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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 <제 20회>
씬 1 궁예의 군영(밤)
지난 회에 장면이 연결된다. 허월이 궁예를 노려보고 있고 안광을 번득이며 다시금 소리지른다. 여러 장수들과 병사들이 그런 허월을 보고 있다.
허월 이 엉터리 중아, 다 속여도 이 늙은이의 눈은 속이지 못할 것이니라. 어서 그 가증스런 가면을 벗어라.
궁예 .......(전혀 흔들리지 않고 담담하다)
종간 .......?
허월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너는 미륵의 이름을 팔아 한 나라를 사려고 하고 있다. 그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뭇생명들이 죽어가고 있느냐. 이 사악한 죄를 어찌 다 갚으려 하느냐. 내 말이 틀렸느냐?
장수들의 눈이 크게 떠지고 있다. 환선길이 얼굴을 찌푸리고 신훤과 원회들이 다가가기 시작한다. 종간과 은부들은 그냥 보고 있다. 미향도 보고 있다. 갑자기 궁예의 웃음소리가 크게 터진다.
궁예 대사께서는 과연 도인은 도인이신 모양이시오. 이 궁예가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어찌 아셨소이까?
복지겸 .........?
궁예 그렇소이다. 나는 미륵의 이름을 팔았소이다. 그리하여 그 나라를 세우려 합니다. 나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죽음과 절망 밖에 없는 이땅에 삶의 희망을 주었소이다. 무엇을 거짓이라 하며 무엇을 참이 아니라 하시옵니까? 대사는 일러 보시구려.
허월 나라를 얻기 위해 미륵을 팔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
종간 (나서며) 참으로 무엄하시오, 대사. 우리 장군께서 손님의 예로 대하시기에 보고 있었습니다마는.... 어찌 이런 무례를 계속하신단 말씀이오. 신장군!
신훤 예, 군사.
종간 이 노인네를 당장 군영 밖으로 끌어 내가시오. 참으로 무례하오.
그러자 다시 허월이 웃는다.
허월 그만 되었다. 되었어... 입을 다물터이니 그만하자꾸나. 허허허...
종간 어서 끌어내시오.
허월 허허, 이런.. 개도 밥먹을 때는 건드리지 않는다 하였다. 나도 먹던 것이나 다 먹고 나가자꾸나. (궁예 보고 웃으며) 아니 그러한가?
궁예 허허허, 맞사옵니다. 어서 드시지요. 비록 식량은 다 떨어져 가지만 그래도 곡차는 안에 두어병 남았을 것입니다. 제가 뫼시지요.
허월 곡차? 좋지, 그거 좋아. 하하하....
궁예 자, 모두들 물러가시구려. 대사 어서 드시지요?
허월 암, 주먹밥이 참으로 맛있네 그려. 늘 그렇지, 쌀 떨어질 때는 밥맛이 더욱 좋은 법이거든, 아니 그런가?
궁예 .......(미소)
씬 2 동 궁예의 거소 외경 (밤)
허월 (E) 핫하하하.. 하하하하..
씬 3 동 궁예의 거소 안
술에 취한 허월이 계속해 웃고 있다. 궁예도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허월을 마주보고 있다.
허월 그대는 역시 큰 도적이로고... 대부분 숨기고 있던 것을 들키게 되면 움치리는 법인데 담도 크네 그려.
궁예 허허허..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허월 그렇게 하세.
그때 소리없이 휘장이 걷히고 미향과 시녀들이 안주를 보아와 상에 얹어준다. 보잘 것 없는 나물 두어 가지다.
허월이 그런 미향을 본다.
허월 갑자기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오셨나?
미향 ......
허월 그대는 누구신가....? 행색을 보니 시중이나 드는 아랫사람은 아닌 것 같고....?
궁예 세상이 짝이 되라고 맺어준 여인이올습니다.
허월 그렇다면 안해란 말인가?
궁예 허허허....그리들 말을 합니다마는, 글쎄올습니다.
허월 (발작적으로 웃음) 핫하하하... 이런 일이 있는가? 아니 미륵도 여인을 안는단 말인가?
궁예 주고 받는 것이 모두가 보시가 아니겠사옵니까? 남에게 베풀수만 있다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허월 베풀려고 하는 일이다.....? 마치 참 부처가 된듯한 말일세 그려.
궁예 그보다도 대사. 나는 참으로 궁금하옵니다. 어디서 오신 분이시며 무엇하시는 분이시옵니까?
허월 (한참 보다가) 뭐가 그리 알고싶은가?
궁예 미련한 소승이 보기에는 이미 한 소식 하신 듯 하옵니다. 한 소식을 하려면 한 세상을 버려야 하는 것인데, 대사께선 무얼 버리시고 무얼 얻으셨사옵니까? 왜, 이 궁예의 곁을 맴도시옵니까?
허월 ........?
궁예 말씀해 주시지요? 대사께서는 어디서 오신 분이시옵니까?
허월 어허, 취하는구먼...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던간에 그게 무슨 소용인가? 우리는 길거리에서 만났지만 어느새 이렇게 동무가 되지 않았는가? 어이, 취한다.....
궁예 대답을 피하고 계십니다. 대사께선 누구시옵니까?
비로소 허월이 묘하게 궁예의 얼굴을 뚫어져라 본다. 그쯤해서 미향과 시녀는 기척을 내며 조용히 물러난다. 여전히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있다.
허월 (갑자기 진지해지며) 자네는 참으로 자네가 부처라 생각하는가?
궁예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누구나 다 부처가 아니겠사옵니까?
허월 그 깊은 가슴속에는 뭘 숨겼는가?
궁예 내겐 숨긴 것이 없사옵니다.
허월 있어. 그건 욕망과 분노야. 애꾸가 되어버릴 수 밖에 없었던 어린 날의 그 억울함과 분노. 왕실에서 태어나 왕관과 옥좌를 빼앗겼던 분노.
궁예 ........ (굳어있다) ........?
허월 내 눈은 속이지 못하네. 자네는 다 버리고 다 던졌다고 하지만 그 속에는 불지펴진 욕망과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어. 피끓는 분노 말일세. 아닌가?
