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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文殊法供養會
44. 인과란 무엇인가? ①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아주 좋은 법공양을 받았습니다.
합창단이 법문을 다 해버리니 저는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부처님과 이런 좋은 인연을 함께하면서 정말 요즘 날씨와 같이 개였다 흐렸다 하는 우리의 인생, 또 때로는 천둥 번개가 치고 먹구름이 일다가도 혹은 푸른 하늘을 볼 수 있고 이러한 삶이 반복되는 사바세계에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면서도 위대하신 스승, 참으로 더없이 높은 깨달음을 성취하신 부처님의 주옥같은 교훈을 우리가 가까이 하면서 때로는 탐욕도 버리고, 때로는 세상을 다 태워버리는 듯한 분노의 불길도 일으키면서 살아가는 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러다가 때로는 저 좋은 노래의 법문과 같이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고자 하는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끔씩 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좀 더 깊어지고 반복되는, 천둥번개의 먹구름에서도 그것을 극복하면서 슬기롭게 헤쳐 나가면서 이렇게 살아가는 길 이것이 불교에서 우리에게 일러주는 삶의 한 방법이 아니겠는가하는 그러한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은 구룡사의 법회인 무량법회라고 하는 보름 법회입니다. 요즘은 달이 밝아도 달이 밝은지, 또 그믐인데도 불구하고 그믐인지를 모르고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고 또 도시인들이 사실은 그러한 것을 더욱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그러한 실정입니다.
이러한 상황일수록 부처님의 훌륭한 교훈을, 깊고 오묘한 교훈을 이러한 날 한 번씩 되새겨봄으로써 인생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고 또 열심히 정진하고 기도하고 염불하고 경을 읽고 첨선하고 이러한 반복되는 정진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참으로 의미 있고 깊이 있는 그러한 삶으로 전개되어 가리라고 믿습니다.
불교에서는 인과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또 그 인과는 당연한 것으로 우리가 생각합니다. 물론 당연한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깨달은 내용이 무엇인가? 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어떻게 생성하고 소멸하고 발전하고 이러한 일들을 거듭하고, 어떤 법칙으로 전개되어 가는가? 하는 그러한 이치를, 연기의 도리를 깨달으신 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불교를 우리가 안다고 하면 그 일은 결국 그 깨달음의 내용, 이 연기 법칙을, 단순한 지식으로서의 어떤 이해가 아니고 참으로 피부로 몸소 그 연기의 법칙을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이해한다면 운명론적인 그러한 인과관계 또는 연기의 법칙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인연이 그러니까 인과가 그러니까 이렇게 운명론적인 그런 자세에서 받아들이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내 삶을 더욱 적극적으로, 내 의지에 의해서 그 운명과 그 연기와 그 인과를 내 의도대로 이끌어 가고 방향을 잡아가는 그러한 각오와, 또한 그럼으로써 내 인생을 내가 주인으로써 내가 이끌어간다는 그러한 자세가 확립이 될 때 인연의 이치를, 인과의 법칙을 완전히 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과가 그러니까 인연이 그러니까 하고 이해하는 것은 반만 아는 것입니다.
인연의 이치가 그렇다면 내가 인연을 지어가겠다는 의지가 그런 연기의 법칙을 아는 데서 용솟음쳐져서 내가 하는 일을, 내 인생을, 내 가정을, 우리 사회를 우리의 의지로써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꿔가려는 자세가 있을 때 비로소 인과의 도리를, 인과의 이치를 제대로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과를 극복하는 길은 인과를 부정하고 인과가 없다고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분명히 인과가 있되 그것을 극복하는 길 이것을 우리가 모색하면서 내 인생을 내 의지로 엮어 가는 이것이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는 이익이고 불교를 공부해서 내 인생에 변화가 어떤 것인가를 생각했을 때 바로 주어진 어떤 인연을 내가 스스로 지어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같은 씨앗을 심어 놓고도 거름을 주고 안 주고에 따라 그 결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고, 김을 매느냐 매주지 않느냐에 따라서 그 곡식은 그 결실이 전혀 다른 차이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한다면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그런 인연은, 그런 인과의 도리는 잘 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지난 달포쯤 되나요. 영화 촬영하던 헬기가 떨어져 몇 사람은 죽고 그 중에 방송국 P.D가 한 사람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버스를 타고 가거나 승용차를 타고 가다가 강물에 빠졌을 때 거기서 정신을 잃지 않고 창문을 깨고 나온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헬기를 타고 강물에 떨어졌는데 그 헬기의 창문을 깨고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얼굴에 겨우, 상처가 입원할 정도는 아니고 그냥 반창고 정도만 붙이면 나을 수 있는 정도의 가벼운 상처를 입고 그런 정도의 입장에서 아무런 일 없이 탈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자들이 정말 뉴스거리고 너무나도 신기해서 이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러한 상황에서 살아날 수 있었느냐는 그런 질문을 하니까 이 분의 말씀이 아주 엉뚱합니다. 엉뚱한 그 말씀은 굉장한 교훈과 불교의 어떤 인과의 어떤 굴레를 우리가 극복할 수 있는 그러한 그 길을 저는 거기서 읽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냥 넘기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대답입니다.
