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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가 2:1-17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uHA97UaNwZM
성경은 총 66권입니다. 그 중에 아가서는 성인용 책입니다. 이 책을 성인용으로 규정한 것은 유대교 랍비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를 향해 부르는 사랑의 노래 가사에 성적인 은유가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가서의 모든 은유들을 문자적으로 성적인면만으로 해석한다면 인간의 성적 욕망을 자극시키는 결과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랍비들은 30세가 되기 이전에는 이 책을 읽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아가서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여호와’라는 성호는 한 번 나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 아가서의 내용이 한 번도 인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가서에는 경건한 신앙에 관한 표현도 없습니다. 또 환상이나 직접적인 계시의 흔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가서의 영감을 부인하는 사람들도 있습다만 유대인들도 그들의 성경에 아가서를 포함시켰고 우리 기독교 역시 아가서를 성경에 포함시켰습니다.
아가서는 솔로몬이 술람미 출신의 한 여인과 주고받는 사랑의 노래입니다. 전체 8장으로 되어 있는데, 마치 뮤지컬을 보는 듯합니다. 사랑하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 노래로 대화를 주고받고, 중간 중간에 합창단이 나와 두 사람의 사랑을 노래하는 내용으로 전개됩니다.
왕상 3장에 보면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에서 하나님께 1천 번제를 드린 후에 전무후무한 지혜를 받았습니다. 솔로몬은 잠을 자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왕상 4장에 보면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초목과 짐승, 새와 기는 것 그리고 물고기 등에 대해서 논했습니다. 그리고 잠언을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천다섯 편의 노래를 지었습니다. ‘아가’란 히브리어로 ‘쉬르 하쉬림’으로서 ‘노래 중의 노래’라는 의미입니다. 영어로 ‘The song of songs’입니다. 이는 솔로몬이 지은 많은 노래 중에서 최고의 노래,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으로서 흔히 히브리인들이 어떤 것을 최상급, 최고를 나타낼 때 쓰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만왕의 왕, King of kings, 만주의 주, Lord of lords 등도 그런 표현입니다.
아가서는 성경 66권 중 매우 특이한 책입니다.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야하기까지 한 에로스적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가서는 이중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는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직접적인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사랑이라는 유비적인 해석입니다.
아가서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66회나 나옵니다. 아가서는 전체가 8장, 118절인데, 그 가운데 54절에 사랑이라는 말이 한 번 또는 두 번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아가서는 사랑의 노래입니다.
솔로몬의 술람미 여인을 향한 사랑은 외모를 보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아 1:5입니다.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술람미 여인은 자신은 비록 검다고 말했고, 게달의 장막 같다고 말했습니다. 게달은 이스마엘의 후손으로 북아라비아 족속입니다. 이들은 베두인입니다. 그들은 들판에서 양을 치며 생활합니다. 그들은 염소털로 장막을 만들어서 삽니다. 그것이 게달의 장막입니다. 게달의 장막은 볼품이 없고 더럽고 지저분합니다. 술람미 여인은 그렇게 볼품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게달의 장막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 여인을 아름답게 보고 침실의 휘장과 같이 봤던 것입니다.
솔로몬의 술람이 여인을 향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자를 향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술람미 여인이 게달의 장막과 같았던 것처럼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표현했습니다. 자신이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라고 했습니다. 술람미 여인이 자신은 검다고 표현했던 것처럼 우리는 허물과 죄로 가득했던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주시고 우리를 사셔서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로 만들어주셨습니다.
본문은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서로를 향한 고백 중의 일부분입니다. 오늘 설교는 두 사람의 사랑의 고백을 통해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나누겠습니다.
제가 어릴 때 유행했던 유행가 중에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가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나훈아씨는 이 노래를 통해서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설교는 본문에서 사랑을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나누겠습니다.
1. 사랑은 상대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2절은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에 대하여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솔로몬은 자신의 연인인 술람미만 보인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에게 다른 여자들은 가시나무고 술람미 여인은 가시나무 가운데 한 송이 백합화 같았습니다. 가시나무와 백합화는 비교불가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솔로몬에게는 술람미 여인 외에는 뵈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3절은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에 대하여 고백하는 것입니다.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 술람미 여인은 어떻습니까? 술람미 여인에게 솔로몬은 수풀 속에서 만난 사과나무 같습니다. 무더운 날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이 숲 속을 헤매다가 잘 익고 맛있는 사과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사과나무를 만났습니다. 그는 사과 하나를 따서 나무 그늘에 앉아서 사과를 아싹~ 하고 한 입 먹습니다. 입에 침이 고이지 않습니까? 그때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술람미에게 솔로몬은 그런 존재입니다. 솔로몬에게는 많은 여자 중에서 술람미만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술람미 여인에게는 많은 남자 중에 내 남자만 위대하게 보였습니다.
