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한 장의 무게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민주화를 향한 함성이 뜨겁게 타오르던 시절, 이 말은 시대를 관통하는 상징처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아무리 억누르고 막아도 세상의 이치는 결국 제 갈 길을 간다는 뜻이었다. 문득 엉뚱한 생각도 해 본다. 시계에 밥을
많이 준다고 시간이 더 빨리 갈까. 아무리 인간이 애를 써도 시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기 속도로 흐른다. 거대한
대자연의 법칙 앞에서 인간은 그저 작은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붙잡으려 해도 시간은 붙잡히지 않고,
무엇을 늦추려 해도 계절은 어김없이 바뀐다.
오늘은 6월 30일이다. 달력 한 장이 넘어가는 날이면서, 한 해의 절반이 저물어 가는 변곡점이다. 저녁이 되기 전에
서재와 거실, 그리고 침실에 걸려 있던 6월 달력을 하나씩 뜯어냈다. 달력 한 장을 넘겼을 뿐인데, 어느새 반년이라는
시간이 내 뒤로 흘러갔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마음을 울린다.
찢어낸 달력을 바라보다가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예전 같았으면 그 종이를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표면이 매끈
하고 질겨서 책껍질을 싸기에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종이 한 장도 귀했다. 공책은 누런 재생지로 만든 이른바 '똥종이'였고, 연필은 심이
툭하면 부러졌다. 글씨가 잘 써지지 않으면 연필심을 입에 물어 침을 살짝 묻혀가며 쓰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그때는 누구나 그렇게 했다.
교과서는 더욱 소중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달력 종이나 포장지로 정성껏 책껍질을 씌웠다. 모서리까지 반듯하게 접어
마치 귀한 보물을 다루듯 감쌌다. 교과서는 공부를 위한 책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신주단지처럼 아껴야 할 물건이었다.
책에 낙서를 하거나 책장을 구기는 일은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물건이 귀했던 시대였기에 물건을 아끼는 마음도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었던 것이다.
세월은 참 많이도 변했다. 이제는 연필을 깎을 일도, 볼펜을 찾을 일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휴대전화와 컴퓨터가 종이와
필기구를 대신하는 시대가 되었다. 달력도 스마트폰 속에 들어 있고, 메모도 손바닥만 한 화면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인지 지나간 달력 한 장의 운명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책을 싸고, 메모를 하고, 무엇인가를 감싸는 쓰임이 있었지만
이제는 뜯어내는 순간 곧바로 쓰레기통으로 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달력은 제 몫을 다한 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회용품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나는 선뜻 버릴 수가 없었다. 찢어낸 달력 종이를 반듯하게 접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전화번호 하나 적고, 문득
떠오른 생각을 메모하고, 해야 할 일을 적는 메모지로라도 써 볼 생각이다. 누군가는 하찮은 종이 한 장이라고 말할지 모르
지만, 내게는 그 종이 속에 지나간 한 달의 시간이 담겨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까운 것은 종이가 아니라 시간인지도 모른다. 달력 한 장을 뜯는다는 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한 달을 보내는
일이다. 종이는 남아 있어도 시간은 남아 있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무심코 버리는 달력 앞에서도 잠시 걸음을 멈추게 되는
지도 모른다.
시간은 누구에게도 더디 가지도, 빨리 가지도 않는다. 인간이 아무리 애를 써도 자연의 섭리는 변하지 않는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 시계에 아무리 밥을 많이 주어도 시간은 빨라지지 않는다. 오늘 뜯어낸 6월의 달력은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내일이면 7월의 새로운 달력이 또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한 장의 달력은 버려질 수 있어도, 그 위에 새겨졌던 나의 시간과 추억만큼은 결코 버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달력
한 장을 쉽게 쓰레기통에 넣지 못한 채, 조용히 접어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