궁예 (미소) 나에 대해서 많이도 알고 계십니다. 하긴 어릴 때는 그랬습니다. 허나 나는 버렸습니다. 새 세상을 위해 다 던졌습니다. 대사야말로 아직도 법력이 약하신 모양입니다. 대사의 눈과 마음이 욕망과 분노에 가 있으면 상대도 그리 보이는 법이 올습니다.
허월 .........?
궁예 허월 대사야말로 아직 버리지 못하고 계십니다. 이제 이 궁예를 그만 시험하시오소서. 자 이르시오소서. 어디서 오셨습니까?
허월 .......?
씬 4 동 명길의 처소
명길과 복지겸, 종간, 은부, 신훤, 원회, 환선길, 이흔암 등이 모여 있다. 뻥해서 보는 명길.
명길 돌아오라니..? 북원으로 말인가?
은부 예, 대장군의 명이시옵니다.
명길 허, 이거야.. 형님께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게야? 복부장, 자네가 말해보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겐지?
복지겸 (한숨처럼)....사정이 그리 됐사옵니다. 제 혼자 힘으로는 어쩔수가 없었사옵니다.
명길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는구먼....궁예를 의심해서 북원으로 오라고 하였단 말씀이야. 그래서 궁예는 갔고 이곳은 내가 맡았어 헌데 불과 며칠이나 되었다고 세상이 또 바뀌어 버렸어..?
모두들 ......?
명길 어떻게 된 것이 이번엔 아주 보따리채 모두 싸가지고들 왔어. 이것이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일인가? 내 형님을 흔들어 놓은 것이 누구인가?
은부 ......
종간 ......
복지겸 지난 일을 말해 무엇하겠사옵니까? 돌아갈 차비를 하시옵소서.
명길 돌아간다? 나만 돌아간다? 허어, 이거야...
환선길 곧 이곳에서는 전투가 벌어질 것이옵니다. 장군께서는 속히 북원으로 가시어서 대장군을 도우셔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북원에도 사람이 없으니 말이옵니다.
명길 (답답해서) 내 말이 그말일세. 왜 거기는 몽땅 비어놓고 자네들이 이곳으로 다 왔느냐 이 말이야?
이흔암 아 그거야 대장군께서 가라 하시니 갈 수 밖에요. 군령을 어찌 안따르겠사옵니까?
명길 군령이라... 군령이라... 이건 분명 뭔가 잘못된게야.
종간 장군도 군령을 받으셨으니 속히 차비를 챙기시오소서. 길이 만만치 않사옵니다.
명길 (열 받아서) 뭐라?
종간 군령 이야기가 나와서 드리는 말씀이옵니다.
명길 허어, 이런. 요즘 젊은 것들이란 통 예의가 없어놔서....어흠... (사위1에게) 갈 차비를 차리게.
사위1 예, 장군
씬 5 궁예의 거소
여전히 마주해 있는 두 사람.
궁예 말씀 아니하시겠습니까? 대사께선 누구시옵니까?
허월 (한참 보다가 웃음) 머지않아 알게 될걸세. 내일쯤은 알겠지.
궁예 .......?
허월 곡차 더 있는가?
궁예 벌써 이 독주를 여러 병째 비었사옵니다. 대사의 주량도 어지간 하시옵니다. 허허허....
허월 이보아라, 궁예야.
궁예 ........?
허월 그래, 너는 역시 재목이 틀림없구나. 내가 오늘 왜이리 독주를 많이 마신줄 아느냐?
궁예 ........
허월 나는 부질없음을 아느니라. 권력도 영화도 또 제왕의 왕관도 그것이 다 소용없음을 보았느니라. 허나, 그릇이 작다보니 보기는 보았으되 놓치를 못하고 있구나.
궁예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이미 다 아시는 분이 놓고 아니 놓고를 왜 못하시옵니까?
허월 허허허허.... (계속 실성한 듯 한참을 웃는다) 궁예야 .
궁예 .....말씀 하시오소서.
허월 (한참 보다가) 명주를 네가 갖거라.
궁예 .......... 뭐라 하셨사옵니까?
허월 명주를 네게 주마.
궁예 대사님..
허월 (갑자기 딴청을 부린다) 너무 마셨어...졸립고 취하는구나. 자야겠다.
허월은 그대로 쓰려져 코를 곤다. 궁예는 표정이 굳은채 허월을 내려다 보고 있다. 참으로 예삿 중이 아닌 것이다. 허월은 누굴까?
씬 6 궁예의 군영 외경 (새벽)
새벽의 여명이 밝고 있다. 각 군막과 군영들 사이로 군사들과 횃불들이 오가는 것이 보인다. 망루마다 깃발이 펄럭이고 여전히 군영은 전쟁 분위기로 가득해 있다.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명길이 여러 장졸들의 환송을 받으며 나오고 있다.
궁예 먼길을 가셔야 겠사옵니다. 조심하시오소서.
명길 형님의 명을 받았으니 가기는 가네만. 이보게 조카사위?
궁예 말씀하시오소서.
명길 한동안 내가 이곳에 있으면서 느낀 바가 많았네. 우리 형님은 자네에게 속았어. 은부에게도 속았고... 자네의 군대는
삼한의 최강일세. 모두들 .......
명길 헌데 우리 형님은 자네를 모르고 있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천하를 얻기가 그렇게 어려운데도 버리는 것은 이처럼 찰나일세. 아니 그런가, 복부장?
복지겸 ......
명길 복부장 자네만 믿고 가네. 들 가세.
궁예 조심히 가시오소서.
명길, 가다가 궁예를 돌아본다. 알쏭달쏭한 쓴 미소를 짖고는 다시 등을 돌려 멀어져 간다. 가다가 명길이 선다.
명길 이보게, 조카사위. 명심하게나. 만약에 우리가 전장에서 다시 만나게 될 때에는 자네는 내 칼아래 죽을 것이야.
궁예는 대답이 없고, 명길은 다짐을 주듯 한 번더 눈길을 주고는 그렇게 사라져 간다. 보고있는 그들의 모습이 면면이 다 다른 모습이다. 종간과 은부만 빼고는....
