「변화의 두려움을 피하기 위한 수단 내지 다원화 사회안에서 자기 정당성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쓰여 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러한 선교 사업은 단순한 집단 이기심의 발로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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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변승식 요한보스꼬 신부님]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이사 2,3)
우리가 전교를 말하면서 떠올리는 희망은 아마도 위와 같은 장면일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이가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길을 함께 걷는 세상,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시길 바라는 기도와 같은 희망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 18)
승천을 앞둔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그러한 희망을 어떻게 이루어가야 하는가 하는 방향을 일러줍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이 일에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며 격려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실천하려고 할 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이 말씀은, ‘남 앞에서 잘난 체 하지 마라’, ‘남을 가르치려 들지 마라’는 우리 처세의 상식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다른 이의 믿음이나 가치관, 사상을 존중해야 한다’고 하는, 함께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원칙도 벗어나는 듯하여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이건 내 생각이 아니라 하느님의 가르침이요, 진리니까’,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너의 구원과 행복을 위한 것이니까’라는 생각도, 결코 내가 남보다 낫다는 오만한 태도를 정당화하거나 사상적 강요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해소하지는 못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그 깊이와 가치를 누가 판단할 수 있습니까? 세례를 받고도 신앙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금방 쉬는 신자가 되어 버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우리의 말솜씨나 끈질긴 권유에 못 이겨 교회를 찾았다면, 진리를 알고 배우게 되었다 해도 그것이 온갖 유혹과 어려움을 이기고 신앙을 지킬만한 힘을 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체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구원을 얻은 것은 체험을 통한 믿음이었고 응답이었기 때문입니다.
볼품없는 삶이라 해도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이 세상과는 다른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주었을 때, 그들은 복음을 체험하고 이끌리게 됩니다. 그런 그들을 초대하여 교회로 이끄는 것, 이것이 우리의 전교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코린 1, 17)
전교주일을 맞아, 내 삶의 모습이 우리의 이웃에게 복음을 통한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있는지 반성해봅시다.
우리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세상 모든 이를 주님의 나라로 이끄는 가장 아름다운 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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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은, “함께, 곁에”라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버림받고, 위험에 빠지고, 불신의 늪에 빠졌을 때, 누군가가 “내가 곁에 있어 줄게.”, “내가 너를 지켜 줄게.”, “나는 너를 믿는다.”라는 신뢰와 위로의 한마디를 건네면서 말없이 곁에서 손을 잡아 주며 함께 아픔을 견뎌 줄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혼자가 아님을 체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의 삶을 마치시고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고 명하십니다.
사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기쁨은 누렸지만, 예수님 없이 자신들만의 믿음으로 복음을 전할 용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승천 자리에서조차 더러 의심하고, 불신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두려움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해 주십니다.
이 약속은 협조자 성령을 보내셔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선포하게 하시며, 교회를 성장시켜 주심으로써 성취됩니다. 성령의 현존은 바로 예수님 약속의 보증이십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라고 바오로 사도는 고백합니다. 누군가 기쁜 소식을 전해 주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법입니다.
