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36년에 간행된 『황색종연초경작연혁사(黃色種煙草耕作沿革史)』에 수록된 오카다 토라스케(岡田虎輔)의 회고록 「一、황색엽담배 생산 창업 당시를 회상하며」 원문과 번역문을 실었습니다.
p1
一、《黄色葉煙草生産創業當時ヲ想ヒ起シテ》
---- 岡田虎輔誌
明治四十三年十二月予ハ專賣局技師ヲ奉職中、時ノ長官濱口雄幸閣下ヨリ朝鮮煙草專賣準備ノタメ同總督府ヘ轉任セヨトノ內命アリ翌十四年二月總督府技師トシテ赴任セリ着任後諸般ノ調査ヲ行ヒ專賣準備事業トシテ消極的ニハ煙草産地ノ整理、煙草製造業ノ統一等ヲ企圖スル傍ラ專賣益金增收ノ目的ヲ以テ種々ノ積極的施設ヲ試ミタルガ就中米國黄色煙草ノ新産地ヲ形成スルコトハ當時兩切紙卷煙草ノ需用ガ世界的ニ激增シツゝアル情勢ヨリ見テ極メテ必要ナルコトヲ感ジ産地計劃ヲ上司ニ建議セリ、幸ニ上司ノ嘉納スル處トナリ四十四年ノ秋ヨリ此ノ事業ニ努力セリ。
計劃ノ第一着手トシテ鮮內大河ノ流域ニ於ケル沖積土ノ平野數箇所ヲ候補地ニ豫選シ此ノ中ヨリ更ニ土質上優秀ナル地方ヲ物色シタルガ現産地忠州ハ奧地ニ銘葉寧越葉ノ産地ヲ控ヘ漢江ノ關係ニテ兩地ノ土壤成分ガ似通ヘルコトヲ推定シタリ又忠州ハ黄色煙草産地ニ必要ナル肥料、燃料等ノ輸入竝ニ生産品(樽詰煙草)ノ輸出ニ漢江ヲ利用スル
p2
ノ便アルヲ以テ先ヅ忠州ニ白羽ノ矢ヲ立テ更ニ進ンデ土壤ノ成分氣象等ニ就キ詳細ナル調査ヲ行ヒタル上愈忠州ヲ産地トナスコトニ決定セリ。
大正元年(明治四十五年)二月予ハ忠州ニ出張シ郡廳內ニ度支派出張所假事務所ヲ置キ所員ヲ指揮シテ事業ノ準備ヲ行ヒシガ先ヅ地方官民ノ有力者=本計劃ノ説明ヲナシテ贊助ヲ求ムルコトノ急務ナルヲ感ジ郡守徐晦輔氏有力者鄭雲䎘氏(初代ノ耕作組合長)等ト連日會同ヲナシ胸襟ヲ披キテ協議シタルガ何分ニモ耳新シキ産業ノコトニテ事業ニ對スル諸氏ノ理解ヲ得ルマデニハ容易ノコトニアラザリシガ反覆說明ノ後少ナクトモ予ノ誠意丈ケハ認メラレタルガ如ク進ンデ本事業ノタメニ一肌脫ガントノ約ヲ言明セリ(此ノ時徐郡守ノ發意ニテ徐氏ト予トハ義兄弟ノ誓約ヲナシタルガ其ノ後予ノ辭任シテ內地ニ歸リタル後モ時々交通ヲ怠ラズ同氏ノ逝去マデ親交ヲ續ケタリ)徐郡守ハ予トノ約ヲ重ンジ毎夜地方ノ有志ヲ集メ深更ニ至ルマデ事業ノ助成ヲ勸告シタルコトハ後ニ至リテ同氏ヨリ之レヲ聞キ同氏ノ努力ノ尋常ナラザリシヲ思ヒテ深ク感謝セリ。
地方有力者ニ對スル説得ハ一段落ヲ告ゲタルヲ以テ次ギニハ地方ノ農民ヲ郡廳ノ前庭ニ集メテ煙草耕作ヲ勸誘シタリ、此ノ時集合シタル農民ノ數ハ約二百名ナリシガ通譯者ガ予ノ演説ヲ通譯セル間、予ハ聽衆ノ態度ヲ注視セルニ彼等ノ多クハ予ノ演説ニ耳ヲ
p3
傾クル風ナク嘲笑ノ動作ヲナシテ隣人ト喃々セリ演説後彼等ガ何ヲ話シ合ヒタルヤヲ質シタルニ彼等ハ異口同音ニ「忠州ハ昔ヨリ煙草ヲ栽培シテ成功シタルコトナシ官吏ノ勸誘ニテ煙草ヲ作ツテモ成育ノ途中莖根腐敗シテ廢棄ノ已ムナキニ至ルベシ這般ノ事情ヲ知ラザル日本人ノ計劃ハ一顧ノ價ナシ」トテ冷笑セルコトヲ耳ニシ今後彼等ニ對シテ耕作指導ヲ行フノ困難ナルベキヲ痛感シタリシモ兎ニ角行ク處マデハ忍耐ヲ以テ進ムモノト決心セリ。
黄色種煙草ノ耕作ハ在來種ト異ナリ進步シタル技術ヲ要スル而己ナラズ乾燥室ノ建設、肥料、燃料ノ購入等ニ少ナカラザル資金ヲ要スルモノナレバ前述ノ如ク此ノ事業ニ對シテ冷笑ヲ浴セ居レル農民ニ初メヨリ此ノ重荷ヲ課スルコトハ策ノ得タルモノニアラズ兎モ角彼等ガ煙草作ノ有利ヲ自覺スルマデハ彼等ノ仕事ヲ簡易ニシ同時ニ資金ヲ要セス樣ニスルガ肝腎ナリト思ヒ此ノ方針ニテ左ノ如ク初年度ノ事業計劃ヲ立テタリ。
