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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산아동문학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문홍
〚부산아동문학의 맥〛② 동화작가 김상남 선생님
아동소설의 달인(達人)
대담 : 동화작가 김 문 홍
‘소로마’(솔마)는 동화작가 김상남 선생의 아호이다. 고향인 남해 바닷가의 소나무에 부는 남풍(마파람)을 뜻한다. 문학적 감수성의 싹을 틔워 주고 유년 시절의 상상력을 키워 준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때문에 그렇게 지었을 것이다. 동화작가 김상남 선생은 부산 문단에서 ‘걸어 다니는 문학 사전’으로 통한다. 아동문학가이건 일반문학자이건 그 사람의 이름만 대면 등단 연도와 경로, 그리고 그 사람의 문학적 업적과 교우 관계를 환히 꿰고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별호이다. 이는 시인과 작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대담자가 알고 있기로는 김상남 선생은 아동소설(소년소설)의 달인에 해당될 만큼 아동소설의 창작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능과 상상력, 그리고 창작의 노하우를 지니고 있다. 이는 아마 아동문학 분야에 등단하기 전부터 소설 창작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합당한 근거가 될 것이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분에서 ‘출토기(出土記)’가 당선된 경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근거 자료가 된다. 그런데 이처럼 탁월한 문학적 자산이 풍부한 선생이 요즈음 작품을 잘 쓰지 않고 있어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동화작가 김상남 선생을 만나 진솔한 속내와 문학적 발자취를 알아보고자 한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십니까?
김문홍 안녕하십니까? 저는 우리 아동문학의 모임에 나가면 꼭 김 선생님이 나
오셨는가를 확인합니다. 모습이 보이면 안도의 한숨을 쉬고, 모습이 보 이지 않으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하고 나름대로 상상을 해 봅니다. 그만큼 선생님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것은 선생님의 문학적 재능과 상상력을 인정하고 아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서울의 전 국적 모임에 참석했을 때에도 1970년대에 함께 문학 활동을 했던 시인 과 작가들이 김 선생님의 안부와 근황을 자주 묻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근황을 들려주고, 말 끝머리엔 꼭 “참 능력 있는 작가인데 요즘 글 을 쓰지 않아 안타깝습니다.”라고 푸념을 하곤 합니다. 요즈음 글은 쓰고 계십니까, 아니면 글을 통 쓰지 않으시는지요? 글을 쓰지 않는다면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김상남 ‘아동소설의 달인’이라는 말씀이 가히 싫지는 않으나 과찬입니다. 그 방면에 안달 난 사람 쯤으로 여겨도 만족스럽습니다. 한때는 필명을 ‘안달생’으로 할까 보다 했지만, 사실 덴마크의 ‘안데르센’ 작품을 잘 알지 못해 포기했습니다. 또한 아류를 자처하는 것도 못마땅했습니다. 자주 들리는 노인 회관 길목에서 ‘구두 수선의 달인’이라는 종이 팻말이 너무 감동적이어서 그 꾀죄죄한 신기료장이를 한참이나 보았습니다. 아동문학계의 나의 위상이 겹쳐져 많이 우울했습니다. 닳아빠진 구두 뒷굽을 갈고 있는 그 신기료장이가, 마치 200자 원고지를 메꾸어도 동화가 안 되어 쓰레기통에 버리는 나보다는 휠씬 낫다 싶었습니다. 사흘이 멀다 하고 새 신으로 바꿔 신는 세태에 오래도록 두고 신는 ‘꼬까신’을 어찌 한 번 만들어 볼 수 없을까 하고 늘 밤잠을 설칩니다.
하원(夏苑) 김박사께서 저에게 쏟는 관심의 반에 반도 못 갖는 저의 무심함이 때로는 자괴감을 넘어 채찍으로 저를 압박하기도 합니다. 짚어주신대로 통 글을 쓰지 않습니다. 쓰지 않는다기보다 못 쓴다는 표현이 맞겠습니다. 물통의 빈 자리는 다른 물로 채워지더군요. 글을 못 쓰니까 관심이 다른 데로 쏠리더군요.
친구 중에는 퇴직 후에 사군자를 쳐서 국전에도 뽑히고, 해외여행기도 펴낸 친구가 있고, 무슨 국민운동 본부장도 하길래, 나도 ‘거름 지고 장에 간다’는 격이지만 글쓰기보다 다른 방면을 해볼까 기웃거리기도 했습니다. 해볼 만한 일이 수두룩하더군요. 그 중엔 경매(競賣)에 관여하는 매우 세속적인 것도 있지만, 역시 정신적인 고통을 수반하는 창작 활동이라야 수지타산을 넘어 만족감이 드는데, 그 만족도가 너무 크면 좌절감도 비례합니다. 글을 못 쓰는 까닭도 너무 기대치를 임계점보다 높게 설정했기에 도달이란 애초 불가능이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나름대로 성찰하는 과정에 있다고 여겨 주십시오.