내 믿음도 부모님이나 친구, 지인들의 안내와 전교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내 믿음의 멘토(스승)나 후견인이 필요했듯이 나 역시 누군가에게 믿음의 멘토이자 후견인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전교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외침처럼 우리 안에서 먼저 복음의 기쁨이 움터 나올 때 가능함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내 주변에 믿음을 잃고 있는 교우는 없는지 먼저 찾아보고 그들을 향해 달려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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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름으로>
마태오 28,16-20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그때에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름으로>
내 이름이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벗들을 살립니다
내 이름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벗들을 품습니다
내 이름이
아니라
성령의 이름으로
벗들에게 스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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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전교 주일이란 전교 사업에 종사하는 선교사나 선교 지역을 물질적, 정신적으로 돕기 위해 정한 주일입니다. 10월 마지막 주일 전 주일에 지내며 1922년 교황 비오 11세가 시작하였습니다. 1970년 한국 주교회의는 10월을 전교의 달로 정하였습니다. 민족들의 복음화라 불리는 전교주일을 맞이하여 전교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전교란 복음을 널리 전한다는 말입니다. 복음은 한마디로 기쁘고 복된 소식입니다. 무엇보다도 기쁜 소식을 전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 기쁜 소식의 핵심이 됩니다. 복음은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하느님의 복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복음’, ‘그리스도의 가없이 부요하심에 관한 복음’인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것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의미는 우리가 결코 할 수 없는 것을 그분이 우리 안에서 그 뜻을 이루시며 그분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기쁜 소식 즉 복음은 우리가 병을 앓고 그 병이 나았으며 우리가 넘어지고 다시 일어났으며 죄인인 우리 자신이 용서 받았을 뿐 아니라 사랑을 받고 은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쁜소식인 복음을 선포하는 복음의 봉사자로 불리움을 받았습니다. 세상의 미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충실히 따르고 그 복음을 당연한 의무와 권리로 선포하는 데 달려있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타인과 세상을 복음화 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 스스로가 복음화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사람이요 모델인 성 프란치스코는 복음을 권고하는 교사가 되기 이전에 먼저 자신이 그 실천가가 되었습니다. 성 프란치스꼬의 가장 높은 지향과 주된 바람과 최고의 결심은 복음을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통하여 실행하는 것이었고, 조금도 한 눈을 팔지 않고, 열의를 다하여 애타게 갈망하는 온전한 정신과 뜨겁게 타오르는 온전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발자취를 따랐습니다. 무엇보다도 성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어오신 모습 안에서 겸손을 바라보고 그분의 수난 안에서 한없는 사랑을 깨닫고 겸손과 사랑의 삶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삶을 살도록 우리 또한 초대받고 있습니다.
자기 복음화는 무엇보다도 복음적으로 가난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적 가난의 의미는 우리의 인생관을 이 땅과 지상의 재물, 지상의 안락, 지상이 줄 수 있는 것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에 두면서 하느님을 갈망하며 잠시 지나가는 현세적인 것들로부터 우리의 정신을 해방시키는 데 있습니다. 복음적 가난의 의미는 하느님이 바라시는 그 목적에 따라서 우리가 가진 재능과 물질적 재물을 사용하는 데 있습니다.
복음의 기쁜소식은 언제나 하느님 나라가 핵심입니다. 이를 위해서 자신먼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자기 복음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주님께서 당신 생애에 하셨던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복음 봉사자의 역할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일상에서 자신에 주어진 환경 안에서 기쁜소식을 전하는 복음 봉사자가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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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고 감당하면 눈이 열린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두가 구원을 받고,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당신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시간 전교의 사명에 대해서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이가 구원을 받는다는 기쁜소식, 곧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께서 명한 것을 지키고,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에 말씀은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듣게 되고 들음으로써 주님께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부르짖음이 우리 안에 숨겨지지 않도록 우리 각자의 능력에 따라 구원의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많은 분이 나는 말을 잘 못한다. 아는 게 없다고 하면서 개신교 신자들의 전교 열정과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 말 잘하는 것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축구를 잘하려면 늘 축구를 해야 합니다. 농구든 야구든, 피아노를 치든 잘하려면, 그만큼 노력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를 잘하려면 자꾸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함으로써 더 전할 수 있는 용기, 잘 전할 수 있는 지혜도 얻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수고 없이 잘하려고 하니 문제입니다.
솔직히 여러분이 말을 잘 못하십니까? 남 얘기하는 데는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게 없습니까?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에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연속극, 트로트 가수의 이름뿐 아니라 사생활 일거수 일투족을 꿰뚫고 있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데 성경에 대해서는 얼마나 관심이 있으신가요? 쓸데없는 것으로 가득 채우면 꼭 필요한 것이 들어갈 데가 없습니다. 사실 주님을 전하는 것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라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코린1,17)
“말로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행동으로 모범을 보인다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됩니다. 신앙은 말로 선포된 복음을 충실히 살아가는 이들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큰 매력을 느끼게 되고 이를 통해 더욱 전파되게 됩니다.”
“교회는 매력과 증거로 성장합니다.” 세례받은 이가 복음의 향기를 풍기는 삶의 증거를 통하여 선교에 나서고 복음화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나는 가족 구성원에게, 이웃에게 어떤 매력을 주고 있을까요? 저는 예수님을 알고 있어요. 당신도 예수님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어던 사람이‘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사람을 대하는 그의 친절, 헌신, 사랑, 희생이 감동이야! 역시 성당 다니는 사람은 달라’ 한다면, 이 순간이 예수님을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사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더 큰 믿음을 얻게 됩니다. 믿음이 있어야 따를 수 있기도 하지만 따름으로써 믿음을 다지게 됩니다. 어느 모임은 릴레이 성경 읽기를 합니다. 반응도 아주 좋습니다. 큰 감동이 있다고 했습니다.
