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 그보다 여강(麗江)이 더욱 어울리는 고운 은빛 모랫밭을 따라 가는 동선은 자취조차 사라져 신륵사 진입로인지 의심스럽다. 사하촌의 아침은 요란스럽기 그지 없고 눈앞에 전개되는 死大江 사업의 전리품이 흉물로 방치되어 있다. 뭐가 그리 급하고 서둘러야 하는지 위정자들의 위대한 (?) 안목이 존경스러울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강가에 위치한 유일한 고찰의 자연스런 풍광을 송두리 채 유린한 작태로 인해 애써 눈을 돌려 발걸음을 재촉해야만 화가 삭을 것 같았다. "신륵사의 아름다움을 어찌 유학자라 하여 폐할 것인가"라며 노래했던 조선시대의 문인 김병기가 환생하면 이제 무어라 할 것인지.
편치 않던 마음이 와편으로 엮은 꽃담으로 인해 그나마 위로가 된다. 3차례나 다녀와도 눈에 담지 못했던 부도 1기도 보너스로 만났다.
신륵사의 창건시기는 불확실하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원효(元曉) 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 설에 대해 창건설화가 전하는데, 원효 대사의 꿈에 하얀 노인이 나타나 절터로 연못을 가리켰다.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잘 되지 않다가 7일 기도를 마치자 9마리의 용이 승천하고서야 절을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륵사의 절 이름과 관련한 전설도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신기한 미륵이 또는 나옹(懶翁) 선사가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것이다. 둘째, 고려 고종(高宗) 때 건너편 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때 인당(印塘) 대사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아무튼 신륵사의 절 이름과 관련해서, 신륵사는 용과 물에 관계가 깊은데, 이는 절이 여강 가에 있음으로 해서 생겨난 전설로 그 형성 시기는 신라 말엽이나 고려시기로 추정된다. 이러한 것은 신륵사 경내 동대(東臺) 위에 있는 전탑(塼塔)이 신라 또는 고려시기에 조성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탑 전체를 벽돌로 쌓은 전탑으로 인하여 신륵사는 "벽절(壁寺)"이라 불리기도 하였다....한국관광사찰정보
명부전. 고려 초 도원 대사가 처음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의 전각은 조선 후기에 지은 건물로 전측면 3칸, 1칸의 맞배지붕이다. 다른 전각과 달리 흰색 연등으로만 장식을 했다.
목조 지장삼존불을 비롯하여 시왕상, 판관, 녹사 등 모두 21위의 조각이 봉안되어 있다. 명부전 편액의 글씨는 17세기 중건 당시 쓴 글씨로 알려지고 있다.
조사당 중정의 향나무. 수령 500~600년, 나옹의 제자인 무학대사가 스승의 영정 앞에 정성으로 향 피우는 마음으로 심었다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
조사당. 보물 제180호. 신륵사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팔작지붕, 다포계 전각이다. 다른 전각과 달리 정면이 길게 한 칸이며 측면은 두 칸이지만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워 보인다. 정면에는 6짝으로 문을 구성하고 3면은 벽으로 마감하였다. 이색이 지은 '보제존자진당시병서(普濟尊者眞堂詩幷序)'에 1397년(우왕 5)에 진영당을 지었다고 나와 있으므로 고려시대에도 조사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학. 나옹. 지공
양주 회암사지 답사기에서 언급했던 글을 가져온다.
