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 고려에 설경성薛景成이란 의원이 있었다. '키가 크고 풍채가 멋졌다'는 외모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경주 사람으로 스스로를 신라의 대학자 설총의 후손이라 하였고, 대대로 의술을 가업으로 삼았다고 한다.
고려 고종 또는 원종 재위 기간에 조선의 내의원에 해당하는 '상약국'에 정9품 의좌로 들어가 왕실과 조정 일원의 건강을 돌본 것으로 보인다.
: 설경성의 의술은 조정과 왕실도 인정할 만큼 실력이 상당하였는지 벼슬이 오르고 올라 종2품에 다다랐고, 충렬왕은 병이 있을 때마다 그를 불러 치료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왕실 주치의로 봉직하며 의원으로써 오를 수 있는 벼슬의 정점에 오른 설경성은 당시로써는 노인이라 할 수 있는 나이 50에 가까워지자 벼슬에서 물러났다.
: 그런 설경성의 은퇴를 막아선 이가 있었으니, 쿠빌라이 칸의 황녀인 쿠틀룩켈미쉬였다. 당시 쿠틀룩켈미쉬는 고려의 충렬왕에게 시집와 고려국 왕비로 지낸지 십여 년째였다.
혼인 이듬해에 충렬왕의 아들 왕원 이지르부카를 낳았지만 충렬왕의 후궁들과 사이가 좋지 못하여 결과적으론 충렬왕과의 관계도 썩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 이런 상황에서 몽골의 대칸이자 원나라 황제였던 쿠빌라이 칸이 칠순의 나이에 몸져눕고 영 차도가 없었는지 고려에까지 사신을 보내어 명의를 수소문하였다.
그러자 쿠틀룩켈미쉬는 아버지의 병구완을 위해 설경성으로 하여금 원나라 황궁에 가도록 하였다.
: 원나라 조정은 황녀가 보내온 고려의 의원에게 황제이자 대칸인 쿠빌라이 칸의 시료를 맡기었다. 설경성의 치료는 그 효험이 있었고, 칸은 저승 문턱에서 다시 이승으로 돌아왔다.
건강을 회복한 쿠빌라이 칸은 설경성에게 원나라 대도에 있는 집을 내리고, 주거비도 지원하였다. 이에 더해 수시로 진료를 올 수 있도록 황궁 출입증을 주었다.
: 그렇게 설경성은 두 해 동안 원나라에 머물면서 황궁을 드나들며 지냈다. 설경성은 바둑도 곧잘 두었는지 쿠빌라이 칸은 주치의의 바둑 대국을 몸소 행차하여 구경하기도 하였다.
원나라에서 이렇듯 호사를 누리고 있다가도 고려에 남은 가족 생각이 났던 설경성은 쿠빌라이 칸에게 귀국 의사를 밝혔다.
: 쿠빌라이 칸은 설경성의 공로에 대한 상을 후하게 내리며, 가족들도 모두 원나라 대도로 데려오라 한다.
고려에 귀국한 설경성은 부인에게 원나라로 가길 권유하였지만, 부인은 고려에서 살길 바랐고 결국 설경성 또한 고려에 남게 되었다.
: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설경성의 소식을 기다리던 쿠빌라이 칸은 고려로 사람을 보내 설경성을 다시 원나라 대도로 데려오도록 하였다.
설경성은 결국 고려와 원을 수차례 오가며 진료하였고, 쿠빌라이 칸은 설경성을 후대하여 수시로 물품을 하사하니 그 목록을 다 기록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한다.
: 쿠빌라이 칸의 뒤를 이어 원의 황제가 된 성종 테무르 역시 설경성에게 진맥받길 원하여 결국 설경성은 다시 원나라에 머물게 된다. 그렇게 설경성은 원 황가의 조손이 모두 신뢰하는 사람이 되었다.
: 원에서의 인맥과 명성에도 설경성은 고려에서 거들먹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인맥을 통하려는 고려의 권력자들과 엮이는 것을 피했다고 한다. 설경성은 말년에 다시 고려로 돌아왔고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 여담
: 설경성의 손녀는 고려 시조 '이화에 월백하고'로 유명한 이조년의 아들과 혼인하여 자식을 여럿 두었는데..
그 여럿 중 한 명은 공민왕 대의 강직한 신하 이인복이었고, 또 한 명은 고려말 최고의 권신이었던 이인임이었다.
첫댓글 이런글 재밋어요
감사합니다 ~
고려왕정도 치료했나했는데 쿠빌라이칸을 ㄷㄷㄷ
잼난 내용이네요...
역사 좋아하는데 감사합니다...
엄청난 실력자였네요
역사 지식 배워갑니다
와
이런분이 있었군요
이거 보니 갑자기 광종 때의 쌍기가 생각나네요.
쌍기는 기록이 부실한것도 감안해야겠지만 광종에서 끝나버렸는데 설경성은 원 황제 2대까지는 간게 놀랍네요.
이인복,이인임 모친이 설씨이긴 하던데 가능성 없지는 않을듯요.
이와 비슷하게 오윤부도 원나라에서 인정받은 천문학자로 이름이 높았음 찾아보면 월클급 고려 인재들이 대개 이 시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