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혼 / 김경인
차갑게 식은 태양은 꺼요 잠들지 않는 야광 해바라기를 붙여 놓을게요 유리창에 침을 뱉지 말아요 들러붙은 풍경은 지워지지 않으니까요 잠의 출구에는 못을 칩시다 입구에는 순하고 깨끗한 표정을 벗어 모양 좋게 걸어 둘 하얀 문 하나를 달고요 노란 진물을 내뿜는 기차를 타고 우리 끄덕끄덕 흔들릴까요 허공을 앉힌 의자처럼요 아껴둔 말을 적은 공책을 찢어 새처럼 날려 볼까요 그러다 죽은 새로 곤두박질치는 서로의 혼잣말을 첫눈처럼 꼭 쥐어 볼까요, 아니 거센 눈보라처럼 혀로 만든 계단을 오르고 내릴까요 그러다가 혀에 스미는 눈송이처럼 지워질까요 오늘 우리 귀엣말처럼 사소해집시다 추운 세계에서 날아가려다 붙잡힌 고통의 깃털을 산 채로 뽑아 만든 가볍고 포근한 이불 아래서 이웃의 나쁜 소식을 자장가처럼 들으면서 잠의 입구를 서성이다가 문득 흘러나온 혼잣말이 침대를 적실 때에 서로의 창문에서 코끼리 귀를 닮은 커튼으로 펄럭입시다 녹을 줄 모르는 얼음 위에서 하나의 다리로 밤을 새는 거위처럼
— 《시와 시학》 2022년 봄호
* 김경인 시인 1972년 서울 출생. 가톨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2001년 《문예중앙》 등단. 시집 『한밤의 퀼트』 『얘들아, 모든 이름을 사랑해』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 현재 한양대학교 에리카캠퍼스 창의융합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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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청혼의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절차가 민망하고 아쉽게 느껴진다. 아쉬운 것은 왜 그렇게밖에 못했나 하는 반성적 시각 때문이요, 민망한 것은 시간의 격차에 의해 어떻게 그런 언행을 취했나 하는 부끄러운 감정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어떻든 청혼은 말의 형식을 취한다. 행동이 수반된다 하더라도 청혼의 언어는 민망함과 아쉬움을 남긴다. 김경인의 시는 청혼을 모티프로 다양한 의식의 파장을 펼친다.
청혼의 자리라면 “차갑게 식은 태양”은 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뜨겁게 불타는 태양 같은 표정이 제격이다. 불타는 태양이 없다면 “잠들지 않는 야광 해바라기”라도 붙여 놓아야 한다. 그것이 추하다고 외면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어떻든 정성을 기울여 청혼을 하는 자리가 아닌가. 잠의 출구에 못을 쳐서 잠을 동결시키는 것이 좋다. 청혼은 적어도 잠과는 무관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입구에는 “순하고 깨끗한 표정을 벗어/ 모양 좋게 걸어 둘 하얀 문 하나”가 필요하다. 그러한 우아한 장식이 주는 순결의 효과는 청혼에 어울린다. “노란 진물을 내뿜는 기차”는 무엇일까? 노란 진물은 아름다운 것일까, 징그러운 것일까? 미래의 실상은 알 수 없으니 그 상태가 어떤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청혼의 상황이니 노란 색의 몽롱한 분위기를 떠올리는 것이 어울릴 것 같다. 몽롱한 분위기의 기차에 몸을 실었으면 아껴둔 말을 적은 공책을 새처럼 날려 볼 만하다. 그 말이 상대에게 들어가지 않으면 “죽은 새로 곤두박질치는” 불행한 결말이 올지도 모른다. 그것은 청혼의 파탄을 의미한다. 첫눈은 순수하고, 거센 눈보라는 사납다. 청혼의 결과가 평온하면 첫눈이 될 것이요 파탄으로 끝나면 거센 눈보라가 일 것이다.
여기 나오는 “혀로 만든 계단”과 “혀에 스미는 눈송이”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청혼은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혀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혀로 만든 계단은 부서지기 쉽고 혀에 스미는 눈송이도 녹기 쉽다. 둘 다 가변적이요 지구력이 약하다. 청혼은 그렇게 덧없는 것이고 가식적인 것이고 표피만 꾸민 허식이다. 그렇다면 청혼의 장식적 속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세상의 가식을 전폭적으로 수용하면서 일상의 건전한 국면으로 자연스럽게 내려가는 일이 필요할지 모른다. 다음 장면의 표현을 세심히 읽을 필요가 있다. “가볍고 포근한 이불”은 “고통의 깃털을 산 채로 뽑아” 만들었다고 했다. 그 깃털은 또 “추운 세계에서 날아가려다 붙잡힌” 새의 깃털이다. 요컨대 그 깃털은 탈주에 실패한 새의 가엾은 깃털이요 그 깃털로 만들었으니 아무리 가볍고 포근해도 고통과 좌절의 무게가 담겨 있는 물질이다. 그러니 귓속말을 나누듯이 친근하고 사소한 관계를 이루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의 상황은 모순 관계 속에 있다. “이웃의 나쁜 소식을 자장가처럼 들으면서”라는 시행이 모순의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어떻게 이웃의 나쁜 소식을 자장가처럼 들을 수 있겠는가. 청혼을 둘러싸고 표명된 발화들은 하나같이 모순이고 가식이고 위장이다. 이웃의 나쁜 소식도 자장가로 듣고 문득 흘러나온 혼잣말처럼 청혼의 독백을 하는 우리들. “서로의 창문에서 코끼리 귀를 닮은 커튼으로 펄럭”이는 무의미하고 덧없는 존재들이다. 그렇게 서로의 창문에서 코끼리 귀 같은 커튼으로 펄럭이는 우리들의 모습은 마치 경계를 넘어선 초월적 존재처럼 영속적 이미지로 변주된다. 이 마지막 장면은 아름다운 이미지로 위장되어 있다. ”녹을 줄 모르는 얼음 위에서/ 하나의 다리로 밤을 새는 거위처럼“은 시간의 한계를 넘어선 인간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인간의 무의미한 동작이 무한히 지속될 것 같다는 모순의 인식을 드러낸다. 인간의 가식과 위장, 비속함은 이렇게 운명적이고 항구적이다. 운명적인 모순과 가식 속에 전개되는 청혼의 의식(儀式)이 의미가 있을까? 그야말로 ”혀로 만든 계단“이요 ”혀에 스미는 눈송이“에 불과하다. 우리는 ”잠들지 않는 야광 해바라기“ 밑에서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 청혼은 그러므로 삶의 무의미를 드러내는 행위다.
김경인의 언어는 삶의 무의미와 가식과 위장과 모순 등 착잡하고 민망한 상황을 대변한다. 극렬한 단어는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의 언어는 현실을 부정하는 사상의 단층을 적극적으로 투사한다. “잠들지 않는 야광 해바라기”가 “허공을 앉힌 의자‘로 변주되고 ”혀로 만든 계단“과 ”혀에 스미는 눈송이“로 승화되었다가 ”코끼리 귀를 닮은 커튼“을 거쳐 ”하나의 다리로 밤을 새는 거위“로 정착되는 과정은 자못 눈부시다. 이것은 언어의 장식이나 나열이 아니라 사상의 창조다. 언어가 사상이 되는 자리를 지향하는 예술적 탐구의 결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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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숭원 (문학평론가). 1986년 《한국문학》 등단. 저서 『못을 통한 존재 탐구의 긴 여정』 『작품으로 읽는 한국 현대시사』 『매혹의 아이콘』 등. 현재 서울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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