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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독립군
이범윤(李範允) 선생 (1856. 5. 3~1940. 10. 20)
.1908~09 노령 연추에서 창의회조직, 의병투쟁, 13도의군 창의군 총재
.1911 노령 연해주의 권업회 총재
.1919~22 의군부, 대한독립군단 총재
아아! 우리 국세의 전복통박(顚覆痛迫)함은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하여 눈썹에 불이 붙을 정도로 위급하여졌다. 전국의 강토는 모두 왜노(倭奴)의 이빨 아래에 있고 8역(域)의 민족은 모두가 원수의 고기밥이 되어 생사간에 돌아갈 곳이 없으니 통곡을 금치 못하겠구나. (중략)
아아! 이 강동(江東)의 동포 신사들이여 나라를 떠나 백반사물이 여의치 않으나 조국에 대한 정신은 더욱 더 활발하여 칼을 갈고 머리를 모아 가로되 일적(日賊)을 토멸하려고 한다 하고, 이를 갈며 서약하기를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 한다고 한다. 부녀자는 비녀나 가락지를 헌납하고 장정은 소를 팔아 다투어 창포(槍砲)를 준비하여 용감 하게 나가야 될 것이니라. 이것이 즉 천연의 이치요 인화동정(人和同情)일 것이니라. 이렇게 하여야 비로소 열성조(列聖朝)의 조유지화(照濡之化)를 보게 될 것이다.
- 1909년 10월 발송한 선생의 군자금 모집 통고문 중에서 -
선생은 1856년 5월 3일 경기도 고양군(지금의 동대문구 신설동)에서 태어났다. 부친 이병하(李柄夏)와 모친 장수 황씨 사이의 3남 1녀 가운데 장남이었다. 본관은 전주, 자(字)는 여옥(汝玉)이다.
선생의 가문은 세종대왕의 5남인 광평대군의 후손으로 대대로 서울에서 살았고, 선대(先代)에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이 많았다. 따라서 학업 과정은 알 수 없으나 선생은 전통 유학을 공부한 유생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46세가 되던 해인 1902년 선생은 간도시찰(間島視察)로 관계에 들어섰다. 백두산 동북쪽 두만강 대안에 위치한 간도지방은 압록강 대안에 위치한 서간도와 더불어 예로부터 한국 민족의 활동무대였다. 그러나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워 중원을 장악하면서 그들의 발상지로 이곳을 신성시하여 봉금정책을 취하였고, 조선 정부도 청나라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곳에 대한 월경(越境)을 금지해 왔다.
하지만 조선 후기 삼정 문란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자 많은 한국 농민들이 간도로 이주하여 농경을 시작하였고, 이로부터 양국 사이에 간도 귀속문제가 야기되었다. 특히 1882년 청나라는 임오군란에 개입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한 뒤, 간도 거주 한국인들에 대한 세금 징수와 호적 정리를 시행하고 귀화를 강요하여 갔다. 나아가 변발(辮髮)과 편복(便服) 등 청나라 풍속을 강요하며 따르지 않는 한국인들을 추방하기도 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에서는 1883년 어윤중(魚允中)을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파견하여 백두산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土門江)이 송화강 상류인 도문강(圖們江)이 틀림없으므로 간도가 조선 영토임을 주장케 하였다. 그리고 간도 거주 한국인들에 대한 보호정책을 추진하여 갔다. 특히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청나라 세력이 약화되자 한국 정부에서는 간도 한인들에 대한 행정․보호 기관으로 1901년 변계경무서(邊界警務署)를 설치한 뒤, 이듬해 5월 22일 선생을 간도시찰로 임명한 것이다.
선생은 간도시찰로 파견되어 한인 동포들을 위무하고, 인구와 호구를 조사하면서 8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여러 혜택을 주어 큰 신망을 얻었다. 또한 한인 동포들에 대한 청나라 관리와 토호들의 포학과 마적들의 약탈 행위를 목격한 선생은 교민보호관의 설치와 보호병의 파견을 정부에 요청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1903년 8월 선생을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로 임명하여 한인 동포들에 대한 행정 및 보호 사무를 전담케 하였다.
