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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조카가 국회 로텐더홀에서 농성한 후 유명세를 탔다
내가 행복할 수 없는 이유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근래 들어 두드러지게 눈과 귀에 거슬리는 것이 많아진 것도 그 중 하나다. 원래 까다롭다는 소리를 들어온 성격이고 그로 인해 비난을 받아온 터라, 스스로도 수긍하고 그 결과를 감내하여 왔지만, 요즘에 그 증세가 더 심해지고 있는 것이 문제다. 모든 성격이 그러하듯 성격의 까다로움이 단점만이 아니어서 젊을 때는 긍정적인 의미의 날카로움으로 평가 받기도 하여 장단점이 다소 균형을 이루었다면, 지금은 날카로움은 사라지고 까다로움만 증가하였으니 늙음의 징후가 아닌가 싶다. 개선할 힘도 용기도 없으면서 거슬리는 것이 많아졌으니 신세타령이나 하여 뒤틀린 심사를 풀어볼까 한다..
이 글의 제목에 포함된 ‘외조카’와 ‘로텐더홀’, ‘유명세’가 요 며칠 사이 나를 괴롭힌 장본인들이다. 제목을 보고도 거슬림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겠고 좀 이상하다 싶어도 별것 아닌 것처럼 넘어갈 법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손톱 밑에 가시처럼 성가시게 따라다니면서 괴롭히는 존재들이다. 이 세 단어가 한꺼번에 나를 화나게 한 시기가 그 전에도 있었지만 나의 전공분야도 아니고 책임질 위치에 있지도 않고 해서, 잘난 사람들이 해결하겠지 하면서 참고 넘겼다. 그런데 마음이 가라앉고 잊을 만하면 또 나타나 나를 화나게 만들고 있다. 언론들이 계속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계속 경험을 하다 보면 단련되고 무뎌져서 별로 의식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와 달리 알레르기반응처럼 경험이 축적되면 될수록 더 과민반응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는데, 이번 나의 경우는 후자의 경우라 생각된다.
‘외조카’란 말이 내 귀를 거슬리기 시작한 것은 작년 가을, 4조원대의 사기를 치고 중국으로 도망간 후 죽었는지 살았는지 불분명한 조희팔의 ‘외조카’가 자살했다는 보도부터다. 그 전에도 ‘외조카’란 단어를 많이 써왔는지 모르겠다. 요즘 시간이 남아돌 때는 방송국을 옮겨가며 뉴스를 보며 소일하는 처지라, 전에는 그냥 넘겼던 오류도 그냥 넘기지 못하고 내 귀에 걸렸는지 모른다. 방송만 ‘외조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로 쓴 신문에서조차 조희팔의 ‘외조카’라고 했다. 방송은 잘못 들었나 하고 자신을 탓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신문에 난 문자 기사는 두고두고 증거로 삼을 수가 있어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내가 시골 집성촌 출신인 되다 집안 어른이 씨족 개념이 강한 분인 덕분에 친인척 관계의 명칭은 남 못지 않게 알고 있다고 생각해온 나에게 ‘외조카’는 너무 생소했다. 그래서 사전을 찾아봤다. ‘외조카’(外조카)는 “’외종질(외사촌의 아들을 이르는 말)’(外從姪)의 잘못”이란다. 그래서 처음에는 순진하게도 ‘외종질’이 어려워 ‘외조카’로 잘못 쓰나 보다 했다. 알고 보니 조희팔의 누나의 아들이었다. 누나의 아들을 ‘외조카’로 칭했던 것이다.
누나나 누이의 아들은 생질(甥姪), 딸은 생질녀(甥姪女)다. 요즘은 나이깨나 든 사람들도, 우리 집안 사람들 외는, ‘생질’ 또는 ‘생질녀’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지식으로 아는 사람도 드물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우리 집안에서는 예사로 사용하는 말이었다. 생질을 두고 차라리 그냥 ‘조카’라고 할지언정 ‘외조카’라고 하지 않았다. ‘외조카’라는 말은 틀린 말이기도 하고 또 자주 쓰는 말도 아니다. 오죽하면 70을 넘긴 내가 처음 들어본 말이라 하겠는가.