선한 일을 하고자 하면 우리가 감히 상상하지 못한 은총으로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 하신 주님의 약속을 믿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할 때 이윽고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됩니다. 사도행전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다락방에 숨어 지내던 사도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1코린2장 4절에 보면 “내가 말을 하거나 설교를 할 때에도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성령과 그의 능력만을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을 믿고 전교하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실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는 늦춰진 성공일 뿐입니다. 더 큰 결실을 위한 믿음의 단련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반응 여하에 실망하지 말고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뜻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십시오.
“교회는 세상 안에서 개종강요가 아닌 매력을 통해 성장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이끌려 그분을 기쁘게 따른다면 다른 이들도 이를 알아차릴 것입니다.”(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교회가 바깥으로 나가지 않을 때, 교회 내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악 때문에 교회는 병들고 맙니다.
왜 교회 내에 이런 병페가 있는 것일까요? 바같으로 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깥으로 나갈 때 사고의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안에 갇힌 채 병든 교회가 되는 것보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 사고를 당하는 교회가 더 낫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십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와 동일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거만함 없이 오직 겸손을 통해 선포되어야 합니다.”
베드로 전서 3장 15절의 말씀을 보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 되어있어야 주님을 제대로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자주 읽고 또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깊이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는 개신교신자가 줄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사회봉사 및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인색하고, 전도활동이 지나쳐서 혐오감을 주며 헌금을 너무 강조한다. 진리 추구보다 교세 확장에 집착하고 너무 시끄럽고 요란하다. 물량주의에 물들어 있다. 도덕적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이원규. 감신대.종교사회학교수).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합니다.
천주교에서도 경계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천주교인들이 개인화하고 있고, 부유해지고 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관한 관심이 줄어들고 점점 보수화, 권력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거리홍보나 공연, 작품활동을 통한 문화 선교를 개신교에서 배우는 것은, 긍정적인데 기존의 좋은 것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반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통한 새 삶을 살아감으로써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교주일을 보내면서 무엇보다는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하시길 빕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이 침체 되었는데 어렵다고 머뭇거리지 말고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소명의식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세례를 받은 지 몇 년이 되었든 나를 통해서 성당을 찾아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되었으면서도 나의 영향으로 하느님을 찾게 된 사람이 아직 없다면 나는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들꽃이나 과일나무도 일 년에 한 번 열매를 맺는데 우리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은혜를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가운데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길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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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욕망이란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하는 행동이나 마음을 말합니다. ‘~ 무엇을 하고 싶다’라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미국의 작가 나폴레온 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욕망이 있다면 이룰 수 있는 능력도 있는 것이다. 욕망이 없다면 능력이 없는 것이다. 능력은 욕망과 함께 온다.” 제 형님이 은퇴 후에 요즘 그림을 계속 그립니다. 그리고 그린 그림을 가족 SNS에 계속 올리십니다. 점점 더 실력이 늘고 있다는 것을 그림을 잘 모르는 저도 알 수 있겠더군요. 그래서 형님이 그린 멋진 그림을 보며 “우와~~”라고 감탄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그림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에게는 그림에 관한 관심 자체가 없어서 욕망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능력도 생기지 않습니다. 제 형은 한 번도 그림 그리는 것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잘 그리고 싶다’라는 욕망을 가지면서, 여기에 본인의 능력도 추가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하고 싶다’라는 욕망은 능력도 함께 오도록 합니다. 에베레스트산 정상을 최초로 등정했던 에드먼드 힐러리 경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는 에베레스트산을 어떻게 올라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곳에 가고 싶다’라는 욕망이 계속 커졌던 것입니다. 이 욕망에 본인의 능력이 더해져서 최초로 정상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고 싶다’라는 욕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본인의 능력이 더해져서 더 큰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마태 28,19)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한 일이 있었습니다.(마태 10,5; 루카 10,1 이하) 그러나 이때는 일종의 실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길 잃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찾아가라고 하셨고,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혹독한 체험을 위해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명령하신 뒤에 파견하셨습니다. 이번 파견은 그때와 완전히 다릅니다. 이제 결정적이고 본격적인 파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전교는 주님의 직접적인 명령으로 반드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교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세상의 반대를 받아 때로는 박해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교할 수 없는 이유를 계속 만들어냅니다. ‘전교하고 싶다’라는 욕망 자체를 없애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뜻을 실행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키워야 합니다. 그에 따른 능력도 생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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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는 모두 주님의 '선교사'이다>
-사랑, 꿈, 제자, 선교사-
오늘은 제96차 전교주일이며 우리는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미사를 봉헌합니다. 교회는 1926년부터 해마다 10월 셋째 주일을 전교주일로 정해 그리스도인의 선교 사명을 일깨우면서 전교 지역을 돕는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담화문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라 하며 다음과 같이 강조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선교사’로서 가장 먼저 파견되신 분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성실한 증인이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교사가 되고 증인이 되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인 교회는 그리스도를 증언하여 온 세상에 복음을 알려야 하는 사명 외에는 다른 어떤 사명도 없습니다.
