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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
고린도전서 12:1-11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주현 후 둘째 주일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을 드러낸 절기가 주현절이다. 그런 주현의 모습 속에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재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성령의 임재를 왜 비둘기가 하강하는 모습으로 표현했을까? 내 생각에 비둘기는 세상 어디든 존재하는 가장 평범하고 생활 가까운 새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과 어울려 산다. 거리, 광장, 골목, 지붕에서 그리고 평화를 따르려는 사람들의 행진과 함께한다.
평범한 목수로, 이웃으로, 가장 평화롭고 선한 이미지로 우리와 함께 하신 예수님을 닮았다. 성령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평화로운 삶을 살도록 세상 가운데로 불러내셨다.
안타깝게도 우리 생활이 점점 위협을 받고 있다. 아마 지난 주중에 그런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의 간구는 불안과 불편, 아픔과 고통 대신 평화가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다.
돌아보면 그동안 참 안전하게 살았다. ‘은혜’라는 가사가 실감 난다.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이 모든 것이 은혜였소.’ 아무쪼록 앞으로 그런 은총의 시간이 계속될 수 있도록 더 많은 예방과 공동체 안전이 요청된다. 그래서 오늘은 각자의 보금자리에서 예배를 드린다.
여러분이 머무는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와 주님의 평화가 같이 하시길 빈다.
1)
오늘 설교 제목은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이다. 성령을 표현하기 어려우니 비둘기라는 상징이 등장한 것이다. 그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친밀한 존재라는 의미일 것이다.
성령은 누구신가? 삼위일체 가운데 성령에 대한 이해는 조금 더 막연한 것이 사실이다. 영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고린도교회를 향해 성령에 대해 말한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1).
성령은 막연한 영적 그림자나, 단순한 영향력이 아니다. ‘신령한 무엇’으로 그리스도교에서 삼위일체 신앙의 핵심이다. 삼위일체 이해의 어려움 때문에 이런 말도 니왔다. ‘삼위일체를 완벽히 알려고 하는 사람은 머리가 돌 것이다. 그러나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그의 영혼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성령은 곧 세 분 하나님 중의 한 분이시다. 누구보다 성령의 존재는 영적이지만, 동시에 인격적으로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이시다. 성경은 보혜사, 위로자, 곁에 있는 분으로 설명한다. 만약 영적인 것이 과학으로나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면 그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고 자연에 불과한 것이다.
신앙에는 인간의 지식으로 논의할 수 없는 영적인 역사가 있다. 믿음은 우리가 이 성령에 의하여 사는 일이다. 바울은 말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에 의지하지 않으면 예수를 나의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없다고 한다.
내가 예수님을 고백하고 예배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바울은 성령이 아니면 누구든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고 말하지 못한다고 단호히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3).
내가 그리스도인 된 것은 바로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주님으로 인정하고 믿는다는 것 그 자체는 이미 성령이 활동하신 결과이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요일 4:2).
신약성경에 따르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가득하였다. 믿는 자들은 세례를 받고, 또 성령을 받았다. 성령으로, 곧 하나님의 영에 따라 살아가는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에 참여하고 있다는 표이며 보증이었다.
과거에 이방인으로 살던 사람들은 그동안 말못하는 우상에게 끌려다녔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데, 이는 성령의 이끄심 덕분이다.
2)
무엇보다 성령은 믿는 사람들을 ‘성령의 은사’를 통해 교회가 자라고 든든하게 하신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 9가지를 소개한다. 성령의 은사 9가지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방언 말함, 방언 통역함’이다. 이러한 성령의 은사들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교회에 덕을 끼친다.
여기에서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지, 9가지 보기를 들고 있다. 그런데 정작 강조하려는 것은 은사의 다양함이 아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다. 곧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와 같이 이방 땅에 세워진 신생교회가 행여 영적 혼란을 겪지 않도록 경계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주시는 은사, 곧 선물과 함께 그 성령의 은사는 다양한 모습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고 일치한다고 강조한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4-6).
바울 사도가 반복하여 설명하는 뜻은 모든 교회가 신령한 것에 대하여 잘 알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은사가 있으나 이를 주시는 성령은 한 분이다.
여러 가지 직분이 있으나 이를 주시는 주님은 한 분이다.
여러 가지 사역이 있으나 이를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거듭거듭 “성령은 같고”(4), “주는 같으며”(5), “하나님은 같으니”(6)라고 반복한다. 그 목적은 분명하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7).
그런 이유로 우리는 성령의 사역을 말할 때 ‘일치, 화해, 다양성 속의 일치’(Unity in Diversity)를 강조한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와 직분과 사역이 다양한 이유를 한 마디로 말한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통해 베푸시는 선물은 공동체에 유익을 주시려는 뜻이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11).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지칭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나눌 수 없듯이, 교회는 나뉘지 않는다.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지만 같은 주님의 세례를 통해 거룩한 교회에 참여하는 것이다. 각각 지체들이 모여 한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바울이 가르치는 ‘공동체와 지체의 원리’는 교회의 역할을 선명하게 설명한다.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이며, 약한 지체든 아름다운 지체든 한 몸을 이룬다. 한 성령으로부터 각 지체에게 주신 은사로 한 몸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교회에는 여러 가지 직분이 있으나 어느 것도 특별히 높거나, 낮지 않다. 다만 서로 존중한다. 여러 가지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공동체 안에서 협력한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전 12:26).
