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사는 오대산에 위치한 대찰로, 사찰 입구 일주문 근처에 토속신을 모시는 성황각(국사당)을 두고 있다. 불교 사찰이 영동·영서의 관문인 대관령/오대산 일대의 토속 서낭신앙(국사성황신 및 범일국사의 호법적 존재)을 포용하고 사찰을 수호하는 가람수호신으로 수용한 불교-민속 신앙의 습합 현상을 보여주는 결정적 장소이다.
세 공간은 "인간 범일(학산) 대관령의 수호신 범일(대관령국사성황각) 불교의 호법신으로 수용된 범일/토속신(월정사 성황각)"이라는 흐름으로 연결된다. 이는 한 고승의 역사적 존재가 민간의 성황 신앙 및 불교 문화와 어떻게 융합되어 영동·대관령 지역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관계이다.
월정사 성황각 (9세기 초~중반 창건 추정)의 창건 시기는 843년(신라 문성왕 5년) 전후 추정한다. 월정사는 643년 자장율사가 처음 창건한 뒤, 843년 신효거사가 중창하면서 가람 수호와 오대산 산신/서낭신을 모시는 성황각의 기틀을 마련했다. 범일국사(810~889)가 신격화되어 대관령에 좌정하기 이전부터 사찰 수호용 성황당으로 먼저 자리 잡았던 곳이다.
학산서낭당 (9세기 중반~10세기 초기 조성 추정)의 창건 시기는 851년(굴산사 창건) 이후 ~ 범일국사 사후로 추정한다. 범일국사가 당나라 유학 후 고향인 학산리로 돌아와 851년(문성왕 13년) 굴산사(崛山寺)를 창건했다. 학산서낭당은 범일국사의 탄생 설화가 깃든 우물(석천)과 학바위 인근에 조성된 마을 서낭당으로, 범일국사가 굴산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마을 수호신으로 추앙받기 시작한 시점부터 형성되었다.
대관령국사성황각 (10세기 초~고려 초기 창건)의 창건 시기는 889년(범일국사 입적) 이후 ~ 고려시대 초기로 추정한다. 범일국사가 889년에 입적한 후, 강릉 지역 민간에서 그를 대관령을 지키는 '대관령 국사성황신'으로 모시면서 국사성황각이 건립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 시기나 명주(강릉) 지역 민속신앙이 결합한 고려 초기에 신당 형태로 확립된 것으로 본다. (현재의 목조 단묘 건물은 후대에 여러 차례 중수됨)
2단계는 영동 전체의 수호신으로 발전하였다. 범일국사가 입적(889년)한 후, 그 신통력에 대한 믿음이 강릉 일대로 확장되었다. 대관령을 넘어오는 왜구를 물리치고 가뭄과 재앙을 막아준다는 민간 설화가 보태지면서, 단순한 마을신을 넘어 강릉 및 영동 지역 전체를 지키는 '대관령 국사성황신'으로 격상되었다. 이것이 바로 강릉단오제의 모태가 된다.
3단계는 불교 사찰에서의 수용 (월정사 성황각)이다. 본래 사찰의 성황각은 일반적인 산신이나 토속 서낭신을 모시던 곳이었으나, 대관령 국사성황신(범일국사)의 신앙력이 영동·영서 지역 전체에서 막강해지자 월정사를 비롯한 지역 사찰들이 이 대관령 국사성황신을 사찰과 불법을 지키는 '호법신(가람수호신)'으로 사찰 내에 받아들인 것이다.
일반적 측면에서는 ‘토속 신앙이 불교에 수용되고 이후 마을신과 지역 수호신으로 다져지는 과정’이 맞지만, 범일국사 신격의 형성사에 한해서는 [마을 사람들의 추앙(학산) 범일 사후 영동 전체의 성황신으로 격상(대관령) 사찰이 민간의 거대 신격인 국사성황을 가람수호신으로 흡수(월정사)]의 순서로 전개되었다.