무학대사 부도탑. 쌍사자 석등...회암사지
무학대사. 삼기(三岐:합천군 삼가면)출신으로 속성은 박씨이고, 휘는 자초(自初), 당호는 계월헌(溪月軒)이다. 1344년(충혜왕 5) 소지(小止)에게 출가하였고,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 불법을 배우며 부도암에 머물다가 1346년(충목왕 2)『능엄경』을 읽다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진주 길상사ㆍ묘향산 금강굴 등을 유력하고, 1353년(공민왕 2) 연경으로 가서 지공에게 배웠으며, 이듬해 법천사에서 나옹을 처음 만난 후 무령 오대산ㆍ서산 영암사 등으로 나옹을 찾아가 수도하였다. 1356년 귀국하였으나, 나옹 또한 귀국하여 천성산 원효암에 머무르자 1359년(공민왕 8) 다시 찾아가 나옹이 전하는 불자(佛子)를 받았고, 1371년(공민왕 20)에는 송광사에서 나옹에게 의발(衣鉢)을 받기도 하였다. 1376년(우왕 2) 회암사의 중창이 끝난 후 나옹이 그를 수좌로 삼으려고 하자 사양하였고, 나옹이 입적하자 명산을 유력하며 자취를 감추고 왕사로 삼고자 하는 공양왕의 뜻을 사양하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왕사에 책봉되었고,'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傳拂心印 辯智無碍 扶宗樹敎 弘利普濟 都大禪師 妙嚴尊者)'라는 호를 받았으며, 태조의 명에 따라 회암사에 머물렀다. 1393년 지공과 나옹의 사리탑을 회암사에 건립하는 수탑(壽塔)을 세우고, 이듬해 용문사로 들어갔다가 1402년(태종 2) 다시 회암사에 잠시 머물다가 금강산 진불암을 거쳐 1405년 금강암에 거처하다가 입적하였다.
이성계의 꿈을 풀이하여 왕이 될 것을 예언했다거나, 한양 천도와 관련한 풍수설화 등에서 조선 태조와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조선 건국 직후에는 태조에게 유교와 불교의 작용이 다르지 않음과 백성의 어버이로서의 태도를 설법하기도 하였다.
지공선사 부도탑,비...회암사지
지공화상.인도의 승려로 법명은 제납박타(提納薄陀:禪賢)이다. 가섭(迦葉)으로부터 108세라고 한다. 인도의 동북지방 갠지즈강 유역에 위치했던 마가다국 만왕(滿王)의 왕자로 태어나 8세 때 중동부 인도에 위치한 나란다사 율현(律賢)에서 출가하였다. 19세때 남인도 능가국 길상산의 보명(普明)에게 의발(衣鉢)을 전해 받고 인도를 떠나 중국으로 왔다.
고려에서는 1326년 3월부터 1328년 9월까지 머물렀으며 이때의 기록은 고려시대의 기록이나 조선전기의 지리지에서 찾을 수 있다. 비록 오랜 기간이 아니지만 고려 불교계에서의 그의 족적은 상당하다. 그는 1326년 3월 개경의 감로사(甘露寺)에 도착하였고, 금강산에서 법기보살도량(法紀菩薩道場)을 개최하였는데 이는 원 황실을 위한 불교의식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강산을 유력한 뒤 개경 동쪽의 숭수사(崇壽寺)에 주석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계를 주었다. 1327년 10월에는 경원(慶原)을 저쳐 화산(華山)을 다녀 왔고, 이듬해 2월 통도사를 유력하였으며, 7월에는 연복정(演福亭)에서 계율을 설법했다.
이밖에 영산현(靈山縣)ㆍ장단현(長湍縣) 등 여러 곳에서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나옹에게 천축(天竺)의 나란다사와 그 지세가 같다고 말하여 회암사의 중창동기를 제시하고 있음은 회암사도 그가 유력한 곳임을 의미한다. 회암사는 그가 고려에서 가장 중요시하였던 사원이었고, 대표적 계승자인 나옹이 중창하고 그의 석비와 부도를 세웠다. 이곳은 조선전기에 가장 큰 사원으로 그의 법통을 이은 고승들이 주석하면서 불교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화장사에는 그의 소상(塑像)뿐 아니라 유물이 밀집되었고, 묘향산의 안심사에도 그의 부도가 있다. 회암사에 남북으로 반대방향으로 임진강과 한강의 중부지역에 각각 자리잡은 화장사와 신륵사는 그의 기념사원이거나 문도와 특별한 관계가 있었다.