耕作者ニハ單ニ本圖栽培ノ技術丈ケヲ會得セシムルニ止メ苗ト肥料トハ無代ニテ官給ヲナスコト、シ生産葉煙草ハ生葉ノ儘ニテ之レヲ買ヒ上ゲ官設ノ乾燥室ニテ乾燥ヲ行フコトニセリ、煙草生葉ノ買買ハ實ニ前代未聞ノコトニテ自分ナガラ其結果ニ就キテ不安ノ感アリシモ此ノ方法ニヨレバ耕作者ハ唯自己ノ土地ト自己ノ努力ヲ提供スル
p4
ノミニテ別ニ金錢ノ出資ヲ要セズ而カモ成育シタル葉ハ野菜ト同ジク畑ヨリ刈リ取りテ出張所ヘ持チ行ケバ確實ニ金ニ代ヘラル、コトナレバ案外甘ク行クカモ知レヌト考ヘ之レヲ實行シタルニ幸ニシテ豫想以上ノ效果ヲ見ルニ至レリ。
創業當時ハ思ヒ寄ラス出來事ガ夫レカラ夫レヘト發生セリ、苗ヲタダデ遣ルカラト云フテモ中々取リニ來タラズ已ムヲ得ズ指導員ガ持參シテ耕作者ノ宅ニ屆ケ植付方法ナドヲ敎ヘ置キ翌日見廻リニ行ケバ苗ハ無殘ニモ溝ノ中ヘ投ゲ棄テ、顧ミズ甚ダシキハ指導員ガ自ラ植工付ケヲナシテ歸リタル後ニ態々引キ拔キテ他ノ作物ニ代ヘテアルト云フコトガアリ又無料ニテ配布セル肥料ヲバ之レヲ他ノ作物ニ施ストカ又ハ家畜ノ飼料ニ與ヘルモノガ多數アリ分リノコトニ立腹セザルヲ得スヤウナ場面ガ至ル處ニ出現セリ何デモ耕作者間ニハ政府ガ前記ノ如キ恩惠ヲ與ヘテ煙草ヲ作ラシメタル後吾々ニ重キ課稅ヲナスニアラズヤトノ杞憂ニテ耕作ヲ避クル風アリトノコトヲ耳ニシタリ然ルニ局ニ當ル吾々トシテハ言行一致ヲ旨トシ努メテ耕作者ノ疑惑ヲ解クヤウニ仕向ケタルニヨリ前記ノ如キ弊害ハ次年度ヨリ其ノ跡ヲ絶ツニ至レリ。
次年度ヨリハ耕作ノ成績其ノ他ヲ勘案シテ優良者ニハ漸次ニ乾燥自營ヲ獎勵シタリシガ同時ニ農工銀行、金融組合等ノ金融業者ニ對シテ火力乾燥室ノ建設、肥料石炭等ノ購
p5
入ニ要スル低利資金ノ供給ヲ懇談シタリ然ルニ金融業者トシテハ新事業創始ノ際ノコトニテ其ノ成否ニ對シテ深ク疑念ヲ抱ケルコトナレバ容易ニ當方ノ希望ニ應ズルノ風ナク已ムヲ得ズ支部上司ノ配慮ヲ煩ハシテ漸ク其ノ目的ヲ達スルコトヲ得タリ、尙一面耕作者ノ側ニ於テハ無擔保借入ノ恩惠アルコトナレバ進ンデ借入ノ態度ニ出デ來ルナラント思ヒシニ意外ニモ自ラ進ンデ借入ヲナナサントスルモノナク此ノ勸誘ニモ可成ノ骨折ヲ要シタリ。
斯クノ如ク創業後ノ兩三年間ハ色々ノ事件發生シタリシガ大正四年頃ニハ産地ノ基礎モ稍確立シタトノ自信ヲ持ツニ至レリ同時ニ新シキ惱ミノ種トナリタルハ生産葉煙草ノ處分ナリ、大正三年マデハ産額少ナク從ツテ其ノ處分モ容易ナリシガ四年ニハ産額急ニ增加シ賣殘リノ品ハ組合ニ於テ手持ヲセネバナラヌ狀況トナレリ、尙ホ今後モ益益額ノ增加スルコトナレバ今ノ場合ニ於テ有力ナル買手ヲ物色シ確實ナル販路ヲ開拓スルノ急務ヲ感ジタリ、之レニ就キテ先ヅ交涉ヲ開始シタルハ本邦一流ノ貿易機關タル某會社ナリ同社ハ朝鮮ノ特産物ヲ一手ニ取扱ヘル關係モアルコトナレバ多大ノ望ヲ以テ時ノ京城支店長ニ懇談シタルニ案外ニモ餘リニ乘氣ナク深ク失望シタリシガ兎モ角モ葉煙草ノ引受ハ懸案トナシ置キ先ヅ同社ノ手ニテ外國方面ニ販路ヲ物色スルコトニナ
p6