복음화하는 일이 바로 교회의 정체성입니다.ㅈ그러니 세례 받은 이는 저마다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선교 사명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결국 사명은 각자 개인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교회 공동체와 이루는 친교 안에서 언제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선교는 교회의 존재이유입니다. 선교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요 이미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선교하는 교회, 바로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선교적이어야 하며 교회에 속한 우리들은 모두 선교사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안으로는 수도승이요 밖으로는 선교사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주님의 선교사로서 훌륭한 삶을 살 수 있겠는지 그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사랑의 선교사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교회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교회를, 이웃을 사랑합니다. 선교사로서 우선적 자질이 사랑입니다. 갈림없는 마음, 한결같은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고백입니다. 사랑의 고백입니다. 성서의 언어는 대부분 고백의 언어입니다.ㅈ주님께 대한 믿음의 고백, 희망의 고백, 사랑의 고백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에 대한 가르침이 고맙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언젠가의 구원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께 사랑을, 믿음을 고백할 때 구원의 체험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은 더욱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 마음에 당신 사랑의 성령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둘째, 꿈의 선교사로 사는 것입니다. 꿈이 있을 때 선교 열정도 샘솟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우리 선교사에게 우선적인 것이 꿈이자 희망이자 비전입니다.
성서와 교회의 모든 성인들의 꿈의 사람, 희망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는 하느님의 나라가 영원한 살아있는 꿈이었습니다. 꿈이 있어야 쉽게 좌절하지 않습니다. 꿈이, 희망이 있어야 끝까지 기다릴 수 있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다시 힘차게 일어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꿈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꿈, 영원한 평화의 꿈이요 언젠가 실현될 꿈입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사야의 꿈은 먼 훗날 오늘 지금 여기서 우리를 통해 그대로 실현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영원한 현재 진행형으로 실현되는 하늘나라의 꿈입니다. 이사야의 꿈은, 바로 하느님의 꿈, 평화의 꿈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오늘날도 여전히 회자되는 평화의 꿈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 고백합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평화의 꿈은 바로 하느님의 꿈이자 예수님의 꿈이요, 교회의 꿈이자 우리의 꿈입니다.ㅈ그러나 작금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예나 이제나 영원히 계속되는 전쟁입니다.ㅈ요즘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평생 애써온 어는 정치가의 자서전을 구입해 읽고 있는데 책 제목이 “다시, 평화”입니다. 남북이, 미중소일 사강이 첨예하게 대치對峙하고 있는 한반도에서 평화가 참으로 절박한 시점입니다.
우리는 모두 영적 야곱의 집안입니다. 그러니 평화의 꿈이 실현되도록 하루하루 노력하면서 평화의 일꾼, 평화의 전사, 평화의 선교사가 되어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도록 합시다.