당시 백성들에게 대관령 국사성황신은 가뭄을 막아주고 왜구를 물리쳐주는 가장 실질적이고 절대적인 수호신이었다. 불교 입장에서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신격을 사찰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역 주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사찰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한국 불교는 예로부터 그 지역의 강력한 토속신을 불교를 지키는 '호법신'이나 '가람(사찰) 수호신'으로 좌정시키는 포용력을 보여왔다. 원래 불법(佛法)의 수호신 역할을 부여하면서, 사찰의 성황각(국사당)이나 산신각에 모시어 "지역 수호신이 우리 사찰과 불법도 함께 지켜준다"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본래 신라 말 불교가 전래될 때 사찰의 성황각(월정사)은 사찰이 위치한 산과 들의 토속 잡신(소규모 산신·서낭신)을 달래고 다독이기 위해 만든 부속 공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백성들 사이에서 범일이라는 고승이 죽어 대관령을 지키는 거대한 국사성황신(대관령국사성황각)으로 부활하고 민중의 절대적 신앙이 되자, 사찰은 이 민간의 거대 신격을 사찰 안으로 다시 모셔 와 '불교를 지키는 당당한 수호신(가람수호신)'으로 격을 높여주었다.
보통 종교의 역사는 중앙 사찰/교리에서 민간으로 파급되는 내리사랑 형태를 띤다. 하지만 이 창건 순서는 반대이다. 학산이라는 시골 마을의 설화에서 시작되어 (마을신)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대관령에 신당을 짓고 모시며 세력을 키운 뒤 (지역 민중신) 월정사 같은 권위 있는 대찰이 그 민중의 에너지를 겸손하게 사찰 안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불교의 수용) 즉, 민중의 신앙 에너지가 거대 사찰의 문화마저 바꾸어 놓은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증명한다.
세계 종교사에서 새로운 종교가 들어올 때 기존 민간신앙을 '이단'이나 '미신'으로 몰아 파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한국 불교는 월정사 성황각이라는 공간을 통해, 범일국사라는 공통의 인물을 매개로 민간의 서낭신앙과 불교의 호법 신앙을 완벽하게 하나로 융합(습합)시켰다. 결국 창건의 순서는 "하나의 인물(범일)이 백성들의 삶 속에서 신이 되고, 그 신이 다시 불교 사찰의 주인이 되어 서로를 품어 안은 1,000년의 상생 과정"이 담긴 정교한 역사적 시나리오였던 셈이다.
월정사 입장에서는 대관령 국사성황신이 다른 존재가 아니라, 신라 신라 선종(禪宗)의 큰 스님이자 불법(佛法)을 바르게 세운 고승 범일(梵日)이었다. 사찰 측에서는 민간의 서낭신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옛 스님이 돌아가신 뒤에도 신령이 되어 이 지역과 사찰을 지켜주신다"는 명분을 자연스럽게 세울 수 있었다.
불교 교리에서 호법신(사찰과 불법을 지키는 신)은 본래 부처님이나 위대한 스님에게 귀의하여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는다. 범일국사는 생전에 이미 불법을 수호하던 대선사였으므로, 사후 신격화되었을 때 사찰을 지키는 '가람수호신(호법신)'의 자격요건을 완벽하게 갖춘 셈이었다.
'범일이 불교 승려였다'는 사실 하나 덕분에 민중의 민속신앙과 사찰의 불교 교리가 아무런 충돌 없이 "국사성황신 = 범일국사 = 가람수호신"이라는 공통분모를 완성할 수 있었다. 결국 범일국사의 승려로서의 높은 정체성은 민간 신앙이 불교 사찰 안으로 문턱 없이 들어올 수 있었던 가장 튼튼한 교량(다리)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한국 민속신앙에서 성황신과 산신은 산중왕인 호랑이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호랑이는 성황신이나 산신의 뜻을 전하고 보좌하는 신령스러운 영물로 여겨진다. 성황각에 성황신(대관령 국사성황신 및 오대산 수호신)을 모셨듯, 그 외벽에는 신의 권능과 위엄을 대변하는 호랑이를 그려 넣음으로써 이곳이 성황신의 영험한 공간임을 표시한 것이다.