어떻게 해서 살았느냐의 물음에 “저는 해병대 출신입니다.” 이 한마디였어요.
해병대 출신이 어떻게 됐다는 것이냐? 그 해병대 출신이라는 말씀 속에는 평소의 극기 훈련과 고도의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헤어나는 고도의 훈련을 평소에 많이 받아서 그쯤의 난관을 극복하는 것은 흔히 해오던 일이고, 얼마든지 있었던 그런 훈련의 한 과정이었다는 그런 표현이겠죠. 그러니까 옛날에 귀신잡는 해병이라는 영화도 있었듯이 해병대의 훈련이라는 것은 아시는 대로 아주 고도의 훈련을 요하는 군대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어느 정도의 가벼운 상처만 입고 헤어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아주 고도의 훈련을 쌓았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되겠지요.
우리가 불교를 인연으로 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또 인생을 부처님 안목으로 보았을 때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떤 결과가 우리에게 돌아오는가? 이것이 사실은 과제입니다.
이 세상과 인생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그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어떻게 살아가나 하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그렇게 살았을 때 우리에게 어떤 결과, 어떤 이익이 돌아오는가 하는 그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죠.
두말할 것 없이 우리 인생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그런 상식적으로 이해해오던 그런 보잘 것 없는 또는 육체만을 내 인생의 전부라고 하는, 그런 정도의 우리들의 이해를 벗어나서 부처님께서 사람의 본질, 인생의 본질을 꿰뚫어 보아서 그 가르침대로 인생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생의 이런저런 정의가 많습니다.
그러나 한 마디로 표현하면 우리는 교육수준이 어떻고, 사회경험과 또는 신체적인 조건, 그리고 내가 쌓아올린 어떤 경험, 경제적인 능력 이런 것은 어느 정도라고 하는 것을 우리 나름대로 평가하고 있죠. 그러나 그것이 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지만, 부처님의 안목으로 볼 때에는, 정말 열려 있는 눈으로 깨어 있는 눈으로 볼 때에는 그러한 것은 한 순간에 지나가는 사소한 것에 불과한 것이고 참으로 우리들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진실한 생명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잘 것 없는 그런 인간에 불과한 그런 차원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의 마음의 무한한 능력과 무한한 가능성을 제발 좀 이해해서 그것이 너의 진실의 것으로 알라. 너의 본래의 면목은 너의 참 얼굴은 네가 이해하고 있는 그러한 모습이 아니야. 참으로 이점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안타까운 일이다. 스스로 흙덩어리인양 또는 돌멩이인양 아니면 무쇠덩이인양 이렇게 하찮게 취급하고 있지만, 사실 내가 볼 때는 거대한 다이아몬드로, 무한한 값어치의 다이아몬드로 빛나고 있는 그런 지극히 존귀한 존재인 것이 사람의 참 모습이고 인간의 진실 생명인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신기한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화엄경에 보면 신기하다고 표현한 대목이 있습니다.
‘참 신기하다 정말 이것은 너무나도 신기한 사실이다. 무엇이 그리 신기한가보니 인간이 지니고 있는 그 내면의 세계가 너무나도 신기하다.’
당신은 육년이라고 하는 세월동안 피나는 고행을 거쳐서 비로소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고서 그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쳤지만, 그 깨달음의 눈으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펴보니까 우리 그 한 사람 한 사람 내부에도 당신의 그 위대함과 똑같이 조금도 차이가 있지 아니하고 그대로 당신의 모습 그대로 빛나고 있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노력에 의해서 갈고 닦은 것이 그 정도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갈고 닦기 전에 이미 성품으로써, 바탕으로써, 본질로써 당신과 같은 위대성이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다 가지고 있더라 하는 것이 부처님의 사람에 대한 올바른 안목으로 올바른 이해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것을 염두에 새기고 내 인생에 하는 것 사람의 진실이라 하는 것은 내가 이해하고 있는 그러한 하찮은 것이 결국 아니고 무한한 가능성과 무한한 능력이 있는 것이구나. 그래서 우리는 성불이라는 말을 곧잘 합니다.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죠. 부처도 되는데 자질구레한 어떤 세속적인 꿈을 이루지 못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어떤 성공은 충분히 거두어들일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진실 생명에 대한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어떻게 하면 그것을 일깨워내고 내 삶으로 일구어 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말할 것 없이 지혜롭게 사는 것이고, 그 지혜를 바탕으로 해서 무한히 정진하는 그런 일이라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 불교를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고 여섯 가지 아주 좋은 실천 덕목 중에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 여섯 가지 덕목 중에 지혜라고 하는 것이 맨 나중에 있는데 지혜는 눈이라고 하는 말로 우리가 대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여기까지 오기까지 빛이 있고 또 우리의 눈이 있어서 아무 사고 없이 넘어지지도 않고, 어디에 부딪치지도 아니하고 무사히 이 자리에 올 수 있었습니다.