씬 7 어느 들판
궁예와 제장들이 수없이 펼쳐진 군막 사이에서 먼 지평선을 보고 있다. 한동안 긴 침묵이 흐르고 있다.
종간 장군...
궁예 말씀하시오.
종간 드디어 군량미가 끝이났사옵니다.
궁예 ........
종간 속히 진군의 명을 내려주시오소서. 그 길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사옵니다.
모두들 ........?
궁예 그렇소이다. 선택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을 때, 결단은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것이오. 이제 우리의 선택은 싸워서 이기는 것 뿐이외다. 지면은 죽는 것이고 끝입니다.
제장들 .......
궁예 누구나 죽는 것은 싫은 것입니다. 이 궁예도 마찬가지지요. 그래서 명주성은 우리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살아서 저 안에 있어야 하니까요. 아니 그렇소이까, 복장군?
복지겸 ..........
궁예 고양이가 아무리 세다 한들 독이 오른 쥐를 이기지는 못합니다. 복장군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이기겠소이까, 저 명주성의 성주 김순식이가 이기겠소이까?
복지겸 ........
종간 복부장께서 한말씀 하시구려.
복지겸 이 전쟁은 아마도 궁장군님의 승리로 끝이 날 것 같사옵니다.
그러자 궁예가 호탕하게 웃는다. 모두들 따라 웃는다. 은부가 거든다.
은부 잘 보았네. 우리가 이길 것일세. 우리의 선택은 바로 저 성밖에는 아무것도 없거든...
궁예 모든 것이 끝났소이다. 제장들은 소속 부대를 재정비하고 영을 대기토록 하시오.
모두들 예, 장군
궁예 원장군.
원회 예.
궁예 명주에 다녀와야겠소. (서찰을 내놓으며) 이 서찰을 그곳 성주에게 전하시오. 우리와 맞서 싸울 것인지 아니면 성문을 열것인지 그 결단을 알아오도록 하시오.
원회 예, 알겠사옵니다.
원회가 대답하고 서찰을 받아 사라진다. 궁예가 몇 발자국 걸어가 한 번 더 지평선을 바라본다. 종간과 은부들이 함께 바라보고 있다. 그 위로 끝없이 일고 있는 흙먼지와 황톳바람.
궁예 우리는 반드시 저 명주성에 입성할 것이오. 아마도 가장 힘든 전투가 될 것이오.
종간 그렇사옵니다. 주군의 세상이 열리는 것이옵니다. 천하를 세우는 기본이 저 곳에서 이루어질 것이옵니다. 천하를 여시는 것이옵니다.
그 황톳바람 위로 마른 번개가 지나쳐 간다. 하늘을 보는 그들의 표정에서....
씬 8 세달사 외경 (부감)
씬 9 동 세달사 어느 암자
이곳에서도 마른 번개 소리는 계속되고 있다. 암자 밖 저만큼 바윗가에서 여전히 도선이 앉아 참선에 잠겨 있다. 마치 늙은 고목처럼 모질게 부는 바람소리에도 미동도 없이 그렇게 앉아있다.
도선 (E) 공자, 거긴 뭐라 씌여 있는고..... 삼한의 땅이 어찌 생겼던고....
카메라 도선에서 멀어지며 암자의 방쪽으로 서서히 다가들면서...
왕건 (E) 보이옵니다. 이 글은 말하고 있사옵니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좋은 것은 속세를 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좋지못한 땅을 피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도선 (E) 또 무엇이라 하였는고?
왕건 (E) 곤륜산(崑崙山) 한 가닥이 큰 사막의 남쪽으로부터 뻗어 동쪽에 이르니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되었고 여기에서 크게 끊어져서 요동벌판이 생겨났느니라.
도선 (E) 계속 해 보게.
왕건 (E) 이 들판을 지나 다시 거대한 산이 솟아나니 일러 백두산이 되었는데 산정기가 북쪽으로 천리를 달려가며 두 강을 끼었고 남쪽으로 향하여 뻗어가니 백두대간의 우두머리가 되었느니라.... 이 땅 삼한의 지세는 동, 남, 서가 모두 바다이고 북쪽 한길만이 요동으로 통하니 산이 많고 평야가 적으며 백성은 유순하고 조심하므로 기개가 옹졸하다 하였습니다.
왕건이 글을 읽어 내려가고 있다. 책에는 선명한 글들이 보여온다.
씬 10 다시 암자 밖
왕건에게서 화면은 밖의 도선으로 이어져 온다. 그리고 그 도선에서 암자 주변의 기암절벽과 협곡들이 보여져 온다. 카메라가 그것들을 거쳐 폭포에 이르는 동안 그 위로 왕건의 소리들은 계속되어 온다.
왕건 (E) 삼한의 땅은 길게 삼천리에 걸쳐 있으나 동서로는 천리도 못되며 오로지 남북사이에 긴 산과 땅이 있느니라. 그 인심들이 산과 강의 생김새에 따라 다 다르고 바다와 접한 모습에 따라 다 다르니 이를 살펴 알아야 할 것이니라 이르셨습니다.
도선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도선 (E) 하하하.... 그것이 내가 말한 도선비기의 시작이로다. 이제 그대는 그 책을 통해 삼한 땅 곳곳의 생김새와 인심에 대해 알게될 것이니라. 산과 강을 알고 사람의 인심을 안다는 것은 천하를 아는 것과도 일치하는 것일세. 이제 그것들은 한점 한획도 빼놓지 말고 다 익히도록 하게. 세상이 보여 올것이야. 하하하... 하하하...
씬 11 예성강 포구
왕륭이 한씨와 함께 포구 주변을 거닐고 있다. 더욱 늙고 초췌한 모습이다.
한씨 건이는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사옵니다. 세달사에 간지 꽤 되었는데....
왕륭 걱정마시오. 건이는 지금 도선대사님과 함께 있습니다.
한씨 대체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그곳으로 가셨을까요?
왕륭 (한참 말이없다가) 아마도 이 송악의 운명과 관련된 것이겠지요
한씨 정말 그럴까요?
왕륭 천지가 요동치고 있어요. 이 송악도 그리 오래가진 못할 겝니다.
한씨 .....?