<김상남 선생님의 침소 겸 서재는 항상 글 쓸 채비를 갖추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문홍 요즈음 일과가 어떤지 참 궁금합니다. 과문한 탓인진 잘 모르겠지만 김 선생님의 아동문학 쪽의 교우 관계는 동시인인 최만조 선생님, 그리고 동화작가인 강기홍 선생님과 가끔 만나 문학을 얘기하면서 술자리를 갖 고 있을 거리는 정도입니다. 아니면 남구문학회를 비롯한 부산문인협회 쪽 사람들과 자주 만나고 계실 거리는 추측일 뿐입니다. 선생님 연세가 이제 80을 바라보는 나이입니다. 이런 나이가 되면 주체하기 어려울 종 정도로 시간이 버거울지도 모릅니다. 즉, 젊은 나이가 되면 시간이 모자 라 버거운데, 선생님 나이가 되면 일과를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는가가 큰 화두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 일과를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합 니다.
김상남 어느 날, 도시철도 2호선을 타려던 버스에서 김박사의 제씨와 조우했는데, 너무 반가워 환담하다가 실물(失物)을 했습니다. 고석(故石) 김천기 수필가가 공력을 들여 내게 선물한 물푸레나무 등산용 지팡이였습니다. 혹시나 싶어 버스 회사에까지 찾아갔지만 허탕이었습니다.
오래전부터 꼭 한 가지를 빠트리고 외출해서 당황하는 일이 잦습니다. 그래서 비방(秘方)으로 내 나름의 주문을 만들어 꼭 중얼거리며 챙깁니다. ‘도전열지수문안’...이렇게 주문을 외는데 이것은 ‘도민증, 전화기, 열쇠, 지갑, 수첩, 문서, 안경’의 첫 글자를 딴 것이지요.
낙동강 하구에 가면 수문이 있는데 그 수문으로 잠수해 열어야 한다는 말이지만, 바깥나들이를 할 적마다 마치 ‘우리의 맹서’ 같이 암숭하곤 합니다. 구민등록증 있어야 우대권 받고, 게이트 자물쇠가 보급되기 전에 열쇠 없이는 집안에 못 들어 갔지요. 지금은 열쇠 아닌 ‘틀니’(번호자물쇠)로 바꾸었습니다.
운정(芸亭) 강기홍, 갈뫼 최만조 님과는 자주 만납니다만, 문설주 저 너머가 바로 저승이라는 생각으로 밖을 나가니 항시 ‘경계와 도전’이라는 나의 태도로 아주 포용적이고 부드러운 두 분에게는 조화가 잘 되지 않아 고심 중입니다.
김문홍 저도 올해 칠순을 맞이했습니다. 이 나이가 되니 자꾸 초조한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열두어 권의 장편동화와 단편동화집을 상재했습니 다만, 후세에 길이 남을 만한 작품은 없는 것 같아 앞으로 남은 시간 에 미래의 독자들에게 회자될만한 장편동화 한두 권과 단편동화집 한 권 정도 남겨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학적 감수성이 낡고 녹슬기 않기 위해서라도 계속 좋은 작품을 읽고 쓰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습니다. 김 선생님께서도 그동안 첫 장편동 화『봄부터 걸린 고뿔』(1983, 제일문화사)을 비롯하여 예닐곱 권의 작품집을 상재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요즈음 어떤 작품을 쓰고 있거나, 아니면 계획하고 있는 작품이 있는지요? 그것도 아니라면 좋은 작품을 남겨야 하겠다는 어떤 각오 같은 건 없는지요?
김상남 <작가 인터뷰>에 ‘앞으로 할 일이 있다면?’하고 물으면 꼭 명작이나 대작을 한 편 쓰겠노라고 하는데, 참 공허하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더군요. 작가로서는 당연한 말이지만 작가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 중의 하나가 경천동지할 창작품 탄생입니다. 독자들의 선호도에 달렸고, 무엇보다도 시대정신과 부합하고 향기가 영원성을 지닐 만큼 강력해야 합니다.
수영강가에 살 적인데 꼼짝도 않는 거북을 만났습니다. 밀물에 떠밀려 왔다가는 돌아가지 못한 미아였습니다. 해운대 ‘아쿠아리움’에서 다친 거북을 치료해 방생할 적에 글감을 삼으려고 갔는데, 용왕제가 아닌 환송식이었습니다. 중국 하이난(海에南島)에 갔을 적에도 이 거북이가 생각이 많이 났지요. 「잘 살제? 은북아」라는 제목을 정해 놓고도 줄거리를 짜는데 파탄이 많았고, 표지 구성에 문장부호를 어찌 처리하나를 두고도 자문을 구해야 할 판입니다. 제목에는 문장부호를 안 넣어야함을 원칙으로 아는데, 요즈음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저는 그만큼 시대에 뒤떨어져 있어 내용도 그렇고, 그렇다면 일찌감치 걷어 치우는 게 낫지 않나 고심 중입니다.
<인터뷰 내내 김상남 선생님은 꾸밈이 없고 있는 그대로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김문홍 김 선생님께서는 1970년대 중반에 문단에 데뷔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40년이 넘게 흘렀습니다. 선생님이 생각하기엔 등단할 무렵 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작품의 소재나 주제, 인물의 형상화를 비롯한 창작 방법, 특히 문체에 있어서 큰 차이가 날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니 면 그때니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는지요? 제가 생각하기엔 김 선생님 의 나이나 지금 젊은 작가들의 작품 세계에 있어서는 작품의 소재나 주제, 그리고 문체에서 큰 차이가 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 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전략은 있 는지요?