바로 ‘즐함우함’의 원리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다양한 은사 그 배후에서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 때문이다. 서로 얼굴이 다르듯 은사가 다르나, 그럼에도 하나 되게 하신다. 우리는 늘 ‘즐함우함’을 고백하는 이유이다.
다양함 속에서 일치를 잘 보여주는 사례는 오케스트라일 것이다. 서로 천차만별한 악기들이 함께 하면서 아름다운 곡을 연주한다. 가장 다이내믹한 ‘불협의 화음’을 연출하는 모습이다.
세계적인 빈 필하모닉은 해마다 신년음악회를 여는데 세계 92개국에서 중계를 한다. 심지어 우리나라 열성팬들은 영화관 메가박스에서 본다. 올해 지휘자는 80세 바렌보임이었다
그는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세계인을 위로하면서 이런 메시지를 전하였다. “심각한 바이러스의 위협 속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이들처럼 우리는 음악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도 그것을 펼쳐 나아가야 합니다.”
올해는 조금 더 특별했다고 한다. 해마다 빈 필하모닉의 레파토리는 요한 슈트라우스 부자의 왈츠곡인데, 올해는 오스트리아 작곡가 칼 미하엘 치러의 ‘밤의 방랑자들’ 왈츠를 처음 연주했다는 것이다. 요한 슈트라우스와 칼 미하엘 치러는 동시대 인물인데 라이벌을 넘어 적대적인 관계였다고 한다. 그래서 빈 필하모닉은 갈등을 피하려고 신년음악회에서만큼은 치러의 음악을 연주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올해는 그의 서거 100주년을 맞아 연주한 것이다. 호사가들은 이를 인류애적 화해라고 불렀다.
당장은 코로나19로 어렵다지만 이렇게 작은 화해, 작은 일치를 이루어갈 수 있다. 우리는 영적 지휘자이신 성령의 감동에 따라 그런 화해와 평화, 위로와 은총의 사람으로 살아간다.
우리가 늘 암송하는 성령의 9가지 열매는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성숙한 인격으로 자라간다. 이러한 열매들은 다양하지만 예수님을 닮은 따듯한 인격으로, 실천적인 의로움으로, 거룩한 질서로 우리를 그리스도인답게 한다.
사람에게는 성령을 맞이하고 받아들이는 영혼의 텃밭이 있다. 그런데 그 텃밭은 가꾸지 않으면 황무지가 되고 만다. 스스로 경건의 노력을 하지 않거나, 사회적으로 나쁜 환경이 영혼의 텃밭을 폐허로 만들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이 경건히 기도하고, 말씀을 가까이하며, 찬양하는 생활을 하는 것은 내 영혼의 텃밭을 기름지게 한다. 착한 마음과 선한 의지로 살는 것은 내 영혼의 텃밭을 기름지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가장 기본이 된다.
3)
과연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아 카펠라’라는 노래를 안다. 무반주 찬양이다. 원래 ‘아 카펠라’는 ‘카펠라’ 즉 교회에서 노래하듯 부르라는 뜻이다. 교회 스타일로, 그리스도인답게 노래하라.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답게 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아 카펠라’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사랑하시는 성령의 도우심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게 주신 성령의 은사에 따라 너는 네 식으로 살아라. 네 고유한 목소리로, 네 직업이란 악기로, 네 가정이란 하모니 속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라’고 요구하신다.
어떠한 장식이나 위선 없이, 믿음도 그렇게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서 나를 표현하라고 말씀하신다.
요즘 자주 듣는 단어 중에 메타 리스크(Meta Risk)가 있다. 평소에는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겨지던 사소한 것들이 뒤엉켜 엄청난 사회 경제적 파장으로 몰고 오는 위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얼마 전에 ′요소수 파동′으로 여러 날 뉴스마다 숨 넘어 가는 소리를 했다. 언제 그랬냐 싶게 금새 해결되었지만 때론 당연한 일들도 아뿔싸 쉽게 간과했다가는 호된 대가를 치루기도 한다. ‘메타 리스트’는 가볍지만 그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말이다.
이번에는 좀 더 무거운 말이다. 영화 ‘돈 룩 업’을 보았다. 영어로 “Don’t look up!” 즉 “위를 보지 마!”라는 뜻이다. 가까이 다가온 위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세태, 언론, 정부, 인류에 대한 경고이다. 당장 기후 위기가 그렇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Don’t look up!”을 외친다. 심판이 영원히 다가오지 않을거야 라고 말하면서 쉽게 죄를 짓는다. 양심의 가책도 없어졌다. “위를 보지 마!”, “위를 볼 필요 없어!”라고 말하는 순간, 죄의식이 없다. 그래서 서슴없이 죄를 짓는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 17:30).
그러기에 위를 쳐다보며 살아야 한다. 우리 위에 계신 성령의 인도와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고 하신다. 초대교회 교부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인을 비둘기라고 불렀다. 당당히 세상에서 복음으로 평화를 증언하는 존재로서 그리스도인임을 밝힌 것이다.
교회 전통에서 일곱 마리 비둘기는 성령의 일곱 가지 선물을 의미한다. 무리 지어 있는 비둘기 떼는 신앙이 돈독한 그리스도인의 무리를 상징한다.
내 은사는 무엇인가? 바울은 많은 은사들 중에서도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한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그것은 사랑이며, 사랑은 가장 좋은 길을 보여준다(고전 13장).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라.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비결은 우리가 하나 되고, 마음으로 일치하며, 평화로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어 성령의 보호와 인도하심으로 살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