왕륭 도선대사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곳에 오신거예요. 왜냐, 우리 건이가 송악은 물론이고 삼한을 구한다 했으니까요.
한씨 (두려움) 그것은 예언일 뿐입니다. 나으리께서는 지금까지 그 예언에 너무 많은 것을 걸고 계시는 듯 하옵니다.
왕륭 믿을 수 밖에요.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많은 재산과 이 송악성을 가지고 있어도 힘있는 자들 앞에는 하룻저녁 요깃거리 밖에 안되는 것이예요.
한씨 ........?
왕륭 우리 조상님들과 나는 한 고을의 부자보다는 한 세상의 주인이 되기를 꿈꾸었습니다. 건이가 그것을 이루어 줄겁니다. 대사의 예언이 맞을 거예요.
한씨 이곳 포구도 예전같지가 않사옵니다.
왕륭 사방이 들끓고 있는데 장사인들 되겠소이까? 쯧, 오늘 배 몇척이 들어온다고 해서 겸사겸사 온 것이예요. 부인도 답답하실 테고.. 해서 함께 온것이고....
한씨 호호호, 고맙사옵니다. 어디 밖에 나갈 여가가 있어야지요. 강장자 내외분도 오신다지요?
왕륭 그 사람들 물건도 이곳에 도착을 하니까요. 오랜만에 그 핑계로 술이나 한잔 또 하고...그런 것이지요. 허허허....
씬 12 그 포구 일각
왕평달과 식렴, 그리고 두 사부가 함께 해 있다. 저만큼 도착한 배에서 짐을 부리는 수많은 짐꾼들이 보인다. 그리고 지나치는 군사들 하며... 왕식렴이 짐꾼들을 이리저리 부리고 있다.
왕식렴 물목마다 다 나누어 창고로 옮기도록 하게. 소금은 수량을 확인하여 넣도록 하고 비단과 인삼은 따로 근을 달아서 봉해 놓토록 하게.
짐꾼1 예, 공자님.
왕식렴 유리 세공품은 깨어지기 쉬우니 잘 다루도록 해야 할것이야.
짐꾼1 알겠사옵니다.
왕식렴 곧 신천에서 강장자 어른이 오신다. 함께 온 그분의 물목들은 잘 챙겨서 보내드리도록 해야 할 것이야.
짐꾼들 예.
그런 왕식렴의 모습을 두 사부와 평달이 보고 있다.
마사부 어르신, 작은 공자분께서도 이제 포구쪽 일이 훤하신 것 같사옵니다. 허허허.
왕평달 저 아이도 어려서부터 얼마나 많이 장삿일을 보아왔는가.
변사부 아주 맡기실 요량이시옵니까?
왕평달 형님의 생각이 그러신 듯 하이. 허기사 다음의 이 송악을 맡아야 할 조카 건이일세. 더 이상 장사에 메달리게 해서는 아니될 것이야. 지금은 예전과는 다르니까.
마사부 하긴 그렇사옵니다. 장삿일보다는 칼과 군대가 더 필요한 세상이 되었으니까요. 아니 그렇소이까, 변사부?
변사부 허허, 그러게 말입니다. 칼과 군대를 중요시 한다는 것은 좋은 세상이 아니지요.
그때 저만큼 강장자 일행들이 오고 있다. 왕식렴이 먼저 인사를 하고 평달과 사부들도 예를 올린다.
왕식렴 어서 오시오소서.
강장자 오랜만이구먼. (평달에게) 오랜만이오? 성주님은....?
왕평달 저 쪽에 계시옵니다. 모처럼 내외분이 나오셔서 바람을 쏘이고 계시옵니다.
백씨 호호호, 우리도 그래서 나왔습니다. 날씨를 보면 화창한 것이 영락없는 꽃놀이 철인데 시국이 어수선하니 그것도 못하고.... 가자, 연화야.
연화 예, 어머님.
이들 한쪽으로 가는데, 유금필과 진서방이 그 자리에 남아있고 사부들과 묵례를 나눈다.
유금필 어른들께서 술상을 벌리실 모양이십니다 그려, 허허허..... 우리도 차 한잔쯤이야 있어야 할게 아닙니까?
진서방 그래도 차보다는 술이 났습지요, 헤헤헤.
마사부 그럼 우리도 차한잔 하십시다. 허허허
이들은 모두 웃는다.
씬 13 그 일각
바닷가가 보여오는 어느 정자이다. 왕륭 내외와 강장자 가족이 상을 마주하고 있다. 술을 마시는 이들....
왕륭 화전놀이를 가시지 못해 섭섭하시다구요?
백씨 그렇지 않사옵니까, 성주님? 예전에 이맘때 같으면 얼마나 좋았사옵니까? 여러 장자분들이 모여서 사냥도 하고 음시고 즐기고 그러지 않았사옵니까?
강장자 허허허, 그랬구말구. 참 좋은 시절이 많았는데...
왕륭 그랬지요, 그랬어요. 허허허....
한씨 화전놀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 이렇게 바닷가 정자에 나와 있습니다. 아쉬운 대로 마음들을 푸셔야겠습니다. 호호호호.....
백씨 예, 마님. 호호호호.......
왕륭 자 드십시다.
남자들은 술을 마시고 여인네들은 차를 마신다. 연화는 먼 바다를 본다. 수십척의 상선들이 물결위에 출렁거리고 있다. 그런 연화를 왕륭이 본다.
왕륭 연화가 사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강장자부부 ..........?
왕륭 그래도 대를 이을 사람이 있었어야 했는데 말이지요?
강장자 우리야 늙으면 그만입니다. 없는 사내아이 탓할게 뭐 있겠습니까마는 우리 연화..... 머리라도 올리는 것을 보고... 뭘 해도 해야 할것인데...
그러자 분위기는 삽시간에 어색해진다. 모두들 왕륭을 본다. 왕륭은 입맛만 다시고 있다.
백씨 더 끌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성주님, 이번에 아예 날을 좀 잡으시지요?
왕륭 ......... 글쎄요, 그것이......
한씨 ........
연화가 보다가 어색한 듯 일어서는데
왕륭 아무래도.... 아이들의 혼사는 좀 미루어야 겠습니다.