김상남 말과 글은 일란성 쌍생아입니다. 전달매체가 다를 뿐입니다. 능변인데도 문장이 유치하다든지, 시인인데도 눌변인 경우와 맞닥뜨리면 갸웃거려집니다. 하지만 일관된 주제나 요지(要旨)에 감탄합니다.
저의 말을 듣는 자가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간단하게 해라 하기에, 아, 또 횡설수설했구나 하고 자탄한 적이 여러 번입니다. 회의에서 내가 제의한 아이디어가 채택되어도 떨떠름한 적이 있는데 친구가 충고한 말은 이렇습니다.
“도무지 못 알아듣겠다. 술 마시고 얘기하지 말라.”
교토삼굴(狡兎三窟)은 한참 뒤 알게 됐는데, 나의 글이나 말에서 뒷 뜻을 감추고 하는 말이 많아 언제나 진정성이 없다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창작이다 보니 지어내어야 하고 거짓이 끼어들기 마련인데, 그 기법이 수준이하여서 설득력이 태부족이라 하겠습니다. 동화창작에도 이 점을 중시해서 개선하려는데 쉽니 않네요.
문학적 발자취가 궁금합니다
김문홍 김 선생님께서는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단 등단은 초등학교 교사 재직 시절에 이루어진 걸로 알고 있지만, 문학 적 활동은 대학 때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아니면 훨씬 그 이전부터일 수도 있을 겁니다. 문학을 알게 되고 글을 쓰는 일을 업 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언제부터였는지요? 고등학교 시절부 터 대학 졸업 무렵까지의 문학 활동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당 시의 문학적 교우 관계도 함께 들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기론 당시 고등학교 문청들의 선망이었던 <학원> 잡지에 투고했거 나 ‘학원문학상’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상남 진주에서 학교 다녔지만 문단 생활은 거의 부산이었습니다. 스스로 ‘이주민’이었음을 표방하고, 경계심으로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려 하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소위 기득권 세력의 횡포도 만만찮았습니다. ‘남강문우회(南江文友會)’를 결성하는데 열정을 쏟은 것도 스스로 탈출구를 찾는 몸부림이었고, 가장 성공했다고 자부합니다. 전국 회원이 300명에 이르고 금년에 회지가 6집이 나오고, 경남에서 가장 많은 액수의 지원금도 보내 줍니다.
저는 바로 앞이 바다인 남해 ‘송남 해수욕장’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네 살 때였던가 큰 상선이 식수를 받으려고 바다 한가운데에 정박했는데, 그 배에 가면 흰 쌀밥을 실컷 먹는다기에 헤엄을 못 쳐 널판때기에 뱃바닥을 대고 겨우 갔지만 곧 배는 부산으로 간다며, 우리가 모두 헤엄 고수로 여겼는지 퇴선 명령을 내리기에 퐁당퐁당 바다로 뛰어 내렸는데, 널판때기를 잃어 개구리 헤엄으로 겨우 모래밭까지 도착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나는 통에 금산(錦山)이 가까운 외가에서 꼴머슴을 오래 했습니다. 그래서 <학원>지에 처음 활자화 된 글이「산딸기 익는 마을」이고, 학원문학상을 받은 글은「산포도」입니다. 바닷가에서 자랐는데도 ‘산(山)’ 돌림자 든 제목을 쓴 까닭은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 바다에 대한 무의식적 거부감이 일었고. 금산이라는 심상(心象)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다 보니 웬지 내 글의 제목에는 이런 무의도의 도식(圖式)이 작용되더군요. 소년중앙 당선작인 소년소설 제목은「비둘기」였고, 조선일보 소설 당선작은「출토기(出土記)」였습니다. 김동리 선생의 ‘황토기’가 있어 떨떠름하기는 했지만 ‘기(記)’ 항렬에 굉장히 집착했습니다.
어느 이력에 <학원>지에 처음 글이 실렸던 1953년을 데뷔 연도로 해 비웃음을 받은 적도 있으나, 의도는 그 때부터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다는 뜻이 강했습니다. 교신(交信)하고 술자리 같이 했던 문우들은 예술원회원도 있고 모두 ‘대가’ 소리를 듣는데 그들을 지금 거명하면 제가 호가호위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접겠습니다. 새삼 저의 문학 업적이 한미(寒微)함을 자탄합니다.
<대담자는 1976년 문단 등단부터 지금까지 거의 40여 년 동안 김상남 선생님과 교류해 왓다.>
김문홍 이번에는 문단 등단 무렵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1970년대 중반에 중앙일보사에서 발행하던《소년중앙》문학상에서 동 화가 당선되면서 등단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광복 30 주년 기념 현상공모에서 장편 아동소설『꽃댕기』가 당선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소년중앙문학상 당선 작품과 광복 30주년 기념 현상공모 당 선작품에 대해서 좀 자세하게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 때가 아마 교직에 몸담고 계실 때였지요? 그리고 등단 당시의 에피소드 같은 재 미있는 얘깃거리도 궁금합니다.
