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지역 기행문 석재준
출경수속
2008년 2월15일 새벽 밤새 달려온 버스가 임진강 역에 도착했을 때는 어둠만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 다. 새벽바람 쌀쌀하여 차안에서 기다렸다. 어둠이 걷히자 하나둘씩 차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06시30분 현대 아산 셔틀버스가 관광객을 도라산 역 남측 C.I.Q(출입국 사무소)까지 실어 나른다. 이곳에서는 남‧북한 이라는 말 대신 남측, 북측 이라고 해야 한다. 07:00부터 08:30까지 남측에서 발권 및 출경수속을 마치고 북측 C.I.Q에서 입경 수속을 마쳐야한다.
휴대폰과 필림, 카메라, 망원경, 비 디오카메라는 소지할 수 없으며. 디지털 카메라만이 허용되는데 원거리 촬영용 줌 카메라는 안 된다. 사용할 돈 은 미화 뿐이므로 미리 환전을 하여야 한다. 북측 C.I.Q 수속을 마치고 정해진 버스에 오르자 버스기사가 잠깐 주의사항을 알려준다. 근래 들어 북측도 많이 부드러워졌으나 세 사람(김일성, 김정일, 김정숙)은 절대 입에 올리지 말아달라고 당부한다. 금강 산을 다녀온 경험이 있으니 북측에 들어가고 나오는 절차에는 익숙해진 편이다. 북측 안내원 3명이 타는데 2명은 앞좌석, 1명은 뒷좌석에 앉아 앞의 2명은 지역을 지 날 때 설명하는 안내자이며 맨 뒷좌석 1명은 차창 밖의 사진촬영을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안내원의 자기소개에 이어 “저기 앞산을 한번 봐주십시오. 여인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반듯이 누 운 모습이 보이지않습니까? 저산이 바로 개성의 대표적 산인 송악산입니다.” 송악산은 머리채를 풀어 헤치고 손을 가슴에 모은 채 반듯이 누운 여인의 형상 이였다. 옛날 개성 에 못생긴 여인이 있었는데 이 여인이 꿈에 나타난 산신령의 계시를 받고 이산에서 약초를 캐어 먹고 미인이 됐 다는 전설이 있었다고 한다. 그 여인이 먹은 약초가 바로 개성 인삼이다.
이어지는 시내의 정경은 황폐한 산과 들 그리고 여러 가구가 사는 기다란 집과 단독 주택들…. 집의 채색은 아예 없고 마을엔 사람이 전 혀 보이지 않는다. 개성시내의 모습에서 마음이 무거워진다. 우리의 마음을 아는지 개성 시가지 안내에 이어서 안내원이 노래 한곡으로 분위기를 바꾼다.
박연폭포
시내를 가로질러 27Km 북쪽으로 달려 박연리에 위치한 송도삼절(松都三絶)의 하나인 박연폭포에 도 착했다. 박연폭포는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로 흐르는 계곡물이 모여 박연(朴淵)을 이루었고 이물이 37m 떨어져 고모담(姑母潭)을 만들었다. 고려시대 박진사라는 사람이 이곳에 머물며 밤마다 피리를 불었는데 이 피리 소리 에 반한 용왕의 딸 용녀가 박진사를 못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고 해서 박연이 됐고 박진사를 찾다 못 한 어머니가 슬픔을 견디다 못해 몸을 던진 곳이 고모담(姑母潭)이다. 고모담 언저리에는 큰 바위가 있는데 생긴 것이 용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용 바위로 부른다. 용 바 위에는 조선시대 명기 황진이가 머리채를 물에 적셔서 일필휘지로 썼다는 시구가 초서체로 적혀 있었 다.
