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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12-22 이삭이 그 땅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자신을 복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복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도 표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분복에 대하여 불레셋 사람들은 시기하고 여러 모양으로 방해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들의 경내에서 축출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삭은 그랄 평원에서 그랄 골짜기로 장막을 옮겼습니다. 물 근원을 찾는 데서도 시련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양보하고 또 다른 시도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따라 인내하고 열심히 수고하여 결국은 승리합니다.
1. 본문 12-13절은
“(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약속하신 복중에서 눈에 보이는 결실을 이삭이 어떻게 거두어 들이는가를 말씀합니다. 이렇게 구별하는 것은 가장 참되고 신령한 것은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이요, 하나님께서 그러하시듯이 가장 참되고 신령한 것은 높고 거룩하고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삭이 씨를 뿌렸을 때 그 수확이 백 배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땅에서도 비상한 결실이었습니다. 그것은 30배도 대단한데 60배는 더 대단하고 100배는 엄청난 결실입니다(마13:, 막4:). 또 이삭에게는 가축이 많았고 가솔(家率)들이 많았습니다(14절).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에서 보이듯이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복은 시편에서도 선포된 그대로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이 잠자고 있는 동안에도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풍성히 내려 주시는 분이십니다(시127:2).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생 나그네로 살라고 명하셨는데 그렇다면 이삭은 어떻게 씨를 뿌릴수 있었을까? 그래서 혹자는 이삭이 땅을 샀다고 봅니다.
그래서 (카나-)란 단어를 소유물로 해석합니다.그러나 창세기에 계속되는 문맥은 그들의 말이 틀린 것을 말해줍니다. 그 직후에 이 경건한 사람 이삭이 땅을 매매하는 일을 볼 수 없습니다. 또 그런 일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사가는 일을 지연시키는 사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땅을 매입하는 일이 그의 특별한 소명과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 같은 주목할 만한 범과가 있었다면 모세가 묵인하고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말을 덧붙일 수는 있습니다. 그 직후에 장막에 대한 말이 밝히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나그네라는 험난한 생활을 계속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삭은 빌린 토지에 경작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지역사람들의 마음을 너그럽게 해서 상당히 넓은 평원 지역을 경작하게 됐을 것입니다. 자기 소유 땅은 한치도 없었지만 훌륭한 가장의 직무를 다하기 위해서 집안 식구들을 위한 양식을 구할 방도가 필요했습니다. 또 굶주림이 자신과 그의 가솔들의 일손과 근면을 재촉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장래를 위해서 직접 부지런히 식량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수고로 얻은 풍성한 수확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2. 본문 14-15절은
“(14)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15)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입니다.
1) 우리는 이런 본문에서 역사가 주는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현실 생활에 관한 하나님의 복은 순수무결한 것이 아니라 약간의 고난이 동반됩니다.
그래서 결코 우리가 그것을 조용히 탐닉하게 해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큰 부자가 되려고 너무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또 이미 부자인자가 어떤 원인의 불안에 괴롭힘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육체의 안일과 물리적인 쾌락에 깊이 빠져서 잠자지 않게 하시려고 주시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도 일종의 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 지금 가난한 자들은 가난도 유익이 있다는 사실로 위로를 삼아야 합니다. 시기와 불안과 갈등이 없이 산다는 것이 결코 작은 행복이 아닙니다.
(2)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이삭에게 풍부한 재물을 주어 놓고 그가 질투의 대상이 되게 하고 여러 가지 문제 거리에 부딪치게 하시는 것은 결코 은혜가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모든 고난은 어떻든 간에 그분께서 내려준 은총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그 맛을 잃지 않도록 보호해 주시는 방식이 됩니다.
(3) 끝으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에게 이 세상에서 보여주신 은혜를 조절하여 주십니다 이렇게 하셔서 자기 자녀들이 자극을 받아서 신령한 삶을 생각하도록 만드십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생물, 특히 동물의 공통적인 소유인 물 근원을 이 경건한 족장에게 차단한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시련이 아니었습니다.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물에 대한 일반 찬사 정도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까지는 거슬러 올라가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대단한 사고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의 사고는 굉장히 철학적이며 과학적이며 통합적인 사고였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삭이 그의 시련을 참아냈다면 우리가 당하는 작은 수난이야 더 큰 인내심으로써 참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든 부당히 피해를 받았다 해서 노하게 될 때면 적어도 물 때문에 투쟁해야 했던 이삭의 경우처럼 그렇게 잔인한 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삭은 물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신과 후손을 위해서 파두었던 우물들까지도 메워지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극도로 잔학한 행위입니다. 그의 시대에 일반적으로 주어졌던 너그러움, 나그네에게 베풀어야 하는 마땅한 환대를 일체 거절당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친아버지가 수고하여 확보한 것을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그가 아무에게도 불편을 주지 않으며 누리고 있던 것까지도 탈취 당했습니다.
3. 본문 16-17절은
“(16)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
(17) 이삭이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입니다.
그랄의 왕이 자기 의사로 이삭을 자기 영토에서 추방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또 사람들이 이삭과 그의 부모를 시기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다른 곳에 가서 정착하라고 명령했는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는 이삭에게 친구처럼 충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이미 이삭에게서 멀어졌을 것입니다. 26:26-27절에 가보면 이 경건한 사람 이삭이 왕을 강력히 비난하는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왕의 참 마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확실한 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 보다 중요한 일은 인간이 모두 본성이 사악한 결과로 가장 훌륭한 자들도 일반인들과 꼭 같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편은 어쩔 수 없이 친근해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경계하고 의심하며 질투하는 일들이 비일비재 합니다.
