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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학자 儒賢 스크랩 조선후기 여성성리학자 임윤지당을 만나다
이장희 추천 0 조회 124 17.12.23 15:20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지난주에 우연하게 원주에서 조선후기 여성 성리학자 임윤지당을 만낙 되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성리학의 대가  율곡 이이는 잘알고 있지만 조선후기에 유일한 여성 성리학자가 잇었다는것에 다시한번 관심을 갔게되었다

 

 

 

 

*임윤지당 찬양비

 

 

 

조선시대 여성 가운데서 학문으로 이름이 있었던 이들을 들자면 높은수준의 성리학 저술을 남겼던 임윤지당과 강정일당을 비롯하여 "음식지마방"을 지은 정부인 장씨 "태교신기"를 지은 이사주당,"교합총서를 지은 이방허각등을 거명할 수 있다

 

 

 

 

*임윤지당 기념관 

 

 

 

정부인장씨,이사주당이병허각등은 여성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게가 잇는 "가정생활백과류"의 저술등을 남겼고 임윤지당과 강정일등은 성리학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 

 

 

 

 

*임윤지당친필

 

 

 

임윤지당은 철학적 탐구를 통하여 여성들이 본질적으로 남성과 다를봐 없으며 학문과 수양을 통하여 요순

 과같은 성인의 경지에 이룰수있는 강한 자아의식을 표시하였다

 

 

 

 

*임윤지당이 오빠에게 보낸 편지

 

 

 

임윤지당과 강정일당은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연구하고 수련한 철학자엿다 그들은 성리학의 본질적 원리안에서 남녀평등의 이념을 찿아내고 최고의 가치를 구현해 나가기위해 평생을 수양하고 실천하엿다 따라서 이들은 조선후기 유학사나 여성사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잇다

 

 

 

 

 

 

임윤지당은 풍천임씨로 부친은 함흥참판을 지낸 노은 임적이다 모친은 파평윤씨로 호저정량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증직된 윤부의 딸이다 그녀는 조선후기 성리학의 대가중 한사람인 녹문 임성주의 누이이며 운호임전주의 누님이었다 윤지당은 오빠 임성주가 지어 준 당호이다

 

 

 

 

임윤지당을 인터넷배과사전에서 찿아보니 다음과같이 저술하고 있다

 

 

임윤지당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 여성의 배움과 사회 활동이 원천봉쇄되었던 조선시대 18세기 중반, 홀연히 등장한 임윤지당은 여류 성리학자로서 뚜렷하게 학문적 성취를 이루어낸 희귀한 인물이다. 유교 경전을 새롭게 해석하고 중국의 사서에 통달했던 그녀에 대하여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였던 동생 임정주는 ‘규중의 도학(道學)이요, 여인들 중의 군자(君子)’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당호 윤지당에 담긴 뜻은 올곧은 성리학자의 면모를 보이다남편을 잃고 청상과부가 되다양자를 잃고 슬픔에 잠기다 뛰어난 학문으로 세상을 일깨우다한국 여류지성사에 큰 자취를 남기다 조선시대 반가의 여성들은 규중에 갇힌 채 집안 살림과 자녀양육을 도맡았고, 사회 활동이나 학문과는 거리가 먼 존재로 치부되었다. 일부 깨어있는 집안의 여성이라도 언문이나 기초한자를 익힌 다음 《내훈》이나 《여사서》 등 초보적인
여성교육서를 통해 현모양처의 부덕을 닦는 것이 고작이었다

 

 

 

 

 

 


18세기경부터 이런 암울한 상황에 변화의 조짐이 일어났다. 상류층 여성들 가운데 남유의당, 이사주당,
서영수합처럼 시문에 소양을 쌓고 문학적인 저술을 남긴 여성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의 작품은 개인적인 소회나 가정사에 머물렀을 뿐 수준 높은 학문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때 등장한 임윤지당은 여성 성리학자로서 형이상학적 철학과 역사를 통찰했던 매우 희귀한 존재였다.

