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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0. 묵상글 ( 사순 제2주간 금요일. - 약하다고 악하지 않은 우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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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0. 사순 제2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약하다고 악하지 않은 우리
오늘 독서의 요셉은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집 짓는 자들이 내 버렸지만, 하느님께서 모퉁이 돌로 삼으신 돌입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런데 여기서 내 버렸다는 것은 필요 없으니까 버린 그 정도가 아닙니다.
제거라는 표현이 맞고 정적을 죽이듯이 죽여버렸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반드시 죽여야겠다고 마음먹는 사람들이 하는 짓입니다.
저로서는 생각이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짓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파리도 함부로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저나 여러분이
누굴 죽이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없고 생각 넘어 마음먹고
마음먹은 것을 실행하고 그것도 같이 모의하여
단체로 실행하는 것은 더더욱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선의 파괴와 모든 생명의 파괴는 악입니다.
물론 자연 순환적인 죽음은 파괴가 아니라 생산이기에
여기서는 악심에 의한 파괴를 말함인데 이들의 악심은 아주 대단합니다.
근현대사의 히틀러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처럼,
그리고 가깝게는 우리나라나 미얀마에서 학살을 저지른 군부 독재자들처럼,
눈 깜짝하지 않고 그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그들의 악심은 대단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 우리,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이런 자들에 대해 하느님은 어떻게 하실지 궁금합니다.
집 짓는 자들이 버린 돌, 모퉁이 돌로 삼으시는 주님은
죽게 된 요셉을 형제들로부터 구출해내시듯,
죽게 된 사람을 악심을 품은 자들에게서 구출해내시는 분일 뿐입니까?
그런데 창세기의 요셉 얘기는 악심을 품은 자들에게서 요셉을 구하시고,
그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하시는 얘기로 끝나지만
복음의 주님은 악심을 품은 자들을 하느님께서 반드시 징벌하신다고 얘기합니다.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이다.”
어제 가난한 라자로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고 회개 없이 죽은 것만으로도
부자를 천국 명부에서 이름을 빼시고 지옥행의 벌을 내리신 하느님께서
힘없는 사람들을 모의하여 죽이는 이 회개 없는 작당을 그대로 두실 리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너그럽고 자비로우신 것만이 아니고,
악한 자에게 약한 사랑이 결코 아닙니다.
약한 사람에게 너그럽고 자비로우시지만
악한 사람에게는 엄하고 강하시며,
회개를 요구하시고 벌도 내리시는데
그것이 이들에게 걸맞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약하다고 해서 악하지 않을까요?
약하기에 큰 악은 못 저지르고 작은 악을 저지르겠지요?
하느님께서는 작은 악에 대해서도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하느님은 크든 작든 악에 대해서는 회개를 끝까지 요구하시는 분입니다.
다만 작은 악이기에 회개하는 것이 덜 어려울지 어쩌면 더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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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0.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마태 21,42)
오늘 <복음>은 ‘포도밭의 사랑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포도밭 주인(하느님)은 당신의 포도밭(이스라엘 백성)을 소작인(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주인은 당신의 종(예언자)들을 여러 차례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학대합니다.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돌로 쳐 죽이고, 결국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지만, 그마저도 포도밭 밖으로 끌어내어 죽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실감나게 해 주는 노래입니다. 그 신뢰와 사랑이 너무도 커서 아들의 목숨까지도 건네주어 버리는 무방비의 신뢰와 사랑의 노래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신뢰와 사랑의 노래는 애절한 그 신뢰와 사랑이 거절당하고, 배반당하고, 끝내는 목숨까지 살육당하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가슴 아픈 노래입니다. 이 크신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에 우리는 얼컥 눈물이 젖습니다.
한편, 이 노래는 그 큰 사랑과 신뢰를 거부해버리고 마는, 나약한 우리 인간의 배신 이야기입니다. 또한 고귀한 사랑과 신뢰마저도 한갓 우리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짓부숴버리고 마는, 배은망덕의 패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제들과 원로들을 고발하며 꾸짖으십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꾀와 작태를 비웃으시며, 하느님의 깊은 섭리와 계획을 밝히십니다.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다’는 성경말씀의 인용을 통해,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겠지만 오히려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펼쳐진다는 역설의 신비를 가르쳐줍니다. 곧 당신께서는 버려진 돌이셨지만, 머릿돌이 되시어 새로운 집인 새로운 백성을 세우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정적으로 구원의 역사가 보장되었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파기되고,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교회공동체에 보편적 구원이 사명으로 맡겨졌음을 드러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특별히 포도원 주인의 믿음과 사랑을 보게 됩니다. 도조를 받으러 보낸 종들이 두 번씩이나 무참히 맞고 죽는 배신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베풀어지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마침내는 당신의 아들마저도 죽음을 당하지만, 끝까지 포도원을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입니다.
