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심은 유학의 나무는 맹자와 주자의 육림(育林)을 거쳐 퇴계에서 꽃을 활짝 피웠다.
퇴계는 한사코 벼슬에서 물러나 성리학에 매진했으며, 학문‧문학‧교육‧시‧서(書)‧화(畵) 등에서 불멸의 자취를 남겼다.
다양한 분야에 걸친 이러한 성과는 일본으로 건너가 더 깊고 넓게 숙성되었다.
퇴계학은 퇴계 사후 불과 20여년 만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선비 강항(姜沆)에 의해 일본에 전파되었다.
일본인들은 임란을 통해 조선백자 제조기법을 비롯하여 엄청난 문화‧사상적 전리품을 챙겨가 오늘날의 왜문화를 일궜다.
일본의 철학자들은 출세지향적 실용학문이 아니라 인격 수양을 최고 덕목으로 추구한 퇴계의 논리에 경도되었으며,
이후 여러 대학이 퇴계학과와 연구소를 설립하여 퇴계학을 가르치는 한편 지속적으로 연구해오고 있다.
퇴계학연구소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대만‧중국 등 동양뿐만 아니라 독일‧미국 등 서양의 대학들도 설립했지만
여러 대학에 퇴계학과를 개설한 나라는 일본뿐이다.
일본의 학자들은 퇴계를 ‘제2의 왕인’이라 일컬으며 숭모하고 있다.
혐한증(嫌韓症)에 사로잡힌 일부 극우파를 제외하면 이성적인 일본인들의 친한(親韓) 행적은 새겨볼 만하다.
남해 한산섬에 조선 조정에서 외면해온 충무공의 사당을 짓고 해마다 추모제를 올린 것도 왜정시대의 일본해군이었다.
왜군은 이순신 장군을 전신(戰神)으로 숭배하면서 장군의 모든 전략을 철저하게 연구‧활용했다.
19세기 말 일본은 이순신 장군의 수군편제를 참고하여 현대해군을 창설했다.
그 결과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동양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순신 장군의 전술을 서양에 전파하여 영국 해군제독 넬슨에게 트라팔가르해전의 승리를 안겨준 것도 왜인들이었다.
1805년 10월 21일, 넬슨이 이끄는 영국해군은 이탈리아 침공에 나선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공격하여 궤멸시켰다.
이전까지 서양 해전은 양측 전함들이 마주 본 채 일렬로 늘어서서 상대방에게 함포공격을 가하는 단조로운 형태였는데,
학익진을 비롯하여 이순신 장군의 다양한 전술을 터득한 넬슨 제독은
수적으로 우세한 나폴레옹 해군과 스페인의 무적함대로 구성된 연합함대에게 쾌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스페인의 트라팔가르 앞바다에서 펼쳐진 이 한 번의 전투로 나폴레옹은 영국 침공계획을 완전히 접었으며,
영국은 지구촌 곳곳에 식민지를 확보하여 1세기가 넘도록 해가 지지 않는 해양왕국의 번영을 구가했다.
넬슨 제독 또한 이순신 장군처럼 전투 도중 프랑스 저격병의 총에 맞아 승전을 눈앞에 두고 숨을 거두었는데,
이때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번역본을 가져오라 하여 가슴에 안고 눈을 감았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중국 여순의 헌병대 감옥에서 학살당한 안중근 의사의 제를 먼저 지내기 시작한 것도 일본인 간수 지바도 시치였다.
5개월 동안 안중근 의사를 감시하던 지바도 시치는 안 의사의 고매한 인품과 숭고한 정신에 깊이 감화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뒤 대림사라는 절에 위패를 모셔놓고 안 의사 탄신일인 9월 2일이 되면 해마다 찾아가 지성으로 제를 올렸으며,
그가 죽은 뒤에는 부인과 양녀가 대를 이어 제사를 지냈다.
안동과 봉화 경계에 있는 청량산은 퇴계의 육체적․정신적 고향이다.
퇴계는 유산여독서(遊山如讀書)라 하여 학문에 몰두하듯 자주 이 산을 오르내렸다.
청량산 곳곳에는 퇴계와 인연을 맺었던 흔적들이 아직껏 산재해 있다.
퇴계는 말년에 ‘청량산 주인’이란 호를 지어 썼을 정도로 청량산에 애착을 보였다.