비류직하 삼천척 (飛流直下 三千尺, 물줄기를 내리 쏟아 그 길이가 삼천자요) 의시은하 락구천 (疑是銀河落九天, 이는 하늘에서 흘러내린 은하수와 같구나)
개성의 박연 폭포는 금강산의 구룡폭포, 설악산 대승폭포와 함께 3대 폭포 중의 하나다. 높이 37m 에 불과한 박연폭포는 장쾌한 맛으로 치자면 50m의 구룡폭포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대신 박연은 고아(高雅)하다 . 어디한곳 감기는 곳 없이 곧게 떨어지는 물줄기는 깨끗하고 단정하다. 구룡이 성폭(聖瀑), 대승이 신폭(神瀑)이라면 박연은 선폭(仙瀑)이라는 안내원의 너스레가 제법 그 럴싸하게 들린다. 겨울이라 폭포는 얼었지만 선폭의 물소리와 박연의 애절한 피리소리를 상상하며 발길을 옮겼 다. 범사정 정자아래 임시로 만들어놓은 판매대에 북측여성이 커피와 마른산채를 팔고 있었다. 우리 안 내원을 불러 함께 차를 마시면서 두 차례 금강산에 다녀온(나무심기, 연탄나누기)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사진촬 영을 했다 이사진을 어떻게 전달할까 하니 다음 들어오는 관광객 편에 보내면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반듯한 외 모에 말솜씨도 세련되어 보인다.
관 음 사 (북한국보유적 142호)
박연폭포 범사정에서 부터 관음사 까지는 860m라는 팻말을 따라 관음사로 발길을 옮겼다. 관음사는 천마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조그마한 절이다. 관음사에는 남쪽 스님과 다르게 머리를 기른 관음사 주지 청맥 스님은 신도가 1천 명 정도이며 대부분 개성에 산다고 하며 넉넉한 웃음으로 관광객을 맞았다. 일행 중 불교 신자인 몇 분은 대웅전 부처님 앞에 불전을 놓았으며, 몇 차례 큰 절을 올리는 모습 이 보기 좋았다. 신성한 종교 앞에서는 이념도 사상도 없으며 북측의 부처님도 자비가 충만하리라 생각했다. 대웅전 옆 관음굴 속에 숨겨진 듯 위치한 높이 1.2m의 관세음 보살상 좌상은 관광객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관세음 보살상은 원래 두 개인데 하나는 중앙역사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고 북측 안내원이 설명했다. 또 대웅전 뒤쪽의 “미완성 문”의 애틋한 사연도 눈길을 끌었다.
<북한 국보유적 142호 관음사 대웅전> <도끼로 팔목을 자른 운나자신의 모습을 새김>
조각 기술이 뛰어난 ‘운나’ 라는 이름의 스님이 대웅전을 지었는데 일에 너무 몰두해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고 한다. 크게 상심한 운나 스님은 자책감에 도끼로 자신의 팔을 잘라 버리고 마지막 대웅 전 뒷문을 완성하지 못한 채 절을 떠나 버렸다. 후세에 사람들이 운나스님을 기리는 뜻에서 미완성 문과 운나스 님의 사연을 부조로 새긴 문을 나란히 붙여 놓았다. 지금도 대웅전 뒤쪽에 가면 미완성 문을 볼 수 있 다.
통일관 식당
관음사를 내려와 버스에 올라 이동하니 통일관 식당 앞이다. 개성의 중심 남대문 인근 에 있는 식당 통일관에서 13첩 반상을 받았다. 1인당 방짜 유기 13개 한 세트씩이다. 원래 첩은 반상기 한 벌에 딸린 쟁첩(작은 반찬접시)을 세는 단위다. 국그릇, 김치 보시기나 간장종지는 포함되지 않는다. 조선시대 양반 집 밥상이라도 7첩 9첩이었다. 그이상은 12첩 수라상 뿐 이다. 12첩의 의미는 12가지 이상이라는 뜻이다. 애당 초 그 이상의 첩 상은 있을 수 없는 셈이다. 밥, 국, 김치까지 다 합하니 13개다. 첩 세는 법이 틀린 셈이다. 그릇 수야 어찌됐든 음식 맛 자체는 맛있었다. 양념은 많이 안 써 깔끔하고 담백하다. 국, 그릇, 작은 반찬 그릇까지 두껑은 덮어져 있고 관광객이 자리에 않으면 뚜껑을 벗겨준다. 금강산을 다녀온 내가 보기에도 옥류관 냉면보다 맛이 낫다. 오 랜만에 놋그릇으로 담긴 정성스런 음식을 먹어본 날이다.