방송, 신문 등 언론에서 누나 또는 누이의 아들을 서슴없이 ‘외조카’로 잘못 부르는 데는 약간의 변명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할아버지와 손자에 ‘외’자를 붙이면 외할아버지와 외손자가 되고, 숙질(叔姪)에 ‘당’자를 접두사로 붙이면 당숙(堂叔), 당질(堂姪)이 되듯이, 그 연장선 상에서 삼촌과 조카에 접두사 ‘외’자를 붙여 외삼촌과 ‘외조카’로 하면 될 법하다. 내 생각에 언론사의 기자들이 이런 식으로 ‘잔머리’를 굴려 조희팔의 누나(일부 언론에서는 ‘누님’이라는 존칭을 쓰는데 크게 잘못된 일임)의 아들을 ‘외조카’로 부르지 않았나 싶다. 외삼촌-외조카의 대칭은 얼른 듣기에, 사전을 찾아볼 필요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흠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외조카는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단어이고 늘리 쓰이는 말도 아니다.
생질이라는 좋은 단어가 엄연히 살아 있다. 생질이 ‘외조카’가 아님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이고 신문이고 스스럼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표준말로 인정 받은 과정을 설명하면서 언중 즉, 언어 대중이 많이 사용하면 표준말로 채택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는데 ‘외조카’의 경우는 여기에 속하는 것 같지도 않다. 언중의 흐름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했듯이, 기자들이 ‘잔머리’ 굴려 만든 말이 아닌가 싶다. 국립국어원에서 편찬한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유행어라면 따옴표라도 붙여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 내가 잘못 알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생질’ 대신에 ‘외조카’를 사용하는 것이 대세라면 국립국어원으로 하여금 먼저 표준말로 인정하도록 조처한 다음에 공식적으로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나 개인적 생각으로는 이 따위 부질없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생질’이라는 기존의 훌륭한 단어를 가르치고 보급하는 것이 훨씬 좋다고 생각한다. 생질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어렵다면 널리 보급되기 전에는 괄호 열고 ‘누나의 아들’이라고 설명하면 될 것이다.
이런 불만을 품고도 내 일이 아니다 싶어 참고 넘겼다. 그런데 며칠 전 ‘태양의 후예’라는 드라마의 조모 배우가 탤런트 최수종의 ‘외조카’라는 보도가 있었다. 역시 누나의 아들을 외조카라고 한 것이다. 알레르기 반응이 돋아났다. 그래서 홧김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이미 오래 전에 지적되어 알 만한 사람은 알고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외조카’만큼이나 나의 신경을 건드리는 단어가 ‘유명세’다. 유명세의 ‘세’자는 ‘세금 稅’자다. ‘권세 勢’가 아니다. 사전에도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탓으로 당하는 불편이나 곤욕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풀이되어 있다. 따라서 ‘유명세’는 소득세, 종부세, 취득세 등과 같이 일종의 세금으로 간주하여 말을 꾸며야 한다. ‘유명세를 내다’, ‘유명세를 치르다’, ‘유명세가 따르다’ 등과 같이 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유명세’의 ‘세’자가 ‘권세 勢’인양 알고 그렇게 사용하고 있다. 방송에 출연한 사람들이 명성의 기세를 타거나 기세를 몰아가는 꼴을 ‘유명세를 타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예사로 볼 수 있다. 유명세의 이런 오용은 많은 학자들이 책이나 칼럼을 통해 지적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정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고 있다. 비속어를 쓰거나 잘못 쓴 단어에 대해 앵커가 지적하고 시정하거나 사과하는 모습을 간혹 보는데, ‘유명세’를 위와 같이 잘못 쓰는데도 잘못을 지적하는 경우를 못 봤다.
만약 ‘유명세’를 언중이 ‘명성의 기세’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대세라면, 나는 ‘유명세’를 두 가지 뜻으로 사용하는데 반대하지 않는다. 만약 대세가 그러하다면 ‘세금 세’와 ‘권세 세’의 ‘유명세’를 모두 인정하여 공식화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방송에서 ‘권세 세’의 ‘유명세’를 쓰면 안 된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외조카’ 사건이 내 마음에 가라앉아 있던 앙금을 뒤흔든 경우가 또 있다. 국회 ‘로텐더홀’이 그것이다. 알고 보니 잘못 쓰인 역사가 엄청 오래 되었는데 내가 분명하게 인지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실제로 못 들었거나 아니면, 그러려니 하고 무심코 넘겨왔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먹고 있던 식당의 TV에 “국회 ‘로텐더홀’에서 야당의원들 농성”이라는 자막이 나왔다. 마침 영문학 교수가 옆에 있었고 이때다 싶어 ‘로텐더’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모르겠단다. 분명 영어스럽고 영어일 텐데 모르겠단다. 사람 이름인가? 미국 대학이나 관공서에 ‘사람 이름 플러스 홀’이라는 건물 이름이 많아 누구누구홀하는 것에 익숙한데다 영문과 교수가 모르는 단어라면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잠시 생각했다. 한편 대한민국 국회 안의 공간에 자기 이름을 붙일 정도의 유명인사라면 그 사람을 내가 모를 리가 없다는 생각도 했다.
