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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羊)
지 하 련
노가리로 있는 국화를 분오로 옮겨 심다 말고 성재(聖在)는 방으로 드러왔다. 오래 해ㅅ빛을 받고 있은 때문인지, 별랗게 방안이 어둡고 또 변으로 조용하기까지 해서 한동안 눈앞이 아리송송하고, 귀ㅅ속이 왱―하니 울린다.
퇴침을 집어 들고 되도록 구석지로 가서 벽을 향하고 드러누은 것은, 이러한 때 빛이란 어둠보다도 더 어듭기 때문이다. 그는 두통이 나는 것도 같고 조름이 오는 것 같기도 해서 일부러 눈을 감었으나 그러나 쉽사리 잠이 오는 게 아니다.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요 멫칠 래로 바짝 더 번거럽게 구는 정래(晶來)와의 교우관게다. 허기야 가족들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정래와 손을 맞잡고 수무ㅅ골 산비탈로 올러와 김생과 화초를 키우고 살어보기로 작정한 것만 보드래도 두 사람이 얼마나 가깝고 친하단 것을 알기는 그닥 어렵지가 않다.
그러나 친하면 그저 친했지 뭘 이대도록 번거러워하고 피로워하는 것인지 단지 알 수 없는 것은 이 점이다. 이래서 그는 이따금―뭐고 꼭 틀린 게 있을 거라고……그 올개미를 잡고 풀지 않고는 백 년을 사귀ㄴ대도 헛것이이고 또 단, 하로를 마음을 놓을 수가 없을 게라고―생각지 않은 바도 아니었으나, 첫재 어느 모를 뚜르고 헤처야 그 올개미가 나올른지 그에겐 종시 엄두가 나지 않었을 뿐 아니라 또 이렇게 닥어서 생각을 정하려 들면은 이번앤 어쩐지 모든 게 한껏 부피고 귀찮게 느껴지는 생각이 먼저 용기를 빼서 가기도 해서 이래서 결국 그양 저양 오늘까지 미러 온 셈이다.
원악 구석지에 머리를 박고 드러누은 때문인지 모기 한 마리가 제법 풍경을 잽히고 볼따귀에 내려앉는다. 그는 모르는 결에 철석 뺨을 한 번 갈기고 눈을 떴다. 빠굼이 손바닥을 디려다보니 그놈의 형체는 거의 간 곳이 없고 오디빛이 나는 피만 한 덩이 나딩군다. 그는 무슨 더러운 것이나 씻어버리듯 그것을 진흙이 더덕더덕 묻은 바지에다 썩썩 문질러 버린 후 다시 손을 겨드랑에 꽃았다. 아까와는 달러 방안이 무척 밝다. 밝아도 이만 저만 밝은 게 아니라 아주 소란하고 허술해서 어디 붙일 곳이 없도록 밝다. 그는 몸을 좀더 오구려 바싹 벽에 닥아 누으며 다시 눈을 감었다. 그리고는
(무엇이 틀렸든, 뭐가 얼켰든, 아무튼 그 올개미를 잡고 좌우간 해결을 지어야지)
하는, 이러한 생각을 오래도록 되푸리하고 있었다.
얼마를 이러구 있었든지 문 듯 아래ㅅ축사에 있는 양을 무엇이 물어놓은 바람에 그는 새로이 정신이 번쩍 났다. 자세히 보니 애목을 아주 구멍이 빵――푸러지도록 물어 놓은 것이다. 그 옆에 정래가 덤덤이 앉었다가 이러나며
"필시 범이 문거요 아니고야 요충 애목을 요 모양으로 작살 낼 놈이 어디 있겠오"
한다. 하도 억색해서 한동안 그대로 서서 보구 있노라니, 그놈이 평소에도 유독 빛깔이 히고 키가 성큼하니 커서, 그저 어리석어만 뵈이든 놈이 덜컥 애목을 물리고 휘둘려 놓았으니 이젠 아주 정신머리 다 빠진 놈처럼 눈을 번―이 뜬 채 피만 퍽퍽 쏟고 있다. 시가지에 내려가 의사를 데리고 온대도 두 시간은 걸릴 것, 이놈이 그 때까지 지탕하리라고는 명을 하눌에 매었대도 바랄 수 없는 일, 성재는 그만 가슴이 메이도록 애연하고 기가 찬다.
"천치 같은 놈이, 그래 백주에 끽소리 한마듸 못지르고……" 그는 양의 잔등에 덥석 손을 언진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기왕 죽을 테면 얼마나 아픈지 소리나 좀 질렀으면 차차리 시원할 것 같다
마츰내 그는 애꾸지 그놈을 잡아 흔들며 뭐라고 소래껏 고함을 치다가 그만 잠을 깨었다―.
