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져가던 판소리 다시 불지핀 ‘참 소리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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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동진 명창이 생전에 판소리
무대에서 소리를 하고 있는 모습.
박동진 명창은‘완창 판소리’를
최초로 시도, 꺼져가던 판소리를
다시 일으켜 세운 선구자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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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의 거목이 갔다. 8일 별세한 박동진(朴東鎭) 명창은 걸쭉한 해학과 입담으로 한 시대를 휘어잡은 국악계의 별이었다. 1998년 담낭
제거 수술을 받고도 국립국악원(원로사범실)에 늘 새벽같이 출근해
후진들에 귀감이 되더니 “충남 공주에 마련한 판소리전수회관에서
별세 전날에도 북을 잡고 소리를 놓지 않은”(제자 김양숙) 참 소리꾼이었다.
박 명창은 지금은 일상적 무대로 자리잡은 ‘완창 판소리’를 최초로
시도, 꺼져가던 판소리를 다시 불지핀 선구자라고 국악인들은 입을
모은다. 박 명창은 68년 국립국악원에서 5시간에 걸쳐 완창한 ‘흥보가’를 시작으로 이듬해 ‘춘향가’, 70년 ‘심청가’, 72년 ‘수궁가’ 등 판소리 다섯마당을 차례로 완창했다. 중간에 날계란 두어개
깨먹고 쉬지 않고 소리를 이어가는 완창 판소리는 말 그대로 초인적
무대. 20~30분짜리 토막소리 판치던 당시만 해도 획기적이어서, ‘미국의 소리’ 방송이 공연을 중계하고 ‘한국전통음악계의 특이한
사건’으로 보도했다. 그의 소리는 6시간을 앉아서 들어도 지루하지
않아 판소리가 재미있는 예술장르임을 인식시켰고, 수많은 명창들이
완창에 도전하는 계기가 됐다.
박 명창은 판소리의 사설을 자유자재로 비틀고 바꾸면서 청중을 울리고 웃겼다. 그의 소리에는 ‘봄날 꽃바람 같고 늦가을 솔바람 같으며
한여름 소낙비 같은’ 아우라가 감쌌다. 전통 소리에만 그치지 않고
창작 판소리에도 힘을 쏟아 ‘예수전’ ‘이순신전’ ‘팔려간 요셉’을 작창했다. 한번 읽거나 들으면 쉽게 잊어버리지 않는 기억력, 타고난 소리감각 덕분이었다. 박 명창은 늘 “내 머릿속에는 180여시간
분의 판소리가 입력돼 있고, 이를 잊지 않으려 늘 연습하고 되뇐다”고 말했다.
박 명창의 구수한 목소리로 방송광고를 탄 ‘제비몰러 나간다’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는 아이들조차 입에 달고 다닐 정도로 전통의 소중함을 일깨운 ‘국민 멘트’였다. 소리판의 음담패설은 삶 속에 그대로 진을 박아 거침없는 육담(肉談)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TV
오락프로그램에도 자주 나와 “국악은 정신으로 하는 것” “먹는 것은 양놈 것, 노래 반주는 일본 가라오케니, 우리 것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꾸짖곤 했다.
박 명창은 1916년 7월 12일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대전중학교에
다니던 16세 때 이화중선·이동백·장판개 명창이 협률사에서 공연하는 것을 보고 소리꾼이 되기로 작정했다. 군청서기를 하면 호강할
텐데 뭣하러 광대가 되려 하느냐는 부모님의 불호령을 듣고 무단 가출, 당대 명창을 찾아 전국을 떠돌았다. 추운 겨울날 쌀 서 말을 지고
몇십리를 걸어 찾아간 박동진에게 정정렬은 ‘제자가 많아 받아줄 수
없다’며 퇴짜를 놓았다. 목에서 피를 쏟고 오물을 들이키는 고생 끝에 김창진·정정렬·유성준·조학진·박지홍에게서 판소리 다섯마당을 익혔다. 1933년 ‘춘향가’로 서울 동양극장 무대에 올랐고, 조선음악단·조향창극단에서 활약했다.
박동진이 본격 명창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62년 국립국악원에 들어가면서부터다. 당시 국악원 원장이 ‘국악원은 공부하면서 월급 타는 곳’이라고 한 말에 감동받아 매일 새벽에 출근, 득음을 위한 훈련에 매달렸다. 1967년 국립창극단에 입단, 1973년 ‘적벽가’로 인간문화재가 됐다. 생활은 검소했으며, 술·담배를 하지 않고, 누구든지
청하면 달려가 소리를 들려주었다. 오랜 세월 박 명창과 호흡을 맞춘
고수 김청만씨는 “박 명창만큼 왕성하게 국악 대중화에 기여한 분은
없었다”며 “우리 시대 최고 명창, 큰 별이 떨어졌다”고 애도했다.
유족으로 인철(현대자동차 미국법인 근무) 인수(현대해상화재보험 이사) 인석(평산공업 개발부장)씨 등 3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