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7월30일
수락산 계곡 따라 정상 찍고 장암역으로 내려오는 코스
[이상헌 기자]
도봉산과 이웃하고 불암산과 어깨동무 하고 있는 수락산(水落山)은 '물이 떨어진다'는 뜻으로, 상당히 깊은
계곡과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랑천의 발원지이며 능선길을 따라 마치 거인이 갖고 놀던 공깃돌처럼
여러 크고 작은 바위가 늘어서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삼삼하다.
이번 산책길은 수락산 계곡을 따라 정상으로 향해 장암역으로 내려오는 코스다. 산책 루트에 있는 용굴암
에서는 누구나 '소원의 종'을 두드리며 근사한 경치를 관망할 수 있고 기개 높았던 선비 박태보를 기리는
노강서원 관람도 빼놓을 수 없다. 글쓴이가 추천하는 노선을 지도에 표시하면 아래 그림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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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락산 산책길 지도. 벽운동 계곡 따라 용굴암 도솔정, 정상 액자바위를 거쳐 노강서원까지. ⓒ 이상헌 |
산책의 시작은 7호선 수락산역 1번 출구로 나와 벽운계곡으로 향하는 이정표를 따르면 된다. 아파트 단지를 지나면 염불사까지 계곡길이 이어지므로 흐르는 물소리를 벗하며 사뿐히 걸어갈 수 있다. 포장도로가 끝나는 곳 바로 우측에 염불사가 있으니 들러보고 가자. 대웅전 뒤편의 자그마한 삼성각에는 산신과 독성의 현판이 함께 걸려있다. 여느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삼성각은 독성과 산신, 칠성을 함께 봉안한 건물이다. 독성각은 대개 단군을 섬기거나 탱화로 모셔져 길흉화복을 관장한다. 산신각은 재물을 감독하고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이며 칠성은 북두칠성 신앙을 반영한다. 불교가 전래된 이후 우리나라의 민간신앙을 수용하면서 한국적 색채가 녹아든 형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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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암. 시골집 마당과 같이 푸근함을 주는 곳. ⓒ 이상헌 |
염불사를 나와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도솔봉 방향으로 한동안 걷다보면 영원암을 거쳐 용굴암을 구경할 수 있다. 도솔봉과 용굴암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근사하므로 놓쳐서는 안 되는 코스다. 매월정 방향으로 가면 정상까지 빠르게 오를 수 있지만 길이 험해서 추천하지 않는다. 비탈 옆으로 난 소로길이 흡사 잔도(절벽에 구멍을 내고 만든 다리)를 걷는 듯한 기분을 선사하며 돌계단길을 돌아가면 영원암이다. 절이 아니고 마치 시골집 마당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 느껴진다. 뜨락에 약숫물이 나오므로 그런 분위기를 배가 시켜주고 있다. 나한전 뒤편으로 돌아가면 모자의 챙과 같이 생긴 갓바위가 황자굴이다. 명성황후가 피신처로 삼았던 용굴암 영원암을 뒤로 하고 도솔봉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보면 오른쪽 샛길로 용굴암 가는 팻말이 서 있다. 이번 산책기에서 빼 놓으면 섭섭한 장소이므로 들렀다 가자. 조금만 내려가면 되므로 진행을 방해하지도 않는다. 벼랑 위에 지어진 암자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상당히 멋진 곳이다. |
▲ 바위 행렬 따라 인생샷 남기는 곳, 바로 여깁니다 ⓒ 이상헌
일제가 조선을 집어삼키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당시, 대한제국은 안동 김씨의 60여 년 세도정치로 나라가 병들어 있었다. 섭정을 하던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권좌에서 축출한 고종과 명성황후는 청나라와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면서 점진적인 개화정책을 펼친다. 또 한편으로는 외척인 민씨 일가를 대거 기용하면서 세도정치의 악습을 이어갔다. 민씨 일파는 부정축재에 여념이 없었다. 군대의 봉급마저 1년 넘게 지급하지 않았으며 13개월 만에 쌀로 대신 주었으나 이마저도 모래를 섞어 구식 군대를 분노케한다. 조선 곳곳에 만연한 부정부패로 관리가 군인들의 봉급을 착복한 것이다. 이에 군부가 민씨 세력을 처단하려고 봉기한 사건이 임오군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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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굴암 육화당. 벼랑 위에 세워진 육화당 옆으로 소나무가 자란다. ⓒ 이상헌 |
명성황후는 군란을 피해 용굴암에 7일간 머물렀다고 전한다. 이후 조정의 하사금을 받아 대웅전을 건립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파른 벼랑 위에 자리 잡은 탓에 오밀조밀하게 전각이 세워져 있지만 육화당에서 바라보는 일대 풍경이 볼 만하다.