원나라에 돌아가서는 대부대감 찰한첩목아(察罕帖木兒)의 부인인 고려인 김씨가 세운 법원사에 머물렀다가 귀화방장(歸化方丈)에서 입적하였다. 1367년 보암장노(普菴長老)에 의해 그의 입적이 고려에 알려졌고, 1370년 사도(司徒) 달예(達叡)가 유골을 받들고 고려에 오자 왕이 직접 지공의 두골을 머리에 이고 궁중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1327년(공민왕 21) 왕명으로 회암사에 사리탑을 세웠는데, 이색이 지은「서천제납박타존자부도명」이『목은집』에 전한다.
나옹ㆍ백운화상(白雲和尙) 경한(景閑)ㆍ무학 자초(無學 自初)ㆍ대지국사 지천(大智國師 智泉)등이 대표적인 그의 문도이다. 나옹은 왕사(王師)로 책종되었고, 나옹의 문도인 환암 혼수와 무학 자초는 조선개국을 전후하여 가장 영향력있는 고승이었다.
나옹선사 부도. 석등...회암사지
나옹선사. 영해 출신으로 성은 아씨(牙氏), 속명은 원혜(元惠)이며, 휘는 혜근(慧勤)이다. 나옹과 강월헌(江月軒)은 호이고, 시호는 선각(先覺)이다. 1340년(충혜왕 1) 친구의 죽음에 무상함을 느껴 공덕산 묘적암에서 요연(了然)선사에게 출가하였다. 또 1344년에는 수도하며 회암사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이곳에 우거하고 있던 일본 승려 석옹(石翁)에게 이를 인가받았다.
1347년(충목왕 3)에는 원나라에 가서 연경의 법원사에 머물며, 4년여를 지공에게 수학하였다. 1350년(충정왕 2) 평강의 휴휴암ㆍ자선사를 유력하였고, 이듬해 명주 모타낙가산에서의 관음보살 친견, 육왕사에서의 석가모니 예배, 승려 무상(無相)ㆍ고목영(枯木榮)과의 법론 토론, 1352년 복룡산의 천암장(千巖長) 방문 등 수도에 정진하였다. 원의 순제(順帝)에 의해 연경 광제선사의 주지로 임명되어 개당(開堂)법회를 열고 금란가사를 하사받았으나 주지의 소임을 내놓고 다시 지공을 찾아 보고 1358년(공민왕 8)에 귀국하였다.
양주 회암사지
오대산 상두암에 은거했다가 공민왕의 청으로 잠시 신광사에 머물며 후학을 지도하였다. 공부선(功夫選)의 시관을 역임하고 구월산ㆍ용문산ㆍ원적산ㆍ금강산 등을 순력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어 1371년에는 왕에게 금란가사ㆍ내외법복ㆍ바리 등을 하사받고'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 보제존자(王師 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 普濟尊者)'에 봉해졌다. 이후 잠시 송광사에 머물다가 다시 회암사주지가 되어 절을 중창하고 1376년(우왕 2)에는 문수회(文殊會)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왕명에 따라 밀양의 영원사로 가던 중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철저한 불이(不二)사상의 토대에서 선(禪)을 이해했고, 전통적인 간화선(看話禪)을 기본으로 임제종의 선풍을 도입하여 고려말 침체된 불교계를 일신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적극적인 사회참여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보살도를 강조하기 위해 육대서원(六大誓願)을 세우기도 했다.
신륵사의 나옹 부도비.부도.석등. 양주 회암사에서 왕명으로 밀양 영원사로 향하는 길에 신륵사에서 입적하여 다비후 신륵사와 회암사에 사리탑을 세웠다.