강장자 더 미룰 것이 무엇이오이까? 이미 아이들의 나이가 차고 넘었습니다.
왕륭 나느 그렇게 생각 안합니다. 모든 것은 불여튼튼이라.... 우리 건이가 확실하게 이 송악을 이어받고 난 후에 혼인을 시키고 싶습니다.
한씨 예, 그렇습니다. 이제 다 되가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요. 얼마 아니 남았습니다.
백씨 세상이 조석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꾸 뒤로 미루다가는....
한씨 부인, 잘 될것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강장자 그만 하십시다. 우리가 자꾸 보채는 것도 민망한 일이고....하기야 한 번 정한 혼사인데 조금더 미룬들 어떻겠소마는...... 요즘 같아서는 밖에 소문을 듣기가 무섭소이다. 하룻밤 자고 나면 몇 개의 고을들이 주인이 바뀐다는 거예요. 궁예 얘기 들어보셨습니까? 그자가 벌써 명주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겁니다. 명주성 말이예요. 부하만 수천명이라는 거예요.
모두들 .......?
씬 14 궁예 군영 외경
모든 전투 준비들이 끝났다. 장수들과 군사들이 열을 지어 영을 기다리고 있다. 그 시야로 궁예가 거처하는 군영이 보인다.
궁예 (E) 허월 스님이 사라졌다구요?
씬 15 동 궁예의 처소
궁예와 제장들이 모여 있다.
은부 예.. 아마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떠난 것 같사옵니다.
궁예 하하하... 이제 술이 깨신 모양이구먼... 본래 불제자들이란 오고감이 다 자유로운 것이 올시다. 이미 가셨으면 그분 일은 잊기로 하고..... 종간군사?
종간 예, 장군.
궁예 전투 준비는 어찌 되어가오?
종간 군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옵니다.
궁예 (끄덕이며) 공격명령은 전령으로 간 원회장군이 돌아오면 내려질 것이오. 오늘밤 안으로 모든 것을 끝내야만 하오. 이기느냐, 지느냐?
모두들 .........
신훤 대답은 뻔한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여지껏 버텨온 저들이옵니다.
환선길 그렇소이다. 투항을 할 생각이 있었으면 벌써 했을 것이 아니오이까?
이흔암 그렇지요. 괜히 시간만 늦추지 말고 공격령을 내리시지요?
궁예 어차피 전령이 갔으니 기다려 보십시다. 지금쯤 만나고 있을 것입니다.
씬 16 명주성 외경 (낮)
씬 17 동 성안
성주 김순식을 중심으로 그의 막료들, 김언, 종회, 김락, 백옥삼, 홍유, 염장 등이 좌우로 늘어서있다. 큰 주를 대표하는 주치소가 있는 성이다. 규모가 대단하다. 원회가 성주 밑에 부복해 있고, 김순식이 서찰을 보다가 원회를 지긋이 노려본다.
김순식 .......(냉소하듯) 항복을 하라?
원회 항복이라기 보다 거룩한 미륵 성전에 함께 참여하자는 것이오이다.
홍유 닥쳐라! 어느 안전인 줄 알고 미륵 운운하는 것이냐?
백옥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작은 고을 몇 개를 차지했다고 감히 명주를 넘봐?
홍유 성주님, 저들의 방자함이 끝이 없사옵니다. 속히 전투 명령을 내려주시오소서. 도적의 무리들을 모두 쓸어 버리겠사옵니다.
백옥삼 성주님..?
김순식 (한참 말이없다가) 그대들의 주군이라는 궁예장군은 미륵을 칭하고 있다고 들었네. 미륵이라.. 과연 그러한가?
원회 우리 모두는 그렇게 믿고 따르고 있사옵니다.
김순식 이유없이 전란을 일으키고 남의 영토를 넘보는 것이 과연 미륵이 할 일일까?
원회 그렇지가 않소이다. 우리 주군께서는 의로서 일어나..
김순식 (자르며) 또한, 그대들의 수장은 북원의 적도 양길의 수하가 아닌가? 양길은 도적이야. 초적이란 말일세. 내가 알기로 글한자 읽지 못한다고 들었네. 그런자의 부하가 되어 이곳으로 왔는데 미륵은 무슨 미륵?
원회 성주께서는 우리 장군을 모르시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김순식 모르다니, 내가 뭘 모른다는 것인가? 나는 다 알고 있어. 지금까지 그대들이 지나온 내력을 다 보고 있었단 말일세. 자 할말이 또 있는가?
원회 .........? (미쳐 대답을 못하고 있다)
그 때 밖에서 아뢰는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 (E) 성주님, 큰 성주님께서 드시고 계시옵니다.
그러자 모여있던 신료들이 일제히 자리를 정리하고 허리를 숙이며 걸어들어오는 이를 맞는다. 김순식도 급히 자리에서 내려오고 허리를 숙인다. 원회들이 무슨 영문인가 몰라 뻥해서 보다가는 눈을 크게 뜬다. 믿기지가 않는다. 들어서고 있는 이는 허월인 것이다.
김순식 어서 오시오소서, 아버님.
원회 ......?
허월 궁예가 보낸 사자로구나.
원회 예, 대사님. 원회라 하옵니다.
허월 성주는 내가 보낸 서찰을 받아 보았는가?
김순식 예, 아버님. 그 서찰이 아니었더라면 우리 군은 벌써 출병하여 저 궁예군을 쓸어 버렸을 것이옵니다.
원회 ..........?
김순식 아버님, 아버님께서 보내신 그 내용이 진실이옵니까? 정말 궁예를 그렇게 보시옵니까?
허월 내 눈이 정확할 것이니라. 그는 이 시대의 미륵이다.
모두들 .........?
허월 성문을 열어주어라.
원회 ........(충격, 전율)... ?
허월 형제끼리 싸울 수는 없느니라. 또한 의로운 군대는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니라. 이미 다 살펴보았으니 더 이상 묻지 말고 성문을 열어주어라. 알겠느냐?
김순식 ........?
허월 아비의 알아듣느냐고 물었다?
김순식 ........ (사이) 자식이 되어 어찌 영을 뫼시지 않겠사옵니까?
