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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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문 석
전공과 인부 등 작업자를 총괄하는 시공사 현장대리인은 서른 중반 대전 사람으로 업무 감각이 빨라 난제를 만나도 잘 헤쳐 나갔다. 시공사가 공사 발주처에서 받아야 할 공사대금이 공사 감독이 작성하는 서류에 달렸으니, 그는 그림자처럼 준하를 따라붙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이다.
50여 종 부설 자재가 빼곡하게 든 기별 재료 명세서. ‘기별’에서 ‘기’는 전주 낱개를 일렀다. 명세서에서 맨 위 칸은 전주갓이 차지했다. 목주에 빗물이나 눈이 들러붙어 수분이 내부로 침투하지 못하도록 함석으로 만든 갓 형태의 모자를 덮었다. 완목이나 암타이도 크기별로 서너 가지씩이고 거기에 맞는 각각의 볼트가 따로 있었다. 전주에 얹힌 변압기는 교체하지 않았지만 훼손되었거나 부싱에 금이라도 갔으면 바꿨고 변압기 개폐기인 COS도 마찬가지였다. 발판못은 없는 곳이 나타나도 전선 도둑을 우려해 다시 박진 않았다. 한 번씩 전주를 세울 때 전주의 쓰러짐을 막기 위해 근가를 철선으로 감아서 붙이기도 했다. 기별 재료 명세서 서류철은 시공사 젊은 직원이 휴대하고 준하를 그림자처럼 따랐다. 새로 전주를 세우면 전주와 전주 사이 긍장을 쟀고 전주에서 철거한 전선은 마이크로미터로 그 굵기를 쟀다.
공사 시작 첫날, 공사 감독이 그렇게도 신신당부한 안전사고 예방은 결국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1년 2개월 동안 매일 50여 명이 전주에 매달려 작업하면서 2명 사망, 1명 중상인 안전사고를 기록하고 말았다. 당시엔 시공사도 작업자도 안전의식은 거의 밑바닥 수준이었다.
선로의 전기를 끊은 휴전 상태에서 작업자가 전주에 매달려 작업하고 있는데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개폐기를 투입하여 송전한 사고가 그 첫 번째였고, 전기가 살아있는 활선을 죽은 사선으로 오인하여 벌어진 사고가 두 번째였다. 두 번째 사망사고는 수칙대로 검전기만 사용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안타까운 사고였다. 전주 위에서 작업을 마치고 내려올 때도 당시 나무로 된 전주는 미끄러지는 사고가 자주 발생해 안전띠를 풀지 말라고 누누이 당부했는데도 이를 어기고 전주를 내려오다가 미끄러져 날카로운 암반 바닥에 추락한 사고가 세 번째였다.
첫 희생자 출상 때는 푹푹 찌는 여름날이었다. 장맛비가 내리는 속을 승압공사를 통해 서로 동지가 된 작업자들이 시공사가 제공한 소복을 걸치고 상여를 멨다. 장지는 시가지와 붙은 판암동 철길 굴다리 위 비탈진 야산이었다. 두 번째 희생자도 대전 사람이었다. 2월 초, 눈발이 흩날리는 속을 장례 행렬은 대흥동 육군 병참학교 뒤 가파른 야산을 올랐고 이때도 상여꾼은 공사에 동원된 작업자들이었다.
대전천을 경계로 동쪽 시가지 공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이날도 준하는 어두워진 뒤 평소처럼 현장에서 사무실로 돌아와 시공사 현장대리인과 당일 시공한 내용을 서류로 정리했다. 이날 밤도 한반도의 허리이자 내륙인 대전의 여름밤은 후텁지근했다. 사무실 서류 정리를 마치고 회사 정문을 막 벗어나려는데 펑, 펑, 하고 둔탁한 소리가 연달아 멀리서 들려왔다. 준하는 동란 초기에 멀리서 들려오던 포성을 떠올렸다. 그러곤 대전천 하류 쪽에서 두세 차례 섬광이 번쩍이곤 끝이었다.
