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쐬러 마실을 나갔어요. 누군가 솜씨 좋은 붓 질로 활엽수 귀퉁이에 노랑이 물감을 한 방울 찍어 놓았더이다. 녹색이 단풍이 될 때까지 부지런히 움직였을 터(변화) 나만 모르고 있었네요. '수학'에서 '미학'이 나왔다는 것을 아시나요? 전에 피타고라스에서 '오르가즘'이라는 말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의외였어요. '미학' 역시 '수학'에서 나왔다니 제쳐 놓은 '미분' '적분'을 다시 꺼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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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사건'을 한 달이 넘도록 붙잡고 있는데 여전히 뜬구름 잡는 느낌이 듭니다. 이유가 뭔지 모르지만 막연히 '수학'이 들어가서 그런가 싶기도 해요. 알랭 바디우의 '존재' 개념은 움직이는 사건으로의 '순수 존재'를 말하는 것 같아요. 이것은 '다수'이어야 하고 '고정'되어 있으면 반칙입니다. 이 때문에 '사건으로서의 존재'는 '비일관적 다수' 이기에 수학의 '공집합'과 흡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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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우의 철학은 세계를 현시된 다수성으로 파악하고 이를 ‘상황situation’ 이라고 부릅니다. 상황 속에서 존재는 있는 그대로의 다수성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현시된 다수성으로, 다시 말해 구조화된 것으로 드러납니다. 이 구조화된 상황이야말로 우리가 현실적으로 살아가고 체험하는 세계입니다. 이 상황은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특정한 ‘무엇’으로 다가옵니다. 구조화는 어떤 상황을 구체화하는 작용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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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상황을 구성하는 다수는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다수가 아니라 이미 상황의 통일성 속에 포섭된 다수, 특정한 셈을 통해 규정된 다수에요. 이러한 구조화 작용은 정확하게 존재의 일자를 수립하는 일자화의 작용과 일치합니다. 이 작용을 바디우는 하나로-셈하기(compte-pour-un) 라고 부릅니다. 다수는 그렇게 하나로-셈하기라는 구조화 작용을 통해 일자로 파악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존재와는 거리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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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있는 그대로의 존재, 다시 말해 ‘존재로서의 존재 être en tant qu'être’란 모든 질적인 규정성에서 벗어난 존재, 감산된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상황이 구조화된 것이라고 할 때, 이 상황 속의 존재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라기보다는 규정된 존재, 일자로 셈해진 존재인 것이지요. 이는 어디까지나 다수를 일자로 규정하는 구조화 작용의 결과일 뿐입니다. 일자를 수립하기 위한 작용으로서의 하나로-셈하기를 통해 현시된 다수는 일자로 파악될 뿐, 일자 그 자체는 아닌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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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일관성consistance이 부여되기 이전의 비일관적 다수multiple inconsistant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구조의 법칙에 의해 억압될 뿐입니다. 존재의 과학으로서의 집합론은 존재의 질적인 차이를 제거하고, 가장 근원적인 존재를 향해 접근합니다. 그것은 바디우가 존재의 본래 모습으로 간주하는 비일관적인 다수성을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이는 수학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입니다. 언어의 형식으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의 비일관성은 집합론에 의해 정확하게 표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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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다름 아닌 공집합(∅)입니다. 단적으로 우리가 {a, b, c}라는 임의의 집합을 가정할 때, 분명 공집합은 이 집합의 부분집합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원소를 하나로 셈하는 구조화 작용 속에서 공집합은 누락되어 있어요. 공집합(또는 공백)은 하나로-셈하기라는 현시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비일관적 다수성의 이름인 겁니다. 그것이 구조화의 작용을 벗어나는 것은 확실합니다. 공집합은 장소를 가질 수 없지만 모든 장소에 있고, 현시 속에서 현시 불가능한 것을 표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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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공집합의 현시 불가능한 성격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비일관적 다수성으로 간주할 수 있게 합니다. 존재로서의 존재가 갖는 비일관성은 확실히 하나로-셈하기라는 구조화 작용의 외부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은 바로 공백(또는 무無)으로서의 공 집합 인데 이 공백은 '직관'이나 '지각', '경험'을 통해 파악할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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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은 현시될 수 없는 것의 현시이며, 고정할 수 없는 것이고, 상황 속에서 배회하는 구조화될 수 없는 다수이기 때문에 구조화 작용 이전의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디우는 이 공백을 존재론이 출발점으로 삼는 존재의 고유명 nom propre de l'être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이러한 공백의 존재는 상황의 안정적 일관성을 위협합니다. 