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탁
김정원
하늘의 갈색 섬 매 한 마리가
내리꽂히기 직전, 강변 갈대숲에
오금이 저리는 뱁새들처럼
겨우내 땅속에 노랗게 웅크린
생명들,
톡,
톡,
지구알 속에서 신호를 보낸다
음파 탐지기같이 하늘 어미가
그 신호의 출처를 찾아서
봄빛 부리로
탁,
탁,
쪼아 환하게 통로를 내주자
이윽고 삐악삐악
천지에 가득한 새싹들의 가락(歌樂)
갈망은 소통을 부르고
소통은 봄날을 부화한다
----김정원, [줄탁](애지 2006년 여름호) 전문
김정원 시인은 1962년 전남 담양에서 출생했고, 전남대학교 영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리고 그는 현재 한빛고등학교 교사이며, ‘전교조 담양 지회장’이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시에 뜻을 두고 창작에 전념하여 왔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2006년도에 우리 {애지}를 통해서 등단한 바가 있다. 김정원 시인은 그러나 대한민국 ‘서정시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는 그의 현실주의를 통해서 모든 생명에 대한 무한한 예찬과, 그리고 이 땅의 한과 삶의 애환들을 더없이 아름답고 뛰어나게 묘사해낸 바가 있다. 김정원 시인은 티없이 맑고 깨끗한 천성을 지닌 시인이며, 속된 말로 ‘법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선량한 양심’을 지닌 시인이다. 그의 시의 장점은 ‘언어의 절제’와 ‘상상력의 자유’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언어의 절제의 토대는 상상력의 자유이며, 이 ‘상상력의 자유’의 결정체는 그 언어의 절제이다. 그의 상상력의 자유는 모든 것을 의인화시킬 수 있는 힘으로 작용을 하고, 그의 언어의 절제는 그 상상력의 자유를 더욱 더 정교하고 세련되게, 아니, 달리 표현해본다면, 더욱 더 아름답고 우아하게 만들어 주는 힘으로 작용을 한다. 그의 언어들은 그의 상상력의 힘으로 이 우주와 서정시의 영역을 자유--자재롭게 날아 다니고, 그 상상력의 자유는 그의 언어의 힘으로 더욱 더 아름답고 우아하게 그 비상의 몸짓(춤)들을 안출해내게 된다.
김정원 시인의 [줄탁]에서 “하늘의 갈색 섬 매 한 마리”는 마치, 모든 법관들이 저마다 독립된 기관이듯이, 자기 자신의 절대적인 권한으로 그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하늘의 갈색 섬 매 한 마리가/ 내리꽂히기 직전, 강변 갈대숲에/ 오금이 저리는 뱁새들처럼”이라는 시구는 절대절명의 생존의 위기에 몰린 자의 심정을 말하고, “겨우내 땅속에 노랗게 웅크린/ 생명들// 톡/ 톡// 지구알 속에서 신호를 보낸다”라는 시구는 그 절대절명의 생존의 위기를 극복하고, 마침내 새로운 생명으로서 부화의 몸짓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한 아이가 어머니의 뱃 속에서 태어난다는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고, 한 마리의 새가 그 알의 껍질을 뚫고 나온다는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며, 그리고, 또한, 모든 씨앗들이 땅에 떨어져서 새싹이 된다는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 모태의 온도와 영양상태와 자연환경과 천재지변에 의한 내외우환을 반드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김정원 시인은 그 과정을 “하늘의 갈색 섬 매 한 마리가/ 내리꽂히기 직전, 강변 갈대숲에/ 오금이 저리는 뱁새들처럼”이라고 표현하고, 또한, 그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을 “겨우내 땅속에 노랗게 웅크린/ 생명들// 톡/ 톡// 지구알 속에서 신호를 보낸다”라고 표현한다. 김정원 시인의 [줄탁], 제1연의 시적 표현은 이처럼, 매우 긴장감이 넘치며, 그 살아 있는 시구 속에서, “겨우내 땅속에 노랗게 웅크린/ 생명들”의 역동적인 모습들을 아주 탁월하고 뛰어나게 표현한 시구라고 할 수가 있다. 마치, 그 속도감은 마하의 속도, 아니, 빛보다도 더 빠른 속도감을 방불케 한다.