 

 

 

당호 윤지당에 담긴 뜻은?
임윤지당의 학문과 수양의 경지는 성리학자인 오빠 임성주로부터 “누이는 우리 가문이 낳은
태임이나 태사이다. 정자의 따님은 대수롭지 않다.”라는 극찬을 받을 만큼 높은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그것은 날이 더워 부채질하는 조카들에게 “정신을 집중해 책을 읽으면 가슴 속에서 자연히 서늘한 기운이 생기는 데 어찌 부채질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말할 정도의 집중력과, 그녀가 〈극기복례위인설〉에서 표현한 것처럼 남이 한 번 노력하면 나는 천 번 노력한다는 마음가짐으로 학문에 몰두한 결과였다.

 

 

 

 

 

 

오늘날 조선의 여류 명사들 가운데 신사임당이 시·서·화의 달인이라면 임윤지당은 학문으로써 당대의 최고봉에 이르렀다고 평가받고 있다. ‘윤지당(允摯堂)’이라는 그녀의 당호도 신사임당과 유래가 비슷하다. 사임당의 사임(師任)에는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과 부인 태사(太姒)를 본받으라는 뜻이 담겨있는데, 윤지당의 윤(允)과 지(摯)는 태임과 태사의 친정을 뜻한다. 그녀의 당호에 대한 유래는 동생 임정주가 다음과 같이 밝혔다 윤지당은 누님이 어렸을 때 우리 중형이 부른 것이다. 주자의 윤신지(允莘摯)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믿음이 두텁고 책임에 정성을 다한다는 뜻이다. 우리 이종형 한정당 송공이 손수 도장을 새겨 주면서부터 집안에서 윤지당이라고 불렀다. 올곧은 성리학자의 면모를 보이다

 

 

 

 

 

 


임윤지당(任允摯堂)은 1721년(경종 1년) 함흥판관을 지낸 아버지 임적과 어머니 파평 윤씨의
5남 2녀 중에 맏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천이다. 아버지 임적은 서울에서 동몽교관과 장원서 별제로 재임하다가 그해 양성 현감으로 부임했으므로 그녀의 출생지가 서울인지 양성인지는 불분명하다윤지당의 큰오빠 임명주는 사간원 정언을 지냈고, 둘째오빠 임성주와 막내동생 임정주는 성리학자로서 명성을 날렸다. 셋째 오빠 임경주는 문장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지만 28세의 나이로 형제들 가운데 제일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녀보다 세 살 어린 남동생 임병주는 33세 때 형 임성주의 임지인 임실관아에 갔다가 병사했다윤지당은 다섯 살 때까지 양성에서 자라다가 1725년(영조 즉위년) 함흥판관으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함흥으로 이사했다. 그로부터 2년 뒤 아버지가 사직하자 서울로 돌아와 송현방의 셋집에서 살았다. 1728년(영조 4년) 아버지가 병사하자 이듬해 온 가족이 함께 청주 근처의 옥화라는 산촌으로 이사했다

 

 

 

 

 


그때부터 윤지당은 과거 공부에 몰두하던 큰오빠 임성주로부터 성리학을 배웠다. 임성주는 조선성리학 6대가에 꼽힐 정도로 뛰어난 성리학자였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윤지당은 곧 사서삼경에 통달하여 형제들과 학문을 강론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당시 그녀는 남성과 여성은 현실에 처한 입장만 다를 뿐 타고난 본성은 다르지 않다고 설파했고, 역대의 정치가나 학자를 호되게 비판하는 등 학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이런 누이에 대하여 오빠들이 “네가 대장부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탄식했을 정도였다

 

 

 

 

 


