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등산 모임에서 산대장이 중간 쉼터에 도착하자 배낭에서 과일을 꺼냈다. 우리 팀은 따로 약속한 것은 아니지만,
각자 알아서 한 가지씩 먹거리를 준비하는 것이 어느새 자연스러운 전통이 되었다.
구리 선생은 군고구마, 조빠는 삶은 달걀, 수석은 충무김밥, 술꾼인 나는 와인과 모닝빵, 산대장은 과일, 동파는 베이글빵,
덕진 선생은 맥주와 비스킷을 맡는다. 같은 과일과 빵이라도 산에서 친구들과 함께 나누어 먹으면 유난히 맛있다. 음식은
분위기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고 하지만, 야외에서 먹는 음식에는 분명 그 이상의 특별한 풍미가 더해지는 것 같다.
산대장이 꺼낸 과일은 얼핏 보기에는 천도복숭아였다. 그런데 한입 베어 물어보니 과육의 식감도, 당도도 우리가 익히 먹던
천도복숭아와는 조금 달랐다. "맛이 좀 다른데?" 하고 말했더니, 산대장이 웃으며 "조금 비싸게 주고 산 신품종 '스위트 퀸'
이야."라고 했다. 덕분에 새로운 품종의 복숭아를 맛보는 즐거움까지 누릴 수 있었다.
복숭아를 보니 자연스레 중국 신화에 전해 내려오는 천도(天桃) 이야기가 떠올랐다. 서쪽 곤륜산에 산다는 여신 서왕모는
하늘의 복숭아 과수원을 가꾸었는데, 그 복숭아는 3천 년 만에 꽃이 피고 다시 3천 년이 지나야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열매를 먹으면 늙지 않고 불로장생한다고 전해진다.
신선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는 반도회(蟠桃會)에서는 이 천도를 나누어 먹으며 장수를 축복했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도 복숭아는 동아시아에서 장수와 복을 상징하는 과일로 여겨진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바로 손오공의 '복숭아 도둑질'이다. 하늘나라에서 천도 과수원을 관리하던 손오공은 "이렇게
맛있는 걸 왜 신선들만 먹지?" 하며 천도를 하나둘 몰래 따 먹기 시작했다. 결국 거의 다 먹어버렸고, 그 덕분에 엄청난 힘과 긴
생명을 얻어 옥황상제도 쉽게 제압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장수를 기원하는 잔치에 복숭아 모양의 떡이나 빵을 올리는 풍습이 남아 있다.
산에서 맛본 '스위트 퀸' 한 알이 신화 속 천도까지 떠올리게 했다. 물론 불로장생의 효험은 없겠지만, 좋은 벗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과일만큼은 신선들이 먹던 천도 못지않은 맛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복숭아를 귀신을 쫓는 신령한 과일로 여겼다. 복숭아나무 가지를 대문에 걸어 액운을 막기도 했고,
무덤이나 제사상에는 복숭아를 잘 올리지 않았다. 복숭아의 강한 양기(陽氣)가 귀신을 물리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화 속에서도 복숭아는 장수와 복, 그리고 액막이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한다.
반면 서양에서는 복숭아에 대한 인식이 조금 달랐다. 오늘날 흔히 먹는 천도복숭아는 19세기 말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재배
되기 시작했는데, 처음 사람들의 반응은 의외였다. "복숭아에 털이 없다니, 병든 과일이 아니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맛을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껍질째 먹기 편하고, 당도가 높으며, 씻기도 쉬웠다. 처음의 의심은 금세
사라졌고 천도복숭아는 미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지금은 세계 어디에서나 여름을 대표하는 과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생각해 보면 같은 복숭아도 나라마다 품고 있는 이야기가 참 다르다. 중국에서는 불로장생의 천도가 되었고, 우리나라에서
는 귀신을 물리치는 길상의 과일이 되었으며, 미국에서는 새로운 품종을 받아들이는 열린 식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신화와
민속, 그리고 과학과 품종 개량이 한 과일 속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셈이다.
산대장이 준비해 온 '스위트 퀸' 한 알은 단순한 간식이 아니었다. 그 복숭아를 맛보는 순간 중국의 서왕모와 손오공이 떠올랐
고, 우리 조상들의 액막이 풍습도 생각났으며, 머나먼 미국에서 털 없는 복숭아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사람들의 모습까지 이어
졌다. 작은 과일 하나가 시간과 국경을 넘어 수천 년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산에서는 음식도 풍경을 닮는다. 아무리 값비싼 진수성찬이라도 혼자 먹으면 그저 한 끼 식사에 지나지 않지만, 좋은 벗들과
함께 산바람을 맞으며 나누어 먹는 과일 한 조각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어쩌면 불로장생의 천도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산길을 함께 걷고 웃으며 복숭아 한 알을 나누어 먹는 이런 시간이 아닐까. 그날 산에서 맛본 '스위트 퀸'은 내게 그런
생각을 선물해 준, 참 달콤한 여름의 복숭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