リ彼我提攜シテ見本ノ發送其ノ他ニ努力シタリシモ香バシキ結果ヲ見ルニ至ラザリキ次ニ生産品一手引受ノ勸誘ヲナシタルハ某煙草會社ナリシガ支拂代金ノ金融、現品ノ無料保管等色々有利ナル條件付ニテ責任引受ヲ勸誘シタリシモ之レ亦吾人ノ期待ニ反シ逃ゲ腰トナリ承諾ヲ得ルニ至ラザリキ斯クノ如ク販路開拓上ノ苦心ハ幾度モ蹉跌シ今後ノ産地發展ニ一大暗影ヲ投ズルニ至レリ然ルニ天ノ助トモ日フベキカ突然英米煙草「トラスト」ヨリ予ノ手許ニ「忠州産黄色煙草ノ見本ヲ一覽シ價段如何ニヨリテハ多量購入ヲナスベシ」トノ申込ヲナシ來レリ此ノ時予ハ懷ヨリ手ノ出ルヤウナ思ヒヲナシタルモ前ニ記シタル如ク外國煙草會社ニ對シテハ專賣準備ノ方針アルヲ以テ輕々シク彼等ノ申込ニ應ズル能ハズト思ヒ單ニ見本丈ケヲ示シ其他ノ交涉ニ對シテハ追ツテ回答スルコトニナセリ(因ニ「トラスト」側ニテハ此ノ申込ニハ他ノ政策ヲ匿藏セシコト後ニ記スルガ如シ)此ノコトヲ傳ヘ聞キテカ前記ノ某煙草會社ハ從來ノ態度ヲ一變シ本社ノ重役京城ニ急行シ來リテ忠州黄色煙草一手買取ノ契約ヲ締結スルニ至リ玆ニ販賣上ノ難關モ一鴻千里ノ勢ヲ以テ解決シ産地ノ前途ニ洋々タル望ヲ見ルニ至タリ。
一難去ツテー難來ルト云フ諺ノ如ク産地ノ基礎確立シ生産品ノ處分方法決定シタル後ニ於テ又々大小ノ難事ガ夫レカラ夫レヘト續出セリ此ノ時分ニハ耕作者側ニ於テモ
p7
數年ノ經驗ニヨリ黄色煙草耕作ノ有望ナルコトヲ自覺スルニ至リタルヲ以テ所謂一擺千金ヲ夢ミル輩ノ簇出スルハ已ムヲ得ザルコトナリ然ルニ予ハ內地專賣局勤務中全國産地ノ管理ヲ務メタノ體驗ト煙草耕作ノ如キ尤モ集約ナル農業ノ統制原理トヨリ耕作者ガ急激ニ反別ノ擴張ヲナスコトハ極メテ危險ナリトノ意見ヲ有スルヲ以テ此等ノ夢想者ノ熱望ニ對シテハ強烈ニ制御ヲ加ヘタリ
耕作者間ニ葉煙草ノ品質觀念ガ發達スルト共ニ官吏ノ鑑定ニ對シテ不平ノ聲ヲ漏スニ至ルハ之レ亦已ムヲ得ザルコトナリ內地ニ於テモ專賣ノ初期ニハ此ノ不詳事件ガ各地ニ起リ甚ダシキハ耕作者大擧シテ專賣局ノ建造物ヲ破壞シ局員ニ危害ヲ加ヘタル例モアルコトナレバ予ハ部下ノモノニテ直接鑑定ニ從事スルモノニハ技術ノ修養ト執務ノ公平ニ就キ絶ヘズ訓戒ヲ與ヘ尙ホ鑑定ノ不當ヲ訴フルモノアラバ物和ラカナナル態度ヲ以テ耕作者ノ誤解ヲ正スベキコトヲ注意セリ幸ヒニシテ內地專賣當時ノ樣ナ暴擧ハ起ラザリシモ一度予ノ心ヲ寒カラシメタルコトアリ大正五年ノ冬某面面長ノ引率セル約四百名許リノ耕作者ガ夜半出張所ヲ襲フトノ情報ヲ受ケタリ予ハ心靜カニ組合事務所ニ於テ彼等ヲ待チ受ケタリシガ萬一ヲ慮リテ豫メ守備隊長ニ保護ヲ依頼シ置キタレドモ群集ハ僅カニ投石シタル程度ニテ予ノ訓示ヲ靜肅ニ聽取シタル上夜ノ白ム頃ニ事
p8
務所ヲ引キ揚ゲタリ。
終リニ事業ニ關スル「エピソード」ノ二、三ヲ記述センニ(一)本事業創始ノ際吾々當局者ハ甚ダシク耕作者ニ忌ミ嫌ハレ吾等ノ影ヲ見レバ風ヲ食フテ逃走スルノ風ナリシガ數年ノ後耕作熱旺盛ヲ見ルニ至リタル時予ハアル夕方忠州出張ノ途次漢江ノ渡船場ニ近ヅキタルニ幾千人カト思ハル、白衣ノ鮮人對岸ニ群集セリ予ハ隨行者ニ何ノタメナルカヲ尋ネタルニ「耕作者ノ有志貴下ヲ迎フルガタメナリ」トノコトニテ予ハ最早事業ノ成功疑ヒナシト思ヒ胸中感謝ノ念ニ滿タサレタリ、今デモ忘レ得ヌハ「タンベ、サラミー」ナル方言ガアツテ吾々ガ産地ヲ巡回スル時ニハ頑是ナキ大勢ノ兒童ガ吾々ノ後ニ付キ來リテ「タンベ、サラミー」ト連呼セラレタルガ自分ハ一種ノ尊稱デモ貴ヒタル樣ナ心持ヲナセリ(二)本事業創始ノ頃忠州地方ハ全鮮中納稅成績ノ尤モ不良ナル處ナリト聞キ予ハ度支部職員ノコト、テ餘所事ナラズト思ヒ其後ノ成績如何ヲ窺ヒ居リタルニ納稅成績ハ漸次良好ニ向ヒ遂ニハ全鮮中納稅模範地トナレルコトフアル有力筋ヨリ聞キ込ミテ左モアルベシト思ヒタリ(三)産地ノ基礎ガ稍確立シタル時分ニ京城ノ有力ナル實業家某氏ガ一夜予ノ自宅ニ來リテ日ハク君ハ退官シテ忠州ノ事業ヲ自營シテハ如何ニヤ若シ君ニ其ノ意志ナクバ自己ガ中心トナリテ事業會社ヲ創立シ今後ノ忠州事業一切ヲ引キ受ケ
p9
