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3.26. 사순 제4주일, 사무상16,1ㄱㄹㅁㅂ.6-7.10-13ㄴ 에페5,8-14 요한9,1-41
빛의 자녀답게
-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
‘빛의 자녀’여러분!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우리는 방금 화답송 후렴을 흥겹게 노래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시편23,1).
오늘 복음과 잘 어울리는, 끊임없이 기도하기에 참 좋은 시편입니다.
묘비명 부탁을 받을 때마다 가장 많이 추천하는 시편구절입니다.
어제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에 이어 오늘은 사순 제4주일, ‘즐거워하라Laetare’ 일명 장미주일이라 불리는 주일이라 제의색까지 기쁨을 상징하는 장미색입니다.
오늘 복음은 참 길지만 미사전례와 우리의 삶을 곁들여 함께 묵상하면 깊고도 풍부한 내적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적시력은 얼마나 됩니까?
육안의 시력이 아무리 좋아도 우리의 영적시력이 약하면 말 그대로 눈뜬 맹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태생 맹인은 바로 영적맹인의 우리를 상징합니다.
바로 오늘 주님은 여러분 마음의 눈을, 영의 눈을, 믿음의 눈을 열어주시고자 이 거룩한 미사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에페5,14).
바로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세례의식에서 사용하던 노래입니다.
세례성사 은총으로 영적시력을 회복한 태생소경인 우리들이 이 거룩한 성체성사 은총으로 날로 좋아지는 영적시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삶을 일컬어 ‘개안開眼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이라 칭하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성장과 성숙은 이런 개안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과 함께 가는 영적성장과 성숙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모두 영적으로 태생 맹인이었고 이제 주님의 은총으로 점차 영의 눈이 열려가고 있으며 영적시력도 차차 회복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에 나오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가 깊은 묵상감입니다.
에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고, 이어 제자들이 묻습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요한9,2).
죄와 눈먼 것을 연결시키는 제자들의 선입견 가득한 물음입니다.
애당초 잘못 제기된 물음이지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렇게 연결시킵니다.
우리의 영육의 질병이나 사고나 죽음 등, 불행한 일이 발생하면 우리는 저절로 죄와 연결시켜 생각하며 참으로 무익하게 자책합니다.
이건 분명 유혹입니다.
잘못 제기된 생각입니다.
하느님은 죄를 집요하게 추궁하여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회개하면 하느님은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과거는 불문에 붙이시고 깨끗이 잊으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그대로 하느님의 심중을 대변합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9,3).
바로 이 말씀대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현실적이고 생산적인 처방입니다.
발상의 전환이요 회개를 의미합니다.
깨달음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보는 눈이 바뀐 것이며 이 또한 주님의 은총입니다.
사실 바꿔야 할 것은 사람이나 환경에 앞서 ‘보는 눈’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무엘이 이사이의 아들들 중 엘리압을 보고 선택하려 할 때 주님은 사무엘을 저지하십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사무상16,7).
이것이 진짜 영적시력입니다.
마음의 눈으로 영의 눈으로, 바로 주님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외관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 하느님을 뜻을 찾아 보는 것입니다.
마침내 다윗이 오자 또 주님은 사무엘의 눈을 열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사무상16,12ㄷ)
그러자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들이 닥쳐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렀다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어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실 때 제대로 볼 수 있음을 봅니다.
마음의 눈이 멀어 제대로 보지 못해 편견과 선입견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은총으로 끊임없이 영적 시력을 높여야 할 것입니다.
병이든 사고든 원인을 캐다보면 끝이 없고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라 믿으시고 지금 여기서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뜻을 깨달아 살아갈 수 있을지 구체적 처방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 주님은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어 그 처방을 주실 것입니다.
사실 지난일 아무리 후회해도 누구를 원망해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쁘게 감사하면서 늘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 살면 거기 답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9,4-5).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아있는 낮 동안 일해야 합니다.
죽음의 밤이 되면 아무도 일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빛이신 주님께서 함께 계신 낮 동안, 살아있는 동안 일해야 합니다.
하루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제가 흔히 드는 비유가 생각납니다.
일일일생一日一生, 내 전 삶을 하루로 압축하여 묵상해 보는 것입니다.
아침 6시에 태어나 저녁 6시에 죽음이라면, 세상의 빛이신 주님이 함께 계신 낮 동안에 내 전삶을 압축해 볼 때 지금 내 나이는 몇시쯤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나이는 오전입니까, 혹은 오후입니까?
정확히 몇 시 몇 분 지점에 와 있습니까?
이런 자각에 투철했기에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삶은 참으로 치열했습니다.
하루를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사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며칠 전 수도원에 머물렀던 개신교 장로회 신학대학원생들이 남긴 메모가 생각납니다.
“처음 경험한 수도원에서 무엇보다도 수사님들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思慕하시고, 그 열망熱望이 얼마나 간절懇切하신지를 깨닫고 도전挑戰받았습니다.”
수도원에서의 충격적인 영적체험을 통해 마음의 눈이 활짝 열린 개신교 장로회 신학대학원생들임이 분명합니다.
이런 마음의 눈이 열리는 영적체험을 통해 일일일생,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세상의 빛이신 주님과 함께 최선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태생 맹인의 치유과정 역시 은혜롭습니다.
그대로 이 미사장면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요한9,6-7).-
침과 진흙보다 더 좋은 말씀과 성체입니다.
실로암 샘보다 더 좋은 생명의 샘, 미사입니다.
참 좋은 주님은 실로암 미사의 말씀과 성체의 은총으로 우리 마음의 눈을 활짝 열어주시어 영적시력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미사전례가 아니고 무엇으로 오늘 복음 말씀을 실감나게 은혜롭게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은 그대로 우리 신앙의 여정을 압축합니다.
태생맹인의 눈을 뜬 것은, 점차 좋은 영적시력을 회복하게 된 것도 순전한 은총입니다.
눈이 열려가는 과정도 인상적이고 눈이 열려갈수록 당당해지고 지혜로워지는 태생 맹인입니다.
두려움도 없고 오히려 바리사이를 압도합니다.
바라사이들과의 논쟁을 통해 눈이 열려간 태생 맹인입니다.
‘예수님이란 분’에서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라는 고백으로 바뀝니다.
맹인의 영적시력이 한단계 높아졌음을 보여줍니다.
마침내 영적엘리트라 자부하는 바리사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에서는 조롱끼마져 느껴집니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요한9,30-33).
영의 눈이 활짝 열린 태생맹인입니다.
태생맹인의 영적체험이 바리사이를 압도합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우리 수도자들은 아침 성무일도 즈카르야 후렴을 신나게 노래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맹인의 눈을 뜨게 해줄 이가 아무도 없도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과 태생맹인과의 대화가 감동적입니다.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 중 예수님과 우리 각자와의 대화로 여기시고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태생맹인;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예수님;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이가 바로 그다.”
태생맹인; “주님, 저는 믿습니다.”(요한9,35-38).-
하며 예수님께 경배한 태생맹인처럼 우리도 주님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이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영의 눈이 활짝 열린 태생맹인은 마침내 예수님을 예언자나 선생님이 아닌 ‘주님’으로 믿어 고백합니다.
이어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9,39).
주님은 보지 못하는 겸손한 이들을 영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시고, 본다는 교만한 이들은 눈먼 자게 되게 하심으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우리 수도자들은 어제 저녁 성무일도 후렴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노래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못보는 사람을 보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은 이 거룩한 실로암 미사은총으로 우리 눈을 활짝 열어주시며 간곡히 당부하십니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에페5,8-10).
아멘.
첫댓글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못보는 사람을 보게 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