예로부터 호랑이 그림(호작도 등)은 맹렬한 기운으로 모든 잡귀, 액운, 병마를 물리치는 강렬한 수호의 의미를 지녔다. 월정사로 들어오는 길목(일주문 옆)에 위치한 성황각 외벽에 호랑이를 크게 그려 놓음으로써, 사찰 영역 안으로 들어오려는 온갖 안 좋은 기운과 산중의 악한 기운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한 목적이다.
매화와 국화는 추운 겨울과 서리를 견디고 피어나는 꽃으로, 어떠한 유혹과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선비의 절개와 수행자의 고결한 정진을 상징한다. 승려이자 수행자로서 높은 경지에 올랐던 범일국사의 고결한 인품과 덕을 찬탄하고 상징하기 위해 사군자 벽화를 그려 넣은 것이다.
사찰 벽화에서 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불교적 상징성을 가진다. 매화느 이른 봄 추위를 이겨내고 피어나듯, 번뇌와 고통을 이겨내고 깨달음을 얻는 수행자의 마음을 상징한다. 국화는 늦가을 오서리 속에서도 은은한 향기를 지키듯, 세상의 욕망에 물들지 않는 맑고 깨끗한 마음(청정심)을 상징한다.
첫댓글 학산서낭당, 대관령국사성황각, 그리고 월정사 성황각은 모두 신라 말의 고승 범일국사(梵日國師, 810~889)라는 공통된 인물/신격과 강원도 영동·영서 지역의 유교·불교·민속신앙(서낭신앙) 결합 구조를 중심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강릉 구정면 학산리는 범일국사가 태어난 고향이다. 학산의 '석천' 우물에서 물을 마신 처녀가 햇빛을 받고 범일을 임신해 낳았으나 학바위에 버렸고, 학들이 범일을 돌보았다는 신화적 탄생담이 전해진다.
학산서낭당은 범일국사가 인간으로서 삶을 시작하고, 훗날 굴산사를 창건하여 영동 불교 및 지역의 중심 인물이 되기까지의 ‘인간적 근원’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범일국사가 입적(889년)한 후, 민간에서는 그가 대관령을 지키는 '국사성황신(國師城隍神)'으로 환생하여 왜구를 물리치고 지역의 가뭄과 재앙을 막아준다고 믿었다.
학산에서 태어난 범일국사가 신(神)의 영역으로 격상되어 좌정한 곳이 바로 대관령국사성황각이다. 해마다 음력 4월 15일이면 이곳에서 제를 지내고 신목(神木)을 모셔 내려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인 강릉단오제를 개최한다.
월정사는 오대산에 위치한 대찰로, 사찰 입구 일주문 근처에 토속신을 모시는 성황각(국사당)을 두고 있다.
불교 사찰이 영동·영서의 관문인 대관령/오대산 일대의 토속 서낭신앙(국사성황신 및 범일국사의 호법적 존재)을 포용하고 사찰을 수호하는 가람수호신으로 수용한 불교-민속 신앙의 습합 현상을 보여주는 결정적 장소이다.
세 공간은 "인간 범일(학산) 대관령의 수호신 범일(대관령국사성황각) 불교의 호법신으로 수용된 범일/토속신(월정사 성황각)"이라는 흐름으로 연결된다. 이는 한 고승의 역사적 존재가 민간의 성황 신앙 및 불교 문화와 어떻게 융합되어 영동·대관령 지역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관계이다.
세 장소의 창건(조성 및 신당 모심) 순서는 월정사 성황각 → 학산서낭당 → 대관령국사성황각 순이다.
월정사 성황각 (9세기 초~중반 창건 추정)의
창건 시기는 843년(신라 문성왕 5년) 전후 추정한다.