원회는 그저 경악과 충격 뿐이다. 그런 원회의 얼굴에서 허월의 얼굴로 갈아들면....
해설 허월.. 신라 왕족 출신으로서 명주성의 성주 김순식의 아버지였다. 그들 부자는 백여년 전인 780년대 신라 원성왕의 왕위 쟁탈전에 참여했다가 밀려 명주로 내려온 김주원의 자손이었다. 이른바 왕족이었고 진골이었던 것이다. 김주원 이래 그의 가문은 대대로 명주 일대를 다스려 왔는데, 허월은 선조로부터 받은 성주 자리를 미련없이 아들 김순식에게 내어주고 불가에 귀의, 선종 9산문의 하나인 굴산문의 승려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세상을 읽을 줄 알았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로 하여금 피를 보지 않고 성문을 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허월 잘 듣거라. 궁예는 너의 형제이니라. 경문대왕의 자손이니라. 어찌 형제가 되어 피를 흘리겠느냐?
김순식 .........
허월 너는 궁예를 이길 수 없느니라. 그들의 군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않는 백성의 군대니라. 나는 보았느니라. 알겠느냐?
씬 18 어느 들판 (궁예의 진지)
원회가 김순식의 부하 장수들인 이치, 장일 등과 함께 큰 백기를 펄럭이며 벌판을 달려 궁예의 진지쪽으로 오고 있다. 그렇게 사라져가면...
궁예 (E) 지금 뭐라고 했소? 성문을.. 연다고 했소?
씬 19 궁예의 처소
원회가 궁예와 여러 장수들에게 보고를 하고 있다. 그 한켠에 원회와 함께 온 홍유, 백옥삼들이 허리를 굽히고 서 있다.
궁예 조건없이 성문을 연다?
원회 그러하옵니다. 허월 스님께서 그리 전하라 하셨사옵니다.
궁예 허월...?
원회 그러하옵니다. 그 분이 바로 명주 성주 김순식의 가친이셨사옵니다.
궁예 ......뭐라?
종간 일이 그리 되었단 말이오? 이런 세상에.... 이런 일이....
홍유 장군, 우리 성주님의 뜻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입성하도록 하시오소서. 성문은 활짝 열려 있으며, 장군께서 드시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문 앞을 깨끗이 쓸어 놓았사옵니다.
아무도 말이없다. 뜻밖의 상황이 온 것이다. 궁예가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궁예 그랬었구먼.... 허월대사께서 그런 분이셨구려...
은부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나옵니다. 그 분이 주군의 뜻을 살펴보고자 짐짓 여러모로 시험을 거듭했사옵니다. 아무도 그분을 몰라 보았지만 주군께선 그분을 알아보셨사옵니다. 과연 주군이시옵니다.
종간 그러하옵니다. 그분께서는 장군의 면면을 보시고 그 큰 성을 내어주신 것이옵니다. 그분 또한 예삿 분이 아니시옵니다.
궁예 그렇구 말구요. 큰 도인이십니다. 나는 보았어요. 참으로 그분은 큰 분이십니다. 명주성을, 저 큰 명주성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고 있습니다. 저 큰 명주를 통째로 우리에게 내어주고 있어요.
종간 이 모두가 장군께서 만드시고 이루신 것이옵니다. 가슴이 벅차옵니다. 우리는 피를 흘리지 않고 신라 9주의 하나인 명주를 얻었사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장군.
제장들 감축드리옵니다.
모두들 감격과 흥분에 휩싸여 군례를 올린다. 궁예는 마치 대왕처럼 그 군례를 받고 있다. 복지겸이 보며 까닭모를 긴 한숨을 내쉰다.
종간 어서 입성할 차비를 차리시오소서. 저들이 성문 앞을 쓸고 장군을 기다리고 있다 하옵니다. 어서 앞서시오소서. 장군의 기치를 하늘 아래 드러내 보이시오소서.
궁예 ....... 고맙소이다. 부처님께서 도우신 일이외다. 그대들과 백성들의 염원을 부처님께서 이루어 주신 것이외다. 가십시다.
궁예가 일어선다. 제장들이 모두 검을 치켜들며 와 함성을 지른다.
씬 20 들판
미륵성전, 불국정토의 수기를 펄럭이며 궁예가 백말에 올라 제장들의 경계를 받으며 나아가고 있다. 그의 숱한 장졸들이 수많은 기치창검을 휘날리며 벌판을 덮을 듯이 그렇게 가고 있다. 연도의 백성들이 끝도없이 몰려나와 '궁예 장군 만세, 미륵 장군 만세'를 외치고 있다. 궁예가 손을 들어 답례를 하며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다. 그 모습에서.... 디졸브
씬 21 명주성
성문이 활짝 열려 있다.
김순식이 그의 부장들과 군사들을 거느리고 맞으러 나와 있다.
백옥삼 저기 궁예 장군이 오고 있사옵니다.
김순식 .......(끄덕인다)
멀리서부터 궁예의 대군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그렇게 오고 있다.
김순식 (신음처럼) 과연 아버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일세... 군대의 사기가 충천해 있어. 저들이 모두 농민군이란 말인가?
백옥삼 그렇다 하옵니다. 농민들로 이루어진 군대라 하옵니다.
김순식 .......
이윽고 궁예군이 성 앞에 이른다. 그들은 곧 김순식 일행과 마주친다.
김순식 어서 오시오소서. 명주성주 김순식이올습니다.
궁예 반갑소이다. 내가 궁예요.
김순식 들어가시지요. 아버님께서 장군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궁예 예..
궁예와 김순식이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성 안으로 들어간다. 그들의 모습에서....
씬 22 동 성안
궁예가 허월에게 절을 하고 있다. 흐뭇하게 보는 허월.
궁예 대사님, 범인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대 결단을 내려 주셨사옵니다. 이몸, 궁예 온몸을 바쳐 진정으로 감사드리옵니다. 대사님이야말로 참다운 부처님이시옵니다. 전투가 벌어졌더라면 수많은 목숨이 버 려졌을 것이옵니다.
