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교(曺命敎.1687.숙종 13∼1753.영조 29)
조선 영조(英祖) 때의 문신. 자 이보(彛甫), 호는 담운(淡雲), 본관은 창녕(昌寧). 판결사(判決事) 조하기(曺夏奇)의 아들. 사마시에 합격하고, 1719년(숙종 45) 문과에 급제, 영조(英祖) 때 정언(正言)으로 시정(施政) 9조를 건의하였으며, 다시 연해파수처(沿海把守處)에 대한 시상 방법이 목을 벤 수의 다과에 따르므로 오살(誤殺)의 폐단이 생길 우려가 있으매, 이를 시정할 것을 주청하였다.
사가누언(司諫院)⋅사헌부(司憲府)의 장을 역임하고, 이조참판을 거쳐 예문관 제학에 이르렀으며, 배천(白川)⋅성천(成川)⋅광주(廣州) 등의 수령을 거쳐 개성유수에 이르러 죽었다. 일찍이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덕행과 문학으로 이름을 떨쳤고, 또한 글씨에 능하였다.
- 이홍직 : <국사대사전>(백만사.1975) -
조선 영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녕, 자는 이보(彛甫), 호는 담운(淡雲)이고, 판결사 조하기(曺夏奇)의 아들이다. 1719년(숙종 45) 문과에 급제, 1721년(경종 1) 예문관검열로 재임 중에 신임사화로 파직되었다가 영조가 즉위 한 후 사간원정언이 되었으며 교리⋅병조참지⋅승정원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729년(영조 5) 친로(親老)로 자원하여 배천군수로 나갔다. 1735년(영조 11) 병조와 이조참의로 옮기고 대사성과 이듬해에 대사간 등을 지냈다. 1747년(영조 23) 대사헌과 한성부좌윤이 되고 뒤에 동지부사가 제수 되었는데 부임하지 않았다.
1751년(영조 27) 이조참판에 이어서 판결사에 임명되고 1753년(영조 29) 한성부좌윤과 예문관제학 등을 지냈다. 글씨에 능해서 영의정 최규서(崔奎瑞) 묘표, 예조판서 김시환(金始煥) 신도비 등의 많은 비문을 썼다.
【글씨】 <능가사사적비(楞伽寺事蹟碑)> <영의정최규서표(領議政崔奎瑞表)> <예조판서김시환비(禮曹判書金始煥碑)> <판돈녕부사조광원비(判敦寧府事趙光遠碑)> <공조참판조문수비(工曹參判曺文秀碑)>
▲조명교 글씨
[출처] 조선 문신 조명교(曺命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