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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에 모인 사람들
사도행전 1:6-14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았지만 지난날처럼 예수님이 함께 계시지 않으시므로 제자들은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로 돌아갔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찾아가셔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흩어진 제자들은 다시 돌아와 감람산에 모였습니다(4).
4절에 “사도와 함께 모이사”란 말씀에 ‘제자’와 ‘사도’는 같은 의미이면서 다릅니다. ‘제자’란 넓은 의미로 예수님은 따르던 사람들을 의미하지만 ‘사도’란 예수님이 직접 뽑아 세운 열두 제자들을 ‘사도’라고 합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란 말씀은 가룟 유다는 이미 배가 터져 죽었으므로 열한명의 사도들이 모였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함께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흩어졌던 제자들을 다시 감람산으로 불러 모아 매우 중요한 부탁의 말씀을 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늘로 올려져 가시는 것을 구름이 가리어 더 이상 볼 수 없을 때 흰옷을 입은 두 천사가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고 오시리라’(11)고 말해 주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감람산에서 사도들을 불러 모아 함께 하시며 분부하신 말씀과 승천과 다시 오실 것이라는 천사들의 말은 기독교의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재림을 믿을 수 있도록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신 것입니다. 만약 모인 사도들이 없는데서 승천하셨다면 기독교는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을 믿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4)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은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눅24:49)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셔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보내실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음에도 제자들은 엉뚱하게도“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이까”(6)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처음부터 가졌던 욕망이라고 봅니다. 제자들 뿐 아니라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떡으로 배부르게 먹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던 것에서부터 세베대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오른 편에 하나는 주의 왼편에 앉게 해 달라’(마20:21)고 말했습니다. 제자들까지도 이러한 욕망으로 양보할 수 없는 간절한 소원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오늘에 예수를 믿는 많은 사람들의 욕망이기도 합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이 말은 ‘이 나라에 혁명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독립하실 때가 지금입니까?’ ‘로마 사람들의 제국주의적 정치 하에서 짓밟히며 고생하는 이 약소민족의 서러움을 언제 씻을 것입니까?’ ‘주께서 이 나라를 회복하시는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라는 질문이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볼 것은 ‘주께서’라는 주어입니다. ‘주께서 회복하실 때가 이때입니까?’ ‘주께서 하실 때가 이때입니까?’ 라는 물음입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그것은 네가 알 바 아니요 너희가 내 증인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나를 위해서 어떻게 하시느냐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주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렇게 관심의 방향을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해 주실 것인가 하고 묻는 사람에게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생각을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계속 품었던 본래의 소원을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어느 목사님에게 무남독녀가 있었습니다. 사랑스런 딸 하나를 지나치게 사랑했습니다. 심방을 가면 교인들이 사탕이나 과자를 딸에게 주라고 싸주면 그것을 가지고 와서 딸에게 주면 딸은 좋아라 합니다. 그러다보니 좋지 않은 버릇이 생겨서 아버지가 들어오면 아버지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가방부터 뒤집니다. 그리고 무엇이 나와야지 만일 찾는 것이 없으면 울어버립니다. 목사님은 딸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과자를 못 얻는 날은 과자를 사 가지고 왔습니다. 이 아이는 과자를 받아먹는 재미로 아버지를 맞이하는 버릇이 시집갈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시집보내고 딸이 보고 싶어 딸이 좋아하는 초코렛과 갠디를 한 가방 사들고 갔습니다. 딸이 반갑다고 맞이하며 가방을 받아 들고 들어갑니다. 아버지는 가방을 열어보고 좋아할 것을 상상하면서 딸을 따라 들어갔는데, 딸은 가방을 응접실에 놓고 부엌에 들어가서 음식 만드느라고 바쁩니다. 딸이 가방을 열어보지도 않는 것이 섭섭해서 참다못해 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가방 안에 네가 좋아하는 것을 많이 가져 왔는데 왜 가방도 열어보지 않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때 딸은 ‘그 동안에는 내가 아버지를 볼 때마다 오늘은 뭘 또 얻어먹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만, 지금은 그런 시간이 아닙니다. 내가 아버지께 무엇을 대접할까? 아버지를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해 드릴까? 그걸 생각하는 시간입니다’라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그때 아버지는 ‘이제 딸이 철이 났구나’ 라고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4), 그리고 ‘내 증인이 되리라’(8)는 말씀을 하시고 하늘로 올려져 가셨습니다(9).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지켜 본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감람산에서 내려와 마가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다락방에는 사도들을 비롯하여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이 모여 약 백이십 명이나 되었습니다(15).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락방에 모여 비로소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게 됩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나셨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핍박이 두려워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와 고기 잡으러 갔던 제자들도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아우들도 모였습니다. 며칠 전에 예수님과 함께 성찬을 베풀었던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이들이 다락방에 모인 것은 예수님이 이 자리에 나타나기를 바라고 모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초자연적 능력을 행사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오천 명을 배부르게 먹이던 그러한 기적을 다시 한 번 베풀어주기를 바라고 모인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들의 모임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4)는 말씀을 듣고 모인 것입니다.