또 돌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밝은 눈이 있는 까닭에, 또 밝은 빛이 있는 까닭에 무사히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불교에서는 지혜를 아주 중요시 여깁니다.
열심히 살 줄 아는 사람 ,열심히 정진할 줄 아는 사람이 결국 지혜로운 삶이라는 뜻입니다. 지혜가 없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입니다. 열심히 정진하는 사람은 지혜가 있어서 열심히 정진하는 사람입니다. 꾀가 있고 수단이 있어서 놀고먹는다고 하는 그런 표현하고는 다르죠.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피나는 노력과 끊임없는 정진을 계속하는 사람이 바로 사실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지혜에 의해서 열심히 정진하고 참선과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법문을 듣고 경전을 읽고 절을 열심히 하고 하는 그러한 각양각색인 그런 취미에 맞는 자기 수행을 펼쳐가므로 해서 평소에 온갖 어려움과 고통과 문제들을 전부 극복 할 수 있는 그러한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길을 모색할 줄 아는 그 마음이 결국은 지혜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께서 제시한 그 지혜로운 삶을 통해서 열심히 정진을 평소에 쌓음으로 해서 하루 중에도 구름이 끼고 천둥번개가 치고 또는 비도 오고 그러다가도 개이기도 하는 여름 날씨와 같이 우리 인생도 하루도 또는 일 년도 또는 한 생에도 가만히 우리가 생각해보면 수없이 비오고 구름 끼고 천둥번개치고 또 용광로와 같이 분노의 불기로 타오르기도 하고 별별 어려움과 난관이 많습니다.
그랬을 때 우리가 쌓은 정진과 기도하는 힘이라고 하는 것이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요즘은 겨울철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지혜로써 냉장고라던지 또는 공기를 시원하게 하는 또는 추울 때는 따뜻하게 할 수 있는 온갖 기구들을 만들어 가지고 어느 정도 극복을 합니다. 이게 또한 슬기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과를 극복하는 길이 바로 거기서 열린다는 것입니다.
위에 예를 들었듯이 헬기를 타고 한강에 빠졌는데도 거기서 가벼운 상처로 살아나올 수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온갖 불행과 고통을 겪습니다.
또 이 순간 우리도 많은 문제를 지닌 체 이 자리에 오셔서 또 이렇게 정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문제들을 슬기롭게 해결하고 극복하는 길은 참선과 기도와 정진을 부지런한 그 정진에 의해서 만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열심히 정진하는 삶만이 그것을 극복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마지막 열반에 드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인생은 무상하다 열심히 정진하라.”라는 말씀을 수차 하시고는 열반에 드셨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열심히 정진하면서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소에 열심히 정진해 놓을 경우 설사 어떤 불행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행을 겪지 않으면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해라고 하는 까닭에 괴로움의 바다에 빠져있는 사람치고 옷 젖지 않는 사람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문제는 때로는 고통과 불행을 겪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들 인생인데 그러한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것을 우리가 인과라고 합시다. 내가 인연을 그렇게 지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일억의 빚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일억이라는 가치는 똑 같습니다만 그러나 오천만원의 재산을 가진 사람은 거기서 오천의 빚을 갚고서도 오천만원의 빚이 남았습니다. 그러나 백억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일억의 빚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일억의 가치는 같지만 빚의 무게는 천지차가 됩니다. 오천만원의 재산은 오천만원을 갚고도 남았지만 그래서 평생 다 갚을 지 못 갚을지 그러한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러나 백억의 재산은 일억의 빛을 갖고서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평소에 쌓아야할 정진의 필요성을 거기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백억의 재산가라고 일억을 안 갚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과를 부정하는 게 아니죠. 얼마든지 일억의 빚이 있다면 그까짓 일억의 빚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과를 극복하는 길이 거기서 열린다는 것이죠. 평소에 고도의 훈련을 쌓았기에 헬기의 창문을 깨뜨리고 살아나올 수 있는 거와 같이 우리가 평소에 열심히 정진을 쌓아 놓으면, 지혜를 갈고 닦아 놓으면 어떠한 어려움에도 그것을 극복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큰 불행이라고 하더라도 그때는 이미 큰 불행이 아닙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죽음의 문제까지도 극복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까지도 벗어날 수 있는데 그 외의 다른 일이야 말 할게 있겠습니까? 다른 자질구레한 문제는 평소에 열심히 쌓아놓은 정진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계속)
첫댓글 생사해탈...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