タニ君ノ意見如何ト予ハ忠州ノ事業ハ耕作組合中心トシ行ク行クハ官廳ノ手ヨリ放
シテ全組合ノ事業トナス目的ニテ己ニ組合ヲ設立シテ旣定ノ方針通リニ進行セリ今
更個人ヤ會社ノ手ニ移ス意志ハ毫モ之レナシト答ヘタリ此ノ樣ナ行懸モアルコトナレ
バ予ハ心窃カニ耕作組合ノ行末ヲ案ジタリシガ何時間イテモ組合ハ頗ル順調ナル生立
ヲナシツゝアリトノコトニテ實ニ快心ノ至リナリ(四)前ニ記シタル如ク英米煙草「トラ
ス」ノ外人ガ突然予ノ許ニ來リテ忠州黃色葉ノ取引ヲ申込ミタル時專賣制度ノ都合上單
ニ忠州黃色葉ノ見本ヲ示スニ止メ置キタルガ其後探知スル處ニヨレバ「トラスト」社員ハ
屢々淸州ニ來リテ忠州事業ノ計劃及實行方法等ニ就キ詳細ナル調査ヲナセリ蓋シ「トラ
スト」側ニ於テハ邦人ノ手ニテ東洋ニ黃色煙草ノ大
大産地ガ生成セル、コト、ナレバ同業競爭上由々シキ大事ナリトシ同社ニ於テモ窮カニ東洋ニ大産地ヲ形成シテ邦人煙草事業者ニ對抗セムトノ計劃ニ着手シ其ノ參考トシテ忠州産黄色葉ノ品質ヲ研究シ忠州産地ノ指導開發ニ關スル方法ヲ調査セリ果セル哉「トラスト」ハ大正六年頃ヨリ支那山東省ニ地ヲ相シテ事業ノ計劃ヲ立テタリ傳聞スル處ニヨレバ「トラスト」ガ同産地ニ投ジタル資金ハ八拾萬弗ニ達シ直接生産費ノ外ニ産地ニ病院學校等ノ設備ヲナシ間接ニ農民ヲ事業ニ誘導セリト云フ。
<번역문>
一、《황색엽담배 생산 창업 당시를 회상하며》
--- <오카다 토라스케(岡田虎輔)> 기록
p1
명치 43년(1910년) 12월, 본인이 전매국 기사(技師)로 봉직하던 중, 당시의 장관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각하로부터 조선 담배 전매 준비를 위해 조선총독부로 전임하라는 내정(內命)이 내렸고, 이듬해 44년(1911년) 2월 총독부 기사로서 부임하였다.
착임(着任) 후 제반 조사를 실시하여, 전매 준비 사업으로서 소극적으로는 담배 산지의 정리와 담배 제조업의 통일 등을 도모하는 한편, 전매 이익금 증대의 목적으로 여러 적극적인 시설을 시도하였다.
그중에서도 미국산 황색종 담배의 새로운 산지를 형성하는 것은, 당시 양끝을 자른 궐련(兩切紙卷煙草)의 수요가 세계적으로 급증하고 있던 정세에 비추어 볼 때 매우 필요하다고 느껴 산지 계획을 상부에 건의하였다. 다행히 상부에서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44년 가을부터 이 사업에 노력하게 되었다.
계획의 첫 착수로 조선 내 대하천 유역의 충적토(沖積土
) 평야 수십 곳을 후보지로 예비 선정하고, 이 중에서 더욱 토질이 우수한 지방을 물색하였다.
--- 여기서 조선내 대하천 유역의 충적토란 구절이 나온다. 물론 다 아는 얘기이고 들은 얘기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말이다. 올해 2월 9일 우연히, 잘 모르면서
《충주시 소태면 인다(仁多)마을과 비내섬의 유래》란 제목으로 쓴 글이 있다. 아래 인용 표시를 한 글이다.
충주종합체육관 인근에서 발굴된 무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큰 자갈들은 달천에서 가져왔을텐데, 오랜 옛날 달천의 흐름은 지금과 달랐다고 봐야 한다.