간도관리사에 임명된 선생은 곧 바로 산포수와 장정들로 사포대(私砲隊)라고 하는 1,000여 명 규모의 충의대를 조직하여 한인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간도 한인 동포사회에서 선생의 인망은 더욱 높아갔고, 이것은 후일 선생의 구국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의 자산이 되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선생은 러시아 군대와 연대하여 한국에 침입한 일본군을 격퇴할 것을 결심하였다. 우선 선생은 함경도 무산, 회령, 종성, 온성과 간도의 양수천자(涼水泉子)․화룡(和龍)․6도구 부근에 충의대 연병장, 모아산(帽兒山)․마안산(馬鞍山)․두도구 등지에는 충의대 병영을 각각 수축하고 서울에서 총기와 탄약을 들여와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런 다음 선생은 이들 충의대 장병들을 거느리고 1905년 7월 러시아의 아니시모프 장군 부대와 연합하여 함경북도에 침입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 전투에서 선생의 충의대는 일본군 3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일전쟁은 일제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고, 곧 이어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사실상 국권이 상실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선생은 러시아로 망명하여 구국투쟁을 계속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700여 명의 충의대 장병들을 이끌고 훈춘을 거쳐 1906년 초 노령 연추(煙秋)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연추에 도착한 선생은 이 지역 한인 사회의 유지이자 거부인 최재형(崔在亨)의 지원으로 의병부대의 편성에 나섰다. 선생은 최재형의 후원으로 직접 연해주 각지를 순회하며 의병 모집과 군자금 모금 활동에 나선 것이다. 연해주에서는 마적의 습격에 대비하여 총기의 민간인 소유를 공인하고 있었으며, 총기, 탄약의 매매도 원래 허가제였으나 연추에서는 사실상 자유로이 매매되고 있었다. 따라서 선생은 의병부대의 무기와 장비를 러시아 군인들로부터 저가로 구입하거나 혹은 한인 사회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무기의 주종은 러시아제 5연발총, 14연발총으로 국내 의병들이 휴대한 화승총에 비해 성능이 매우 우수하였기 때문에 선생의 의병부대가 보다 높은 전투력을 갖출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선생은 동의회(同義會)와 창의회(彰義會)를 결성하여 의병부대의 인적․물적 기반으로 삼았다. 동의회는 최재형이 한인 동포들의 단결도모와 환란구제를 표방하면서 1908년 5월경 결성한 항일 단체이다. 이 회는 최재형이 총장, 선생이 부총장, 그리고 안중근․엄인섭이 평의원을 맡고 있었다. 창의회는 선생이 의병부대를 지원할 목적으로 1908년 7월경 조직한 항일 단체였다. 이들을 후원 단체로 하여 선생은 1908년 여름 연추에서 최재형과 연합하여 3~4천명에 달하는 청년들을 모아 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이범윤의병부대’ 혹은 ‘연추의병부대’라 불리는 의병부대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 의병부대의 진용은 다음과 같다.
총 독 : 이범윤, 총대장: 김두성(金斗星 : 柳麟錫),
대 장 : 전제덕(全濟德), 김영선(金永先), 김모(金某)
좌영장 : 엄인섭(嚴仁燮), 우영장 : 안중근(安重根)
영 장 : 백규삼(白圭三), 이경화(李京化), 김기룡(金起龍), 강창두(姜昌斗),
최천오(崔天五), 장풍한(張風翰)
이같은 선생의 의병부대가 조직된 시기를 전후해서 국내에서는 의병운동이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북한지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시기 삼수, 갑산, 무산 등 함경남도 북부지방에서는 홍범도, 차도선 등의 의병부대, 함경북도 두만강 지역에서는 최덕준, 장석회, 이남기 의병부대가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의 의병부대는 이들과 연계하여 항일전을 전개하며 장기적인 투쟁 근거지를 마련하려고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여 갔다.