이는 아무리 인간의 죄가 크다 하여도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과 구원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마태 21,42). 사실, 도조를 바치지 않고 못된 일을 저지른 소작인들, 그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잘못과 죄를 반복하고 있는 우리들의 자아상 입니다. 소작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끊임없이 주시는 포도밭 주인에게 여전히 우리의 권리만 주장하고 있는 완고한 우리들의 자아상 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밀쳐내고, 그분의 권리를 강탈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탐욕으로 인해 주인의 아들마저도 죽이고 마는, 악한 마음과 배은망덕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좋은 결실을 맺고, 그 풍성한 소출을 도조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바로 오늘, 그분의 신뢰와 사랑에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주님!
당신께서 제게 하신 일,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꼭 가두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거부되고 버려지고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며,
감춰둔 사랑의 신비를 보여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제 머리 위에 당신 사랑을 두고,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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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0. 사순 제2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의인은 아무도 겁내지 않아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서 주신 포도밭이고, 우리는 그 밭의 일꾼입니다.
일꾼은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일꾼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고 주인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열매를 맺어 주인께 바쳐드려야 합니다. 만약 일꾼이 주인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일을 한다면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일꾼으로써의 자격을 잃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이미 하느님의 일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께서 주신 포도밭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훌륭한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롭지 못한 삶을 지적하시며 당신의 죽음을 암시하셨습니다. 그러자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의 속을 들켜버린 것을 알고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중이 두려워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왜 군중이 두려웠을까요? 자기들이 의롭게 살았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의인은 아무도 겁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옛 말이 있듯이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한 것은 곧 자기들이 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당당하셨습니다. 바리사이나 수석 사제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하시는 일이 아버지의 뜻에 의합하고 당신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5,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내주신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버지 안에 머무는 만큼 당당히 가실 길을 가야만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걸으신 그 길을 당당히 걷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보면(마르6,14-29), 홀로 정의를 외치다가 장엄하게 죽어가는 예언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나약하기 짝이 없는 왕의 모습이 대조적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헛된 약속을 하는 바람에 마음이 몹시 괴로웠지만, 요한의 목을 베어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의인은 당당하고 불의한 사람은 늘 불안합니다. 주님 앞에서 항상 떳떳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죽음을 통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 삶의 여정도 희생을 통해 다른 이를 이롭게 합니다.
신상옥씨의 ‘내 발을 씻기신 예수’를 묵상합니다.
그리스도 나의 구세주, 참된 삶을 보여주셨네.
가시밭길 걸어갔던 생애,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네.
죽음 앞둔 그분은 나의 발을 씻으셨다네.
내 영원히 잊지 못할 사랑,
그 모습, 바로 내가 해야 할 소명.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이 아파하는 곳으로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 손길 필요한 곳에
먼 훗날 당신 앞에 나설 때
나를 안아주소서.