윤지당은 학문뿐만 아니라 예법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풍천 임씨 가문에는 매년 설날과 동지,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아침 어른들에게 문안드리는 행사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윤지당이 매번 앞에 나아가 예절과 수신에 관한 훈계서를 낭독했다. 그 뒤를 이어서 집안의 남녀 노비들이 마당에 정렬한 다음 상전들에게 절을 올리고 역시 훈계서를 읽었다고 한다. 그 무렵 윤지당은 뛰어난 학문을 지니고 있었지만 남들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훗날 동생 임정주는 그녀의 행적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인용문
유인(孺人)은 단정하고 한결같았으며 성실하고 장엄했다. 어릴 때부터 빠른 말이나
황급한 거동이 없었으며 천성이 총명하고 영리했다. 형제들을 따라 경전과 역사를 공부했고, 때론 토론을 제기했는데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말이 많았다. 둘째 형님께서 기특히 여겨 《효경》·《열녀전》·《소학》 등을 가르쳤는데 매우 기뻐했다. 낮에는 종일토록 여성의 일을 다 하고 밤중이 되면 소리를 낮춰 책을 읽었다. 뜻이 목소리를 따르는 듯하고 정신이 책장을 뚫을 듯했다. 하지만 학식을 깊이 감춰 비운 듯 했으므로 친척들 중에도 그런 사실을 아는 이가 드물었다. 윤지당이 17세 때인 1737년(영조 13년)에 가족들은 청주 옥화의 힘겨운 생활을 청산하고 일가붙이와 선영이 있는 여주로 이사했다. 당시 여섯 살 아래인 동생 임정주가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방탕한 나날을 보내자 윤지당은 그를 조용히 부른 다음 “왜 방심한 마음을 거두지 않고 두레박처럼 오르락내리락 놀러만 다니느냐?”라고 꾸짖었다. 그녀의 지속적인 가르침에 감화된 임정주는 결국 마음을 바로잡고 학문에 몰두하여 대성할 수 있었다.남편을 잃고 청상과부가 되다

 

 

 

 

 

 

 
임윤지당은 여주에 머문 지 2년 뒤인 1739년(영조 15년) 19세의 나이로 한 살 어린 원주의 선비 신광유와 혼인했다. 시가는 당대의 명문 평산 신씨 집안으로 영의정을 지낸 신중만, 신중회 형제와 일가였다. 그녀가 시댁에 들어가 사당을 예를 표할 때 법도에 한 치도 어긋나는 점이 없었으므로 시숙부였던 선릉참봉 신저는 이렇게 감탄했다나이도 어리고 체구도 작은데 처신을 보니 의젓함이 태산교악과 같다하지만 그녀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아이를 하나 낳았지만 일찍 죽었고 혼인한 지 8년 뒤인 1747년(영조 23년) 남편 신광유가 27세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졸지에 자식 하나 없이 청상과부가 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뒤 윤지당은 남편이 필사하다 중지한 《시경》과 《초사》를 이어 쓰면서 단장의 아픔을
달랬다. 38세 때인 1758년(영조 34년) 《시경》의 필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4월 완성한 그녀는 발문에 남편에 대한 애모의 정과 자식을 갖지 못한 쓸쓸한 심경을 이렇게 묘사했다아! 이것은 남편이 생전에 필사를 채 끝내지 못한 책이다. 《상서》·《시경》·《초사》·《잡기》가 있다. 《시경》은 반쯤 필사했는데 서체가 매우 특별하다. 오랫동안 묵은 종이 사이에 뒤섞여 있었다. 만약 자식이 있었다면 그분의 뜻을 이어 책자를 완성했을 것이다. 이제 자식이 없으니 완성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대로 두었다간 오래지 않아 헌 종이에 섞여 항아리 덮는 폐지가 되기 십상이다. 내가 순절하지도 못한 부녀자의 처지에서 남편이 필사하던 책의 뒤를 이어 쓰는 것은 외람된 일이다.