월정사는 643년 자장율사가 처음 창건한 뒤, 843년 신효거사가 중창하면서 가람 수호와 오대산 산신/서낭신을 모시는 성황각의 기틀을 마련했다. 범일국사(810~889)가 신격화되어 대관령에 좌정하기 이전부터 사찰 수호용 성황당으로 먼저 자리 잡았던 곳이다.
학산서낭당 (9세기 중반~10세기 초기 조성 추정)의
창건 시기는 851년(굴산사 창건) 이후 ~ 범일국사 사후로 추정한다.
범일국사가 당나라 유학 후 고향인 학산리로 돌아와 851년(문성왕 13년) 굴산사(崛山寺)를 창건했다. 학산서낭당은 범일국사의 탄생 설화가 깃든 우물(석천)과 학바위 인근에 조성된 마을 서낭당으로, 범일국사가 굴산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마을 수호신으로 추앙받기 시작한 시점부터 형성되었다.
대관령국사성황각 (10세기 초~고려 초기 창건)의
창건 시기는 889년(범일국사 입적) 이후 ~ 고려시대 초기로 추정한다.
범일국사가 889년에 입적한 후, 강릉 지역 민간에서 그를 대관령을 지키는 '대관령 국사성황신'으로 모시면서 국사성황각이 건립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 시기나 명주(강릉) 지역 민속신앙이 결합한 고려 초기에 신당 형태로 확립된 것으로 본다. (현재의 목조 단묘 건물은 후대에 여러 차례 중수됨)
범일국사(대관령 국사성황신)라는 특정 신격의 형성 과정에서는 시간적·신앙적 순서가 조금 다르게 진행되었다.
실제 범일국사 신격화의 역사적 전개 과정은 마을(탄생) → 지역 수호신 → 불교 사찰 수용의 순서로 전개되었다.
1단계는 학산마을신으로 시작되었다.
범일국사가 태어나고 자란 강릉 학산리 마을에서 출발하었다. 햇빛을 받고 태어난 신이한 탄생 설화와 함께 마을의 우물(석천), 학바위를 중심으로 마을을 지켜주는 혈연·지연적 수호신(마을 서낭신)의 형태를 먼저 띠었다.
2단계는 영동 전체의 수호신으로 발전하였다.
범일국사가 입적(889년)한 후, 그 신통력에 대한 믿음이 강릉 일대로 확장되었다. 대관령을 넘어오는 왜구를 물리치고 가뭄과 재앙을 막아준다는 민간 설화가 보태지면서, 단순한 마을신을 넘어 강릉 및 영동 지역 전체를 지키는 '대관령 국사성황신'으로 격상되었다. 이것이 바로 강릉단오제의 모태가 된다.
3단계는 불교 사찰에서의 수용 (월정사 성황각)이다.
본래 사찰의 성황각은 일반적인 산신이나 토속 서낭신을 모시던 곳이었으나, 대관령 국사성황신(범일국사)의 신앙력이 영동·영서 지역 전체에서 막강해지자 월정사를 비롯한 지역 사찰들이 이 대관령 국사성황신을 사찰과 불법을 지키는 '호법신(가람수호신)'으로 사찰 내에 받아들인 것이다.
일반적 측면에서는 ‘토속 신앙이 불교에 수용되고 이후 마을신과 지역 수호신으로 다져지는 과정’이 맞지만,
범일국사 신격의 형성사에 한해서는 [마을 사람들의 추앙(학산) 범일 사후 영동 전체의 성황신으로 격상(대관령)
사찰이 민간의 거대 신격인 국사성황을 가람수호신으로 흡수(월정사)]의 순서로 전개되었다.
불교가 민간의 강력한 영웅/성황 신앙을 거꾸로 사찰 안으로 받아들여 '성황각'에 모심으로써, 불교와 민속신앙이 서로를 인정하고 결합한 한국 불교 특유의 습합(習合) 과정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찰/신당 자체의 역사는 월정사 성황각 학산서낭당 대관령국사성황각의 순서이지만,
범일국사 신격의 형성은
1단계 탄생·마을 2단계 입적 후·지역 수호신 3단계 불교가 국사성황신을 호법신으로 수용의 순서로 전개되었다.