보제존자의 석종 석종비. 나옹선사가 입적하자 각신스님이 석종을 만들고 각주스님이 비를 세울 좋은 돌을 구하여 이색에게 글을 쓰도록 청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지대석과 3단의 장방형 대석 위에 비신을 얹었다. 비신은 대리석을 사용하였으며 양 옆에 화강암 기둥을 세웠다. 비신 위에는 공포와 기와골을 조각한 옥개석을 놓았다. 비문의 글씨는 한수(韓修)의 작품으로 해서체다.
이색이 비문을 지은 것도 재미있다. "이색이 신륵사와 관련 있는 것은 아버지 이곡이 발원하여 조성하려 했던 대장경을 완성하여 절에 봉안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절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흔히 왕명으로 나옹 선사의 비문을 지으면서부터라고 하나 이 이전에 이미 그는 선사가 살아있을 때 절에서 교류하기도 했으며 더욱이 아버지가 일찍이 신륵사 근처 가정리에 머물렀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절에서 1380년부터 1383년에 이르기까지 대장경을 출간하였고, 1382년에는 2층의 장경각을 지어 이 대장경을 봉안하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의 깊은 불심을 살펴볼 수 있다."...한국사찰관광정보
단층 기단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석종형 부도이다.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고 앞쪽과 양 옆으로 계단을 두었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가 솟아 있다. 김제 금산사와 더불어 석종형 부도의 시원으로 회자되기도 한다.물론 울산 학성공원의 십이지 부도는 신라하대의 석종형 부도로 알려져 있다..
8각 석등으로,8각 지대석 위에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에는 표면 전체에 꽃무늬를 가득 새겨 장식하고 있다. 화사석은 각 면에 무지개 모양의 창을 낸 후, 나머지 공간에 비천상과 용을조각했다. 지붕돌은 두꺼우나 여덟 귀퉁이에서의 반전이 경쾌하다. 고려 우왕 5년(1379) 보제존자석종 및 석비와 함께 세워졌다.
밀양...영원사지
나옹선사가 주석하려했던 밀양의 영원사. 지금은 폐사지로 남아 있다.
신륵사 사적에서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분이 계신다. 정희왕후(1418∼1483)는 조선 제7대 임금 세조의 왕비이다. 문신이었던 파평부원군 윤번(1384∼1448)의 딸로 1428년(세종 10) 홍주에서 가례를 행하였다. 1455년(세조 1)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예종이 14세로 제8대 임금에 즉위하였으나 왕위에 오른 지 1년 2개월만에 16세로 요절하였다. 예종의 사후에도 정희왕후는 국가의 운명에 깊이 관여하여 한명회?신숙주 등을 중용하면서 정치를 맡았다. 정희왕후의 대리정치는 예종 다음으로 제9대 성종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성종 7년(1476)까지 계속되었다. 1483년(성종 14)에 나이 66세로 죽었다. 자식으로는 덕종, 예종, 그리고 의숙공주를 두었으며 경기도 광릉(光陵)에 안장되었다.
정희왕후는 신륵사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 다. 즉 세종의 영릉(英陵)을 지금의 위치인 여주로 옮기고 신륵사를 그 원찰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이름을 바꾸었던 것이다. 이 무렵 200여 칸의 전각을 새로 짓는 등 대규모의 중창을 이룩하였다. 이로부터 절은 더욱 사세가 확장되었고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이 부(府)에서 주(州)로 승격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삼성각
극락전은 불사중
신륵사 극락보전 앞 다층탑."기단을 2단으로 마련한 후, 그 위로 여러 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조형방법은 전혀 달라서,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치켜올려져 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바닥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조각은 형식적이나, 특이하게도 물결무늬를 돋을새김해 두어 눈길을 끈다. 아래층 기단의 맨윗돌을 두껍게 얹어놓아 탑의 안정감을 높이고 있으며,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 꽃 모양을 새긴 기둥을 두고 각 면마다 용무늬를 깊이 새겼다.