후손들은 청량산 들머리에 퇴계의 시비를 세워 선조의 기품과 학문을 기리고 있다.
청량산 입구에서 오리쯤 들어가면 웅장하지는 않지만 산뜻한 전통한옥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퇴계는 연산군 7년(1501) 경상도 안동부 예안현 온계리의 이 저택에서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된 아버지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러나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힘겹게 자랐다.
12세 때는 숙부 이우 공으로부터 「논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학문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곡진한 보살핌 속에 한학에 정진해온 덕에 학문의 길은 순탄했다.
퇴계는 스물세살에 소과인 생원․진사시에 입격한 뒤 더욱 정진하여 서른네살에 대과에 급제, 벼슬길에 올랐다.
벼슬보다는 학문 연구에 마음이 더 이끌렸지만 그에게도 역시 목구멍은 포도청이었다.
중종․인종․명종․선조를 거치는 동안 퇴계는 60여개 관직을 역임했다.
직급에 따라 6조 관직에 두루 스카우트된 관행이었으니 오늘날의 잣대로 계량할라치면 이해하기 어렵다.
그 동안 퇴계는 79회에 걸쳐 사직상소를 올리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는데,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학문에 전념하고자 한 퇴계나 그를 간곡하게 만류한 조정이나 참으로 질긴 인연이다.
퇴계가 한사코 벼슬을 마다한 데는 또 다른 까닭이 있었다.
친형인 온계 이해(李瀣)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함경도 갑산으로 유배되던 중 장독(杖毒)으로 요절한 데서 온 한(恨)이다.
바로 퇴계가 단양군수로 있을 때 친형이 충청감사로 부임하는 바람에 풍기현감으로 자리를 옮겼던 그 형이다.
얼마 전 타계한 최인호의 장편소설 「유림」 전(前) 3권을 읽고 퇴계 이야기를 쓰면서
후 3권이 출간되면 퇴계가 낙향하여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매진하는 얘기도 하겠다고 했으나 아직 약속을 못 지켰다.
신세가 고달파 차일피일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이행할 마음의 짐으로 기억에 담아두고 있다.
퇴계가 자주 오르내리던 청량산 오솔길은 누군가 일부를 복원하여 <녀던길>이란 돌 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녀던길 중간 퇴계가 다리참을 하던 곳에는 윷판대라 불리는 너럭바위가 있는데,
퇴계의 후손인 이육사는 바로 이 윷판대에서 낙동강 상류인 반변천과 들판을 내려다보며 호방한 민족시 <광야>를 구상했다.
퇴계의 학문적 업적에 비견되는 웅혼한 기상을 함께 음미해보자.
광야(廣野)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나이 예순에 접어든 명종 15년(1560), 퇴계는 향리에 도산서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붙였다.
마당 한귀퉁이에 작은 연못을 조성하여 그 안에 연꽃을 기른 아담한 서당이다.
퇴계 사후 자손들은 도산서당 옆에 규모가 큰 도산서원을 지어 퇴계의 뜻을 계승했고,
선조임금은 도산서원에 사액(賜額)을 내려 큰 선비의 자취를 기렸다.
현재 걸려 있는 현판은 한석봉의 친필이다.
칠순을 맞아 죽음을 예감한 퇴계는 자식들을 불러 일일이 뒷정리를 명한 뒤
‘분매에 물을 잘 주라’는 유언을 마지막으로 자리에 정좌한 채 숨을 거두었다.
퇴계는 조선조를 통틀어 매화를 가장 많이 기른 선비이기도 하고
매화와 매분을 소재로 한 시를 가장 많이 지은 ‘매화 바보’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학자와 매화 애호가들은 ‘분매에 물을 잘 주라’는 유언을 퇴계의 매화사랑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최인호는 소설 「유림」을 통해 그 유언이 단양기생 두향을 당부하는 말로 해석했는데,
퇴계의 자손들이 그렇게 받아들여 두향의 묘지를 은밀하게 보살펴주었다는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
숨을 거두기 직전 퇴계가 가리킨 분매는 바로 정인(情人) 두향이 작별의 선물로 건네준 정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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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친 어르신 늘 건강하세요
퇴계 선조님의 글귀 카페의 깊이를 더해 주시는 군요
급하게만 살아 온 날들, ~~ 이밤 조용함을 주시는군요
지기 아제님 시간될때 마다 퇴계선생의 글귀 공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