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물
류미영
.하늘거리는 깃털처럼 흩날리는 눈이 차창을 살포시 두드렸다가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전기 불에 반사된 눈은 어지럽게 허공을 난무하고 있다. 문득 어릴 적 내리는 눈을 보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예기했던 시절이 그리워진다. 소복이 쌓인 눈을 보고 흰쌀가루였으면, 돈이었으면...... 저마다 생각하는 것이 달랐지만 모두들 나름대로 희망을 품었다.
얼마 전 병실에서 만난 한 고등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병실은 마무리하는 한해와 새로이 맞이하는 해에 대한 아쉬움과 설렘으로 모두가 희망에 차 보였다. 그중에 그 학생은 유독 눈길이 갔다. 사지에 붕대를 감고도 연신 벙글거리는 모습에서 평화가 따로 없음을 느꼈다. 병실을 나오며 그 학생에 관해 전해들은 이야기는 더욱 가슴이 짠하게 했다.
부모님이 모두 난치병을 앓고 계시는 집안에서 오로지 희망이 그 아이였다. 혼자서 어렵게 공부하는 고등학교 3학년생이었는데, 농구 실력이 뛰어나서 수시전형으로 대학입학이 합격된 상태였다고 했다. 병상으로 일상을 보내고 있던 부모는 아들에게 더 많은 희망을 가지게 되었고, 그 희망이 병과 싸우는 데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의 희망이었던 아들이 어느 날 돌발 사고로 온몸에 부상을 입고 병원에서 꼼짝을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자신 있던 운동도 포기해야 했고 이제 얼마만 지나면 대학생이 된다는 꿈에 부풀었던 모든 희망을 저버리고 두 다리를 천정에 매달아 똑바로 위만 쳐다보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보는 이들이 너무나 측은하여 조심스럽게 위로의 말을 걸면 자신은 괜찮다고 하면서, 몸이 나으면 이제 다른 일을 찾아보겠다고 장래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의 걱정과 안타까운 맘을 읽어서일까? 아니면 어려운 환경을 헤쳐 나가는 방법을 터득해서일까? 오히려 주위의 사람들이 그를 보면 희망을 얻는 기분이었다. 간호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종교 단체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고 있는 형편이었다. 절박한 상황, 낭떠러지에 다다른 느낌을 가질만도 하련만 전혀 그런 내색을 내지 않고 두 달 동안의 병원 생활을 밝게 웃으며 지내고 있다.
깃털처럼 흩날리는 눈이 이젠 제법 함박꽃이 되어 버렸다,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책상에 붙어 있어야 하는 고등학생인 아들이 눈을 맞아 감기라도 들까 걱정이 되어 학교까지 올라갔다. 정류장에 오려면 꽤 긴 거리를 눈에 젖어 와야 한다는 생각에 핀잔을 들을 각오를 하고 운동장까지 차를 몰고 갔다. 제법 눈이 덩이가 되어 떨어졌다. 나뭇가지에는 눈꽃이 피고 지붕은 하얗게 단장을 하고 학교 운동장은 하얀 카페트를 깔았다.
아이를 데리고 내려오는 경사진 길은 어느새 완전한 빙판이 되어버렸다. 길이 미끄러워 운전하는데 사고가 날까 등골에 땀이 흘렀다. 내려가자니 잘못하면 누군가를 다치게 할 것 같아 아예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만약 여기서 내가 핸들을 잘못 돌린다면, 하고 생각을 하니 더 내려갈 수가 없었다. 꼼짝을 못하고 지나가는 학생들만 한참 쳐다보고 있었다.
여태껏 아이들을 보아왔지만 그 순간처럼 모습이 귀하게 여겨진 적은 없었다. 모두가 가정에서 희망덩이가 아닌가? 실수로 사고를 내면 가족들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줄까 생각하니, 꼼짝할 수가 없었다. 오금이 저려오고 불과 몇 미터 되지 않는 길이 십 리는 되어 보인다. 엄마는 괜히 오늘 같은 날 차를 학교에 몰고 와 이 고생을 하느냐고 아들의 핀잔이 대단했다.
힘겨운 투병 중에도 희망을 갖고 다른 사람에게 웃음을 베풀던 그 학생도 자신의 어려운 고비를 이런 마음으로 넘기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힘겹게 그 길을 빠져나왔더니 아주 후련하다.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학생들은 모처럼 만에 내리는 눈에 기분이 좋아서인지 서로 눈을 뭉쳐 던지면서 눈싸움을 한다. 좁은 언덕길에서 미끄럼을 타는 아이도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던 조금 전의 힘들었던 시간을 보상이라도 받고 싶은지 한데 엉겨 신나게 장난을 치고 있었다.
물이 다 내려간 펌프를 살리는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떠오른다. 허드렛물이라도 한 바가지만 퍼서 펌프를 자아주면 콸콸 시원한 물이 쏟아지는 것이 어릴 적엔 무척 신기했다. 어떤 요술이 있기에 물 한 바가지만 부으면 그렇듯 물이 펑펑 쏟아질까? 아들이 이제 고등학교 생활 막바지에 다다랐다.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있으므로 힘찬 물줄기를 뿜어낼 수 있듯 아들에게도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있어 대학 입시와 씨름하는 이 순간을 슬기롭게 이겨나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