식당에서 서빙 하는 아가씨 모두가 한복을 곱게 입었고 상냥하였다. 먹다 남은 개성 약밥을 싸 줄 수 있느냐고 물으니 두말없이 예쁘게 포장하여 건네준다. 짓궂은 우리 일행이 한 아가씨의 쌍꺼풀눈을 보고 조 용히 불러 눈 쌍꺼풀 수술 했냐고 물으니 대답 없이 얼굴이 빨개진다. 통일관 뒤편 자남산에 있는 김일성 주석 동상만 시내에서 유일하게 촬영이 허용된 곳이다. 우리가 먼저 앞쪽의 개성시내 모습과 뒤편의 김일성 주석 동상을 배경으로 디카에 담으니 그제서야 많은 관광객이 기념 촬영을 한다. 어느 관광객 일행이 김일성 주석 배경으로 촬영을 마치자 안내원이 급히 달려와 삭제를 요구하며 몇 호 차냐고 확인한다. 갑자기 사람들의 얼굴이 굳어진다. 장군님 앞에서 복장이 불량한데다 주머니에 손을 넣 고 촬영한 것이 문제였다. 문제의 사진을 삭제 후에야 수습 되었다. 우리 차에 탔던 안내원은 멀리서 이 광경을 보고 “뭐 그럴 수 도 있지” 하고 너그러운 말과 표정으로 동료의 지나친 행동을 안타까워했다.
시내관광
점심 식사 후 시내 남동부를 통과 하면서 북한주민들의 사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유 적지 구경은 그 다음 이였다. 코앞에서 본 오늘의 개성은 창백했다. 색으로 치면 빛바랜 무채색으로 몇 십 층짜 리 빌딩이 드문드문 섞여 있긴 하지만 가로수가 드물고 관광지를 벗어나면 산에 나무가 없다. 가끔 골목길에서 놀던 아이들의 손 흔드는 눈빛은 생기가 넘쳤지만 거리 자체는 건조해 보인다. 기와집 처마가 끝없이 이어져 비가와도 옷을 적시지 않았다는 옛 영화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 북한에서도 개성은 직할시로 인구 30만이 살고 있다고 한다. 한때는 50만이 넘었다고 안내원이 설명을 한다. 3시간 반 동안 개성시내에 머물면서 개성시내에서 본 자동차는 20여대가 전부였다 안내원의 눈치를 살피며 틈틈이 간판이름을 적었다.「천연색 사진관」,「아동백화점」,「남새(야채)가게」,「전자기구 수리」,「 개성직매점」,「선죽식당」,「고려상점」,「미용원 리발관」,「개성고려식품점」,「조선우표전시관」등 차가 없는 시내 신호등은 볼 수 없고 하늘색 옷차림을 한 교통 여순경(?)이 하는 절도있는 수신호 가 전부였다.
(통일관 식당에서 바라본 개성시내)
( 숭양서원 (북한 국보유적128호)
숭양서원은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서원으로 정몽주의 옛 집터라 전하며 자남산 배경으로 동남쪽을 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1573년 개성 유수 남응운이 유림들과 함께 창건하여 정몽주 서경덕 위폐를 모셨고1575 년 숭양이란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했다. 1668년(현종9)에 김상헌, 1681년(숙종7)에 김육. 조익을, 1784년( 정조8)에 우현보를 추가 배향했다. 우현보만 고려시대 사람으로 그는 정몽주 시신을 수습하였다.