눈을 떠, 멍一하니 천정을 향한 채, 그는 거듭 신기하다. 꿈은 분명히 꿈인데 아무렇기로니 세상에 이처럼 시원하고 다행한 일이 있을 수가 없다. 방금 그 끔직하든 사실이 단박에 이처럼 무사할 수가 있다니, 참 용케도 된 노릇이다. 허나 다음 순간 그는 맥없이 느껴지는 그놈에 대한 불안한 생각 때문에 끝내 이러나 밖으로 나오고 말었다. 좌우로 떼짱이 깔리고 고넘으로 백합 스이ㅅ도삐 아네모네 이러한 초화들이 하늘거리는 가르마ㅅ살 같은 마당길이 대낯을 받어 조으는 듯 고요하다. 문턱에서 졸고 있는 수탉이 깃을 치고 이러나는 바람에 그는 맥없이 놀라며, 온실 앞까지 나오려니까 조금 전에 옮겨 심어 놓은 국화분에 몇이 쨍이 드러있다. 그는 속으로―(김군이 어디를 갔기에 저것을 그대로 두었을까)一하는, 이러한 생각을 하며 그것을 그늘 밑으로 드려다 놓은 후 마악 축대를 밟으려는 참인데, 핏득 옆으로 나무의 순을 잘르다 말고 나지막식한 향나무 그늘을 시렁 삼아 앙천(仰天)하고 잠을 자는 정래가 눈에 띄인다. 이래서, (역시 정래도 피곤했든 게라)―고 문듯 실소하려는 그의 눈에 이번엔 실로 고독하고 고집스런 또 하나의 모습이 커다랗게 나타난다.
마츰내 그는 이 잠자는 벗의 얼굴로부터 야릇한 압박과 불안을 느끼며 급히 층대를 밟기 시작했다.
늘 외로이 축사를 직히고 있는 젊은 양은 주인을 보자 짐짓 외면을 하며, 얘물 얘물 풀을 색이고 있다. 역시 아무 일도 없었든 거다. 그는 잠갛고 가까이 가 앞에 그득히 놓인 크로바를――그 중에서도 제일 난들난들하고 맛있어 보이는 대목을 골라 가만이 입가에 대어 주었다. 그리고는 싱겁게 볼기를 한 번 툭툭 처 주고는 물러선다. 헌데, 이놈은 무슨 버릇인지 멀리서 보면―가령 모종밭에서 칫처다 볼 때라든가 저편 밭뚝에서 건너다 볼 때라든가―이러한 때는 곳잘 저도 제법 귀ㅅ전을 치며 마조 보아주면서, 이렇게 가까이 와 듸려다만 볼 양이면, 영 무가내로 외면이다. (무슨 까닭일까?)―그는 한 손을 호주머니에 꽂고, 어정어정 우에ㅅ축사로 가면서도 여전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가 우에ㅅ축사로 와서 웅기중기 설레고 있는, 숫한 면양들을 듸려다보고 있었을 때는, 발서 그놈의 생각은 머러진 때다. 그런데, 뭐보다도 오늘 따라 이곳이 꼭 돼지우리ㅅ간 같어서 그는 이상하다. 옆으로 몸을 구부정이 하고 한참 동안 그것들을 보고 섯노라니, 이번엔 모견듸게 싫은 생각이 먀츰내 덜미를 잡고 닥어 선다
면양이란 원체 배때기가 부르고 다리가 짧어 털이 긴 놈도 볼품이 그닥 시원치 못한데다가 항차 엇그제 털을 깎어 낸 놈의 그 누덕누덕 고약을 발른 꼴이란―그렇거고는 도라 단이고 풀을 먹고 하는 형상이란 참말 괴이쩍고 우수깡스럽다기보다도 차라리 무안쩍은 불쾌를 금할 수 없다.
조금 후 그는 뒤곁 산림(山林)쪽으로 거름을 옴기면서
(면양은 죄다 팔어 버려야지一)
하고 마음먹는 것이다.
정오에 가까운 숲 속은 더욱 그늘이 짙다. 역부러 고개를 지처본댔자, 쉽사리 해빛을 볼 수 없는 무척 잠목이 짙은 산림이다. 그는 몸에 추위를 느끼며, 옆으로 굼테기가 몹시 패인 소나무가 서있는 바위 턱까지 와서는 그곳에 자리를 잡었다. 그리고는 그 앞에 성히 돋아 있는 고비풀이 신기한 것처럼 그것을 이모저모로 만저보고 또 뒤쳐보기도 하면서, 이런 종류의 남국 식물을 연상하고 있었다. 그러노라니 그것은 어느 잡초들 틈에서도 쉬 가려낼 수 있는 윤이 흐르고 살찐 것이어서 그는 새로이 신기하다.
