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족지혈, 생명지혈
"그건 새발의 피밖에 안 된다."
우리는 분량이 너무 적거나 도움이 되지 않을 때 흔히 이렇게 말한다. 한자식으로는 '조족지혈(鳥足之血)'이라고도 한다.
새의 발에 있는 피라니, 생각만 해도 얼마나 적겠는가.
가끔 새를 유심히 바라본 적이 있다. 비둘기든 참새든 닭이든, 다리를 보면 가느다란 뼈에 비늘 같은 각질만 덮여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사람처럼 푸른 핏줄이 불거져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새발의 피'라는 말이 생겼을 것이다. 수의사가 아니
더라도 "저기 피가 얼마나 흐르겠어?"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새도 엄연한 동물이다. 하늘을 힘차게 날아다니려면 산소와 영양분을 온몸에 실어 나르는 피가
반드시 필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발끝까지 피는 쉼 없이 순환하고 있다. 적어 보인다고 해서 부족한 것은 아닌
셈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 몸에는 피를 만드는 공장이 있다. 뼈 속 골수에서는 새로운 혈액세포가 태어나고, 수명이 다한 것들은 몸속에서 차례차례
정리된다. 신장은 혈액을 걸러 노폐물을 제거하는 중요한 일을 맡는다. 누구도 임명장을 준 적은 없지만, 몸속에는 각자의 직책
을 가진 직원들이 24시간 교대근무를 하는 셈이다.
그런데 기계도 오래 쓰면 부품이 닳듯 사람도 나이가 들면 신장 기능이 예전 같지 않다. 젊은 사람 가운데서도 신장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해 투석으로 생명을 이어 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평소에는 존재조차 의식하지 않던 장기가 어느 날 생명의 열쇠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피도 그렇다.
우리 몸속을 돌고 있는 혈액은 유효기간이 있다. 오래된 적혈구는 제 역할을 마치고 새로운 혈액으로 교체된다. 몸 안에서는 자연
스러운 순환이지만, 몸 밖으로 나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헌혈된 혈액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사용할 수 없어 폐기된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헌혈하는 사람들이 더욱 고맙다. 그들이 내민 팔 한쪽에서 흘러나온 피는 누군가에게는 응급수술을 가능하게
하고, 사고 환자를 살리고, 아이의 생명을 이어 준다. 헌혈자가 없다면 아무리 뛰어난 의사도, 아무리 최신 장비를 갖춘 병원도 할
수 있는 일이 크게 줄어든다. 의술은 준비되어 있어도 피가 없으면 수술은 시작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한 번의 헌혈량은 사람 몸 전체 혈액의 일부에 불과하다. 자신의 몸에서는 조금 덜어 낸 정도다. 말 그대로 조족지혈
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작은 양이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는 순간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누군가에게는 내일을 선물하고, 가족의 웃음을
되찾아 주며, 생명의 시간을 연장하는 귀한 선물이 된다.
결국 조족지혈은 양을 말하는 표현일 뿐, 가치를 말하는 표현은 아니었다.
세상에는 적어서 하찮은 것이 있고, 적지만 귀한 것이 있다. 촛불 하나는 작지만 어둠을 몰아내고, 씨앗 하나는 숲을 만들며, 따뜻한
말 한마디는 낙심한 사람을 일으켜 세운다. 피 한 봉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이제 '조족지혈'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렇게 한 글자를 바꾸어 보고 싶다.
'생명지혈(生命之血).'
양은 적어도 생명을 살리는 피.
그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값진 '새발의 피'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