1868년(고종5)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 폐령에 때에도 그대로 남아 있던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다. 숭양서원 좌우에는 한곳에 3마리 동물모양이 새겨진 특이한 2개의 돌계단은 정몽주가 말을 타고 내릴 때 이용했다는 마상석‧ 마하석 이다 숭양서 원은 개성에 남아있는 옛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랜 건물이다
선 죽 교 (북한국보유적159호)
개성시 선죽동 자남산 동쪽 기슭에 작은 개울이 있으며 919년 고려 태조가 송도의 시가 지를 정비할 때 하천정비의 일환으로 축조한 곳이다. 고려 말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 등에 의해 이곳에서 철퇴를 맞아 숨진 곳으로 길이 6.6m넓이 2.54m로 옛 이름은 선지교이다. 정몽주의 죽음이후부터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 고 주위에 충절의 대나무가 돋아났다 하여 선죽교로 개칭 하였다. 난간은 1780년 정몽주의 후손인 유수 정호인이 부임하여 후손들이 선조의 핏자국을 함부로 밟게 할 수 없다 하여 다리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만들었으며 다리 동쪽 선죽교라는 3자는 한석봉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선죽교에는 고려 때 축조된 다리와 이조시대에 다리가 나란히 놓여 있다. 현재 선죽교 근처에는 대나무를 전혀 볼 수 없고, 핏자국이 아니고 돌질에 따라 철광에서 베어 나 오는 붉은 철분 녹물이라는 말이 있지만 다시 한번 충신의 절개를 생각하게 하였다. 당시에는 철퇴를 사용한 형벌은 없었지만 이방원이 철퇴를 쓴 이유는 철퇴로 머리가 깨진다면 유골 을 수습하기 힘들고 그 몸에서 흘린 피를 일부로 선죽교에 흩뿌려 궁에 들어가는 온건개혁파, 즉 조선 개국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서란다. 그리하여 이방원 이성계 일파는 별다른 반대세력 없이 1392 년에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다. 정몽주의 피살에 관련된 시 3편이 전해온다. 정몽주는 사냥을 하다 떨어져 다리를 다쳐 조정에 나 오지 않은 이성계의 병문안을 가기 전에 어머니에게 이성계의 집을 방문하겠다고 여쭈니 그의 어머니는 다음과 같은 시조를 지어 만류했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흰 빛을 더럽히나니 창파에 고이 씻는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또 이성계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오려는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정몽주를 불러 주안상을 마련하고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 같이 얽혀져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우리에게 ‘하여가’로 알려진 시를 읊자 이에 대한 답시로 정몽주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라는 ‘단심가’로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을 하겠다는 화답을 하였다.
선죽교 옆에는 1797년 유수 조진관 이 세운 녹사(기실)비와 1824년(순조24)에 유수 이용수가 세운 녹사(순의)비가 있다. 녹사비는 포은 정몽주가 이성계의 집에서 돌아올 때 자신이 살해당할 것을 예견하고 녹사(비서) 김경조라도 살리기 위해 먼저 집에 가라 고 일렀으나, 이에 따르지 않고 숨어서 뒤따라오다 정몽주를 살해한 조영규에게 달려들어 싸우다 같이 철퇴에 맞아 의절한 녹사(비서) 김경조를 기리는 비다. 선죽교 담장너머에 오후 햇살을 받으며 북한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선하고 소박해 보이는 사람들…. 그들은 어떤 꿈을 가지고 있을까 궁금하다. “우리는 어떻게 일하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일하는가가 중요하다고….’안내원이 들 려준 이야기다.
표 충 비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는 표충비는 선죽교와 도로 사이에 두고 마주해 있는 암수 거북 위에 새겨진 돌 비석으로 충신 정몽주의 원혼을 달래고 충절을 널리 칭송하기 위해 왼쪽은 1740년 영조가 오른쪽은 1872년 고종이 세운 곳으로 표충비의 높이는 왼쪽 3.58m 오른쪽 3.17m 이고 거북이가 비를 받치고 있다. 비석을 받친 거북의 얼굴은 만지면 자식을 잘 낳을 수 있다는 전설이 개성 사람들에게 전해져 내려 오고 있다. 거북이의 코를 만지며 사진을 찍는 관광객도 있다.