이따금 마을 색시들이 이리로 드나드는 것을 그는 보았고 산채를 꺾어려니 생각기도 했으나, 이곳에 고비가 나는 줄을 몰랐다. 그러나 이러구 보니, 이곳이 꽤 깊은 곬작이기도 하려니와, 곬 안에는 "오장군"의 고총이 있어 수목이 짙기로도 유명하다.
성재는 그대로 앉인 채 잠깐 주위에 밀집한 수목을 우러러본다. 그리고는
(내가 뭣허러 이것을 샀을까?)
하고 다시금 생각해 본다. 사천 육백 평이나 되는 울창한 삼림을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이 그저 좋아서 샀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설사 말이 된대도 이건 결코 그리 떳떳지 못한 이유임에 틀림이 없다.
(웨 이렇게 모든 것이 도시 떳떳지가 못한 것일까?)
그는 못내 서글푼 생각이 들기도 한다.
뒤에서 무슨 인끼척이 나는 것 같어서 성재는 그곳을 버리고 이러섰다. 잠깐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다시 아무런 기척도 없다. 그러나 외인편 풀섶을 쪼차 및 거름 내딧지 않어서 그는 마진편 답싸리 밭에 정래가 있는 것을 보았다. 정래는 웬일로 삼ㅅ처럼 촘촘이 드러선 싸릿목을 헤치고 나는 듯이 다러나고 있다. 멀리서 보아도 눈에는 안광이 돋는 것 같고 왼몸이 긴장하여, 그것은 꼭 무슨 김생 같은 모습이었다. 드듸어 정래는 보이지 않고 어데서인지 꽝―하는 총 소리가 들려왔다. 총은 본시 형이 쓰든 것으로 이리로 온 후 작난삼아 가지고 노는 것이었으나, 그는 순간 야릇한 흥분으로 해서 모루는 결에 그편으로 다름질첬다. 가까이 이르자 그는
"뭐요? 어떻게 됐오?"하고 가뿌게 무렀다. 정래는 그제사 긴장을 풀고 도라서며
"꿩이 앉은 것 같아서 와 봤드니 도무지 날러야지"하고, 시무룩이 우섯다. 정래 말을 드르면 꿩은 날러야 잠기가 쉽지 기면 어렵다는 것이다. 성재는 저도 따라 숨을 도르키며 이번엔 객적게―자기보다 두 살 아래인, 나이로는 훨신 노숙해 보인다고―땀에 저진 약간 검고 기름한 얼골이 몹시 아름답다고――생각하는 것이었다. 정래는 멍뚱이 서서 저를 보고 있는 성재가 이상한지 수건을 내어 땀을 씨스며
"참 손님이 왔든 것을……"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누가 왔드냐고 물어볼 틈도 주지 않고 발서 저마큼 앞서 걸었다. 그런데 무척 거름이 빠르다. 기척도 없이 그저 성큼성큼 걷는 거름인데 횟바람이 나도록 빠르다. 그는 저도 일부러 빨리 거러 보았으나 암만해도 따를 수가 없었다.
조금 후 그는 제풀에 아까보다도 더 천천이 내려오면서 이젠 보이지도 않는 그 뒷모양을 다시 한번 눈앞에 그려보는 것이었다.
아랫 축사에 들러 그는 한번 더 그놈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아모리 보아도 착하고 귀하게 생긴 놈이다. 그러나 하도 먼 곳에 고향을 둔 놈이라 그런지, 어덴지 몹시 쓸쓸한 데가 있어, 흡사 외로움이 찌드러 힌빛을 더한 것도 같다. 그러나 이러한 부질없는 생각이 스스로 쑥스러웠든지 마악 발낄을 돌리려는 참인데 마츰 봉아가 깼득깼득 웃고 올러 온다.
"오빠 뭐허우?" 하고 닥어서면서
"아버지가 오빠 오랬어. 꼭 와야 헌대. ……나더러 꼭 대리고 오랬어一"
하고 뭐가 몹시 재미있는 것처럼 횡설수설 덜렁댄다.
“아버지가―왜?"
그는 일방 의아해하면서도 여학교 삼 학년에 단이는 재종매의 상기된 두 볼을 향해 놀리듯 우서준다.
“몰라―몰라ㅡ 아무튼 오빠 오랬서."
봉아는 뒷짐을 지고 고개를 살레살레 저어, 시침이를 떼면서도 여전 뭘 해죽해죽 웃고 있다.
그는 봉아를 대리고 축대를 내려오면서 (무슨 일일까)하고 중얼거려보는 것이었으나, 부르면 갔지 별수가 없다 집안에 어른이라고는 어머니 당숙밖에 없을 뿐 아니라 어머니께서 무슨 일이든 당숙과 의논하고 처단하는 터이었음으로 당숙이 부른다면 곧 집에 무슨 일이 생겼나 짐작한다.