그러나 [줄탁]은 새들이 알을 낳고 부화하는 과정을 노래한 시가 아니다. 김정원 시인의 [줄탁]은 모든 생명들은 난생卵生이지만, 그러나 그 알은 새들의 그것이 아니라 ‘지구의 알’이라고, 매우 도전적이고 야심만만하게 주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겨우내 땅속에 노랗게 웅크린/ 생명들// 톡/ 톡// 지구알 속에서 신호를 보낸다”라는 발구發句에 의하여, “음파 탐지기같이 하늘 어미가/ 그 신호의 출처를 찾아서/ 봄빛 부리로/ 탁/ 탁/ 쪼아 환하게 통로를” 내주게 되고, 그 발구發句와 대구對句, 즉, 그 신호와 응답에 의하여, “이윽고 삐악삐악/ 천지에 가득한 새싹들의 가락歌樂”이 울려 퍼지게 된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해두지만, ‘지구알’ 속에서 ‘톡, 톡’ 신호를 보내는 것은 새들도 아니고, 뭇짐승들도 아니며, 또한 우리 인간들도 아니다. 그것은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의미하듯이, 새로운 나무와 풀들의 새싹을 의미하고 있는 데, 왜냐하면 “겨우내 땅속에 노랗게 웅크린/ 생명들”은 새와 뭇짐승들과 우리 인간들을 지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늘 어미’는 ‘봄날이 되고, 그 새끼들은 수많은 풀과 나무들의 새싹이 된다. 겨우내 노랗게 웅크렸던 생명들이 지구알 속에서 신호를 보내오면, ‘음파 탐지기같은 하늘 어미’, 즉, 따뜻한 봄날이, 그 ‘봄빛 부리’로 “탁/ 탁/ 쪼아 환하게 통로를” 내주게 되는 것이다. 새싹들의 “갈망은 소통을 부르고/ 소통은 봄날을 부화한다”.
김정원 시인의 장점은 첫 번째로 언어의 절제를 통하여 서정시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며, 두 번째로는 ‘인식의 대전환’을 통하여 ‘상상력의 자유’를 마음껏 살고 있다는 점이다. 언어의 절제란 모든 시인들의 지상최대의 과제이며, 그것은 시의 역사와 함께, 모든 시인들을 그토록 괴롭히고, 또, 괴롭혀왔던 지상최대의 난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든 시는 침묵을 지향하고, 그 침묵이 모든 인간들을 감동시킨다. 시는 침묵함으로써 말을 하는 언어 예술이고, 또한 시는 말을 함으로써 침묵하는 언어 예술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가능하면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이, 마치 물이 흐르듯이----그것이 시냇물이든, 폭포이든, 상류계곡의 급류이든, 비옥한 평야지대의 강물이든지 간에----그 자연스러운 흐름을 잃지 말아야 한다. 시인은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언어를 자유--자재롭게 사용할 줄을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언어는 반드시 잠언적이고 경구적인 문체로 이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최소한도의 언어로 최대한의 의미를 담아내는 것이 시라고 한다면, 모든 시는 침묵의 언어를 지향한다라는 말의 참뜻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갈망은 소통을 부르고/ 소통은 봄날을 부화한다”라는 것이 [줄탁]의 잠언이고 경구이라면, ‘하늘의 갈색 섬 매 한 마리’, ‘오금이 저리는 뱁새들처럼’, ‘겨우내 땅속에 노랗게 웅크린 생명들’, ‘지구알 속에서 신호를 보낸다’, ‘음파 탐지기같이 하늘 어미가’, ‘봄빛 부리로’, ‘이윽고 삐악삐악/ 천지에 가득한 새싹들의 가락’은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언어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상징과 함축은 다의적인 언어들이며, 그 언어들은 그것을 읽는 독자들마다 저마다의 ‘창조적인 해석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이를 여러 이름으로 언표한다’. 아니, 이 힌두경전의 잠언을 좀더 과감하게 변용시켜본다면, ‘진리는 없되, 모든 시인들은 그것을 저마다 다르게 표현한다’가 될 것이다.