거인의 공깃돌을 배경으로 멋진 사진을 용굴암을 나와 수락산 정상으로 가보자. 도솔봉을 타고 치마바위를 거쳐 철모바위를 지나며 각각의 봉우리를 배경으로 멋진 사진을 남길 수 있다. 마치 독수리가 내려앉은 듯한 도솔봉에 이르면 남동쪽으로 경기도 남양주시를 비롯하여 중랑구와 노원구의 지세를 확인할 수 있다. 정상으로 오르는 데크 계단에 서면 기암괴석 옆으로 장대한 풍광이 펼쳐진다. 서쪽으로 도봉산 암릉 행렬이 지척에 닿을 듯 느껴지며 북으로는 의정부시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남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유려한 산세를 드러내고 있는 불암산 능선이 흡사 내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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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솔봉. 날개를 펼치고 날아갈 것 같은 모양이다. ⓒ 이상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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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락산 정상의 액자바위. 포개진 바위 속은 오리걸음으로 겨우 통과할 수 있다. ⓒ 이상헌 |
산꼭대기에 놓여진 몇개의 커다란 공깃돌 위에 서면 다소 센 바람이 옷자락을 휘날리게 만들어 몸이 저절로 흔들거린다. 이 짜릿함 속에서 부감하는 풍광이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흔들바람이 통과하는 액자바위 사이에 앉으면 네모난 프레임 속에 인생샷을 담을 수 있어 외국인들도 심심치 않게 찾는 곳이다.
기개 높았던 선비 박태보를 기리는 서원 수락산 절벽 경치를 감상하며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조망점(사진촬영소)를 지나 계곡을 타고 40분 쯤 진행하면 서너채의 전각으로 이루어진 석림사가 나온다. 창건 연대는 불확실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조선중기 문신 박태보(朴泰輔)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의 명복을 빌기 위해 중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한국전쟁 때 불타없어진 것을 1956년 비구니 상인(相仁)이 큰방(大房) 등의 건물을 세우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이라는 한자 대신에 큰법당으로 한글 표기를 하고 있는 것이 이런 이유로 짐작된다. 계곡길을 따라 일주문까지 이어지는 길이 노을빛을 받으면 상당히 운치 있으며 바로 앞에 노강서원이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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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태보의 부친인 서계 박세당 고택과 묘역. 사전예약을 통해 입장할 수 있으며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다. ⓒ 이상헌 |
31화(왕을 보살핀 궁녀길에서 왕을 구한 도량까지)에서 숙종이 두 번째 왕비인 인현왕후 민씨를 궁에서 내 쫒는 과정을 살펴봤다. 이때 정재(定齋) 박태보(朴泰輔)는 왕후의 폐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유배지로 가는 도중 노량진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를 기리기 위해 노량진에 충렬사가 지어지며 사액(賜額)을 받았고 약 100년 후 노강서원으로 승격되면서 다시 사액(임금이 사당과 서원 등의 이름을 짓고 액자를 하사함)을 받는다. 노강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살아남았지만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고 1968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했다. 그 이유는 노강서원 조금 아래에 부친인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고택과 묘역이 있기 때문이다. 옛집 안에는 수령 400여 년의 은행나무가 아직도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다. 고택과 서원을 둘러보려면 사전예약을 해야 한다. 문화관광해설사가 동행하여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으니 관련 내용은 의정부시청 문화관광과(031-828-4353)로 문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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