 

 

 

하지만 남편이 남긴 것이라곤 이것밖에 없다. 나의 쇠잔한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책으로 완성하지 못하면 그분의 흔적이 점차 사라질 것이다. 양자를 잃고 슬픔에 잠기다임윤지당은 남편이 죽은 뒤 시동생 형제들과 한 집안에서 살았다. 남편 신광유는 일찍이 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갔으므로 그녀는 생가와 양가의 두 시어머니를 모시며 효성을 다했다. 당시 그녀는 학문과 문장을 감추고 여성의 직분에 충실했지만 송곳은 드러나지 않아도 주머니를 뚫듯이 일가친척과 근동에 글을 잘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과연 그녀는 38세 때 큰오빠 임명주가 세상을 떠나자 한문으로 제문을 지어 자신의 문장 실력을 드러냈다.윤지당은 40세 이후 신광우의 큰아들 재준을 양자로 삼고 젖 뗄 무렵부터 데려다 길렀다. 그런데 친자식처럼 사랑으로 양육한 재준이 28세의 한창 나이에 1남 2녀를 남기고 세상을 등지자 그녀는 비통함을 숨기지 못했다. 1789년(정조 13년) 삭망제 때 쓴 〈아들 재준에게 올린 제문(祭亡兒在竣文)〉에는 그녀의 깊은 절망과 슬픔이 담겨있다

 

 

 

 

내가 너의 빈소를 거두기 전에 조석으로 애도하면서 원통한 심정을 조금이나마 풀어볼까 했더니
눈먼 것이 심하여 거의 소경이 되었다. 이 때문에 완전한 소경이 되면 성인의 가르침에 죄를 얻게 될 것이다. 또 훗날 지하에서 너를 만나도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까 두려워 뜻대로 하지 못하니, 이 또한 비통하다. ……네가 자주 꿈에 나타나 이 노모의 비통하고 한 많은 심경을 만에 하나라도 풀어주겠느냐? 아, 애통하다뛰어난 학문으로 세상을 일깨우다

 

 

 

 

 

 

임윤지당이 남긴 《윤지당유고》에는 조선 후기의 저명한 성리학자들의 수준에 필적하는 학문적 성취가 담겨있다. 그녀는 〈이기심성설〉과 〈사단칠정인심도심설〉이라는 두 편의 글에서 본체론, 심성론 등 성리학적 이론 방면의 중요한 주제들을 빈틈없이 분석하고 있다그녀는 평소 남녀를 불문하고 사람의 심성이 천성적으로 순수하고 선한데 외부의 자극으로 인해 착한 마음이 흐트러져 본래의 모습을 잃게 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를 제어하기 위하여 욕심을 억제하고 예법을 익혀 바른 인격을 완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쓴 ‘비수에 새기는 명문(匕劍銘)’에는 이런 의식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사람의 성품은 모두가 선한데 요·순·주공·공자와 같은 성인이 되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사람의 사욕이 본래의 성품을 해치기 때문이다. 능히 사욕을 제재할 수만 있다면 자연의 순리가 저절로 보존되어 우리도 그들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 안자가 말하기를 ‘순임금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실천하기만 하면 그와 같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실천이란 자연의 순리와 사람의 사욕이 만나는 경계에서 밝게 분별하고 독실하게 행하는 것이다.
성품이 세심했던 윤지당은 어린 시절부터 지은 산문을 비롯하여 많은 글을 정서해 두고 있었다. 65세 때인
1785년에는 문집 간행을 위해 자신의 글을 간추려 동생 임정주에게 보내기도 했다. 이때 그녀는 편지에서 ‘나는 어려서부터 성리의 학문이 있음을 알았다. 조금 자라서는 고기 맛이 입을 즐겁게 하듯 학문을 좋아하게 되어 그만두려 해도 할 수 없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원래 그녀가 정리한 글은 40편이었는데 문집을 간행하는 과정에서 10편은 삭제하고 만년에 쓴 5편을 추가하여 총 35편이 되었다. 윤지당은 미리 써놓은 서문에서 “비록 식견이 천박하고 문장이 엉성하여 후세에 남길만한 투철한 말이나 오묘한 해석은 없지만, 내가 죽은 후에 장독이나 덮는 종이가 된다면 또한 비감한 일이 될 것이다.”라고 겸양했지만 내심 자신의 글에 대한 애착과 긍지가 드높았다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일화를 남긴 전국시대 진나라의 선비 예양을 헛되이 목숨을 바친 충직한 필부로 묘사했고, 《자치통감》을 쓴 사마광이 유비의 촉한 대신 조조의 북위를 정통으로 보는 시각을 조소했다. 북송의 개혁정치가 왕안석에 대해서는 정치의 근본을 소홀히 하고 지엽에만 치중하여, 재화의 이득만을 생각하고 부국강병만을 꾀했다고 비판했다. 그녀가 성리학에 있어서 매우 보수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한국 여류지성사에 큰 자취를 남기다