달천평야 일대로 물길이 흐르고 습지가 발달했을 것이다. 그 증거가 일제시대 작성된 아래 지형도에 나오는 제언(堤堰)과 못이라고 본다.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육지측량부(陸地測量部)에서 1916년 측도(測圖)하고 1917년 제판(製版)한 지형도(1: 10,000)중 충주도엽(忠州圖葉).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탄금대 일대는 물론 하방(下方)마을 아래 습지와 벌이 보인다.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육지측량부(陸地測量部)에서 1916년 측도(測圖)하고 1917년 제판(製版)한 지형도(1: 10,000)중 충주도엽(忠州圖葉).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지금 호암지와 대제(大堤, 함지) 아래 부근이다. 제언과 못, 물도랑이 보인다. 물도랑은 보(洑)의 역할을 했다.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육지측량부(陸地測量部)에서 1916년 측도(測圖)하고 1917년 제판(製版)한 지형도(1: 10,000)중 충주도엽(忠州圖葉).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바로 아래 2차지도를 참고하면, 위 지도 왼쪽 하단에서 왼쪽 북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달천 본류가 아니라 하방마을 앞을 흐르는 달천 지류(枝流)다.
대일본육지측량부(大日本陸地測量部)에서 명치 43년(1910년) 측도(測圖)하고 대정 2년(1913년) 제판(製版)한 지형도(1: 50,000)중 충주도엽(忠州圖葉). 2차지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위에서 언급한 하방마을 앞을 흐르는 달천지류(達川枝流)가 뚜렷이 보인다. 지금 달천교 아래인데 넓은 하중도(河中島)가 보인다. 탄금대와 갈마골(渴馬洞) 사이 달천에도 넓은 모래벌이 펼쳐져 있다.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日本陸地測量部)에서 대정 4년(1915년) 측도(測圖)하고 대정 5년(1916년) 제판(製版)한 지형도(1: 50,000)중 충주도엽(忠州圖葉). 3차지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 지도에 파란색으로 칠해진 것은 물을 표시한 것인데 2차지도와는 달라진 모습이다. 불과 15년 사이에 변한 모습이다. 탄금대앞 습지는 매립되고 도로가 새로 났다. 충주읍에서 지금 탄금장례식장 아래 선착장인 계선대(繫船臺)까지 나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하방마을 앞을 지나는 달천지류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황지(荒地, 荒蕪地)를 표시한 기호가 있는걸 보니 갈수기(渴水期)의 모습이다. 달천이 범람하면 물길이 생겼으리라 본다.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日本陸地測量部)에서 대정 4년(1915년) 측도(測圖)하고 대정 5년(1916년) 제판(製版)한 지형도(1: 50,000)중 충주도엽(忠州圖葉). 3차지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위 지도를 확대한 모습이다. 지도의 위쪽을 보면 2차지도 에 보이던 탄금대와 남한강 사이에 있는 용섬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능바위 앞 남한강변도 전혀 다른 모습이다.
---------------------------
올해 소가 뒷걸음질하다 쥐 잡는격으로 충주 어느 지역에서 지표 10m 아래 자갈층과 모래, 진흙층을 보게 되었다. 진흙층을 파니 잔자갈과 모래층이 나왔는데 진흙층은 훨씬 두터웠다.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는데, 관련자료는 나중에 입수가 가능할 것이다. 좀더 자료를 수집한후 공개할 생각이다.
하지만 그 곳은 지금 남한강 수위보다 훨씬 높은 지대였는데, 인공으로 생겼다고는 믿을 수 없이 자연스러웠다.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가볍게 넘길 수도 있으나 최소한 고대로 올라가면 남한강 물줄기가 지금과 달랐다고 봐야 한다. 그 고대가 역사시대라고 보면 충주를 다룬 읍지류에 꼭 나오는
[建置沿革 :本高句麗國原城。一云未乙省,一云薍長城。新羅取之。眞興王置小京, 徙貴戚子弟及六部豪民以實之。景德王改中原京。]
이 부분은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여기서 고구려때 충주를 일컫던 완장성(薍長城)의 완(薍)은 <물억새>란 뜻이 있다. 그럼 완장성(薍長城)은 《물억새가 넓게 자라는 곳》이란 뜻이 된다. 그리고 未乙城도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충주분지 일대는 사람이 살기 좋은 낭만적인 곳이 아니라, 습지와 늪, 숲이 우거진 곳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누구나 자신이 태어난 고장을 소중히 여기고 대단하게 여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하겠지만, 아닐 수도 있다고 본다. 한국의 대부분 향토지나 지방지에는 자신들의 고장을 오랜 옛날부터 살기 좋은 곳이라고 서술한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의식한 것이고 책에 쓰다보니 그리된 것인데, 인문지리에 앞서 자연지리를 제대로 아는 것이 선결과제요 그 지역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그 지방의 地質과 암석, 토양과 산세와 하천은 그곳에 사는 주민들의 삶은 물론 식생과 농작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편마암과 화강암, 석회암, 점판암과 대리암이 풍화된 토양은 제각각 다르다.
역사시대에 들어와서 남한강 수위는 지금보다 높았고 물줄기도 지금과 판이했다면 지금 중앙탑 부근에서 발굴된 여러 건물지들에 대한 이해가 쉬우리라 본다.
그리고 중앙탑을 남한강변에 세운 이유와 꿋꿋하게 버티어 온 이유가 설명이 된다. 대홍수가 자주 일어났던 남한강변에 굳이 세울 이유가 없을텐데. 이 일대에 달천이 흐른 것은 분명한데 남한강은 흐르지 않았거나 분기(分岐)되어 흘렀을 가능성이 높다.
