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들, 빛의 기억
캔들(Candle)은 우리말로 양초 또는 촛불이다. 참 단순한 물건이다. 밀랍이나 파라핀으로 몸을 만들고, 가느다란 심지
하나를 품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캔들은 단순한 생활용품이 아니었다. 인간은 오랫동안 촛불
하나에 의지하여 밤을 견디고, 마음을 다스리고, 미래를 꿈꾸었다. 캔들은 빛을 만드는 도구이기 전에, 인간이 어둠과
맺어 온 관계의 역사였다.
전기가 없던 시절의 밤은 지금의 밤과는 전혀 달랐다. 어둠은 세상을 삼켜 버릴 만큼 깊었고, 사람들은 그 어둠을 이기기
위해 작은 불꽃 하나를 피워 올렸다. 석유를 종지에 담아 심지를 띄우고, 호롱불을 걸어 방안을 밝혔다.
내 어린 시절에도 그 풍경은 낯설지 않았다. 다섯 날마다 서는 반성장에 정종 됫병을 들고 가 석유를 한 되씩 사 오곤 했다.
방안을 조금이라도 밝히려고 심지를 돋우면 금세 홰가 나고, 아침이면 콧구멍이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콧털에 그을음이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생활이었지만, 그 시절에는 그것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당시에도 부잣집에는 양초가 있었다. 종지불보다 훨씬 밝고 깨끗했다. 어린 마음에는 양초 하나가 생활의 여유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같은 불빛인데도 삶의 형편에 따라 빛의 색깔마저 달라 보였던 것이다.
빛의 세기를 나타내는 물리량의 단위가 '칸델라(candela)'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오늘날 과학은 가장 정밀한 측정으로
세상을 설명하지만, 그 출발점에는 촛불 하나의 밝기가 있었다. 인간은 작은 불꽃을 기준 삼아 우주의 빛을 재기 시작했다.
거대한 세계도 결국은 아주 작은 것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캔들의 가치는 밝기에만 있지 않다.
성당의 제대 위에도 촛불은 타오르고, 제사상에도 촛불은 꺼지지 않는다. 전깃불은 공간을 밝히지만, 촛불은 마음을 밝힌다.
전깃불은 스위치를 누르면 켜지지만, 촛불은 사람의 손으로 불을 붙여야 한다. 그래서 촛불에는 언제나 인간의 마음이 먼저
담긴다. 기도하는 마음, 그리워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 떠나보내는 마음이 작은 불꽃 속에서 조용히 흔들린다.
오늘날에는 향기를 머금은 캔들이 또 다른 위안을 준다. 은은한 불빛과 향기는 분주한 마음을 잠시 내려놓게 한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더 많은 빛을 얻었지만, 이상하게도 촛불 하나에서만 얻을 수 있는 평온은 여전히 남아 있다.
흥미로운 것은 현대의 경제도 '캔들'이라는 이름을 빌려 왔다는 사실이다. 주가의 움직임을 기록하는 캔들 차트는 하루의
희로애락을 촛불 모양으로 새긴다. 오르고 내리는 가격의 흔적은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불꽃을 닮았다. 동양에서는 상승을
붉은색으로, 하락을 푸른색으로 나타내고, 서양에서는 대체로 상승을 초록색, 하락을 붉은색으로 표시한다. 색은 달라도
사람들의 기대와 두려움을 읽으려는 마음은 다르지 않다. 이 표현법이 일본 상인들의 지혜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삶의
경험이 어떻게 세계 공통의 언어가 되는지를 보여 준다.
생각해 보면 캔들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 어둠을 밝히던 등불에서 종교의 상징이 되었고, 향기를 품은
예술이 되었으며, 이제는 시장의 흐름을 읽는 언어가 되었다. 모습은 달라졌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스스로를 태워 다른
것을 비춘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우리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은 무엇인가를 태우며 살아간다. 젊음도 태우고, 시간도 태우고, 정성도
태운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자신의 세월을 태우고, 스승은 제자를 위해 지식을 태우며,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은 누군가의
하루를 밝히기 위해 자신의 삶을 조금씩 내어준다. 어쩌면 인간다운 삶이란, 얼마나 오래 살아남았느냐보다 누구의 어둠을
얼마나 밝혀 주었느냐에 있는지도 모른다.
촛불은 자신을 아끼지 않는다. 몸은 점점 짧아지지만 불꽃은 마지막 순간까지 가장 높은 곳에서 빛난다. 그것이 촛불의 운명
이고, 또한 아름다움이다.
우리의 삶도 언젠가는 한 자루의 촛불처럼 끝이 날 것이다. 그러나 그 끝이 소멸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의 마음에
남긴 따뜻함, 누군가에게 건네준 위로, 세상에 남긴 작은 선의는 다른 심지에 다시 불을 옮겨 붙인다. 그래서 빛은 꺼지는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것이다.
밤이 아무리 깊어도 촛불 하나는 어둠과 타협하지 않는다. 세상을 모두 밝히지는 못해도, 자신이 닿는 자리만큼은 끝내 포기
하지 않는다.
어쩌면 인간이 평생 찾아 헤매는 것은 거대한 태양이 아니라, 자기 앞의 한 걸음을 비춰 줄 작은 캔들 하나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