 

 

 

 

 

 


임윤지당의 시동생 신광우는 학문과 경륜에 뛰어나 청요직인 사간원 대사간을 지낸 인물이었는데 평소 형수의 드높은 학식과 고상한 인품을 몹시 존경했다. 그는 만년에 윤지당의 모습을 이렇게 회고했다.

 

 

 

 

 

인용문
유인께서는 부인의 덕성과 용모와 일에 있어 하나도 완비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성품은
장중하고 단정했으며 말할 때나 웃을 때도 경망스럽지 않았다. ……시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유인도 또한 늙었을 때였다. 간혹 집안일을 하다가 여가가 나면 밤이 깊은 뒤에 보자기에 싸 두었던 경전을 펴놓고 낮은 목소리로 읽었다. 그 때 창밖으로 등불이 형형하게 비치는 것을 보고 비로소 유인의 학문에 남모르는 공부가 있음을 알았다. 형제들이 매번 다짐하기를, ‘부인으로서도 저와 같이 부지런히 공부하는데 우리들은 마땅히 어떻게 해야겠는가!’ 했다.

 

 

 

 

 


이런 시동생의 외경에도 불구하고 임윤지당의 만년은 쓸쓸했다. 친정어머니와 형제들이 연이어 죽더니
1788년에는 학문의 스승이었던 둘째오빠 임성주까지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실의에 빠진 윤지당은 그로부터 5년 뒤인 1793년(정조 17년) 5월 14일, 원주의 시가에서 73세를 일기로 이승을 등졌다.

 

 

 

 

당시 그녀는 가쁜 숨을 내쉬면서 주위 사람에게 “내가 평생 시를 지어본 적이 없는데, 지금 정신이
혼몽한데 갑자기 세 구절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임종하던 사람들이 그 내용을 묻자 “오직 슬픔만 더할 뿐이니 들은들 무슨 이득이 되겠느냐?” 하고 알려주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는 며느리에게 “집안을 잘 단속하고 남녀의 출입을 엄하게 삼가도록 하라.”고 말한 뒤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보수적인 성리학자답게 그녀는 임종하면서도 집안 부녀자들의 행실을 엄하게 단속했던 것이다.임윤지당이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지난 1796년(정조 20년)에 임정주와 신광우는 그녀가 남긴 기록을
정리하여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라는 제호로 간행했다. 남녀 차별이 엄연했던 조선시대였지만 평소 그녀를 존경했던 양가 동생들의 마음이 합쳐진 결과였다.유고를 간행한 그 해에 동생 임정주가 죽고, 2년 뒤인 1798년에는 시동생 신광우도 죽었다. 그들의 최후의 유업이 윤지당의 학문을 후세에 전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임정주는 유고의 발문에서 유고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아! 부인들의 저술이 예로부터 얼마나 많았는가. 그러나 의미와 이치를 분석한 변론과, 청품과 천명을 논한 오묘함과, 경의(經義)와 성리(性理)에 대한 담론은 마치 차 마시고 밥 먹듯이 자유로웠다. 이와 같이 집대성한 일은 아마도 문자가 생긴 이래 찾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를 두고 천지간에 없을 수 없는 글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우연한 기회에 조선후기 여성 성리학자를 처음알게되어 기쁘고 숨겨준 임윤지당의 역사적 기록이 후대에 널리 전파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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