허월 중요한 것은 백성들의 목숨이 아니라 그대들의 생각일세. 욕심이 앞서게 되면 집도 세상도 다 태우고 자신들의 목숨까지도 태우게 되지. 그래서 내린 결단일세.
궁예 명심하겠사옵니다.
허월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 이리 앉게나..
궁예 .....?
허월 그대의 자리가 아닌가? 어서...
궁예 어찌 그 자리가 소승의 자리라 하시옵니까? 소승은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니라 의리로써 문을 열어준 곳에 들어와 있사옵니다. 제게는 맞지 않사옵니다.
허월 허허허, 세상 보기를 우습게 아는 궁예도 예의라는 게 있는 모양일세. 이보시게, 성주?
김순식 예, 아버님
허월 세상사는 모든 이치가 다 분명해야 하는 것일세. 기왕에 성문을 열었으니 성주는 궁예장군의 수하가 된 것이야. 주군을 뫼시게.
김순식 예, 아버님. 장군 어서 상좌에 앉으시오소서. 명주성주 김순식 진정으로 장군을 주군의 예로서 뫼시오리다.
종간 (그제서야 나서며) 오르시오소서. 그것이 예이옵니다.
장수들 장군, 오르시오소서.
허월 어서.....
궁예 (그제서야) 참으로 민망한 일이외다. 허나 만인의 뜻이 그러하니 어찌하리오. 앉겠소이다.
궁예가 천천히 걸어가 비어있는 상좌에 앉는다. 그와 동시에 제장들이 열화같은 목소리가 터지기 시작한다.
종간 만세, 궁예 대장군 만세!
일동 만세, 궁예 대장군 만세, 만세, 만세!
해설 궁예. 삼국사기에 보면 궁예는 이곳 명주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처음으로 장군 소리를 듣는 것으로 되어 있다. 장군, 그것은 궁예의 독림과 자립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신라 9주 중의 하나인 명주를 얻었던 것이다. 그것도 싸움이 없는 무혈입성이었다. 참으로 당시로써는 보기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대왕을 칭하지는 않았다. 명주성주 김순식의 토착적 권력유지를 그대로 인정해주었던 것이다. 이 또한 궁예의 사내다움을 그대로 드러내는 또 하나의 진면목이 아닐 수 없다 하겠다. 말하자면 그는 명주를 그대로 김순식에게 돌려주었던 것이다.
씬 23 북원성 외경
양길 (E) (흥분하여) 뭐라? 궁예가 명주를 함락시켰다?
씬 24 동 양길의 처소
양길과 명길, 사위1,2가 모여 있다.
양길 하하하하... 과연... 과연 내 사위로다.. 과연 궁예야.. 하하하하..
그러나 명길과 사위 1의 표정이 밝지 않다.
사위2 더욱 놀라운 것은 전투를 벌이지도 않고 무혈입성했다는 것이옵니다.
양길 싸우지도 않고...?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하하하하.. 대단해.. 참으로 대단해..
명길 아직 기뻐하시기에는 이르옵니다.
양길 .....? 그게 무슨 소린가?
명길 궁예가 돌아와 형님 앞에 조아리기 전까지는 그 자를 믿을 수가 없사옵니다.
양길 괜한 의심이야.. 그 사람은 내 사위일세.. 미향이도 함께 해 있고 복지겸이 환선길이도 다 가 있어. 설마하니 장인인 나를 배반하겠는가?
명길 권력을 다투는 일엔 부자간도 서로 적이 되는 법이옵니다.
양길 그만하게 곧 좋은 소식을 보낼 것이야. 잔치 준비나 하게.
명길 좀더 지켜보시오소서. 아직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이 너무도 많사옵니다.
사위1 의심가는 대목이 한두가지가 아니옵니다. 명주를 함락했으면서도 아직 전령이 오지를 않고 있사옵니다.
양길 .......전령? 아직 경황이 없는 것이겠지.
명길 아니옵니다. 제일 먼저 서둘러 알려야 할것이 그 것이온데 소식이 없다니요.
양길 ....그야... 전선의 사정이란 때때로 그럴 수 있는 것이야. 전령이 곧 오겠지. (고개를 외로꼬며 뭔가 생각) 아니야.. 전령을 기다리기 보다도.... (사위1에게) 이보게, 자네가 다시 한 번 가봐야겠네.
사위1 ...예?
양길 그 쪽 사정이 어떤지.. 자네가 직접 가서 알아보고 오란 말이야. 전령들이라는 것이 오다가 사고도 날 수 있는 것이고 지체될 수도 있는 것이거든. 자네가 다녀오란 말이야. 어서.
사위1 ......예.
양길 ....이보게 아우, 이젠 되었네. 그런대로 천하의 명분도 섰고.... 서둘러 주변 성주들에게 알리고 대관식을 준비하도록 하세.
명길 예? 대관식이라.... 하셨습니까?
양길 그래.. 이제 명주를 얻었으니 마땅히 대왕으로서 즉위해야 할 것이 아닌가? 명주가 이 양길이의 영토라는 것을 대내외에 공표하는 자리이기도 하네. 인근 고을 성주들을 모두 불러드리도록..
명길 ....(딱하다) 형님... 지금 대관식이 급한 것이 아니옵니다. 좀 더 형편과 사정을 확인하시고 나서....
양길 무슨 소리? 이미 명주가 떨어졌어. 뭘 확인한단 말인가? 한 나라를 세우는 막중한 대사일세. 잔소리 말고 시행토록 하게. 어서!
명길 .........알겠사옵니다.
명길과 사위1,2가 모두 밖으로 나간다. 양길이 신이나서 웃는다.
양길 으핫하하하하.....견훤이 이 놈... 나를 비장으로 삼았겠다? 하지만 이제 나도 대왕이다. 이놈아! 네 놈보다도 더 큰 영토를 내가 가지고 있다. 내가 진정한 대왕폐하니라.. 너보다도 더 큰 왕관을 만들어 쓸 것이니라. 호화찬란한 왕관을 만들어 쓸것이니라. 하하하하....
씬 25 무진주 성 외경
견훤 (E) 명주를 점령했다..?
씬 26 동 견훤의 대전
견훤이 앉아 있고 박씨가 그 곁에 있다. 최승우, 능환, 추허조 등이 시립해 있다.