우선 선생의 의병부대는 국내 진공작전에 앞서 선발대를 잠입시켜 일본군수비대의 배치상황을 정탐하면서 철도와 전선을 절단하여 통신 연락을 두절시켰다. 그런 다음 1908년 7월부터 9월까지 약 2개월에 걸쳐 지속적으로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였다. 즉 좌영장 엄인섭과 우영장 안중근은 각각 10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7월 5일 연추를 떠나 장고봉을 넘어 국내로 진공하였다. 이때 이들은 두만강 하류를 건너 경흥군 홍의동을 점령하면서 일본군수비대와 격전을 벌여 4명의 적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7월 9일에도 선생의 의병부대는 두만강 하류를 건너 경흥 북방으로 진격하였고, 이튿날 새벽 신아산 헌병분견대를 습격하였다. 그리하여 치열한 교전 끝에 분견대 진지를 파괴하면서 적군 1명을 사살하고 5명을 행방 불명케 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밖에 1908년 7월부터 9월까지 선생의 의병부대가 국내 진공작전을 통해 올린 전과는 다음과 같다.
7월 11일과 12일에는 회령-경성간의 철도와 전선을 파괴하여 일본군의 통신 연락을 마비시켰다.
7월 13일에는 경원군 고건원의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하여 적군 5명을 사살하였다.
7월 14일에는 경성군 계상면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하면서 그곳의 전주를 파괴하였다.
7월 16일에는 회령군 용흥면 용성사를 점령하고 그곳의 일본군 통신 전화선을 절단
하였다.
7월 17일에는 회령군 남방 2㎞ 지점까지 진격하여 점령하였다.
7월 21일에는 회령군 멱사동에서 일본군수비대와 교전하여 격퇴하였다.
7월 25일에는 경성군 장풍에서 일본군수비대를 격퇴하고 그곳을 점령하였다.
8월 4일에는 경흥군 노서면의 서수라를 점령한 뒤, 일본인 어장을 습격하여 일본
인 어부 14명을 살상하고 어구를 노획하였다.
8월 9일에는 회령군 중도 북방에서 일본군 척후병들과 교전하여 격퇴하였다.
9월 3일에는 경성의병부대와 연합하여 명천의 일본군수비대를 기습하여 격멸하고
명천읍을 하루동안 점령하였다.
9월 18일에는 경성과 명천 사이의 7반동에서 일본인 통신 기술자를 습격하고 전선
을 파괴하였다.
9월 19일에는 일본군 ‘폭도토벌대’와 교전하여 격퇴하였다.
이와 같이 선생의 의병부대는 지속적으로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면서 국내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모색하고, 투쟁 근거지 구축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1908년 가을 이후 소강상태로 빠져들었다. 그 이유는 일본군의 화력과 수적 우세를 극복하지 못한 탓이다. 또한 그동안 방관적이던 러시아, 청국 당국이 일제의 항의를 받고 한인 의병활동을 적극적으로 금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모병과 모금 활동을 통해 의병부대를 정비하고, 재차 대규모의 국내 진공작전을 펼칠 계획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그 계획은 여러 난관에 봉착하여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이토오 히로부미 처단 의거가 일어났다. 이에 선생은 유인석과 함께 안중근 의거를 국권회복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유인석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13도의군(十三道義軍)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13도의군은 만주, 노령의 의병 지도자들이 안중근 의거를 계기로 투쟁역량을 결집하여 재차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하고자 결성한 것이었다. 이는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의 의병부대를 하나의 군단으로 통합함으로써 투쟁역량을 결집하고, 나아가 작전과 지휘를 단일 계통으로 통일하기 위해 1910년 6월 우수리스크 부근의 추풍에서 편성한 것이다. 13도의군은 도총재를 정점으로 실제 전투력을 지닌 창의군(彰義軍)과 장의군(壯義軍) 두 부대로 편제되어 있었다. 선생은 창의군 총재, 경성의병 출신의 이남기가 장의군 총재로 각기 선임되었으며, 유인석이 도총재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이상설은 외교통신원으로 외교 통신과 사무, 그리고 조직을 관리하는 실질적 책임을 담당하였다. 안창호와 홍범도, 이진룡, 이갑 등은 동의원(同義員)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선생과 유인석, 이진룡, 홍범도 등은 의병장 출신인데 비해, 신민회의 핵심인물들이었던 안창호와 이갑 등은 무장투쟁노선과는 종래 그 성격을 달리하던 계몽운동 계열이었다. 결국 이들이 13도의군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때까지 민족운동선상에서 무장투쟁 노선과 대립 혹은 갈등 관계에 있던 계몽운동 노선이 의병운동계열과 공동전선을 모색하여 간 증거인 것이다.