모인 그들은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하기 시작합니다(14). 그들은 모여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증인들이 되기 위해서 성령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준비하며 기도하며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이 따라 배워야 할 신앙의 자세입니다.
다락방에 모인 무리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제자들을 그저 둘 리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다고 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험하지만 다락방에 모인 무리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며 오로지 기도에 힘쓸 뿐이었습니다. 위로부터 오는 능력, 위로부터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성령의 강림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능력을 받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려고 했습니다.
이들은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안 계시니 어떻게 할까?’ 이러한 의논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해야 먹고 살까?’ ‘잡히면 어떻게 하나?’ 이러한 염려나 두려움 때문에 서로 위로하고 의논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를 바라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고 힘써서 기도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락방에 모인 무리는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구속의 진리를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유익이라’(요16:7)고 하신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3년 동안 우리는 무엇을 위해 따랐던가? 무엇을 생각하며 주님의 말씀을 들었던가? 나는 어떠한 사람으로 살아왔던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생각을 바꿉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는 사명감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그동안에 수없는 말씀을 들었음에도 깨닫지 못했던 것을 비로소 다락방에 모여서야 깨닫게 됩니다. 마음의 눈이 어두워서 깨닫지 못했던 것을 다락방에서 깨닫게 됩니다.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를 하게 됩니다.
빌라도의 잘못된 재판도 이해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도 성경 안에서 이해를 합니다. 베드로는 가룟 유다의 배신과 죽음도 일찍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다’(16)고 깨달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가룟 유다가 ‘제 곳으로 갔다’(25)고 말 할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의 구속 사업은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교회의 시작은 마가 다락방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복음 사역의 생활을 다락방에서 결론을 맺습니다. 그리고 다락방에서 성찬 예식을 거행하므로 교회가 시작됩니다. 마가의 다락방은 지상교회의 모형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무리들의 생각과 믿음이 바꾸어진 것처럼, 오늘의 교회에 모인 성도는 주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는 생각과 믿음을 바꾸어서 내가 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믿음이 되어져야 합니다.
사도들이 감람산에서 ‘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물었던 질문이 다락방에서는 예수님의 증인되기 위해서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주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라고 받기를 바라던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내가 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믿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지금까지는 받기만을 바라던 믿음이 다락방에서 내가 드릴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락방의 역사입니다. 무리들은 다락방에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쓰며 말씀에 빠졌습니다.
이렇게 하여 열흘이 지나 오순절 날에 다락방에 모인 무리 가운데 홀연히 하늘로부터 금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온 집안에 가득 찼습니다. 각 사람들 위에 성령이 임하여 모두가 성령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방언으로 말하고 듣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모두가 ‘이 어찌 된 일이냐’고 하며 놀랐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일어나 소리 높여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14)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대로 성령 강림하심으로 성령 충만함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은 무리들은 밖으로 뛰어나가 예루살렘 거리를 활보하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지상교회는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
마가 다락방은 지상 교회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모든 지상교회의 모델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마가 다락방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닮아야 하는 다락방입니다. 그리고 다락방에 모인 백이십 명은 오늘의 나와 여러분의 신앙의 모델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잘못된 믿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받고자 하는 믿음이 드리고자 하는 믿음으로 바꾸어져야 합니다. 자기중심으로 예수를 믿었다면 이제는 예수중심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달라고만 하던 기도를 이제부터는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 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받기만을 원하던 믿음에서 드리고자 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던 것을 섬기고자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을 받고자 하기 보다는 사랑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마가 다락방 교회의 시작입니다.
오늘의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처음 제자들처럼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기를 바라는 믿음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분석해 보면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다는 것보다는 무엇을 달라는 기도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달라는 것도 영적인 성장이나 성숙한 믿음을 위하기보다는 자기중심적인 바람입니다. 자신의 가정과 사업의 번영을 위하는 기도입니다. 하물며 부활하신 예수님에게까지도 제자들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여쭙던 것처럼 ‘주께서 나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와 같은 기도를 드리고 있다면 부끄러운 믿음일 뿐입니다. 아직도 성숙하지 못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모여 성령 받기를 원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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