주님께서 걸으신 길, 기쁨으로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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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0.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기시감(旣視感, 프랑스어: Déjà Vu 데자뷔)라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 만났는데 예전부터 알았던 사람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 가는 곳인데 예전에 와봤던 곳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혀 다른 공간과 장소인데 비슷한 전설과 신화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인드라망처럼 어쩌면 우리는 모두 하나의 기운으로 연결된 것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저도 처음 보는 사람인데 마치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친숙함을 느끼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처음 가는 장소인데도 예전에 와 봤던 것처럼 편안함을 느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신경과 혈관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여러 지체로 이루어져있지만 우리는 하나의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몸의 여러 지체를 통제하고 있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러한 생각의 지평을 더 넓게 보았습니다. 신앙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들이라고 보았습니다. 교회는 여러 곳에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의 교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보다 2000년 전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이야기를 들으면 예수님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막내로 태어났던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거룩하게 변모하실 때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았습니다. 요셉은 은전 스무 닢에 팔렸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은전 서른 닢에 팔렸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갇히고 고난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이집트의 재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부활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잘못을 용서하였고, 가족들에게 편안한 집과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용서하셨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요셉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잘못한 모든 이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예수님의 모습이 떠오를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기시감은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소작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소작인은 주인의 포도원을 잘 가꾸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소작인은 포도원이 자기들의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소출을 거두려고 주인이 종들을 보냈습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매질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주인은 아들까지 보내서 소출을 받으려고 하였습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아들을 상속인이라고 생각하고 죽였습니다. 주인은 포도원의 소작인들을 모두 없애 버리고 소출을 잘 내는 다른 소작인들로 바꾸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쁜 소작인들과 기시감을 느끼는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은 교회의 부끄러운 역사를 인류와 역사 앞에 깊이 사과하였습니다. 십자군 전쟁, 교회의 분열, 합리적인 지성에 대한 단죄, 마녀사냥, 권력과의 야합이 있었습니다. 나쁜 소작인의 모습을 보이는 성직자들도 있습니다.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있는 성직자들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성직자들도 있습니다. 저 역시도 나쁜 소작인에서 자유롭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지 2000년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닮아야 할까요? 예수님을 유혹했던 악의 세력인 사탄을 닮아야 할까요?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했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을 닮아야 할까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했던 베드로 사도를 닮아야 할까요?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무죄하신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빌라도를 닮아야 할까요?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셨던 예수님께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했던 군중을 닮아야 할까요?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굳은 믿음을 보여주었던 백인대장과 시로페니키아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했던 자캐오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자캐오의 집은 구원 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땀과 피를 닦아 주었던 베로니카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우리들의 구원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보다 앞서서 예수님을 닮은 길을 걸어갔던 요셉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모습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닮았다는 기시감을 느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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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0.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코로나19 팬데믹 전, 이탈리아 성지 순례를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때 특별히 한 성인이 인상 깊었습니다. 바로 베네딕토 성인이었습니다. 수도생활을 하셨던 수비아코, 서방교회 수도원의 발생지라고도 말하는 성인께서 직접 건립한 몬테카시노 등을 순례하면서 베데딕토 영성에 큰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순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베네딕토 규칙서’ 책을 샀습니다. 혹시 잘 모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규칙서의 주석서를 구매했지요. 그만큼 성인의 영성을 알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도 끝까지 다 읽는 저입니다. 그러나 이 규칙서의 머리말을 읽다가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내용이 너무 어려웠고 그만큼 지루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작년 말에 사제 피정을 신청하라는 인천교구 공문을 받았습니다. 여러 피정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중에 ‘베네딕토 영성과 가르침’이 보이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피정 지도 신부님은 제가 구매한 책의 저자였습니다. 이 피정을 신청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피정 강의를 통해 베네딕토 성인의 영성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규칙서에 대한 지도 신부님의 설명을 통해 성인께서 얼마나 대단한 분이었는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쉬는 시간에 신부님께 왜 ‘베네딕토 규칙서’를 읽기 힘들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책은 베네딕토 성인을 잘 아는 사람을 위한 해설서입니다. 따라서 잘 모르는 상태에서는 어려운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피정을 마치고서 이 책을 다시 펼쳤습니다. 성인의 기본 영성을 알고 난 뒤에 이 책을 이해하기는 훨씬 편했습니다. 책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저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전해주십니다. 밭 임자가 맡긴 소작인들은 포도원이 자기 것인 양 행동합니다. 그래서 소출을 받으러 온 종들을 오히려 매질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들까지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아들까지 죽여 버립니다. 그들은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소작인들이 해야 할 포도밭을 직접 일구고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우는 등의 일을 직접 한 주인의 자비와 사랑은 잊어버리고, 마치 자기 것인 양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악한 자들을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줍니다.
알고 모르고는 이렇게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알려는 시도와 또 알아가면서 그 사랑을 더 크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노력을 과연 계속해서 하고 있을까요? 혹시 주님의 사랑을 몰라서 계속해서 불의한 소작인들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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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고, 첫인상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정확성은 그리 신뢰할 만하지 않다(이드리스 샤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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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0.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꿈꾸는 사람이 됩시다"
꿈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승리
-요셉, 예수님, 성인들-
제가 예전은 물론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는 것이 꿈입니다. 꿈을 소재로한 시도 많습니다. 꿈이 있어야 비로소 산 사람입니다. 꿈이 없을 때 사람은 참 거칠어지고 사나워집니다. 요즘 사람들 보세요. 너무 거칠고 사나워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꿈을 잃으면 사람은 괴물이, 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꿈의 사람들에게서 꽃처럼 피어나는 시들입니다. 꿈에서 피어나는 시의 꽃입니다.