김상남 『꽃댕기』당선통지서가 문공부로 되돌아가자 호구조사를 해서 겨우 필명 ‘김어진’(아내의 이름)의 남편이었던 저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고향에서 받으시고는 저에게 간단한 격려편지와 함께 보내셨는데, “문공부에 기고한 작품이 당선되었다. 더욱 면려하기 바란다. 부친”이라고 씌어 있더군요.
곧 문공부에 전화할 적 당선이냐, 가작이냐부터 물었습니다. 퇴근해 아내에게 알렸더니 딸아이들을 불러 울면서 “이제 너희들도 대학공부까지 할 수 있다. 아버지가 글 쓰면 된다.” 하던 말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교사 월급으로는 매우 힘든 살림살이였습니다. 기성, 신인 안 가리고 응모할 수 있기에 신인 당선은 과욕이고, 혹시나 예선에 오르면 부산아동문학회 회원으로 이미 기성 행세하고 있는 처지라 남새스럽다고 아내 이름으로 했고, 주소도 셋방살이하던 여동생 집이었던 연산동으로 했으니 작가를 찾느라 전국 수배령이 내렸던가 봅니다. 고향의 지서에서 김어진의 남편이 글쟁이라는데 혹시 알지 않을까 싶어 물었던 것이 적중했나 봅니다.
500장 가량이었는데 겨우 반쯤 쓰니 마감일이 다 돼 부산역 앞의 ‘여원 타자교실’에 갔습니다. 낙서와 다름없는 초고를 타자로 쳐 달라 주문하고 나머지 부분을 마무리 짓는데, 타자 강의를 맡은 원장님이 넘기는 쪽쪽 치길래 나중에는 메모지를 보며 구술(口述)을 했습니다. 당선되면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고 책도 출간해 준다는데 사실 초고가 아직도 내 머리 속에만 있고 오래 된 글이라 당선작 타자원고가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학원’ 잡지에 연재하다가 이 잡지의 폐간과 함께『꽃댕기』의 연재도 중단했습니다. 타자 친 작품을 들고 부산역으로 가다가 흥분한 나머지 광장에서 택시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걷다가 맞부딪쳤지만 툭툭 털고 운전수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봄비가 내렸는데 그만큼 기분이 좋았다 할까요. 마감 넘겼다고 안 받아주면 출판사에 팔아넘길 작정이었습니다. 문공부에서는 시골서 직접 갖고 오니 접수는 하는데 그냥 가라기에 접수증을 요구했습니다. 나중 떨어지면 출판사에 팔려 했는데 원고는 그뿐이어서 입니다. 어떻게 마무리했는가도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꽃댕기』상금으로 집도 장만했지만 그 집이 지금은 ‘체칠일안식교회’의 목사님이 삽니다. 아내가 저승에 가고 ‘꽃댕기’의 메모장도 2층에 불이 나면서 사라졌지만, 아직 동백꽃과 산호수 나무는 그대로 있는지 궁금합니다. 가보고 싶어도 웬지 울음이 터질 듯해서 한 번도 가지 못 했습니다.
김문홍 제가 선생님을 처음 만났던 때가 새롭습니다. 아마 제가 1976년에 ‘소년중앙문학상’에 아동소설「바닷가의 소년」이 당선되었을 무렵이었을 겁니다. 선생님께서 제게 축하한다고 전화해서 광복동 어딘가에서 처음 만나 술 한잔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2년 뒤인 충무초등학교에 저와 선생님이 함께 부임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 교우가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때 선생님이 제게 전화하셨던 건 단순한 축하라기보다는, 그때 선생님 역시 등단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서 무척 외로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불러내어 문학적 호연지기를 얘기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추측되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절 불러내었던 건 어떤 의도였습니까?
김상남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사자성어를 보면 스승과 제자가 서로 가르치고 배워 큰다는 뜻을 지녔는데, 인용이 부적절하지만 혼자로는 도무지 문학이라는 엄청난 과제를 풀어내기가 벅찼습니다. 어떤 우상이나 멘토가 저에게는 절실했습니다. 용호초등에 근무하는 교사가 ‘월간문학’에 당선되었다는 기사를 읽고서인데, 이런 분과 교류하면 저의 문학적 역량이 확장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같은 직종이어서 설사 방향이 다를지라도 동위원소가 같으면 덧칠이 되리라 확신이 섰습니다.
앞서 문단 활동을 하시는 분이 같은 고장에 몇 분 계셨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낯선 길을 가면서 동행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활력이 넘치겠는가?
<김상남 선생님은 비교적 과작의 작가로 장편동화와 동화집 7권 정도를 상재했다.>
김문홍 저는 등단하자마자 선생님의 소개로 ‘부산아동문학회’ 회원으로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이듬해인 1977년인가 선생님과 저는 몇몇 문학 동지들과 더불어 부산아동문학회를 탈퇴하고 ‘부산아동문학가협회’를 따로 창립했을 것입니다. 최만조, 강기홍, 박원돈, 김재원, 이우철 등 몇몇 문우들과 아동문학의 프로페셔널을 주창하기 위해 탈퇴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한때의 치기였다고 생각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로는 문학적 서슬이 푸르렀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 무렵의 아동문학 양분 사태에 대한 진의와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것은 부산아동문학사에 있어서도 중요하고, 문학을 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지침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사정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김상남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말처럼 체질 개선을 하려면 조직도 새로워져야겠다는 염원이 구체화되었다고 봅니다. 간판부터 ‘문학회’라는 동호인이라는 인상을 벗고, 버젓이 ‘아동문학가’라는 전문성을 품자였는데 숫적으로 열세였고 반발이 대단했습니다. 고 심군식 목사님이 ‘부산아동문학회’ 회장이었고, 최장길 님이 사무국장있다고 기억되는데, 새로 만든 ‘부산아동문학가협회’를 구성할 적에 기성 문인이냐, 부산아동문학으로 자생한 작가도 영입하느냐로 구분한 행위가 큰 패착이었습니다. 그러니 기존의 주류와 비주류 간의 극한 대결로 치닫는 패거리 놀음이 되어 버렸고, 부산아동문학가협회는 모종의 사태로 백기를 들었습니다.