“큰댁 아즈머니께서 어듸가 편찮으시듸?"
그는 마당을 드러서면서 한번 더 무렀다.
"아니야―그런 것 아니래두"
봉아는 여전히 해룽댄다.
하긴 요즈막에 와서 어머니나 당숙의 태도가 다소 달러진 건 사실이다. 전처럼 성재가 이런 산마룩에 와서 고생(고생이라고 했다) 하는 것을 몹시 반대하는 남어지 무슨 역정으로 해서 불러 내리는 게 아니라 이를테면 백살을 먹어도 "장가"를 가지 않으면 어린애라고―성재의 이런 철따구니 없는 짓을 막기 위해 작구 장가를 가라고 졸랐다. 허나 이곳엔 그로서 지란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뭐보다도 "선"을 보라고 닥드리는 데는 딱했다. 본시 위인이 되기도 그렇게 할 주제가 없거니와 또 그 "선"이란 것을 보고는 암만해도 장가가 잘 가지지 않을 것 같어서, 그는 결국 귀찮어지고 만다. 이래서― 보지 않어도 좋으니 아무데고 정하라고―말을 했다면 이건 참 그로서 큰마음 먹고 한 흔껏나는 승락인데도 웬일인지 이렇게만 되면 집안에선 맥없이 겁을 먹고 파혼을 시켰다.
그는 일할 때 입는 양복바지를 다른 것으로 박궈 입을까 하다가 위선 귀찮기도 하려니와, 옆에 봉아도 있고 해서, 그냥 그 우에다 잠바를 걸치고 댄추를 잠그면서 (혹 또 장가 말이 나올지도 몰리)하는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참인데
"아이 승해라 저게 뭐야ㅡ"
하고 별안간 봉아가 핀잖을 준다.
"승없긴…… 뭐가?“
"꼭 군밤장사 같으네ㅡ"
봉아는 찌징 오라범의 복색을 까탈하는 것이다. 성재는 그제사 제 모양을 급어보며
"이만했으면 됐지, 승업 긴……이댐에 너이 실랑이나 모양내 줘리―"
하고 놀여주었다. 그랬드니
"오빤 꼭 저런 말만 하지ㅡ"하고는, 아주 눈을 째―지게 흘기면서
"오빤 어떤데 그래. ……가마니 있으니께루, 아ㅡ주 좋아서……"하고는 뭔지 조소하듯 배식이 웃는 것이다. 이래서 그는 역부러 시침이를 떼고
“내가 어떻긴 웨? 너처럼 시집간댔니?"
하고 지릿 떠봤드니 아니나 다를까, 봉아는 아주 발칵해서
“내가 언제 시집간댔어, 거짓뿌렝이. ……지금 색시가 기두르고 있는 사람은 누군데 그래?"하고, 바로 직통을 내뿜는 것이다
성재는 이상 더 뭘 무러볼 흥미도 그렇다고 딴말을 끄낼 멋도 잠깐 나지 않어서 한동안 방 가운데 그대로 멍청이 서 있었다.
봉아는 차츰 제가 무슨 잘못이나 저지른 것처럼 뭔지 불안한 얼굴로 변해갔다. 하도 우수워서
"난 안 간다―너 혼자 가거라!"하고 말을 했드니, 봉아는 정말 낭패하면서, 나는 모른다고 어떻게 할까부냐고, 뎀벼드렀다.
나종에 이야기를 자세 듣고 보니, 봉아는 극 비밀리에서 성재를 꼭 대려올 것과, 무슨 수로든지 옷을 가라입게 할 것 그리고 될 수만 있으면 면도라도 하게 맨들라는 실로 중대하고 어려운 사명을 띄고 왔다는 것이다.
조금 후 그는
"그래 수단이 짜장 고것 뿐이었구나"
하고, 봉아를 놀리면서도 봉아가 시키는 대로 옷을 입은 후 같이 집으로 내려왔다.
열 시가 훨신 넘어서야 성재는 산으로 도라왔다. 혼자만 집에 가서 식사를 하게된 것이 정 래에게 미안해서 닭복기와 포도주를 사서들고 올라왔다.
옆으로 침정 동백 이러한 나무들이 열을 지어 서있는 밖앝문께를 드러서자 그는 먼저 정래 방에 불이 켜진 것이 눈에 띄인다. (혹 손님이 왔나?) 하고 지음하면서 그는 마당으로 드러섰다. 요즈막엔 성재 방에서 두 사람이 거처했기 때문이다.