각 부분 아래에 괴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일부분 남기고 있으나, 세부적인 조각양식 등에서 고려 양식을 벗어나려는 여러가지 표현이 돋보인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한층 우아하게 보이게끔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원각사지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돌의 재질, 조각양식이 비슷하다. 신륵사는 조선 성종 3년(1472)에 대규모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이 탑도 이 때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김병기 공덕비. 철종 9년 순조비 순원왕후의 발원으로 친정이자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이었던 호조판서 김병기가 신륵사를 중수하였다. 누구의 원에 의해서 세워진 공덕비인지는 모르지만 세종의 원찰이었던 신륵사가 한 집안의 원찰로 변해버린 계기가 되지는 않았는지.
대장비각 "이 비석은 장방형(長方形)의 지대석(地臺石) 위에 대석(臺石)을 놓고 비좌(碑座)를 마련하여 장방형 홈을 파서 대리석 비신(碑身)을 꽂았으며 그 좌·우에 석주(石柱)를 세워 지주(支柱)를 삼고 개석(蓋石)을 덮은 것이다. 이렇듯 양지주를 시설한 형식은 고려말(高麗末)에 보이는 것으로 주목된다. 대석에는 복련(覆蓮)과 귀꽃문 등으로 장식하고 개석의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게 했다. 이곳 신륵사는 원래 대장각(大藏閣)이 있어서 고려말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승려 나옹(懶翁)의 문하생(門下生)들이 발원하여 경률론(經律論)을 만들어서 수장(收藏)하던 집이었는데, 이 비는 대장각의 조성에 따른 제반 기록을 새긴 석비로서 고려 우왕(禑王) 9년(1383)에 세워졌다. 비문은 이숭인(李崇仁)이 짓고 권주(權鑄)가 썼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명문(銘文)이 많이 마멸되어 판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문화재청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있다. 조선 영조 2년(1726)을 뜻하지만 이 때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상태가 어지럽혀지고,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여진다.
금당과 동떨어진 강변의 석탑. 대체적으로 비보석탑으로 생각되지만 '신륵사동대탑수리비(神勒寺東臺塔修理碑)’ 기록에 의하면 나옹선사의 화장지에 세워진 석탑이라고 한다.
넓은 1매 지대석의 호각형 2단의 기단받침을 새겼다. 기단에는 양우주와 탱주를 모각했다. 갑석에는 복련을 표현하였고 상부에는 2단 탑신 받침을 두었다.탑신석에는 양 우주가 모각되었는데, 1층탑신에 비해 2층은 급격히 체감되었다. 현재 3층 탑신석과 상륜부는 결실됐다. 낙수면 경사가 급하지만 짧다.
전탑 가까이에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누각이 있는데 본래 나옹선사가 입적한 후 화장터의 석탑 가까이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1972년의 대홍수로 떠내려가고 이후 탑보다 조금 아래쪽인 지금의 위치에 철근 콘크리트로 다시 세웠다. 강월헌이라는 이름은 나옹의 당호(堂號)로 그를 추모하여 누각을 세운 것이라 생각된다.
이색은 나옹의 비문에서, '보제의 몸은 이미 화장을 하였건만 강물과 달은 지난날과 다름이 없구나. 이제 신륵이 장강에 임하여 있고 석종이 거기에 우뚝 솟아 있어 달이 뜨면 그림자가 강에 거꾸로 걸려있고 물빛은 등불빛 같고, 무럭무럭 타오르는 향기만 그 속에 엉겼으니 이른바 강월헌이로다. 비록 한없는 세월이 흐른다 해도 마치 보제가 살아있는 것만 같구나'하고 읊었다.
밤에 신륵사 앞에다 배를 대고 동대에 오르다[夜泊神勒寺登東臺]...정다산 밤에 홀로 동대 탑에 올라 / 獨夜東臺塔
그나저나 강물은 신륵사를 범람하지 않고 흘러야 할텐데... 2011.0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