[강바닥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낮아진다고 보는게 맞을거다. 상류로부터 끊임없이 자갈과 모래가 퇴적된다고 해도 특히 홍수철이면 흙탕물이 바닥을 훑고 지나간다. 대홍수가 끝나고 물길이 달라졌다는 얘기가 많다. 서울 목동과 강남일대가 그렇고 전국의 하천이 이런 변천을 겪는다.
반대로 시간을 거꾸로 올라가면 강바닥 높이는 지금보다 높아져 수위도 높아질 것이다. 충주댐 건설시 다량의 모래와 자갈을 용탄동 가린여울 부근과 조정지댐 하류에서 채취하였다. 특히 조정지댐 아래 목계상류 지역은 지형이 바뀔 지경이었다.
계명산과 남산아래 충주분지(忠州盆地)도 오랜 세월 침식작용으로 낮아졌다고 봐야 한다. 시간을 거꾸로 올라가면 남한강과 달천도 동시에 높아졌을 것이고 호암동 충주종합운동장 인근에서 자갈층이 발견되는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고려시대쯤이면 요도천(堯渡川) 수위도 지금보다 높아져 배로 남한강을 거쳐 신니면 숭선사(崇善寺) 인근까지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달천과 남한강은 수계(水系)도 길고 강폭도 넓으니 요도천보다 빠르게 강바닥이 낮아졌을 것이다.]
현 산지인 충주는 오지(奧地)에 명산 담배인 영월엽(寧越葉) 산지를 품고 있으며, 한강을 끼고 있어 두 지역의 토양 성분이 서로 유사할 것으로 추정되었다. 또한 충주는 황색종 담배 산지에 필요한 비료, 연료 등의 수입 및 생산품(樽詰煙草, 타루즈메 타바코. 나무통에 담은 담배)의 수출에 한강을 이용할 수 있는
p2
편의가 있으므로, 우선 충주를 적임지로 지목을 하고 더 나아가 토양 성분과 기상 등에 대해 상세한 조사를 실시한 끝에 마침내 충주를 산지로 정하기로 결정하였다.
대정 원년(1912년, 1912년 7월 30일부터 大正 원년이다. ) 2월, 본인은 충주로 출장을 가서 군청 내에 탁지파출소 임시 사무소를 두고 소원(所員)들을 지휘하여 사업 준비를 진행하였다. 우선 지방 관민의 유력자들에게 본 계획을 설명하고 찬조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느껴, 군수 서회보(徐晦輔) 씨와 유력자 정운숙(鄭雲䎘)씨 (초대 경작조합장) 등과 연일 회동하여 가슴을 열고 협의하였다.
그러나 워낙 생소한 산업에 관한 일이라 사업에 대한 이들의 이해를 얻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거듭된 설명 끝에 적어도 본인의 성의만큼은 인정받은 듯, 적극적으로 본 사업을 위해 팔을 벗고 나서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때 서 군수의 제의로 서 씨와 본인은 의형제를 맺었는데, 그 후 본인이 사임하여 일본 본토로 돌아간 뒤에도 때때로 교류를 게을리하지 않고 그가 서거할 때까지 친교를 이어갔다.)
서 군수는 본인과의 약속을 중히 여겨 매일 밤 지방 유지를 모아 한밤중에 이르기까지 사업 지원을 권고(勸告)하였는데, 이는 나중에 그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로, 그의 노력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생각하며 깊이 감사하였다.
지방 유력자에 대한 설득이 일단락되었으므로, 다음으로 지방 농민들을 군청 앞뜰에 모아 담배 경작을 권유하였다. 이때 모인 농민의 수는 약 200명이었는데, 통역관이 본인의 연설을 통역하는 동안 청중의 태도를 주의 깊게 살펴보니 그들 대부분은 본인의 연설에 귀를
p3
기울이는 기색 없이 비웃는 태도로 이웃과 수군거렸다.
연설 후 그들이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물어보니,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충주는 옛날부터 담배를 재배해서 성공한 적이 없다. 관리의 권유로 담배를 심는다 해도 성육 도중에 줄기와 뿌리가 썩어 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일본인의 계획은 돌아볼 가치도 없다”라며 냉소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앞으로 그들에 대해 경작 지도를 실시하는 것이 매우 어려울 것임을 통감했으나, 어쨌든 갈 데까지는 인내(忍耐)를 가지고 나아가기로 결심하였다.
황색종 담배의 경작은 재래종과 달리 진보된 기술을 요할 뿐만 아니라 건조실 건설, 비료 및 연료 구입 등에 적지 않은 자금이 필요한 일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 사업에 대해 냉소를 보내고 있는 농민들에게 처음부터 이러한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은 좋은 책략이 아니었다.
어쨌든 그들이 담배 농사의 유리함을 스스로 자각할 때까지는 그들의 일을 간이하게 만들고, 동시에 자금이 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肝腎)하다고 생각하여 이러한 방침으로 다음과 같이 첫해 사업 계획을 세웠다.
경작자에게는 단지 본밭 재배 기술만을 익히게 하는 데 그치고, 묘(모종)와 비료는 무상으로 관에서 지급하기로 하였다. 생산된 잎담배는 생잎 그대로 매입하여 관설 건조실에서 건조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담배 생잎의 매매는 실로 전대미문의 일이라 스스로도 그 결과에 대해 불안한 감이 있었으나, 이 방법에 의하면 경작자는 오직 자기의 토지와 노력을 제공할
p4
뿐 별도로 금전 출자가 필요 없으며, 게다가 자란 잎은 채소와 마찬가지로 밭에서 베어 출장소로 가져가면 확실히 돈으로 바꿀 수 있으므로 뜻밖에 원만하게 진행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이를 실행했더니, 다행히 예상 이상의 효과를 보기에 이르렀다.