가까이 이르자 힐끗 방안에 동정을 살펴봤드니, 과연 손님이 오긴 왔는데,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정래 누의 지인이다. 두 남매는 다소 머리를 숙인 채 무엇인지 꽤 흥분된 얼골로 가만 가만 이야기를 논우고 있었다.
성재는 먼저 그리로 드러갈까 하다가 도르켜 자기 방으로 드러오고 말었다. 방안은 횡덩그레하니 냉기가 돌고 불도 없이 두었으나 그는 별로 불을 켤 생각도 없이 그대로 아무 곳에나 몸을 던졌다. 그는 다소 피곤했다. 색시 선을 본다는 극히 평범하고 또 아무 것도 아닌 행사가 그에겐 몹시 페로웠든 셈이다. 첫재 그 “당사자”라는 사람들을 무슨 목탁처럼 앞에 놓고 그 주위에서 멫 번 오락가락 설레다가는 나종 무슨 리유로 해서든 용케 빠저나가 버리는 대목으로부터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참말 요절을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무튼 언제 누가 이런 기묘한 법을 생각했는지는 모르나, 대단히 천덕스런 노릇임에 틀림이 없다.
옆에 방에서는 여전히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무슨 말인지 몹시 얕은 음성이어서 잘 분간할 수 없었으나, 그 말의 억양이라든가 분위기로부터, 내용이 다소 어렵고 복잡하다는 것을 그는 곧 알 수가 있었다. 이리하야 이번엔 조금 전 창넘으로 엇본 정인이란 색시의 얼골을 그는 더듬기 시작했다. 물론 그는 정인이란 색시가 구두를 신는 것을 일즉이 본 일이 없다. 길다랗게 머리를 따어느린 채 검정치마나 쪽빛치마에 힌저고리를 즐겨 입었기에 그의 머릿속에는 단지 옛날과 함께 있어 온 “처녀”이외 아무 것도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여학교도 나온 모양인데 무슨 취밀까?)하고 그가 실없이 무시해 버리기엔 지나치게 흥미를 끄으는 처녀였다. 시방도 그는 몹시 신선한―다정한 곳이 있는 것도 같어 그곳을 헤치고 드러다보노라면, 이번엔 극히 배타(排他)하는 어떤 거힝(拒抗)에 부딪처 어지러웁다
성재가 등잔에 불을 켤 때쯤 해서 정래가 건너왔다.
"언제 오섰오?" 하고 드러서면서
"그래 어떻게 되섰오?"하고, 뭇는다. 그러나 성재가 뮐 흥없어 하는 낌피를 채자, 곧 말끝을 돌려
"형도 어서 장가를 드시고, 정인이도 빨리 시집을 보내야지……"
하면서 훨신 농을 섞은 혼잣말투로 중얼거린다.
성재가 잠깐 어리둥절해서
"무슨 말이요?" 하고 무르니까
"아니, 정인이헌테도 좋은 실랑이 나섰다니 말이요―“ 한다.
성재는 어쩐지 이 말에 대답을 미처 못했으나, 다음 순간 엉뚱하게도 지금 제가 무엇에 꼭 조롱을 당코 있다는 이런 당찮은 생각으로, 마츰내 몹시 불쾌했다. 정래는 곧 밖으로 나가 누이를 대려다 주려고 그 채비를 하는 모양이다 채비가 다 되었는지
"내 잠깐 단여오리다"하고 정래가 문을 연다. 성재는 그렇지 않어도 두 남매에 대한 맹낭한 반발이 소꾸치든 판이라 무슨 턱에 닷는 말인지 도시 요령부득인 말로다
"그 뭘 그렇게 유별랗게들 구료? 아무데서나 어때서―지금이 멫 신데……어째서 모두 그렇게 까다롭다는 거요?"
하고, 마치 뭘 페받듯 내던지고 말었다.
정래는 한동안 어처구니가 없는지 그대로 잠깐 서 있더니 문을 닫고 자기 방으로 건너가면서 이번엔 지나치리만큼 크다란 그러나 무척 사람 좋은 목소리로
"정인아! 너 그만 예서 자거라."
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너무 느저서 온…… 너 예서 자면 내일 고비도 꺾고 재미있을 게다―" 이런 말도 하는 것이다. 허지만 이건 생트집을 받어주는 것도 분수가 있지, 아무리 늦기 아니라 우밤중이래도 처녀가 집으로 도라가지 않고 남의 총각이 살고 있는 산마럭에 와서 밤을 새다니 온당지 못하다. 정말 친구의 말을 쪼처도 분수가 있다. 그러나 성재는 천정을 향해 턱을 고이고 앉어 생각을 하니 일이 난처하기 짝이 없다. 만일 두 사람이 승부를 따지고 본다면 이건 자기가 저도 뭐 이만저만 진 게 아니다.