고려박물관
고려 성균관(成均館)은 개성시내에서 15분 떨어진 개성시 고려동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 성균관은 고려시대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으로, 992년 국자감(國子監)이라는 이름으로 창설되었다가 이후 성균관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의 성균관과 구분하기 위해 ‘고려 성균관’으로 부르고 있다. 북한은 1988년부터 고려시대 유물을 한데 모은 고려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명륜당, 대성 전, 동재, 서재 등 18동에 해당하는 건물들과 그 주변에 역사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에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와 다양한 청자가 볼거리다. 고려대장경 판목, 고려청자, 고려귀족 의상 등 1,000여점의 당시 유 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성균관 전경과 우측에 국가지정 제 387호 은행나무> 제2전시장에 고려 왕궁 터인 만월대에서 발견되었다는 ‘이마 전(顚)’ 자가 새겨진 활자가 관람객 의 눈을 사로잡는다. 고려시대에 세계 최초로 제작된 금속활자 원본으로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만든 것보다 300 년을 앞선다고 한다. 야외에는 헌화사 칠층석탑(국보 139호) 헌화사비(국보 151호), 불일사 오층석탑, 개국사 석등 , 류수영 문루 등이 있다. 그밖에 성균관 입구에는 국가지정 제386호와 387호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등의 천연기념물도 보 존되어 있다.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디카에 담아올 수 는 없었지만 그 중 기억에 남는 것은 공민 왕이 사랑하던 노국공주의 죽음을 슬퍼하며 무덤 벽화와 조각으로 치장한 것이다. 사후에 함께 묻혀 석실 사이로 영혼이라도 오갈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하고 수많은 보석으로 장식 된 것을 보았다. 좋은 남편으로는 평가 받을 수 있겠지 만, 그 전에 좀 더 나라 일에 열심이었다면 나라가 망하는 슬픔은 없었으리라 생각되었다.
<고려박물관 판매대 관광의 마지막코스다>
고려박물관에서 만난 안내원 류 ㅇㅇ는 15년째 안내를 맡고 있었다. 고려박물관 관광은 마지막 코스이기에 안내를 듣다가 모두 매점으로 몰려가 고 나와 집사람, 고령에서 온 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정몽주 선생님의 28대손이라는 여선생님만 남아서 격 의 없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려사에 대한 의견이 서로 조금씩 다른 것은 역사인식의 차이로 생각된다. 남과 북에서 각각 역사를 전공한 두 사람의 만남은 역사적인 절묘한 만남으로 보였 다.
대화 중에 왜 이성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했을까? 에 대한 안내원의 설명은 나라를 잃고 저항하는 세력 을 피해 한양으로 옮기면서 이제 개성은 氣가 모두 빠졌다하여 한양으로 추종 세력과 갔다는 설명이다. 혹 고려장(高麗葬)에 대해선 아느냐고? 했더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손을 휘 젓는다. 또 개성 깍 쟁이는? 그것은 장사하는 사람이 많아 가게쟁이가 변하여 깍쟁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짧은 시간의 만남이지만 많은 대화를 통해 이념과 사상을 떠나 인간의 참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또 만날 기약을 하면서 기념사진 한 장으로 아쉬움을 뒤로하고 버스로 돌아왔다. 오는 길 개성공단을 지나오면서 같은 하늘아래 너무 다른 현실에 마음 한구석 무거움을 느꼈다. 개성공단의 활성화로 제 2.3의 공단이 생겨 북한 경제의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우로부터 관광객 정 선생, 안내원 류씨, 우리부부>
개성관광을 마치며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 장벽을 극복하고 달려 온 시간이 얼마던가? 무표정과 무관심으로 시내를 오가는 개성시민들, 손 흔들며 우리를 반겨주던 골목길에서 놀던 어린아이의 생기 있는 모습을 보면서 어른들의 잘못을 반성해본다. 군 시절 우리부대 자주포의 사정거리 목표지점이 개성 시내였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추 억이 부끄럽다. 같은 언어와 풍습, 같은 얼굴 모양을 한 민족임을. 투박함 그대로 우리식대로 살아간다는 구호가 삶의 절규처럼 들려온다. 군사분계선을 넘어오며 꿈에 그리던 고향을 보고 가는 노부부의 독백이 귓가에 맴돈다
. “죽기전에 소원은 이루었지만 마음이 너무 아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