이때 당직 근무 중인 보수반 차량이 정문을 막 나서고 있었다. 높은 철탑인 송전선로에서 취객이 자살소동을 벌인다는 신고를 받았다고 했다. 준하가 맡은 공사 현장은 아니겠지만 분명 배전 선로에도 영향은 있을 것 같아 그도 차량에 함께 올랐다. 불과 2km를 달려 대전천 둔치의 철탑에 도착했다. 자전거로 이곳을 지나던 초로의 사내가 그때까지 철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목격한 자살자의 행동은 놀라웠다.
만취한 청년은 마시던 소주병을 손에 들고 철탑 밑으로 비틀거리며 다가서서는 울부짖듯 큰 소리로 여자 이름을, 서너 차례나 부르짖더란다. 그러곤 병에 남은 소주를 입에다 대고 나발을 분 뒤 철탑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는 것. 사각 철탑 한쪽 모서리엔 작업자가 오르내리도록 볼트가 50cm 간격으로 붙어 있다. 청년은 만취한 사람답지 않게 발판을 하나하나 잡고 철탑이 벌인 팔까지 올랐고 살아있는 15만 4천 볼트 송전선로 전선에 닿으려고 몇 차례나 팔을 뻗어 시도했지만, 만취한 몸이 중심을 잃어 실패하자 다시 여자의 이름을 몇 번 외치고는 송전선로 위로 몸을 날려버리더라고 했다. 펑, 펑 소리가 연속으로 들린 건 청년의 몸이 처음 송전선에 닿은 순간 스파크와 함께 포성처럼 일대를 진동시켰고, 윗단 선로에서 불붙은 사체가 타면서 사지가 분리돼 아랫단 선로에 닿으면서 제2, 제3의 스파크가 굉음으로 포성처럼 지축을 흔들었단다.
대전MBC 악단은 매년 연말이면 지역 내 관공서와 국영기업을 순회하면서 연주회를 펼쳐온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연말에 바쁜데 해당 기관들은 응하지도 또 응하지 않을 수도 없어 죽을 맛이었을 터이다. 회사에선 ’MBC 노래자랑‘에 출전 희망자가 보이지 않자, 그동안 해오던 방식대로 부서별로 할당해 버렸다. 타 부서보다 고령 직원이 많은 공무과에서는 바쁘게 공사 현장에 매달리고 있는 송준하를 추천했다. 준하는 노래자랑 날짜로 잡힌 날은 승압공사 전체를 통해서 가장 힘든 유성 온천지구 공사를 해야 하므로 출전할 수 없다고 밝혔지만, 공무과 주무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무대에서 부를 곡목을 열흘 전에 미리 받는 것은 MBC 악단이 연주를 연습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준하는 한 해 전에 세상에 나온 노래 <못 잊을 대전의 밤>을 써냈다. 대전에서조차 시들한 반응을 보여 강당에 직원들이 모이더라도 노래를 아는 이가 많지 않을 것 같아 이 노래를 골랐다.
노래를 연습할 시간도 없는 준하를 출전시킨 공무과 주무가 준하는 원망스러웠다. 젊은 사람이 벌써 반년 이상 사무실에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이 기회에 얼굴 좀 제대로 보이라고 주무가 준하를 찍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시 준하가 대전역에서 가까운 목척교를 자주 건너다닌 건 공사가 벌어진 현장을 질러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도 ‘가로등 희미한 목척교에 기대서서……’란 노랫말 시작부가 준하가 맡은 승압 공사를 말한다는 느낌도 들었다. 작사자가 시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겠지만 새로 설치한 밝은 가로등을 두고 희미하다고 한 것은 준하 마음에 걸렸다. 검정으로 염색한 군복 상의를 걸치고 무대에 오른 준하를 가까이 에워싼 기타와 아코디언 등 악사 셋이 함께 든 흑백사진이 지금껏 ‘대전 1963’ 기념으로 남았을 뿐 성적은 꼴찌를 면치 못했다.
대전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기념물이 목척교다. 목척교는 대전의 중심에 있고 대전역과도 가까워 동란 땐 서울 등지에서 남하한 피란민들이 생이별한 가족 친지를 찾느라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준하는 대전에 처음 발 디딘 후 회사 위치는 대전역에서 비교적 가까운 인동이었는데도 하숙은 거리가 뚝 떨어진 효동에다 정했다. 걸어서 출근하면서라도 그는 대전이란 도시를 느끼고 싶었다. ----------> 다음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