선생이 참여하였던 13도의군의 활동 기간은 경술국치 때까지 불과 2~3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이 기간 선생을 비롯한 유인석, 이상설 등은 대규모 항일전을 펼칠 계획 아래 광무황제에게 연명 상소를 올려 내탕금으로 군자금을 지원해 줄 것과 연해주로의 파천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내외의 의병 통합을 표방하고 편성된 13도의군이 미처 항일전을 개시하기 전에 조국이 병탄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선생을 비롯한 13도의군의 간부들은 일제의 한국 강점을 규탄하고 그를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였다.
성명회는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 조치에 강력히 항의하고, 그 부당성을 세계 만방에 알리기 위해 조직한 항일 결사이다. 1910년 8월 이른바 한일합방조약의 체결이 박두하였다는 소식이 연해주에 전해졌다. 이 소식에 충격을 받은 선생을 비롯한 민족운동가들은 한인학교에 모여 비상시국에 대처할 방안을 논의한 결과 ‘대한의 국민된 사람으로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하고 성취’할 것을 결의하고 성명회를 조직하였다. 아울러 일본 정부에는 국제공약의 배신을 맹렬히 비난하는 공한을 보내고, 각국 정부에는 ‘합병무효’를 선언하는 전문(電文)과 성명회 선언서를 발송할 것도 의결하였다
8월 26일 다시 모인 선생을 비롯한 성명회의 주요인물 50여 명은 빗속에서 조국독립의 결의를 거듭 다짐하면서 독립전쟁의 방략을 논의하였다. 이후 성명회는 취지서와 각종 격문을 중국, 러시아에 산재한 한인사회에 반포하는 등 그 활동을 확대해 나갔다. 선생을 비롯한 한인동포들이 성명회를 조직하여 이처럼 활발한 반일운동을 전개하자, 일제는 러시아 정부에 강력히 항의를 제기하였다.
동시에 선생을 비롯한 유인석, 이상설, 홍범도 등 주요인물들의 체포 인도를 요구하고 나왔다. 이에 러시아 당국은 성명회를 주도하고 있던 선생을 비롯한 13도의군의 핵심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고 항일운동을 탄압하여 갔다. 결국 성명회와 13도의군은 1910년 9월 해체되고 말았다.
연추에 은신하던 선생 또한 그해 10월 24일 러시아 당국에 체포되었다. 선생이 체포되자 유인석은 서신을 보내 “어찌하여 선생의 충의를 하늘도 보호하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면서 통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러시아 당국에 선생이 체포된 것을 인지한 일제는 선생의 인도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당국은 선생을 이르쿠츠크로 호송하였다. 그것은 “파송되는 이범윤을 무슨 죄를 범한 사람으로 보지말고 그를 이르쿠츠크 경내에 가능한 한 최고의 조건으로 안주시키는데 조력하라”고 한 연해주 지사 스베친의 편지에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다.
이르쿠츠크에서 7개월간의 유형생활 끝에 1911년 5월 18일 석방된 선생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이후 선생을 비롯한 러시아의 한인 민족운동가들은 현실적이고도 장기적이며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방략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을 비롯하여 이종호․이상설․최재형 등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민족운동가들의 발기로 ‘조국독립’을 최고 이념으로 하는 자치결사로서 권업회(勸業會)가 1911년 5월 20일 연해주에서 창립되었다.