아비멜렉의 경우는 확실히 그렇습니다. 포만은 실로 만행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부자들은 거만하게 자랑할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부자가 되고 명예를 얻고 권좌에 오른 사람은 필요 이상으로 무례해서는 안 됩니다. 그밖에도 자기들의 권력으로 남을 억압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그러한 내색을 이삭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일반 악덕에 붙어 다니는 시기심을 이삭은 아비멜렉과 그랄 사람들로부터 받아야 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사람이 적절한 처지에 놓이는 것이 지극히 높은 자리에 있게 되는 것보다 얼마나 더 쓸모 있고 바람직한 일이겠는가를 생각합니다.
그것은 적어도 보다 평화로우며 시기심의 폭풍우에 걸리지 않으며 부당한 혐의를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내려 주신 복은 매우 희귀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재산은 부유해서 왕과 그 백성에게 두려움을 줄 정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실로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많은 유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삭이 이 땅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되어서 전보다 더 번창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곳 주민들이 더 이상 이삭을 그대로 놔두려 하지 아니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비교적 그랄의 넓은 평원지역에서 그랄 골짜기로 그의 거처를 옮겨야 했습니다. 이것이 어떤 지경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것과 나그네로 사는 사람들의 고충입니다.
4. 본문 18-22절은
“(18)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19)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20)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가로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을 인하여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21)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는 고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22)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입니다.
1) 지금 이 경건한 사람 이삭은 그의 이웃들에게 크게 증오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물을 찾아 다른 곳으로 가야 했습니다. 물이 부족한 곳 이상으로 일상 생활이 고되고 불편한 주거지는 없습니다. 더욱이 그의 많은 가축과 많은 종들과 가족들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마치 작은 군대와 같았습니다. 때문에 물 공급이 시급했습니다. 그는 큰 시련에 부딪혔습니다. 이러한 극심한 곤경도 그에게 복수심을 불러 일으키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의 큰 인내심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때로는 아주 하찮은 침해가 인정 있고 온건한 사람의 인내심조차도 빼앗아 버립니다. 이삭이 힘이 모자라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정규전을 치를 능력은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400명의 종들을 무장시켰듯이 이삭 역시 집안 식구들을 대단히 많이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로서 이웃들을 쉽사리 격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처음 그랄 계곡에 정착했을 때 가졌던 희망이 다시 갑자기 깨어집니다. 이삭은 자기 아버지가 그 곳에서 손수 발견했었던 우물을 이용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록 그 우물들이 막혀 있었지만 우물을 다시 파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한 물을 공급해 주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떠난 이래로 줄곧 그 우물들이 막혀 있었다는 사실은 그곳 주민들이 방문객에게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들의 땅이 이 우물들로 인해서 혜택을 입을 수도 있었건만 아브라함을 이웃으로 대하기 보다는 그 같은 혜택을 상실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 같은 편리가 아브라함이 그곳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랄 사람들은 우물을 막음으로써 그의 길을 방해한 셈입니다.
옛 사람들은 자기들이 누구를 파멸케 하고 그를 사회에서 추방시키고 싶으면 물과 불을 못 구하게 만드는 것이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자기들 마을에서 추방시킬 목적으로 그에게서 물 근원을 빼앗았습니다.
2)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라는 말씀에서 이삭은 그 우물들에 새 이름을 붙이지 않고 아버지가 붙였던 그 이름을 다시 붙였습니다.
(1) 이렇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버지에게 주신 것을 기념함으로써 우물들에 대한 옛 소유권을 회복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삭은 적어도 어떤 기념물로써 블레셋인들이 가한 침해를 밝히 말해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념물로서 그들을 견책해 줄 수 있기 위해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한 우물은 ‘다툼’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증오’라고 불렀습니다. 이삭은 그 주민들이 어떤 정당한 권한에 의해서 그 우물들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원수나 강도처럼 탈취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려한 것입니다.
(2) 한편 이러한 다툼을 하는 중 이삭은 또한 갈증과 물 부족과도 치열한 투쟁을 했습니다.
사실 그것을 통해서 블레셋인들은 그를 파멸시키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역사의 모습입니다. 우선 모세는 자기 관습을 따라서 사건 개요를 대강 말했습니다. 이삭은 자기 아버지가 먼저 발견해 낸 우물들을 다시금 이용하려 했습니다. 잃어버렸던 소유권을 원상 복구에 의해서 다시 찾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모세는 그 문제를 좀 더 세밀히 다룹니다. 이삭이 그 일을 착수했을 때 부당한 탈취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세 번째 우물을 파면서 그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우물을 ‘넓은 곳’ 이라 불렀습니다. 그렇게 부른 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더 물이 풍부한 샘을 찾아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어서 그 안에 내재되어진 꺾을 수 없는 인내심을 실제로 증거했습니다. 이 같은 거룩한 인내와 고집과 열심히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는 심한 방해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견디며 이겨 나갔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싸움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역경을 다 치르고 난 다음에는 다시금 고요히 하나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선하심을 송축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가 시련 중에도 침착함과 평온함을 잃지 아니했다는 이 한가지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4) 이것이 이삭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가장 고귀한 은혜와 복입니다.
이삭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누린 물리적인 분복은 참으로 크고 중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중요한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자신의 기업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삭이 그의 가족과 종졸들과 함께 고난의 세월 중에 은혜를 얻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꾸로 남습니다. 고난의 세월은 남고 하나님을 잃어버립니다. 이삭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것은 잃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방배와 지극히 크신 상급으로써의 여호와는 빼앗아 갈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예나 지금이나 신앙인들에게 가장 큰 분복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