진짜 사랑에 빠지면 상대 외에는 뵈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상대를 위해서라면 화약통을 매고 불속에라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요즘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나라 사랑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국민들은 위대합니다. 그들의 행동을 보면서 나라를 사랑하는 그들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여러분은 우크라이나 국민 중에 한 사람이 맨몸으로 탱크를 막아서는 것을 영상으로 보셨습니까?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탈레반이 득세하자 대통령이 달러를 챙겨서 도망을 갔는데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은 수도 키우에에 남아서 결사항전을 다짐하고 국민들을 독려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크라이나 영부인이 무장을 하고 있는 모습의 사진을 봤습니다. 우크라이나 어린이가 주먹을 쥐고 러시아 군인을 위협하는 동영상을 봤습니다. 외국에 거주하던 수많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조국을 위하여 싸우기 위하여 우크라이나로 들어가서 자원입대를 했습니다. 이들은 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일까요? 그들에게는 지금 다른 것은 보이지 않고 오직 조국만 보이는 것입니다. 조국을 사랑하니까 조국의 안녕 외에는 뵈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유치원에세 체육대회를 한다고 가정합시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를 보려고 운동장에 갔습니다. 많은 어린이들이 운동장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눈에는 자기 손주만 보이는 것입니다. 수많은 아이들 중에 자기 손주가 주인공입니다. 왜 그럴까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랑에 눈이 멀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우리는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였습니다. 수많은 석탄 속에 빛나는 다이아몬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우리의 구원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시고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우리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을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한다는 말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주님에게만 초점을 맞춘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의 신비 중에 하나가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님만 보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후에 자신이 가진 세상적인 모든 좋은 조건들을 분토처럼 여겼습니다. 그리고 주를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 드렸습니다. 사랑은 상대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모든 초점을 주님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사랑하면 그렇게 됩니다.
2. 사랑은 상대에게 정복당하는 것입니다.
4절은 술람미 여인의 고백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 이 말은 자신은 솔로몬에게 정복당했다는 의미입니다. 전쟁을 해서 상대의 땅을 정복하면 그곳에 정복자의 깃발을 꼽습니다. 그런 것처럼 술람미 여인은 솔솔로몬이 자신을 정복한 깃발과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의 사랑에 정복당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속해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힘과 권력으로 술람미 여인을 정복한 것이 아닙니다. 4절에 보니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의 인도를 받아서 잔칫집에 들어갔습니다. 술람미 여인에게 솔로몬과의 사랑은 축제였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의 사랑에 정복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사랑의 깃발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정복한 곳에 꽂은 깃발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정복당합니다.
사랑하면 상대에게 모든 것을 정복당합니다. 상대를 위하여 시간을 써도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물질을 써도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상대에게 모든 것을 줘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랑은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는 것입니다. 내 목숨도 빼앗고, 내 마음도 빼앗고, 내 물질도 빼앗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상대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상대에게 정복당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향한 사랑에 정복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주신 것입니다. 아 8:6입니다.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여기 보니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다고 말씀합니다. 죽음은 이길 자도 막을 자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을 위하여 죽었습니다. 사랑에 정복당한 것입니다. 사랑의 힘입니다.
오래 전 일입니다만, 도봉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중학교 3학년 학생인 경애가 부모님과 함께 도봉산 등산을 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긴급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바위가 굴러온다!” 얼른 뒤를 돌아본 어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거대한 바위가 자기 딸 경애를 향해서 굴러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온 몸을 날렸습니다. 딸을 가로막아 서고는 딸을 힘껏 밀쳤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경애는 무사했고 불행하게도 그 어머니는 바위에 치여서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으로 딸을 지켰습니다. 딸을 대신해서 목숨을 버린 것입니다. 어머니는 사랑에 정복당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에 정복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내 위에 어떤 깃발이 세워져 있는가를 봐야 합니다. 돈에 정복당한 인생이 되면 안 됩니다. 에로스 사랑에 정복당해서도 안 됩니다. 세상 성공이라는 목표가 깃발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다른 어떤 깃발보다도 예수님의 깃발이 세워져야 합니다. “주님이 나의 깃발이시다. 나는 주님께 점령당했다.” 사랑은 정복당하는 것입니다.