김정원 시인은 그 출신성분과 시인의 경력이 일천함에도 불구하고, 이 ‘인식의 대전환’을 통하여 ‘상상력의 자유’를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때의 ‘인식의 대전환’은 기존의 낡은 인습과 전통을 떠나 있다는 것을 말하고, 다른 한편, ‘상상력의 자유’는 우화寓話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우화는 ‘무생물들’과 ‘동식물들’의 세계를 의인화시키는 것을 말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상상력의 자유’를 살고 있지 않으면 가능하지가 않다. 나는 이미 앞에서, “다시 한 번 더 강조해두지만, ‘지구알’ 속에서 ‘톡, 톡,’ 신호를 보내는 것은 새들도 아니고, 뭇짐승들도 아니며, 또한 우리 인간들도 아니다. 그것은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의미하듯이, 새로운 나무와 풀들의 새싹을 의미하고 있다”라고 말한 바가 있는데, 이제는 그 오류들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오류들은 시의 문맥만을 축자적으로 따라간 것이지, ‘지구알’이 뜻하는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새들과 짐승들도 지구 위에서 태어나고 지구 위에서 죽어간다. 인간과 나무와 풀들도 지구 위에서 태어나고 지구 위에서 죽어간다. 김정원 시인의 ‘지구알’이란 용어는 ‘모든 생명들은 난생卵生이다’라는 도전적이고 야심만만한 주장이 담겨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인식의 대전환’의 소산이며, 따라서 그는 시인으로서 그 언어의 신전의 주인공이 되어갔다는 것을 뜻한다. [줄탁]의 신전에서는 그가 최초의 명명자이며, 그 입법자의 권력을 향유한다. ‘하늘의 갈색 섬 매 한 마리’에 의해서 ‘오금이 저리는 뱁새들처럼’ 오돌오돌 떨다가 마침내 ‘톡/ 톡// 지구알 속에서 신호’를 보내는 생명들과 “음파 탐지기 같이 하늘 어미가/ 그 신호의 출처를 찾아서/ 봄빛 부리로/ 탁/ 탁/ 쪼아서 환하게 통로를 내주자/ 이윽고 삐악삐악/ 천지에 가득한” 울음 소리를 내고 있는 생명들이 그 사제(시인)의 자식들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이고, “갈망은 소통을 부르고/ 소통은 봄날을 부른다”라는 시구가 그 최초의 명명자(입법자)의 교시敎示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따뜻한 봄기운을 ‘하늘 어미’로 표현하고, 그 모든 생명들을 ‘난생’ 속의 새로운 생명들로 빚어낸 이 우화적인 솜씨는 김정원 시인의 제일급의 솜씨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겨우내 땅 속에 노랗게 웅크렸던 언어들이 톡, 톡, 톡, 신호를 보내오면’, ‘음파 탐지기같은 시의 어미가’ 그 ‘봄빛 부리로’ 탁, 탁, 탁, 쪼아주게 되는 것이다. 이윽고 ‘삐악삐악/ 천지에 가득한 시의 새싹들의 노래’----.
만일, 우리 시인들이 아니라면 어떻게 새와 짐승과 나무와 인간과 바위와 바다와 별들이 그 생명력을 얻고, 또, 그리고, 이 아름답고도 신비한 우화의 주인공들이 되어갈 수가 있단 말인가!
시인은 언어의 사원의 주인공이며, 모든 생명들의 어머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