아동문학의 프로페셔널 주창과 아마츄어리즘을 불식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큰 성과입니다. 오늘날의 거대한 아동문학 단체가 그 존재가치를 발휘하는 저변에는 아동문학가협회라는 전문작가적 정신과 기량과 의지가 담겨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러한 기백을 지역 문단 전체를 겨냥해야 했는데, 그러지 않고 오직 아동문학의 내분을 자초한 경거망동에 후회막급입니다. 하지만 4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군림하는 자, 추종 세력은 사라지고 모두 함께 잘 하자는 기풍이 넘치고 있어 앞으로도 부산아동문학계는 전도양양합니다.
김문홍 두 단체로 양분되어 활동하게 되면서부터 1978년에 ‘필화사건’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과 제가 1978년에 충무초등학교에 함께 부임했던 1978년
3월이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부산아동문학가협회는 첫 동인지로『하얀 뱃고동』을 발간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실린 저의 동화「쫓겨난 여우」가 당시 여당이었던 공화당의 언론 탄압 정책을 비판했다는 투서가 부산시경찰국 정보과에 들어갔던 모양입니다. 저는 그날 수업 중에 경찰국에 불려가 하루 종일 조사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파면당할 위기에 처했지만 몇몇 문우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사정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김상남 누가 ‘칠팔삼’(1978. 3) 사태라 부르기에 새삼 떠올렸는데, 지금 그러한 일이 재연되었다고 가상한다면, 아주 불행한 일이 일어났으리라 여겨집니다.「쫓겨난 여우」가 ‘소년’ 지에서도 박홍근 선생님이 거부해 실리지 못 했는데, 부산아동문학가협회의 연간집『하얀 뱃고동』에 실은 것은 부산아동문학가협회 창립 배경과 일치되었다고 판단해서입니다.
당국에서는 약 보름간의 내사를 모두 끝내고 관계자를 한 사람씩 소환 조사중이었는데, 저는 발행인의 책무가 그렇게 막중한가를 처음 경험했습니다. 조사 책임자는 조성규 총경이었는데 시인이라서 시화전에 얼굴을 익힌 분이라 좀 봐 주리라 여길 만큼 저는 어리숙했습니다. 마침 출입구에서 오래 전에 안면을 튼 강상덕 경감을 만났는데, 이 분의 따님이 경남 어느 고등학교 수학선생 하는 사실을 알고 문안했더니, 아주 불편한 기색이어서 일이 꼬여 가는구나 여겼습니다. 정영태 시인이 동광초등 근처에서 부산에서 최초로 글짓기 학원을 개설했던 때라 정보 수집 차 들렸더니 아직 시판도 하지 않은『하얀 뱃고동』이 수십 권 쌓여 있고「쫓겨난 여우」작품이 접혀 있어 사건의 추이를 대강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한참 학생 데모로 정국이 어수선할 때인지라 격무에 쫓기는 수사관들이 아동문학지에 실린 작품을 어떻게 분석하겠나, 필시 내부에서 동화 께나 쓰는 사람의 밀고일 것이라고 정 시인이 시사하기에 가닥이 잡혔습니다. 그 무렵, 교사들의 비행으로 가장 조심한 일이 부독본 판매였는데 교육위원회에 자진 출두해 알아보니 ‘대공 혐의’ 였습니다. 헛다리 짚고 있다고 여겨 비상 대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칠팔삼’ 사태는 한때 휘몰아친 돌개바람으로 치부하고, 지금은 생각만 해도 부스럼 긁는 우행이라 여깁니다. 하원 김박사에게는 나의 무책임과 만용을 한없이 부끄러워 합니다.
<78년 3월 사태를 일으킨 동화 '쫓겨난 여우'가 실려 있었던 부산아동문학가협회 연간집>
김문홍 김 선생님께서는 70년대 후반에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분에서「출토기」라는 소설이 당선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이력으로 1980년대 초에 부산소설가협회가 창단되면서 저와 선생님은 창립 멤버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무렵에 소설과 동화를 함께 썼습니다만, 선생님께선 부산소설가협회에 적만 올려놓았을 뿐이지 작품 활동은 거의 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당선된 소설을 읽고 선생님의 소설창작에 대한 열의와 주제의식에 대해 감탄한 바가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런 좋은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왜 그 이후에 소설을 계속 쓰지 않았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왜 그동안 소설 창작을 하지 않았는지 저간의 사정을 알고 싶습니다.