마츰내 그는 못견듸게 불쾌한 감정으로 해,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튼날 아츰 성재는 외톨 소나무가 비스듬이 서있는 마진편 잔디밭에 엎듸려 오랬동안 무엇을 주저하고 있었다.
지난밤에 정래는 누의를 자기 방에서 자게한 후 곧 성재 방으로 건너왔고 와서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양, 먼저 자리를 편 후 성재보구도 고단해 보이니 빨리 자라고 권했다. 그는 여전 뭐가 찝찝해서 도시 유쾌하지가 못했으나 그러나 이 이상 역정을 내기는 더 싫은 일이어서 그저 권하는 대로 자리에 든 셈이다. 그리고는 가지고 온 술을 나누어 마시기로 했다. 원체 성재는 술을 좋아했으나 정래는 그닥 좋아하지 않었음으로 찻종으로 두 잔을 마시드니 제법 얼골이 붉었다. 성재는 정래가 평소 과묵한 대신 취하면 훨신 다변한 것을 안다. 이래서 남어있는 한잖을 정래에게 권하며 이번엔 장차 있을 이야기에 대한 기대와 흥미를 가만―이 가저보는 것이었다.
조금 후 정래는 과연 말이 많어저서 나종엔 그의 수 없는 여정(旅程)(정래는 이 말을 즐겨 썼다)에서 만난 아름다운 여자들의 이야기까지 하는 것이었으나 기실 지금 성재가 기다리고 있는 근처엔 쉽사리 가려구 않는다. 그는 거반 진력이 나는 것을 지긋이 참는 일방, 방금 이야기가 모다 처음 듯는 이야기임에 다소 놀라며
"당신은 이야기를 얼마나 진였오?"
하고, 무러봤드니, 정래는 이 말에 대답은 없이 다못 소리를 내어 조금 우슬 뿐이었다. 성재는 그 웃는 얼골이 몹시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이번엔 그곳에 야릇하게 끌리고 있는 자기를 발견했다. 그는 전에라도 이렇게 가깝게 접근하게 되면 늘 무엇인지가 불안했다. 이것은 끝내 저편에 대한 경게를 새롭히든 것이다.
잠간 건너다보고 있든 정래가
"뭘 생각소?"하고, 무르면서 이번엔 제법 정색으로
"우리 이런 일 이젠 관둡시다"―한다.
"어찌된 말이오?" 하고, 성재가 무르니까
"당신은 내게 작구 속는 것 같은 일종의 공포가 있지 않오, 이건 나도 꼭 같읍니다. 요컨대 자기 이외 아무 것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남”과 접촉을 가진다는 것은 대단 워태로운 일일 거요―"
하면서, 성재 말에 대답이라기보다도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이었다.
“신뢰 없이 친한 법도 있소? 우리는 누가 보아도 가까운 사이가 아니요?"
성재는 일방 말을 하면서 정래의 기색을 살폈으나 정래는 이 말에도 대답은 없이, 그대로 제 말을 계속했다.
"이런 사람들에게 제일 두려운 일은 역시 “애정의 문제”인데……가령 이 사람들이 누구를 사랑해 보구려, 얼마나 진력이 날 노릇인가―"
말을 마치자, 정래는 가벼이 우섰다. 성재는 모르는 결에 정래 말을 가뿌게 쪼츠며
"진력이 날 노릇이라니, 웬 말이요?"
하고 마조 보았다.
"당신은 나보구 무턱대고 믿으라고 명령하지 않소? 그리고는 화해하라고, 타협하라고 명령하지 않소? 허지만 그처럼 고집하는 당신을 내가 어떻게 믿고 화해허냐 말이요―ㅡ"
역시 성재가 무러본 말과는 다소 동떠러진 대답이었으나, 그는 한순간 기가 맥혔다.
이것은 바로 정래에게 하고 싶었던 자기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뭘 고집했기에 허는 말이요ㅡ"
성재가 어이없어 이렇게 무렀는데두 정래는 조금도 주저하는 빛이 없이
"“고독”이요 어떠한 평화도 욕망도 정열까지도 이곳에 드러오면 사러나지 못하는 고독이란 괴물이요" 一하면서
“사람이 감동하지 않는단 건― 아무 곳에도 격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실로 두려운 일일 겁니다."―하였다.