창업 당시에는 생각지도 못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모종을 공짜로 준다고 해도 좀처럼 가지러 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지도원이 지참하여 경작자의 집에 배달하고 식재 방법 등을 가르쳐 두었는데, 다음 날 둘러보러 가보면 모종은 비참하게도 도랑에 던져 버려져 돌아보지도 않거나, 심지어 지도원이 직접 심어주고 돌아간 뒤에 일부러 뽑아버리고 다른 작물로 대치해 놓는 경우가 있었다. 또한 무료로 배포한 비료를 다른 작물에 주거나 가축의 사료로 주는 자가 다수 있어, 사정을 알면서도 화를 내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 곳곳에서 출현했다.
아무래도 경작자들 사이에는 ‘정부가 위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담배를 재배하게 한 후 우리에게 무거운 과세를 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우로 경작을 피하는 풍조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당국을 맡은 우리로서는 언행일치를 으뜸으로 삼아 힘써 경작자들의 의혹을 풀도록 유도하였고, 이에 따라 위와 같은 폐해는 이듬해부터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듬해부터는 경작 성적 등을 감안하여 우수자에게는 점차 건조 자영을 장려하였으나, 동시에 농공은행, 금융조합 등의 금융업자에 대해 화력 건조실 건설, 비료 및 석탄 등의 구
p5
입에 필요한 저리 자금의 공급을 정답게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懇談). 그러나 금융업자로서는 신사업 창시 때의 일이라 그 성패에 대해 깊은 의심을 품고 있었으므로 좀처럼 당사의 희망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지부 상급자의 배려를 번거롭게 한 끝에 겨우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한편 경작자 측에서는 무담보 대출의 은혜가 있으니 앞다투어 빌리러 오리라 생각했으나, 뜻밖에도 스스로 나서서 대출을 받으려는 자가 없어 이 권유에도 상당한 애를 먹었다.
이와 같이 창업 후 2~3년간은 여러 사건이 발생했으나, 대정 4년(1915년) 무렵에는 산지의 기초도 어느 정도 확립되었다는 자신감을 갖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새로운 고민거리가 된 것은 생산된 잎담배의 처분이었다. 대정 3년까지는 산출량이 적어 그 처분도 용이했으나, 4년에는 생산량이 갑자기 증가하여 팔다 남은 물품은 조합에서 재고로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향후 더욱 수량이 증가하게 된다면 지금 단계에서 유력한 매수자를 물색하여 확실한 판로를 개척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느꼈다.
이에 대해 먼저 교섭을 개시한 것은 일본 일류의 무역 기관인 모 회사였다. 그 회사는 조선의 특산물을 독점 취급하는 관계도 있었기에 다대한 기대를 가지고 당시 경성지점장과 간담(懇談)을 나누었으나, 뜻밖에도 너무 적극성이 없어 깊이 실망하였다.
어쨌든 잎담배 인수건은 미결 과제로 남겨두고, 우선 그 회사의 손으로 외국 방면에 판로를 물색해 보기로 하
p6
여 피차 제휴하여 견본 발송 등에 노력했으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지 못했다.
다음으로 생산품 일괄 인수를 권유한 곳은 모 담배회사였다. 대금 지불 금융, 현품 무료 보관 등 여러 가지 유리한 조건부로 책임 인수를 권유했으나, 이 역시 우리의 기대에 반하여 뒷걸음질을 치며 승낙을 얻지 못했다. 이처럼 판로 개척상의 고심은 몇 번이나 좌절되어 향후 산지 발전에 큰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다.
그러나 하늘의 도우심이라고 해야 할지, 갑자기 영미 담배 '트러스트(Trust)'로부터 본인에게 “충주산 황색 담배의 견본을 보고 싶다. 가격에 따라서는 다량 구매를 하겠다”라는 신청이 들어왔다.
이때 본인은 가슴이 뛸 정도로 기뻤으나, 앞서 기재한 바와 같이 외국 담배회사에 대해서는 전매 준비 방침이 있었으므로 경솔하게 그들의 신청에 응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단지 견본만을 보여주고 기타 교섭에 대해서는 추후 회답하기로 하였다. (참고로 트러스트 측에서 이 신청에 다른 정책을 숨겨두고 있었음은 나중에 기재하는 바와 같다.)
이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앞서 언급한 모 담배회사는 종래의 태도를 일변하여 본사의 임원이 경성으로 급히 내려와 충주 황색담배 일괄 매입 계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판매상의 난관도 단숨에(一鴻千里) 해결되어 산지의 앞날에 양양한 희망을 보게 되었다.
'산 넘어 산이라는 속담처럼 산지의 기초가 확립되고 생산품의 처분 방법이 결정된 후 또다시 크고 작은 난제들이 연이어 속출했다. 이 무렵에는 경작자 측에서도
p7
수년간의 경험을 통해 황색 담배 경작의 유망함을 자각하게 되었으므로, 이른바 일확천금을 꿈꾸는 무리들이 떼 지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본인은 일본 본토 전매국 근무 중 전국 산지의 관리를 맡았던 체험과, 담배 경작과 같이 가장 집약적인 농업의 통제 원리에 따라 경작자가 급격히 재배면적(反別)을 확장하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들 몽상가들의 열망에 대해서는 강하게 제재를 가했다.