김상남 소설쓰기의 환경이라고 말하면 내가 소설을 안 쓰는 행위를 마치 남의 탓으로 돌리는 못난이 짓이겠군요. 당시 김상남이 부산소설가협회 창립 산파역이었고, 회장 최해군, 사무국장 김상남이었다고 하면 믿을 사람이 없지만 사실은 사실이고 신문에도 났습니다.
그런데 소설가협회 여름 세미나 때 기념 페난트 협찬 일과 ‘도자기 전’할 적에 회원들이 마각(馬脚)을 드러내더군요. 이러한 사람들과 동고동락한다는 것이 더욱 나를 왜소하게 하리라는 자각이 들더군요. 또한 정비석 선생이나 박계주 선생 만큼 인기 소설을 쓸 재주가 없다고 간파해서입니다.
김문홍 선생님께서는 첫 장편 아동소설인『봄부터 걸린 고뿔』으,ㄹ 비롯하여 그동안 예닐 곱 권의 동화집을 상재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1970년대부터 함께 활동했던 작가들은 선생님이 재주는 있는데 게으름을 피우거나 문학적 열정이 식어서 그 이후로 전혀 작품집을 상재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등단 이후부터 지금까지 선생님께 내놓은 작품집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이참에 소상하게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상남 기획 출판은 아무 데서도 못 했습니다. 부산의 어느 출판사에서 한다는데 심사에 통과해야 한다고 해서 다시는 전화를 안 했습니다. 부산문예지원금 받아서 쬐금 낸 것까지 챙기면 여나문 권 됩니다. 저작권을 넘겼는지 안 넘겼는지도 모르는『흰구름 먹구름』은 장편이고, 작품집으로는『하느님, 2월에는 하루만 더 주세요』,『이사 가는 비둘기』,『보석이 열리는 콩나물』,『춤추는 과녁』,『잘가라 폭탄 갈매기』,『봄을 나르는 종이배 사세요』등입니다.
아동문학에 대한 영원한 화두
김문홍 흔히들 동화작가라고 하면 동화와 아동소설을 함께 쓰는 작가를 총칭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같은 동화작가라고 해도 동화에서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는 작가도 있고, 아동소설에 장기를 보이는 작가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선생님께서는 동화보다는 아동소설 쪽에 장기를 보이고 탁월한 능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두 분야 중 자신은 어느 쪽에 속한다고 보시는지요. 그렇다면 그 둘 중에 유독 그쪽에 탁월한 장기를 보이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상남 김박사의 추정에 동의합니다. 아동소설을 지향함에 장기(長技)라 할 것 없고 워낙 판타지에는 고도의 상상력과 서사력이 융합되어야 하는데, 그럴 능력이 없어 소설 쪽으로 기울어졌다고 봅니다. 그러니 소설보다 환상동화 쓰기가 더 어렵지요. 세계적 베스트셀러였던『해리포터』시리즈도 환상동화입니다. 동화의 큰 자산인 우리의 민담이나 설화도 아직 통독 못 했으니, 동화적 기량을 가지려면 그 다음에나 가능하겠는데 워낙 게을러서......
김문홍 선생님은 아동문학에 근 45년을 종사해 오셨는데, 선생님에게 있어서 아동문학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선생님께선 아동문학 분야에서 동화를 써 오고 계신데, 선생님에게 있어서 동화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김상남 동화는 고단백의 모유입니다. 영양소와 비교해서 한 말인데, ‘사랑’이라는 첨가물, 아니 주성분이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김박사의 ‘하원엽신’에서 문득 생각햇는데 ‘재미성’과 ‘교화성’이 병행해야 옳은 아동문학이 된다는 주장에 시사 받는 바가 큽니다. 나름대로는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하는 노랫말을 따사 일은 민화, 이는 천사로, 첫째는 만화만큼 재미나는 작품, 둘째는 천사같이 고운 마음씨가 담긴 글이 동화라 여기고, 그래야 봉(鳳)이 된다는 말입니다.
버스 안에서 백인 아이가 연신 쿡쿡 웃는데 스마트폰이 아니고 책이어서 아주 장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일핏 보니 만화책이더군요. 상업성이나 가벼움에 빠질 우려도 없지 않으나 재미가 없으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고, 교화성이 매몰되면 독서경진대회 지정본 아니면 아무도 찾지 않을 겁니다.
<광복 30주년 기념 문공부 주최 장편동화공모 장편소설 "꽃댕기" 수상 기념식장에서 사모님과 함께>
김문홍 선생님은 지금까지 수많은 동화와 소설을 써 오셨는데, 선생님은 어떤 과정으로 작품을 쓰시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소재를 선택하고 주제를 설정해서 한 편의 작품이 탄생하는데, 자신만의 창작 과정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은 한 편의 작품을 어떤 과정으로 쓰는지 자세하게 알고 싶습니다.
김상남 작법이 없는 게 작법이란 말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무작법이 바로 작법입니다. 독자적인 공법(工法)을 개발하라는 뜻 아닐까요. 대개가 그러하듯 동화 창작도 사회교육원이나 어디에서 배우는 공부가 아니고, 쓰지 않으면 못 배길 만큼 자기만의 내면 고찰에서 얻은 침전물입니다.