성재는 한동안 잠잫고 있었다. 역시 잘 연락이 닿지 않는 말들이다. 허나 다음 순간 그는――누구보다도 잘 감동할 줄 아는 사람들이 아무 곳에도 격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얼마나 차단된 고독한 상대인가― 싶었다기보다도 지금껏 자기가 제일 싫어하고 괴롭게 여긴 것이 정래가 고집하는 이 “고독”이 아니었든가 싶다. 그러나 이것을 지금 정래도 자기에게서 꼭같이 느낀다고 한다. 만일 이렇다면 아무 것도 살어나지 못한다는 이토록 무서운 고독을 두 사람은 어찌자고 이처럼 고집해 온 것인지― 그는 한순간 하나는 동으로 오고, 하나는 서으로 와, 어느 십자로에서 훅닥 튀어나와, 맞서게 된 두 개의 독갑이를 보는 것도 같은, 이상하게 섬찍하고 싫은 생각에 늘려 여전 말을 잃고 누어 있었다.
"이러한 것은 정인이에게 있어서도 꼭 같을 겁니다."
별안간 정래가 다시 건닌 말이다.
"그분에게 있어서도 꼭 같다니?"
"아―정 인이가 당신을 좋아했기 하는 말이요―"
그러나, 이건 더욱 어려운 말이다. 잘 믿어지지 않는 말이나, 만일 이것이 정말이라면 조금 전 그를 위해 좋은 실랑이란 누굴 두고 한 말이며, 꼭 같단 건 또 뭐가 꼭 같다는 말인가? 종시 요령부득이다. 그러나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자기를 저편에 보이기가 어쩐지 싫어서, 그는 우정 느릿느릿한 말투로
"그야 어찌됐든 아까 실랑이 나셨다고 했는데 그 사람은 누구요?" 하고 무러봤다.
"당신도 알지 않소 웨. 삼각정에서 양품점 하는 박이라는 청년 말이요―"
정래는 조금도 거침이 없다.
모든 것을 오리무중으로 돌린다면 그뿐이겠으나. 그는 웬일인지 이 말을 듯자 황망이 박이란 청년을 기억 속에서 찾고 있었다. 하긴 제법 해구찮을 데가 있는, 꽤 똑똑하게 생긴 청년이다. 그러나 어듼지 상뙤고 비속한 데가 없지 않어 정인이란 색시의 배우자로는 암만해도 부족한 데가 있었다.
"그래――그 사람을 매씨가 좋아헌단 말이지?"
지나치게 가라앉인 말소리다. 그러나 정래는 무표정한 우슴을 띄운 채
"잘 알 수 없단 말 아니요?"
하고 도로 무르면서
"정인이가 그 사람을 좋아한다면 그건 단지 그 사람이 하천(下賤)한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안심할 수 있다는 것 이것 때문일 거요―"하고,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 가사 성재로서 오래ㅅ동안 정인이를 연모해 온 터이라 해도 더 뭐라고 할말이 없겠꺼럼 된 셈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이처럼도 고집하는 두 남매를, 이대로 영원이 노쳐 보낼 수는 도저이 없었다. 이건 무슨 애정이나 미련에서라기보다도, 훨신 자조에 가까운 역시 그 “고집”에서다. 마츰내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정말 무슨 수로 해서든지 꼭 잡어 보고 싶은 꽤 조폭하고 끈기 있는 욕망에 괴로웠다.
"내가 당신헌테 요구한 것을 당신이 나헌테다 요구를 해서, 내가 그것을 완전히 드러줄 수 있다면, 일이 어찌 되겠오?"
조금 후 성재가 건넌 말이다. 이 말을 듯자, 정래는 시무룩이 우스며,
"그런 명령이야 나도 당신헌테 많이 했지 않소―"一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으나 역시 조금도 요동이 없는 싸늘한 말이다. 마츰내 성재는 몸을 이르키며
"정말은 내가 매씨를 사랑하고 있었다면, 그리고 매씨가 “안심”할 수 있는 그러한 “하천”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면, 일이 어떻게 되겠오?"
하고, 다잡었다.
"잘 믿지 않을 거요―"
성재는 이 말을 듯자 이상하게 괴로웠다. 사람과 사람끼린데, 더구나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끼린데, 무엇이 이처럼 여지없는 장벽을 가저왔나 싶다.
"여보! 이건 지옥이요!"
마츰내 그는 자기도 모르는 말로 벗을 바라다보았다. 순간 정래도 뭔지 괴로운 얼굴이다. 그러나 역시 그 이왼 아무 것도 아니었다.
성재는 도로 자리에 누었다. 몹시 피곤하였다.