이런 이들이 궁극의 승리자가 됩니다. 바로 예수님을 비롯한 성인들입니다. 왜냐? 하느님이 꿈꾸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꿈이 현실화된 분들이 성인들입니다. 예전 제 자작 짧은 애송시 몇편을 나눕니다.
“창문밖
가난한 언덕
보랏빛
은은했던
제비꽃 그 자리에
샛노란
민들레꽃
감동의 그 자리에
하얀 눈
덮여있다
흰 눈 덮인 하얀 땅
보랏빛
샛노란 빛
봄꿈을 꾸고 있겠지”-1998.1.22.
지금도 선명히 떠오르는 그 당시 장면입니다. 이 시 덕분에 그해 겨울은 따뜻한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봄꿈’에 이어 ‘별꿈’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풀잎들
밤새
별꿈 꾸며 뒤척이며
잠못 이루더니
아침
풀잎마다 맺힌
영롱한 별무리
이슬 방울들”-2000.10.1.
요즘 산책하며 자주 부르는 제18번 노래 아침이슬 노래중 ‘긴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이란 대목이 연상되어 더욱 애착이 가는 별꿈이란 시입니다. 별꿈을 꾼후 강론을 쓰는 새벽 고요한 시간입니다.
“살아있는 것들만 꿈꾼다
죽어있는 것들은 꿈꾸지 않는다
연초록 새싹으로
화사한 꽃들로
피어나는
봄꿈의 나무들
살아있는 것들만 꿈꾼다.”-2009.4
문득 과로로 지금 입원중인, 윗 시가 속한 시집들을 곱게 편집하고 제본해준, 20년 이상 물심 양면 헌신적으로 수도원과 저를 도와준 고마운 자매님이 생각납니다. 무엇을 줘도 아깝지 않은 참 사랑스런 하느님의 딸, 자매님에게 주님의 치유의 축복을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어제 사촌 누님의 장례미사시 깜짝 놀랐습니다. 자녀들이 모두가 신자들인데 냉담중인 듯 한사람도 영성체를 하지 않고 연령회 회원 몇분만이 했습니다. ‘믿음이, 꿈이 없구나. 위로부터의 끈이, 하느님의 끈, 믿음의 끈이 단斷! 끊어졌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과 무관한 삶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통의 단절, 믿음의 단절, 꿈의 단절이 오늘날의 대체적 보편적 현실같습니다. 참으로 자녀들에게 물려 주어야 할 최고의 유산은 믿음이자 하느님 꿈임을 깨닫습니다. 조카들의 잠든 믿음의 씨앗이 초록빛 믿음의 꿈으로 활짝 피어나는 파스카의 봄철이면 참 좋겠습니다.
문득 어제 끝기도후 신선한 감동을 잊지 못합니다. 누구보다 꿈의 사람들이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평생 날마다 함께 바치는 아름다운 시편 성무일도의 은총이 꿈의 수도자들로 만들어 줍니다. 한 형제가 집무실 밖에서 서성이다 저를 보자 청했습니다. 작년 꿈같은 아이디어로 제주도 여행을 주선했던 수사입니다.
“수사님, 올해 저와 함께 전주 부근의 아름다운 성지에 성지순례휴가합시다. 아주 아름다운 성지들입니다. 끝기도때 꿈처럼 꽃처럼 떠오른 생각입니다.”
요지의 고운 생각과 말에 “고마운 생각입니다. 염두에 두고 생각하겠습니다.” 화답했습니다.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강론써 인터넷에 올릴 수 있고 매일 미사만 드릴수 있으면 언제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휴가는 이미 잊은지 수십년이 됩니다. 하루하루 일하면서 꿈꾸듯 휴가하듯 아름다운 나날을 살고 있는데 새삼 무슨 휴가이겠는지요!
오늘 창세기의 요셉은 제가 참 좋아하는 꿈의 사람입니다. 참 매력적인 사람이,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꿈의 사람들입니다. 보십시오, 꿈이 없으니 질투에 눈멀어 저렇게 모질고 사납게 요셉을 사지로 몰아넣는 형제들이 아닙니까? 꿈을 잃으면 누구나의 가능성이 사나운 괴물같은 사람들이나 무기력한 폐인들입니다. 악한 형제들의 단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저기 꿈쟁이가 오는구나.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그러자 형제들중에 하느님의 첩자(?) 르우벤과 유다가 있었고, 이들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살아나니 이또한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하느님의 꿈은 요셉을 통해 서서히 무르익어 가다가 언젠가는 꽃으로 활짝 피어날 것이며, 아무도 이런 하느님의 꿈을, 하느님의 섭리를 막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예표와 같은 요셉입니다. 궁극엔 꿈의 사람들의 승리요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오늘 복음의 소작인들은 꿈이 없어 욕심에 눈이 멀으니 사납기가 야수같고 괴물같습니다.