“잘했군 잘했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영감과 할멈이 주거니 받거니 장단 맞춰 부르는 노래입니다. 하춘화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입니다. 1,2절 가사는 이렇습니다. “영감! 왜 불러? 뒤뜰에 뛰어 놀던 씨암탉 한 마리 보았소? 보았지! 어쨌오? 이 몸이 늙어서 몸보신하려고 먹었지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영감이라지!/ 여보 마누라! 뒤뜰에 매어놓은 송아지 한 마리 보았나? 보았지! 어쨌오? 친정 집 오라버님 장가 밑천으로 주었지.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마누라지!” 어느 목사님이 이 노래를 아주 의미 있게 해석했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의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 가사 내용을 잘 살펴보면 정말 잘해서 잘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 같이 속이 쓰린 것들입니다. 남편은 씨암탉을 잡아먹었고, 아내는 송아지를 친정 집 오라버니 장가 밑천으로 주었으니 싸워도 한 참 싸울 일들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했으니 잘했다는 것입니다. 왜 잘했다고 하는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사랑에 정복당해서 그런 것입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을 줄 수 있습니다. 주고도 아깝지 않은 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 상사병 아시죠? 상대를 몹시 그리워하여 병이 드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상사병이 나옵니다. 5절에 보니 술람미 여인은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고 말합니다. 술람미 여인은 사랑하는 솔로몬을 보지 못해서 병이 난 것입니다. 보고 싶은데 보지 못하니까 마음에 병이 난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여 병이 생길 정도로 정복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술람미 여인처럼 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어서 병들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받는 것 외에는 채워짐이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돈이 많이 생기고, 좋은 사람을 만나고, 세상적으로 출세를 하고 성공을 해도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병들 정도로 그렇게 뜨거운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3. 사랑은 상대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13절 하반절입니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에게 자신과 함께 가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 달라. 남은 인생을 동행하자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에게 우리는 사랑하는 자입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어여쁜 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그때부터 우리는 예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동행의 모델이 된 사람이 에녹입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그 이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365세에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였습니다. 사람은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창세기 5장의 족보를 보면 족장 10명의 수명이 나오는데 에녹 빼고 평균 수명이 912세였습니다. 에녹은 이 세상에서 365세를 살았으니 지금으로 보면 3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는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우리는 주의 음성에 순종해야 합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가야 합니다. 심지어 죽음의 장소에도 함께 가야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신 주님은 자신이 잡혀가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26:46입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주님과 함께 가지 못했습니다. 사랑의 부족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한데 제자들에게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 잘하려면 사랑하면 됩니다. 고전 13:4-7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면 어디든지 함께 갈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어려운 일이 많아도 사랑하면 모든 것을 이기고 하나님과 함께 갈 수 있습니다.
4. 사랑은 방해꾼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 포도나무에 꽃이 피었으면 곧 열매가 열립니다. 그런데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중동지역에는 포도원에 쥐만한 크기의 작은 여우가 있습니다. 그 여우는 땅을 깊이 파고 들어가 포도나무의 뿌리를 갉아먹습니다. 그러면 포도나무가 시들어 말라버립니다. 그래서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성경에서의 포도원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우는 사탄을 의미합니다. 신앙생활에는 항상 마귀의 역사가 있습니다.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가 있는 것처럼 주님과 우리의 사랑을 무너뜨리는 방해꾼이 있습니다. 마귀와 귀신들입니다. 때로는 마귀가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처럼 작게 역사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시무시한 사자처럼 크게 역사할 때도 있습니다.
마귀가 역사하면 시험이 찾아옵니다. 이 시험의 목적은 주님과 나 사이, 목회자와 성도 사이, 성도와 성도 사이를 갈라놓는 것입니다. 하나 되지 못하게 만들고, 별거 아닌데 섭섭하게 만들고, 서로를 불신하게 만들고, 서로를 미워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랑이 식어지게 만들고 결국은 사랑이 깨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과거 어느 때를 회상하면서 ‘그때는 교회를 그렇게 사랑했는데, 그때는 성도들을 그렇게 사랑했는데, 그때는 주의 종을 그렇게 사랑했는데, 그때는 배우자를 그렇게 사랑했는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면 여러분은 이미 시험에 든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랑의 방해꾼인 마귀에게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첫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식어진 열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포도원을 허는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마귀는 대적해야 합니다.
5. 사랑은 상대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에게 속해있습니다. 서로 하나 됩니다.
완전한 하나 됨의 모델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요 14:10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거하셨고 아버지는 예수님 안에 계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 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하나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요 14:20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놀랍습니다. 그날에는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날이 언제인가요? 이 말씀 앞부분을 보면 보혜사 성령으로 충만한 날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 뒷부분을 보면 그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날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날입니다. 다음 절인 요 14:21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종합하면 우리에게 성령님이 임하시면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이고, 그렇게 될 때 하나님과 하나 된다는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본래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하와를 보자마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내 뼈와 나는 하나이고, 내 살과 나는 하나입니다. 이 고백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당신 없는 세상은 앙꼬 없는 찐빵이요. 물 없는 오아시스요. 고무줄 없는 팬티요. 김빠진 사이다”라는 말입니다. “당신 없이 나 없고, 나 없이 당신은 없다”는 고백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 사랑할 때는 둘이 이렇게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하나 됨을 방해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귀와 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했는데,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을 깨버렸고, 아담과 하와의 사랑도 깨버렸습니다. 사랑이 깨지니 하나 됨도 깨졌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하나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관계에서도 하나 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면 하나 됩니다. 사랑하지 못하면 하나 되지 못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하나 됨의 삶을 살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아가서 2장을 본문으로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1. 사랑은 상대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2. 사랑은 상대에게 정복당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에 정복당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정복당해야 합니다.
3. 사랑은 상대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 어떤 조건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4. 사랑은 방해꾼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포도원을 허는 여우처럼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성도와 주님의 사랑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마귀와 마귀의 졸개들입니다. 모든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과 깊은 사랑을 유지하기를 바랍니다.
5. 사랑은 상대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속해야 합니다. 사랑할 때 하나 됨이 가능합니다. 사랑을 잃어버리면 하나 됨은 깨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