‘소설창작법’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마치 일품요리 제조 과정처럼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기까지가 잘 설명되었으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창작은 이 세상에 없는 물건을 하나 만든다는 생각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눈을 감고 가부좌하여 선(禪)을 한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느 날 벼락 치듯 생각나지도 않습니다. 어떤 사람의 얘기에 사물과 사상을 정확히 포착하려면 관찰, 통찰, 성찰의 단계에 이르러야 작품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단초(單初)는 아주 예사로운 면에 있습니다. 이를 확장시키는 것이 바로 집필 단계에 속할 것입니다.
김문홍 마파람이 불었다./ 뒤뜰 언덕배기의 아카시아숲이 간간이 일렁거렸다. 모빌처럼 매달린 주렁주렁 매달린 꽃타래도 출렁거렸다. 밥풀만한 흰 꽃잎은 차르르차르르 떨어졌다. 풋풋한 꽃향기가 교실까지 번져 들어 왔다./ 바로는 내처 거기에만 눈길을 꽂고 있었다. 아카시아숲에 좌악 널린 햇살로 눈이 부셔 이따금 실눈을 지으며 조는 듯 앉아 있었다.....(하략) 지금 소개한 인용문은 첫 장편 소년소설인『봄부터 걸린 고뿔』(1983)의 모두 부분입니다. 문장의 탄력적인 리듬이나 비유 등이 아주 실감나게 다가오는 부분입니다. 선생님은 동화나 소년소설 창작에 있어서 어느 부분에 중점을 두고 공을 들이는지 알고 싶습니다. 물론 다 중요하겠지만 선생님께서 특히 주안점을 두는 부분이 어느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김상남 워낙 오래 된 작품이어서 낯설더군요. 다시금 책을 꺼내 읽으니 “내가 쓴 작품이구나, 제법인데?”하고 감탄했습니다. 줄거리를 거의 까 먹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동아대학 공과대학에서 전산학을 익힌 박사 한 분이 나를 찾는데, 그 분이 바로 제자였습니다.『봄부터 걸린 고뿔』을 전자책으로 내고 싶다기에 “알아서 하라”고 하며 팔리겠느냐 물으니 줄거리가 썩 재미난다고 했습니다.
내 작품을 다시 읽으니 나는 문장이 아주 경쾌하고 묘사가 잘 되었다고 자만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어째 줄거리가 안 떠오를까. 아마 표현 쪽이 승하지 않나 여겨지더군요. 문체는 이제 바꿀 수도 없고 그대로 내 식을 고집할 수밖에 없는데, 하원 선생이 문장이 좋다니까 기분이 아주 유쾌합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중언부언해도 재미가 나야 하는데, 재미가 문장의 상관성이 좀 의아해서 줄거리 구성에 치중해야겠다고 여깁니다.
김문홍 선생님께서는 요즈음 젊은 작가들의 동화나 소설을 많이 읽고 계시는지요? 그렇다면 요즈음 동화작가들에게서 배울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또 그들의 작품은 선생님의 동화관에 비추어 볼 때 어떤 점이 못 마땅한지 알고 싶습니다.
김상남 신인들의 작품을 자주 대면해야 마치 수혈처럼 젊어질 터인데 그러지 못해 유감입니다. 아마 산수(傘壽)에 가까운 노년 세대가 패기 있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소화한다는 것은 많은 무리가 있을 것이라 여겨지면서도, 아동문학은 원래 아동을 위한 이야기이기에 본질은 마찬가지여서 노년이건 유년이건 소회불량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여깁니다. 자주 읽어야겠다고 여깁니다만 팔리는 책을 위해 주문 생산되는 작품들이 너무 유행성에 민감하지 않나 하는 선입견이 듭니다. 신인상,당선작도 제대로 읽지 않는데 제가 지금 왈가왈부할 처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역시 재미니 교화(문학성)가 융합된 글이 되어야겠습니다.
<후배 동화작가 한아 선생에게 동화작가의 길을 조근조근 들려주시고 있다.>
김문홍 앞으로 선생님의 동화문학 여정에 있어서 필생의 역작이라고 남기고 싶을 만한 작품으로 어떤 작품을 한 번 쓰고 싶은지 계획이 있다면, 그 거대한 작업의 여정을 한 번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김상남 쓰다 보면 역작이 되지 않겠나 스스로 위안과 격려를 갖습니다. 그런 결의로 살면 생활이 곧 창작 활동이니 가능하다고 여깁니다. 너무 빚이 많은 삶이었기에 부채감을 갖고 열심히 쓸 작정입니다. 부채를 갚는 일을 나는 보은(報恩)으로 미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선 돌아가신 부모님들께 갚아야 할 빚, 그리고 선생님이나 친구들, 그리고 내 자식들을 위해 큰 빚을 졌습니다. 이들을 위해 여생을 바칠 생각입니다.
