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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두는 창조의 기원 또는 하나가 다양한 개성적 형태로 갈라지는 세계를 만드는 지점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빈두의 입장은 산스크리트로 '나누다, 가르다'를 의미하는 어근 빈드(bind)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빈드 : 이것은 나누는 동시에 결합하는 접점이다. 따라서 결합의 의미를 지닌 단어도 파생되어 나왔다. 조임(banda), 친구(bandha). 영어의 결합하다(bind), 악단(band) 등도 같은 어원이다.
빈두는 차원이 없는 점을 의미한다.
산스크리트의 어떤 교본에는 뿌리가 무한한 의식에 있는 치드가나라는 말로 나와 있기도 하다.
빈두는 공의 상태인 슈나의 문으로 간주된다.
공은 무의 상태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사물이 아닌 상태, 즉 순수한 절대 무차별의 의식이다. |
빈두는 신비롭다.
그것은 두 개의 대립자, 영(0)과 무한,
충만과 텅 빔이 공존하는 신성의 초점이다.
빈두 안에는 우주의 수 많은 존재를 위한 진화의 잠재력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창조의 청사진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언급한 진화란 생명, 대상, 구조가 존재의
근본으로부터 나오는 정점의 초월적 과정을 말한다.
이 진화는 다윈의 진화론과는 그 개념이 전혀 다르다.
다윈의 진화는 나무나 동물의 종과 같은 특징의 개체가
어떤 기간에 걸쳐 형태, 작용, 외관상 변해가는 역사적 흔적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진화는 시간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적 기록이다.
그러나 개체의 안과 밖으로 진화하고 해체되는 의식의 진화는 무시간성의 영역에 있다.
우주에 수천만 가지 대상을 만들어내는 개체화 원리가 있다.
그것은 근본 의식 속에 내재한 잠재력이 빈두에서 모이도록 한다.
이 점에서부터 대상, 동물, 인간이 생겨날 수 있다.
각각의 모든 대상은 그 근본에 빈두를 가지고 있으며
창조의 자궁 히라니야 가르바 안에 놓여 있다.
이전에 무형으로 있던 것이 빈두를 통해 형상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형상의 성질은 빈두에 의해서 고정된다.
빈두는 의식 표현의 수단인 동시에 속박의 수단인 것이다.
빈두로부터 나오는 어떤 센터는 인간처럼 의식을 가진다.
그러나 5대, 돌 등 대부분의 센터는 의식이 없다.
의식적으로 되는 것과 무의식적으로 되는 가능성은
오직 개체의 성질과 구조에 의존하며 이 또한 빈두에 의해 결정된다.
사람은 자신이 의식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기구를 가지고 있다.
의식을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 모든 대상은
빈두의 매개를 통해 의식의 근본 정수에 연결된다.
모든 대상은 빈두의 매체를 통해 물질적 존재로 진화하고
또 빈두의 매체를 통해 다시 원천으로 돌아간다.
빈두는 양 방향으로 통하는 트랩도어(뚜껑문)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과 같은 의식적 중심이 사하스라르의 전체성을 깨달을 수 있는 수단이다.
근본적으로 두 형태의 인간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현현의 길(프라브릿티)로 가는 사람과
근원의 길(니르브릿티)을 가는 사람이다.
현현의 길을 따르는 사람은 빈두로부터 떨어져 바깥 세계로 가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전적으로
외부 사건에 의해 움직인다. 이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따르는 길이며 자신을 아는 것으로부터 멀어져 속박으로 인도되는 길이다.
근원의 길은 영적인 길,지혜의 길이다. 이 길에서 개인은 빈두를 바라보기 시작하며 자기 존재의 원천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 길은 우리를 해방으로 인도한다.
진화의 길은 현현과 외향의 프라브릿티의 길이다.
내적 진화의 길은 개체적 존재를 창조한 길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다.
그것은 빈두를 통하여 사하스라르로 되돌아가도록 인도한다.
사실 요가 수련의 목적은 내적 진화의 길로 의식이 운행하도록 돕는 것이다.
((붉은 빈두와 하얀 빈두))
만물은 빈두라는 우주적 씨앗으로부터 나와서 자란다.
정자 하나의 작은 빈두가 난자와 결합해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기 때문에 빈두는 종종 정액과 연관된다.
임신 행위는 빈두 원칙의 완전한 심벌이다.
사실 빈두는 많은 탄트라적 쿤달리니 요가의 교본에서 이와 같은 의미로 설명되었다.
<요가 추다마니 우파니샤드> (Yoga Chudamani Upanishad)에는
"빈두는 흰 것과 붉은 것 두 유형이 있다. 흰 것은 슈클라(정액),
붉은 것은 마하라즈(월경)이다." 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흰 빈두는 푸루샤, 즉 의식인 시바를 상징하고
붉은 빈두는 프라크리티, 즉 창조의 힘인 샥티를 상징한다.
흰 빈두는 빈두 비사르가에 놓여 있고 붉은 빈두는 물라다라 차크라에 있다.
탄트라와 요가의 목적은
이 두 개의 원리를 결합하여 시바와 샥티가 하나로 되게 하는 데 있다.
이 책은 계속해서
"붉은 빈두는 태양 속에 자리잡고 흰 빈두는 달 안에 자리잡고 있다.
그 둘의 결합은 어렵다."고 기술하고 있다.
태양은 핑갈라를 닮은 이다를 나타낸다.
두 빈두는 음과 양으로 대립하는 두 세계를 융합하는 것을 상징한다.
그 둘이 결합한 결과 쿤달리니의 상승이 일어난다.
붉은 빈두(샥티)가 프라나의 조절에 의해 위로 올라가면(쿤달리니 상승)
그것은 흰 빈두(시바)와 섞여 하나가 되고 신성하게 된다.
모든 요가 체계는 이 합일을 위해 여러가지 방법으로 프라나를 조절한다.
어떤 경우에는 프라나야먀처럼 직접적이고 어떤 경우는 간접적이다.
어쨋든 이 양극, 즉 시바와 샥티의 만남은 우리를 초의식으로 인도한다.
붉은 빈두가 흰 빈두로 녹아들어갈 때 이 두 빈두의 근원적 하나됨을 깨닫는 사람만이 요가를 안다.
쿤달리니 탄트라/박광수 옮김에서 빈두 비사르가 부분 발췌.
더 아시고 싶은 부분은 꼭 위책 "쿤달리니 탄트라"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아래 산야님의 글,요가 탄트라와 수행이라는 글에서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는,빈두에 관한 발췌글입니다. 지산...()...
좋은 자료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