돌이켜보면 우스운 일이지만, 집에 오자마자 ‘로텐더홀’이 Rotender Hall 아니면 Lotender Hall일 것이라 생각하고 영한사전과 영영사전을 뒤져봤지만 허사였다. 비슷한 단어도 없었다. 고유명사로도 없었다. 영어 좀 한다고 직접 대들다가 창피당한 것이다. 아차 싶어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 들어가 한글로 ‘로텐더홀’을 검색하니 수많은 정보가 떴다. 기사는 며칠 전 기사에서부터 지금의 국회의사당이 건축된 직후인 1975년의 기사까지 볼 수 있었다. 게다가 ‘로텐더홀’이 잘못된 표기라고 지적한 기사도 있었고 원어를 설명하는 글도 있었다. 아래는 포털 사이트에 나온 정보들을 요약한 것이다.
‘로텐더홀’은 rotunda를 우리말도 잘못 표기한 것이란다. 원래는 영어가 아니고 라틴어 totundus(원형의, 둥근)에서 유래된 말로, 이탈리아어로는 rotonda, 프랑스어로는 rotonde, 독일어로는 rotunde, 영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로는 rotunda로 표기한단다. 건축 용어로서 우리말로는 ‘로툰다’로 정착되어 있다. 위 각국 언어의 표기들을 아무리 여러 번 봐도 ‘로텐더’로 표기할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영어의 발음이 ro-tun-da[rout∧nd어]이니 ‘로우턴더’ ‘로탄다’ ‘로탄더’ ‘로턴다’ ‘로턴더’ 중 하나로 표기하면 몰라도 ‘로텐더’는 있을 수 없는 표기이다. 이미 건축계에서 이미 ‘로툰다’로 옳게 표기하고 있는데 왜 국회의 그 방만 ‘로텐더홀’이라고 할까?
영한사전에서는 rotunda를 “(특히 지붕이 둥근) 원형 건물, 원형홀”로 번역했고 영어사전에는 “a rotunda is a round building or room, especially one with a round bowl-shaped roof.”로 풀이하고 있다. rotunda라고 불리는 대상의 건축물은 우선 둥글어야 한다. 거기다 지붕까지 둥글면 더더욱 rotunda라 부를 자격이 첨가된다. 싶게 말하면 지붕까지 돔인 둥근 건물 또는 방(홀)을 rotunda라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국회 ‘로텐더홀’은 직사각형이란다. 기본적으로 rotunda가 아니다. rotunda라고 부르려면 미국 의사당의 rotunda나 버지니아주립대학의 rotunda처럼 건물 또는 방(홀)이 원형이어야 하는데 이 필요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것이다. 지붕이 둥글다는 것은 부수적이다. 우리 국회의 ‘로텐더홀’은 rotunda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rotunda에는 홀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굳이 ‘홀’이라고 덧붙일 필요가 없다. ‘역전앞’, ‘처갓집’을 예를 들어 항변할 수도 있겠으나 이런 중복현상을 외국어에까지 원용할 수 없다고 본다. 이래저래 ‘로텐더홀’은 잘못된 표기로 보인다.
나를 괴롭히는 의문은 어떻게 해서 이런 엉터리 용어가 생겨났으며 또 40년이 넘도록 시정되지 않고 정착해 왔는가 하는 것이다. 순전히 나의 추측이지만, 우리 국회의사당을 지은 직후, 영어깨나 하고 미국 의사당을 안답시고 유식한 척하던 인사가 ‘로텐더홀’로 불렀거나 그 사람은 ‘로턴더’라고 정확하게 영어 발음을 했는데 기자가 ‘로텐더’라고 잘못 받아 적었거나 하지 않았나 싶다. 그 후 영어 비슷해서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감히 따지기도 뭣하고 해서 그럭저럭 40년이 흘렀던 게 아닌가 싶다.
노다지나 오렌지, 라디오처럼 원어의 발음과 다르더라도 외래어로 취급하여 그냥 계속 쓰면 안 될까? 나는 반대다. 로마자 발음을 한글로 변환하는 어떤 원칙과도 부합되지 않으며 언중이 널리 쓰고 있어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일부 언론인들이 조금만 신경 쓰면 시정될 수 있는 문제이다.
모르는 게 약이요, 아는 게 병이라더니, 조금 아는 것은 더 큰 병인 것 같다. 나의 불행은 여기서도 시작된다. 그러나 이 글의 제목, ‘외조카가 국회 로텐더홀에서 농성한 후 유명세를 탔다’를 읽고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무식하다고 매도하고 싶다. 최현배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글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이 땅의 국어 선생들이 뭣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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