견훤 그것도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허허허.. 과연 궁예일세..
추허조 그래봤자 양길의 수하가 아니옵니까? 제 아무리 날고 뛰는 재주가 있다 한들 일개 장수에 불과하옵니다.
능환 이런 쯧쯧쯧.....가만히나 있으면 핀잔이나 안듣지. 자네가 뭘안다고 나서는가?
박씨 호호호, 그대들은 왜 추장군이 입만 뻥긋하면 그렇게 면박들을 주십니까?
추허조 그러게 말이옵니다. 나 이거야....
최승우 허허허, 궁예라는 사람은 이미 양길의 수하가 아닙니다. 그 그늘을 벗어났습니다.
추허조 예?
최승우 우리 첩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이미 명주에서 장군을 칭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독립을 한것이지요. 양길과는 남남입니다.
추허조 그렇게 되나요?
견훤 아마도 결과적으로는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된 것일게야. 서로가 한바탕 창을 겨누고 피를 부르겠지.
능환 예, 그리 될것이옵니다.
박씨 .....세상인심 참 무섭기도 하지...
최승우 두 당사자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로선 좋은 구경거리가 생긴 셈이옵니다. 폐하께오선 양길과 궁예 양쪽을 저울질하시어 실리만 얻으시면 되옵니다.
능환 폐하께오서 다시 한 발 앞서 나가실 수 있는 기회이옵니다. 그들이 으르렁 거리는 동안은 우리에게 한동안 접근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우리는 그 사이에 아직도 미흡한 국가의 체재를 확실하게 다져야 할 것이옵니다.
견훤 옳은 말일세. 허면 이참에 나라안의 인심도 살펴볼겸 순행길에 오르는 것이 어떻겠는가?
최승우 참으로 옳으신 말씀이시옵니다. 각 고을을 돌면서 목적지는 완산주로 하시옵소서. 일단은 그곳이 우리의 궁극적 목표이옵니다.
견훤 완산주라......?
최승우 그곳은 옛 백제의 심장부였사옵니다. 의미가 아주 크옵니다.
견훤 (고개 끄덕이며) 알겠네, 그리하도록 하세.....
최승우 또한 국내 뿐만 아니라 밖으로는 당나라와의 외교에도 관심을 보이셔야 할 것이옵니다. 당이 지금은 혼란속에 잠겨있으나 그래도 대국이옵니다.
견훤 ....그건 좀 생각을 해봐야겠네. 우리가 백제국을 복원하려는 마당일세. 그렇다면 당나라는 우리의 원수가 아닌가?
모두들 .........(보면)
견훤 내가 알기로는 당나라는 신라와 손을 잡고 옛 백제를 멸망시킨 장본인이야. 그들과 손을 잡는다면 백성들이 좋지 않게 생각할 것이야.
최승우 과연 폐하시옵니다. 신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였사옵니다.
견훤 아닐세. 지금으로서는 그래야 한다는 생각일세. 그리고 그대들의 생각은 어떤가? 이번에 궁예가 명주를 얻었으니 축하사절이라도 보내는 것이....
능환 아직은 때가 이르옵니다. 궁예가 비록 명주를 함락시켰다 하나 여전히 양길의 장수이옵니다.
견훤 그도 그렇겠구만... 아쉽구먼.. 참으로 인물인데.... 허허허...내가 소식을 전하면 반가워 할 것인데...
씬 27 명주성/김순식의 처소
궁예와 김순식, 그리고 여러 장수들이 명주 지형도를 놓고 향후 대책을 의논하고 있다.
궁예 우리는 이렇게 영월, 나성, 울오, 어진을 거쳐 이곳 명주에 이르렀소. 이제 북으로 진군하여 남아있는 명주 관내의 일부 지역을 모두 접수하고 태백을 넘어 철원으로 향해 나아갈 것이오.
김순식 (감탄하며) 대단하시옵니다. 그리되면 반도의 허리가 잘리는 형국이 아니옵니까?
궁예 (끄덕이고) 잘 보셨습니다. 종간군사.
종간 예, 대장군...
궁예 군사가 불어난 만큼 새롭게 군사들의 편제를 고쳐야 할 것이오.
종간 이를 말씀이옵니까? 이미 은부 장군과 논의를 했사옵니다.
복지겸 그건 아니될 말씀이오이다. 이는 양길 대장군의 영을 받아서 해야 할 일이외다.
모두들 ......?
복지겸 누구 마음대로 군대의 편제를 바꾼다 하는 것입니까?
궁예 ........?
환선길/이흔암 .........?
김순식 이곳은 나의 성이외다. 나는 양길에게 이 성을 준 것이 아니라 궁예 장군께 드린 것이오. 또 나는 여전히 이 성의 성주요. 무엄하오. 지금 누구에게 따지고 있는 것이오?
은부 더 이상 우리 군의 전열이 흩어져서는 아니되겠사옵니다. (궁예에게) 장군, 이번 기회에 여쭙겠사옵니다. 우리는 이미 양길의 그늘을 벗어났사온데 아직까지도 장수들 중에 어리석은 옛일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사옵니다.
복지겸의 얼굴은 굳어져있고 환선길, 이흔암들도 굳어져서 본다.
종간 그렇습니다. 복지겸 장군의 곧은 마음과 충성심은 이해를 하옵니다. 허나, 군대올시다. 우리는 궁예 장군을 주군으로 뫼셨소이다. 양길장군에게 있었던 것은 잠시 신세를 진 것 뿐이외다.
복지겸 반란이외다. 배신이외다.
종간 그렇지가 않소이다. 어리석은 봉사에게 끌려가다가 물구덩이에 들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의리를 앞세워 목숨을 맡기려 하오이까? 그것이 잘하는 일이오이까? 그것이 백성을 위하는 일이오이까?
은부 (궁예에게) 영을 내리시오소서. 더 이상은 아니되옵니다. 주군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참형으로 다스리소서.
궁예 .........?
은부 그리하시오소서. 주군. 복지겸은 내 친구이나 주군의 적이 될 수도 있사옵니다. 베시오소서.
<20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