경작자들 사이에서 잎담배의 품질 관념이 발달함과 동시에 관리의 감정(등급 사정)에 대해 불평의 소리를 내뿜게 되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본토에서도 전매 초기에는 이러한 불미스러운 사건이 각지에서 일어났고, 심한 경우에는 경작자들이 대거 몰려가 전매국 건물을 파괴하고 국원에게 위해를 가한 사례도 있었다.
그래서 본인은 부하 직원 중 직접 감정에 종사하는 자들에게는 기술 연마와 집무의 공정성에 대해 끊임없이 훈계하고, 감정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자가 있으면 부드러운 태도로 경작자의 오해를 바로잡도록 주의시켰다.
다행히 일본 본토 전매 당시와 같은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한때 본인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던 일이 있다. 대정 5년(1916년) 겨울, 모 면의 면장이 이끄는 약 400명가량의 경작자가 한밤중에 출장소를 습격한다는 정보를 받았다.
본인은 침착하게 조합 사무소에서 그들을 기다렸으나, 만일을 우려하여 미리 수비대장에게 보호를 의뢰해 두었다. 하지만 무리는 겨우 돌을 던지는 정도에 그쳤고, 본인의 훈시를 정숙하게 청취한 후 날이 밝아올 무렵 사
p8
무소에서 물러갔다.
끝으로 사업에 관한 에피소드 두세 가지를 기술하고자 한다.
(1) 본 사업 창시 당시 우리 당국자들은 경작자들에게 심하게 기피당하여 우리의 모습만 보이면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풍조였으나, 수년 후 경작 열의가 왕성해진 것을 보게 되었다.
본인이 어느 날 저녁 충주 출장길에 한강 나루터에 가까이 갔을 때, 수천 명은 되리라 생각되는 백의의 조선인들이 건너편 언덕(對岸)에 군집해 있었다.
본인이 동행자에게 무슨 일 때문인지 묻자 “경작자 유지가 귀하를 마중하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답하여, 본인은 ‘이제 사업의 성공은 의심할 여지가 없구나’ 하고 생각하며 가슴속에 감사의 염이 가득 차올랐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담배 사람’이라는 방언이 있어, 우리가 산지를 순찰할 때면 철없는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우리 뒤를 따라오며 “담배 사람, 담배 사람(タンベ、サラミー, 담배 사라미이)” 하고 연호하곤 했는데, 본인은 일종의 존칭이나 귀한 대접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2) 본 사업 창시 무렵 충주 지방은 전 조선 중에서 납세 성적이 가장 불량한 곳이라고 들었다. 본인은 탁지부 직원인지라 남 일 같지 않게 여겨 그 후의 성적이 어떠한지 살펴보고 있었는데, 납세 성적이 점차 양호해지더니 마침내 전 조선 중에서 납세 모범지가 되었다는 소식을 한 유력 출처로부터 전해 듣고 ‘과연 그렇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3) 산지의 기초가 어느 정도 확립되었을 무렵, 경성의 유력한 실업가 모 씨가 어느 날 밤 본인의 자택으로 찾아와 말하기를 “귀하는 퇴관(퇴직)하여 충주의 사업을 자영해 봄이 어떠한가? 만약 귀하에게 그 뜻이 없다면 본인이 중심이 되어 사업회사를 설립하여 향후 충주 사업 일체를 인수하고 싶은데 귀하의 의견은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본인은 “충주의 사업은 경작조합 중심으로 가고, 언젠가는 관청의 손에서 벗어나 완전한 조합의 사업으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이미 조합을 설립하여 정해진 방침대로 진행하고 있다. 이제 와서 개인이나 회사의 손으로 넘길 의사는 터럭만큼도 없다”라고 답하였다.
이러한 경위도 있었기에 본인은 속으로 경작조합의 앞날을 걱정했으나, 언제 보아도 조합은 매우 순조롭게 성장해 가고 있다고 하니 실로 기쁘기 그지없다.
(4) 앞서 기재한 바와 같이 영미 담배회사 《트러스트》의 외국인이 갑자기 본인을 찾아와 충주 황색엽의 거래를 신청했을 때, 전매 제도의 사정상 단지 충주 황색엽의 견본만을 보여주는 데 그쳤다.
그러나 그 후 탐지한 바에 의하면 《트러스트》 사원은 자주 청주에 찾아와 충주 사업의 계획 및 실행 방법 등에 대해 상세한 조사를 하였다.
대개 《트러스트》 측으로서는 일본인의 손으로 동양에 황색 담배의 대산지가 형성되는 것이 동업 경쟁상 매우 중대한 일이라 여겨, 그 회사에서도 기어이 동양에 대산지를 형성하여 일본인 담배 사업자에 대항하려는 계획에 착수했던 것이다.
그 참고 자료로 충주산 황색엽의 품질을 연구하고 충주 산지의 지도 및 개발에 관한 방법을 조사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트러스트》는 대정 6년(1917년) 무렵부터 중국 산동성을 대상지로 삼아 사업 계획을 세웠다.
소문에 들리는 바에 의하면 《트러스트》가 해당 산지에 투입한 자금은 80만 달러에 달하며, 직접 생산비 외에도 산지에 병원, 학교 등의 설비를 갖추어 간접적으로 농민들을 사업으로 유도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