셋째, 제자답게 사는 것입니다.ㅈ우리 그리스도인은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요 밖으로는 주님의 선교사입니다. 선교의 활동이전에 관상의 친교가 우선입니다. 관상의 친교를 통해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이자 스승이요 영원한 도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하느님 공부, 예수님 공부는 평생 필수 공부입니다. 늘 기도하고 말씀을 공부하고 실천하여 주님과의 관계를 날로 깊이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제자로서 믿어야 받들어 부를 수 있고, 들어야 믿을 수 있고, 이렇게 스승인 주님께 믿고 듣고 배워야 선교사로 파견되어 진리를 선포할 수 있으니 선교에 앞서 제자로서 끊임없는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관상적 친교와 공부 수행이 우선임을 깨닫습니다.
넷째, 선교사답게 사는 것입니다.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 밖으로는 주님의 선교사입니다. 선교사명은 우리의 기본적 사명이요 존재이유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 내 삶 자체가 선교이며, 내 삶의 자리가 복음화의 자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선교사로 파견하며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여라.”
우리 주변의 모두가 복음 선포의 대상이요 궁극에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교황님의 담화문중 다음 내용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우리 제자들은 개종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파견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개종시키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러한 선교적 확장을 말하고, 주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부르심에 충실하여 밖으로 나가는 교회의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선교사, 바로 우리의 신원입니다. 과연 주님을 잘 드러내는 선교사로서의 삶인지 자문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닮을수록 선교 사명은 잘 이뤄질 수 있겠습니다. 이사야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순수와 열정의 선교사들보다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참으로 우리 선교사로서의 삶이 그리스도의 말씀이 육화된 삶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겠는지요.
우리는 모두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입니다. 주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하는 제자이자 선교사입니다. 끊임없이 관상적 친교와 공부로 주님과의 우정을 깊이하는 주님의 제자요, 주님의 현존이 되어 끊임없이 참 좋으신 주님을 증언하는 선교사입니다. 또 예수님처럼 하늘나라의 꿈, 평화의 꿈을 끊임없이 실현시켜 나가는 주님의 꿈쟁이 선교사들입니다.
이런 하늘나라의 꿈과 희망, 평화의 꿈과 희망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열정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의 제자이자 선교사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무엇보다 평생 늘 함께 하시겠다는 임마누엘, 주님의 다음 약속 말씀보다 더 큰 결정적 도움은 없습니다. 언제나 마음에 담고 사시기 바랍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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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마태28,19)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복음화!>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가 드려지는 날'입니다. 교회는 오늘 지구촌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기억하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헌금은 전액 교황청 전교회로 보내져서 전교지역의 교회를 위해 쓰여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마태28,16-20)은 '마태오 복음의 끝 말씀'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을 복음화하라는 선교사명'입니다. 이 선교사명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부여하신 사명이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만 하는 '절대사명'입니다.
'세상 복음화의 첫 단계, 그 시작'은 '나 자신의 복음화'이고, 나 자신의 복음화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복음화가 되지 않았는데, 내가 복음 때문에 그리고 복음이신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지 않는데, 어떻게 너에게 복음이 되라고, 성당에 나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그리고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다.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로마10,14-15)
'복음화'는 내가 먼저 믿고, 내가 먼저 기뻐하고,
이 믿음과 기쁨을 '말과 행동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전교주일을 맞아 한번 각자의 모습을 잘 성찰해 보고,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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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1wzcz4QG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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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마태 28, 19)
가장 예수님다운
삶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모든 민족들에게
들어오신
예수님의
삶이 바로
복음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삶은 만남이며
삶은 생활입니다.
함께 생활하시는
예수님의 삶을
만납니다.
전교는 만남이며
전교는 생활입니다.
소극적이고
이기적인 삶에서
벗어나
복음의 기쁨을
우리가 먼저
나누는 것입니다.
나눔은 봉사이며
봉사는 전교로
이어집니다.
하느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들
삶 자제가
봉사와 나눔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듯
삶의 현장에
가까워지는 삶이
생활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
복음의 삶입니다.
뜨거운 마음과
따뜻한 손길
친절한 말 한마디가
전교의 핵심입니다.
생활 안에서
복음의 기쁨을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전교입니다.
먼저
우리 앞에 있는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것이 복음의
배려임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전교는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배려와 존중으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실천입니다.
그 실천의 중심에
계시는 예수님의
생활입니다.
생활의 실천이
복음이며
전교입니다.
새로운 실천
새로워지는
생활이 필요한
복음의
시간입니다.
복음을
우리의 삶으로
기쁘게
응답하는
배려의 주일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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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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