조곰 후 정래는 극히 낮은 목소리로
"정인이에게 대한 이야기는 형이 직접 무러보시요"―하면서 이번엔 사뭇 혼잣말투로
"우리 훨신 늙거든 어데서고 만납시다. 그래서 ……그곳에서 ……우리도 그 “승천(昇天)”이란 것을 하게 합시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외톨 소나무가 서있는 산빗탈에 오래두록 누어 있는 성재는 마츰내 산림을 항하고 걷기 시작했다. 한거름 내닫기 시작하자 웬일인지 그는 옆도 뒤도 도라보지 않고 다름질치듯 수풀을 헤지고 깊이 작구 깊이로만 드러갔다. 단 멫천 평밖엔 되지 않는 산림 속이 수천만 평이나 되는 대 산림 속인 것처럼 어지러운 착각을 이르키며 그는 집요히도 정인이란 색시를 찾어 방황했다. 그러나 그 처녀는 결코 그리 어려운 곧에 숨어있지는 않었다. 건일 성재가 머무렀든 바위 턱에 오둑하니 앉어 어데론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재는 잠깐 거름을 멈추었으나 곳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이젠 바로 한거름 앞에 있다. 그러나 웬일인지 처녀는 그가 오는 줄을 조금도 모른다. 최후였다ㅡ그는 드디어 일흠을 불렀다. 그것은 결코 그리 큰 음성이 아니었으나, 놀라리만큼 그것을 크게 느끼며 그는 한번 더
"정인씨―"一하고 불렀다.
정인이는 성재로부터 일흠을 불리우고 곧 이러섰다. 처녀는 다소 놀라는 표정이었으나 그것은 극히 히미한 촌시의 것이었고……그리고는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그저 겸손하고 다정한 얼굴이었다.
성재는 별로 얼굴에 찬 기운을 느끼며, 그 굼테기가 몹시 패인 소나무에 기대인 채, 잠깐 정인이의 눈을 직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다정한 눈은 역시 그에게 생소한 것이었고 타인의 것이었다.
다음 순간 그는 심한 현기로 하여 잠깐 눈을 감었으나 그러나, 신기하게도 눈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가사 지금 이 한까풀 밑에 또 하나 다른 정인이의 눈이 초조히 성재를 기두리고 있대도 그는 이 이상 어떻게 더 행동할 도리는 없었다.
조금 후 그는 앞에 다소긋이 서 있는 여자가 무서웠다기보다도, 제 지신이 무서웠다. 이처럼 아집하고 거절하는 사람들을 그는 일즉이 상상할 수가 없었든 것이다.
그는 몸을 바르켜 각까스로 한거름을 닥어서며
"무슨 나물을 뜯씁니까?……고비는 저 아래 많이 있든데―"
하고, 빈 우슴을 지었다.―만사는 끝이 난 셈이다. 여자도 따라 꼭 같은 우슴을 지으며 나물을 잘 알거든 아르켜 달라고 말했으나, 웬일인지 그는 이 말에 대답을 잘 못하리만큼 심한 두통과 역기를 느끼며 그대로 서 있었다.
마츰내 그는 그곳을 떠나, 조금 후엔 지향없이 산 속을 걷고 있었다. 어디를 드러왔는지, 문듯 길이 맥히고 앞에 높은 언덕이 가로 놓였다. 잠깐 망사리고 있노라니 어데서인지 솔방울 하나가 잡목 틈으로 바시시 굴러 떠러진다. 하도 나무닢같이 날르는 것이라 집어봤드니ㅡㅡ, 그것은 마치 적년의 것인 듯 좀이 먹고 거미줄이 얼킨―가볍기 헛갭이 같어서, 완전히 썩은 것이었고, 죽은 것이었다. 꼭 딱쟁이 같었다. 이미 저 거대하고 오만한 체구엔 손톱만치도 필요치 않은 무슨 종기에 딱쟁이와도 같은 그러한 것이였다.
성재는 손에 묻은 거미줄과 좀틔를 털고 도라섰으나, 다시 사방은 죽은 듯 고요하고… 목을 졸르는 듯 닥어서는 애매한 초조 때문에 그는 뿌릿치듯 황한 거름으로 급히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언덕 넘엔 바로 고총이다.
무척 잔디가 곻았다.
성재는 그 곧에 자리를 잡고 아무렇게나 주저앉었다. 몹시 피곤하고…… 작구 조름이 오는 것 같다. 자고 싶었다. 잠을 자면은, 작구 무수히 잠을 자면은, 어찌면 혹 여게도 태고와 같은 “편안”이 찾어와 줄 지도 몰랐다.
차츰 동공이 조라드러 시야가 쉴새없이 명멸한다. 모든 물체가 하낱 허공을 그린 채 소실되는가 하면, 다시 집중되어 닥어서는 강한 “빛”으로 해서 그는 자조 현기를 느꼈다.
마츰내 그는 깊은 조름 속으로 흘러들며― (그래서…그곳에서 “승천”을 하게 되면 해도 좋고…) ―라고…벗의 말도 그의 말도 아닌 먼 곳에의 이야기를, 가만이 입속으로 외어보는 것이었다.
(創作集, 『도정』 1948, 白楊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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