민간에서 '범일국사(대관령 국사성황신)'에 대한 신앙과 신통력에 대한 믿음이 워낙 강력하고 널리 확산되자, 불교 사찰(월정사 등)에서도 이를 배척하는 대신 사찰 내부로 기꺼이 포용하고 수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당시 백성들에게 대관령 국사성황신은 가뭄을 막아주고 왜구를 물리쳐주는 가장 실질적이고 절대적인 수호신이었다. 불교 입장에서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신격을 사찰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역 주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사찰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한국 불교는 예로부터 그 지역의 강력한 토속신을 불교를 지키는 '호법신'이나 '가람(사찰) 수호신'으로 좌정시키는 포용력을 보여왔다.
원래 불법(佛法)의 수호신 역할을 부여하면서,
사찰의 성황각(국사당)이나 산신각에 모시어 "지역 수호신이 우리 사찰과 불법도 함께 지켜준다"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본래 신라 말 불교가 전래될 때 사찰의 성황각(월정사)은 사찰이 위치한 산과 들의 토속 잡신(소규모 산신·서낭신)을 달래고 다독이기 위해 만든 부속 공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백성들 사이에서 범일이라는 고승이 죽어 대관령을 지키는 거대한 국사성황신(대관령국사성황각)으로 부활하고 민중의 절대적 신앙이 되자, 사찰은 이 민간의 거대 신격을 사찰 안으로 다시 모셔 와 '불교를 지키는 당당한 수호신(가람수호신)'으로 격을 높여주었다.
보통 종교의 역사는 중앙 사찰/교리에서 민간으로 파급되는 내리사랑 형태를 띤다.
하지만 이 창건 순서는 반대이다.
학산이라는 시골 마을의 설화에서 시작되어 (마을신)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대관령에 신당을 짓고 모시며 세력을 키운 뒤 (지역 민중신) 월정사 같은 권위 있는 대찰이 그 민중의 에너지를 겸손하게 사찰 안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불교의 수용)
즉, 민중의 신앙 에너지가 거대 사찰의 문화마저 바꾸어 놓은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증명한다.
세계 종교사에서 새로운 종교가 들어올 때 기존 민간신앙을 '이단'이나 '미신'으로 몰아 파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한국 불교는 월정사 성황각이라는 공간을 통해, 범일국사라는 공통의 인물을 매개로 민간의 서낭신앙과 불교의 호법 신앙을 완벽하게 하나로 융합(습합)시켰다.
결국 창건의 순서는 "하나의 인물(범일)이 백성들의 삶 속에서 신이 되고, 그 신이 다시 불교 사찰의 주인이 되어 서로를 품어 안은 1,000년의 상생 과정"이 담긴 정교한 역사적 시나리오였던 셈이다.
월정사가 대관령국사성황신을 사찰수호신으로 쉽게 받아들인 것은 범일이 불교승려였다는 점도 한몫했다.
범일국사가 ‘불교 승려’이자 ‘조계종 구산선문의 일파를 창시한 대고승’이었기에 불교계가 이를 수용하는 과정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만약 대관령 국사성황신이 전래의 일반 토속신이나 출처가 불분명한 신격이었다면, 아무리 민간의 신앙력이 강했더라도 불교 사찰 내부로 끌어들여 공식 전각(성황각/국사당)에 모시기까지 심리적·교리적 거부감이 훨씬 컸을 것이다.
월정사 입장에서는 대관령 국사성황신이 다른 존재가 아니라, 신라 신라 선종(禪宗)의 큰 스님이자 불법(佛法)을 바르게 세운 고승 범일(梵日)이었다.
사찰 측에서는 민간의 서낭신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옛 스님이 돌아가신 뒤에도 신령이 되어 이 지역과 사찰을 지켜주신다"는 명분을 자연스럽게 세울 수 있었다.