김문홍 선생님께선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자신의 삶이 흔들리려고 할 때마다 자신을 추스릴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준 좌우명이 있는지요? 좌우명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한 번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김상남 수요일마다 벗들과 등산합니다. 회장을 몇 차례나 맡으면서 통지는 카페에 게시합니다. 꼭 끄트머리에 좌우명이나 마음가짐, 태도, 실천 방법 등을 올리다 보니 사자성어로 된 경구(警句) 따위를 익히게 되더군요. 해수불양(海水不讓), 유수불부(流水不腐), 호시우보(虎視牛步), 부신불립(無信不立), 견현사제(見賢思齊), 상선약수(上善若水) 등을 자주 썼으나, 벽에 걸린 휘호라야 명색 좌우명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아주 오래 전 “화기치상(和 氣致祥)”이라는 박경종 선생의 글을 액자에 넣었는데, 내용이나 필체도 일품이었지만 “위 김상남선생 광복30주년기념 장편공모 꽃댕기 당선기념 내영박경종”라고 써 주신 글귀를 은근히 내방객에게 자랑할려고 거실에다 오랫동안 걸어두었던가 싶습니다. 지금은 여러 차례의 이사 바람에 행방이 묘연합니다.
지금 내 방의 가장 눈길이 잘 멎는 자리에 “춘조환우(春鳥喚友)”라는 향파 선생의 횡액이 걸렸는데, 역시 서체도 빼어나지만 내용이 나의 성격을 얼마간 드러내기도 해 아끼는 편입니다. “봄새가 벗을 부른다.”는 뜻입니다. 환경 구성의 장식용이고 찬장 안에 소품(小品)으로 표구된 ‘기산심해(氣山心海)“가 사실상 나의 좌우명 아닐까 여깁니다. 진주교대 부산 동창회장이었고 부산대 경제학 교수였던 고 강진호 박사 댁에 갔을 적 골랐던 것인데, 자주 이런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법구경이나 큰 스님들의 족자에도 금언이 많지만 아직 공백을 메꾸는 구실에 불과합니다. 후세들을 위해 가훈은 꼭 있어야지 하면서도 여태 없습니다. 말보다 바로 저의 일거수일투족이 본(本)을 이룰 터인데 그러지 못해 서글픕니다. 작가는 작품으로 글을 쓰는 것이 바로 후세들에게 남기는 가장 뚜렷하고 소중한 가훈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향파 이주홍 선생님께서 김상남 선생님을 위해 특별히 써 주신 횡액 "춘조환우">
김문홍 아동문학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고 이렇게 살아라 하고 싶다든지,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일은 하지 말라고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동문학에 종사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문학의 자세나 태도에 대해서도 한 말씀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김상남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라는 속담이 가끔 떠오릅니다. 이에 반하여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도 있지만, 전자(前者)에 방점을 찍습니다. 저가 아주 고루하고 폭이 좁습니다. 유한의 인생인데 너무 방대한 욕망을 지니면 거기에 압살당하기 마련입니다. 가령 저기 지금 구의원에 출마한다면 저의 식구 말고 누가 표를 찍겠습니까. 일찍이 자리 알고 발 뻗으라는 훈련에 익숙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교사 하다가 예순에 명예퇴직 했습니다. 글을 많이 쓰고 싶어서였습니다. 짐 싸고 절에 들어갈 작정이었지만 어렵더군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넘치면 모자람만 못 하다. 문학상 당선이나 수상 못 했다 해서 투덜대기보다, 내 실력에 너무 무리하지 않았나 하고 타산지석 삼아 자기를 성찰해야 합니다.
물론 세상사가 옳게 돌아가지 않아 분노도 치밀지만 발본색원하는데 목숨을 바쳐야지, 자기가 피해자라고 먼저 고함부터 지르면 아무도 박수 안 칩니다. 자기를 가장 잘 아는 자는 자기입니다. 스스로 헤엄쳐야 합니다. 짜디 짠 바닷물을 한 바가지쯤 먹어야 재생합니다. 삶은 고해(苦海)입니다. 그 바다를 넘는 일을 운이라 할까요. 남무관세음보살
<큰 딸의 운동회에 가족들이 참석헤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모습>
김문홍 그동안 후배들을 위해 귀한 시간을 내어 좋은 말씀을 들려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저를 비롯한 후배들이 선생님께 바라고 싶은 점이 있다면 앞으로 건강을 잘 챙기시면서 두고 두고 회자될만한 역작을 쓰시라는 것입니다. 조만간 “역시 솔마 선생님은 아동소설의 달인이구나.” 하고 혀를 내두를 만한 좋은 작품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늘 건강하고 행복하십시오.
김상남 고맙습니다. 하원 김문홍 박사님, 고시 3관왕이 선거에 떨어지는 판입니다. 이름대로 ‘문홍(文弘)’이라는 작가는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 아니지만 충분히 그런 재목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축을 울리는 작품 쓰시길 기원하며, 오늘 대접이 부실해 송구합니다.
김문홍 내내 건강하십시오. 그리고 좋은 작품 꼭 쓰시길 빌겠습니다. 오랜 동안 자리를 마련해 주시어 정말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끝>
* 후배 동화작가 양경화, 한아 선생님께서 인터뷰에 함께 해서 사진 쵤영 및 원고 정리를 도와주셨습니다. 고마움을 전합니다. 7월에는 동시인 선용 선생님, 8월에는 동시인 최만조 선생님을 찾아갑니다.
첫댓글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들과 함께 먹은 점심자리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소로마 선생님의 발자취를 시냇물 흐르듯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귀한 글 덕분에 소로마선생님이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