상황 속에서 현시 불가능한 공백의 방황은 두 번째 셈을 요구하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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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구조화된 상황을 다시 구조화하는 재 구조화의 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두 번째 구조화는 구조화된 상황의 불안정성으로부터 제기되는 필연적인 요구로 이러한 재 구조화는 필수적입니다. 공백의 방황으로 인해 상황의 일관성은 항상 위협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상황은 재 구조화되고, 상황은 구조의 구조, 다시 말해 메타 구조를 갖게 됩니다. 이때 재 구조화가 셈하는 부분들은 “공백이 존재의 잠재적 형상을 부여 받는 장소” 가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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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공백은 재구조화의 셈을 통해 고정되는 것입니다. 바디우는 그러한 상황의 재구조화가 만들어내는 두 번째 구조를 상황 상태 l'état de la situation 라고 불러요. 이것은 이미 하나로 셈해진 상황을 다시 셈함으로써 일자의 지배를 관철하는 기제 같은 것입니다. 사회적인 차원에서 국가는 이런 재 구조화의 기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는 항상 사회를 구성하는 부분집합들, 즉 집단들을 통제하고 관리합니다. 국가에게 개인이란 사실상 없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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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개인을 다루더라도 그것은 항상 집단 속의 개인일 뿐입니다. 그렇게 재 구조화의 작용은 부분들을 셈함으로써 상황의 부분들을 관리합니다. 예를 들어, 상태/국가의 셈은 노동 하는 개별적 원소들을 노동자로 분류하고, 그 집단을 관리하는 식이죠. 그것은 상황의 항목들을 특정한 부분으로 구분하고 분류하는 작용으로서, 식별과 분류의 체계를 수립하여 백과 사전적인 지식 체계를 확립 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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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상황과 상황 상태가 구조화하는 현시와 재현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조화된 현시와 재구조화된 재현 사이의 연결정도는 가변적입니다. 바디우는 그 유형을 세 가지로 나눕니다. 정상성normalité의 연결은 현시되는 동시에 재현되는 항목들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정상적인 다수는 현시와 재현이 항상 일치하는 다수라고 할 수 있어요. 다음으로 돌출excroissance은 현시되지는 않지만 재현 되는 다수, 상황의 원소는 아니지만 부분 집합인 다수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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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단독성singularité에 해당하는 항목입니다. 상황 속에서 현시되지만 상황 상태의 셈에 의해 재현되지 않는 항목들, 상황에 귀속되지만 상황 상태의 셈에 의해 상황에 포함되지 않는 항목들은 단독성의 규정 안에 있어요. 단독적인 항목들은 상황 속에서 부분으로 파악되지 않고, 상황의 부분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셈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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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독적인 항목은 역사적인 것, 즉 사건événement을 사유할 수 있게 하는 범주이고 단독적인 항목은 자연적 다수가 아닌 역사적 다수에만 존재하고 일어납니다. 바디우는 총체적으로 비-정상적인 다수, 즉 단독적인 항목으로만 구성되는 다수를 사건의 자리le site événementiel라고 부릅니다. 정확히 말해 사건의 자리는 공백이 아닙니다. 사건의 자리는 분명 하나의 집합으로서 상황에 현시됩니다. 그러나 사건의 자리를 구성해내는 원소들은 모두 단독적인 다수로, 그 어느 것도 하나로 셈해지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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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발생은 우연적이며, 어떤 법칙성에도 따르지 않아요. 예를 들어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사건은 사건의 자리에 속하는 여러 원소들(마르세이유 의용군, 쌍 퀼로트, 쟈코뱅, 삼부회등등)과 더불어 ‘대혁명’ 이라는 항목, 즉 사건 자신을 필요로 합니다. 사건의 자리의 원소들이 배열되는 것만으로는 사건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죠. 과연 사건은 사건의 자리가 속해있는 상황, 다시 말해 사건이 일어난 그 상황에 속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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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결정 불가능한 문제에요. 엄밀히 말해, 사건은 그 성립에서부터 결정 불가능해요. 1871년 프랑스 파리 코뮌의 예를 들면파리의 노동자들은 보불 전쟁의 패전이라는 상황 속에서 봉기하였습니다. 그들의 봉기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대중 봉기였고, 그것은 일찍이 알려진 적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노동자 대중은 그저 하나의 불명확한 집단으로만 존재했을 뿐 그 개개인들은 정치적으로 전혀 가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는데 그들은 그들의 봉기를 ‘파리 코뮌’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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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이름은 알려질 수 없는 것의 이름이었다고 당시 프랑스의 상황 속에서 그들은 단지 ‘폭도들’, ‘불순분자들’이라고 지칭되었을 따름입니다. ‘파리 코뮌’이란 상황의 법칙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이름, 상황에 대하여 철저히 정원외적인surnuméraire 이름이었던 겁니다. 바디우는 상황 내부에서 그것을 명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사건은 '이름 없음'을 자신의 이름으로 지닌다고 말합니다.
2024.9.24.tue.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