오늘날 정가에도 꿈을 잃은 권모술수의 괴물같은 정치인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정치가’가 아닌 ‘정치업자들’이라 하더군요. 고 김대중 토마스 대통령을 모 정치 평론가는 정치가를 넘어 ‘정치의 신’이라 칭했고 저역시 공감했습니다. 정치의 신하면 김대중 대통령의 절친이었던 남아프리카의 대통령까지 했던 역시 평화 노벨상 수상자 만델라가 생각납니다.
다음 소작인들의 말이 방금 제1독서 창세기의 사악한 요셉 형제들은 연상케 합니다. 인간 역사는 이처럼 반복됩니다.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아, 무지한 사람이 꿈을 잃으면 이처럼 사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꿈의 사람, 파스카의 예수님을 좌절시킬수는 없습니다. 다음 예수님 말씀은 후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의 체험에 배어 있는 시편을 통한 체험적 고백입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아무도 하느님의 꿈을 막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꿈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파스카의 꽃으로 활짝 피어납니다. 꿈의 사람, 예수님의 평생 꿈이자 화두는 하늘나라였고 부활을 통해, 매일 미사은총을 통해 서서히 실현되고 있는 하느님의 꿈, 하늘나라입니다. 궁극엔 꿈의 사람, 예수님의 승리요 하느님의 승리임을 뜻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늘 나라의 꿈을 실현하며 꿈의 사람으로, 파스카의 꽃으로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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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0. 사순 제2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이보다 멍청한 일이 있을까요? 이보다 바보스러운 일이 있을까요? 포도밭 주인의 아들을 죽이다니요. 그것도 상속자를 죽이다니요. 상속자를 죽이면 그 밭이 소작인들의 것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밭 주인이 살아 있는데 말입니다. 오히려 아들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밭 주인은 소작인들을 죽이려 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소작인들은 참으로 바보스러운 짓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런 바보스러운 일이 우리 영혼 영혼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도 하느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알면서, 주님의 길이 어느 쪽인지 알면서도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일은 없었는지요.
‘세상 사람들 다 그렇게 살아가는데 나도 한 번쯤 눈감고 하지 뭐.’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는지요.
‘기도하고 또 해도 응답이 없으니 용한 점집이나 찾아가 봐야겠다.’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는지요.
만약 있었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빛을 어둠으로 덮어 버린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영혼을 어둠으로 조금 더 밀어 넣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의 실수와 잘못을 주님께서는 두고만 보시지 않습니다. 다시 우리 영혼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역할이고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빛’이라고 부활절 미사 안에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순절을 지내며 우리는 우리 안에 어둠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으로 빛나고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 빛은 우리 안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리석은 잘못을 했더라도 우리가 그 빛을 향해 돌아선다면 빛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다시금 비추어주실 것입니다. 다시 우리 영혼을 밝은 곳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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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창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보물창고가 있을까요? 저는 있습니다. 저의 보물 창고는 냉장고입니다.
물론 각종 재료와 맛있는 것들이 들어 있어서 저의 보물창고라고 이야기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즐기는 음식과 재료들이 들어있고 그것을 이용해서 누군가에게 기쁨의 선물을 할 수 있는 만능 창고이기에 보물창고라고 말한 것입니다.
저는 마음의 보물창고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가졌던 모든 피정 시간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피정 안에서 저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한 번도 선물을 받지 않은 피정이 없습니다. 그 모든 선물은 저의 영혼과 마음속에 기쁨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가끔 힘들고 지칠 때 그 창고를 열어 선물을 꺼내 봅니다. 그리고는 다시금 감사의 마음으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합니다.
이것이 저의 보물이 아니고서 무엇이 보물이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보물창고를 가지고 계십니까?
분명 주님께서 주신 영적 선물을 담은 보물창고를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가끔 열어보셔요. 특히 힘들고 지칠 때 열어보셔요. 그 보물들이, 영적인 선물들이 다시금 우리를 희망차게 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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