불교 교리에서 호법신(사찰과 불법을 지키는 신)은 본래 부처님이나 위대한 스님에게 귀의하여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는다.
범일국사는 생전에 이미 불법을 수호하던 대선사였으므로, 사후 신격화되었을 때 사찰을 지키는 '가람수호신(호법신)'의 자격요건을 완벽하게 갖춘 셈이었다.
'범일이 불교 승려였다'는 사실 하나 덕분에 민중의 민속신앙과 사찰의 불교 교리가 아무런 충돌 없이 "국사성황신 = 범일국사 = 가람수호신"이라는 공통분모를 완성할 수 있었다.
결국 범일국사의 승려로서의 높은 정체성은 민간 신앙이 불교 사찰 안으로 문턱 없이 들어올 수 있었던 가장 튼튼한 교량(다리) 역할을 했던 것이다.
월정사 성황각(국사당) 외벽에 그려진 호랑이 벽화에는 성황신(산신)의 영물이자 사찰과 불법을 지키는 벽사(벽사: 삿된 것을 물리침) 및 호법(護法)의 의미가 담겨 있다.
한국 민속신앙에서 성황신과 산신은 산중왕인 호랑이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호랑이는 성황신이나 산신의 뜻을 전하고 보좌하는 신령스러운 영물로 여겨진다.
성황각에 성황신(대관령 국사성황신 및 오대산 수호신)을 모셨듯, 그 외벽에는 신의 권능과 위엄을 대변하는 호랑이를 그려 넣음으로써 이곳이 성황신의 영험한 공간임을 표시한 것이다.
예로부터 호랑이 그림(호작도 등)은 맹렬한 기운으로 모든 잡귀, 액운, 병마를 물리치는 강렬한 수호의 의미를 지녔다.
월정사로 들어오는 길목(일주문 옆)에 위치한 성황각 외벽에 호랑이를 크게 그려 놓음으로써, 사찰 영역 안으로 들어오려는 온갖 안 좋은 기운과 산중의 악한 기운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한 목적이다.
오대산 깊은 산중에 위치한 월정사는 역사적으로 산짐승이나 화재, 외침 등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산중의 가장 무서운 영물인 호랑이를 사찰 입구 성황각 벽에 모심으로써, 사찰 전체와 승려, 불자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달라는 염원을 담았다.
월정사 성황각 외벽을 장식하고 있는 사군자(매화·국화) 벽화는 괴석(괴이한 돌)과 함께 그려진 국화(菊)이고, 고목에 피어난 매화(梅)를 그린 것이다.
매화와 국화는 추운 겨울과 서리를 견디고 피어나는 꽃으로, 어떠한 유혹과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선비의 절개와 수행자의 고결한 정진을 상징한다.
승려이자 수행자로서 높은 경지에 올랐던 범일국사의 고결한 인품과 덕을 찬탄하고 상징하기 위해 사군자 벽화를 그려 넣은 것이다.
사찰 벽화에서 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불교적 상징성을 가진다.
매화느 이른 봄 추위를 이겨내고 피어나듯, 번뇌와 고통을 이겨내고 깨달음을 얻는 수행자의 마음을 상징한다.
국화는 늦가을 오서리 속에서도 은은한 향기를 지키듯, 세상의 욕망에 물들지 않는 맑고 깨끗한 마음(청정심)을 상징한다.
불법을 지키는 국사성황신이 좌정한 거룩한 공간을 한층 더 아름답고 기품 있게 장식하는 용도와 동시에 사찰을 찾는 대중들에게 매화와 국화의 기품을 통해 "수행자와 같은 맑은 마음으로 성황각을 마주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성황각 외벽의 호랑이가 "나쁜 기운을 막아내는 강렬한 수호(벽사)"를 뜻한다면, 이 매화와 국화 그림은 "국사성황신(범일국사)의 고결한 덕을 기리고, 사찰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청정하게 가다듬게 하는 장엄"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