권업회의 목적과 이념은 한인사회의 권익을 증진시키는 ‘실업(경제)’ 문제와 독립운동을 강력히 추친하는 ‘항일(정치)’ 과제를 결부시키는 전술을 취하면서, 조국독립을 달성하려는 데 있었다. 창립 당시 권업회는 최재형이 회장, 홍범도가 부회장을 맡았다. 그러나 그해 12월 17일 총회에서 조직이 회장제에서 총재제로 바뀌면서 유인석이 수총재(首總裁), 선생을 비롯한 김학만, 최재형, 최봉준이 총재로 선임되었다.
이같은 권업회는 연해주 전역에 걸쳐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수리스크, 하바로프스크, 니콜라예프스크, 이만 등지를 비롯한 연해주 각처에 지회와 사무소를 설치하여 한인사회를 효과적으로 조직하였던 것이다. 창립 이후 회세 확장과 사업 진척에 따라 회원 수도 크게 증가하였다. 1913년 10월경에는 총 회원이 2,600여 명이었으나, 1914년 무렵에는 회세가 크게 확장되어 8,579명에 달하였다.
권업회의 주요 사업 가운데 하나는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하여 한인 신문을 발간하는 일이었다. 사실 신문간행은 러시아 한인사회의 숙원사업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권업회가 그 산하에 신문부를 두고 적극 활동함으로써 1912년 4월 22일 ≪권업신문≫을 창간하기에 이른 것이다. 신채호를 비롯하여 이상설‧김하구 등이 교대로 주필을 맡았던 이 신문은, 1914년 9월 정간 때까지 3년간 총 126호가 발간되었다.
신문간행사업과 함께 권업회는 인재양성과 민족의식의 고취를 위해 민족주의 교육 진흥에도 심혈을 쏟았다. 권업회가 운영한 대표적인 한인 교육기관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한민학교이다. 한민학교는 신한촌 건설 직후 설립된 계동학교를 확대 발전시킨 것으로, 러시아 한인사회의 민족주의 교육기관을 대표하는 학교로 명성이 높았다.
권업회는 또한 경제력이나 민권 등 한인의 실력 향상을 위해서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권업회는 1914년 9월에 해체되고 말았다. 그것은 1차 세계 대전 발발과 더불어 일본과 함께 연합국으로 참전하게 된 러시아 당국이 한인의 정치, 사회활동을 탄압하였기 때문이다.
간도시찰로 부임한 이래 이같은 활동으로 선생은 만주, 노령 지역의 독립운동 지도자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19년 만주, 노령의 민족 지도자들이 ‘대한독립선언’을 발표할 때, 선생은 그 대표 39인 가운데 한 분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후 3․1운동이 일어나자 각지에서 독립군 단체를 조직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여 갔다. 이때 선생은 60세를 훨씬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북간도에서 조직된 의군부의 총재로 추대되었다. 또 서북간도 일대를 총망라하여 복벽주의 독립운동자들이 조직한 광복단의 단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모두 선생의 명망이 그만큼 높았던 때문이다.
자유시참변 이후에도 선생의 영향력은 건재하였다. 자유시참변 후 북만으로 돌아온 독립군단들은 많은 전력의 손실을 입어 일제와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따라서 북간도 지역에 포진하고 있던 각 독립군단들은 1922년 8월 통합운동을 벌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는데, 이때에도 선생은 총재로 추대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한독립군단이 중심이 되어 북간도 지역 독립군단들을 통합하기 위해 1925년 3월 10일 길림성 액목현에서 부여족통일회의가 개최되었다. 회의 결과 대한독립군단과 북간도에서 재정비한 북로군정서 등 각 단체는 통합에 합의하여 새로이 신민부(新民府)를 창립하였다. 이때에도 선생은 혁명 원로로서 신민부의 자문기구로 설치된 참의원 원장으로 추대되었다. 또한 신민부가 무관 양성을 위해 목릉현 소추풍(小秋風)에 설립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의 고문을 맡아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선생은 노구를 이끌고 만주, 노령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활약하다가 1940년 10월 20일 노환으로 서거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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