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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5월23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수도회] 이미지 과잉 소비시대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사도 28,16-20.30-31
† 복음 요한 21,20-25
★ 사도행전의 마지막 단락은 바오로 사도가 황제의 판결을 받으러
로마에 도착했음을 전해 준다. 카이사리아에서 배를 타고 로마로 오는
도중에 폭풍을 만나 위험에 처했을 때, 천사가 바오로에게 나타나 그가
황제 앞에 서야 한다고 말한다. 바오로도 로마에 무사히 도착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야 복음이 “땅끝까지”(사도 1,8) 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제1독서).
★ 한편 요한 복음의 마지막 단락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른 제자에
대해 묻는다.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하다. “너는 나를 따라라.” 그저
그뿐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내가 아닌 다른 제자를 특별히 총애하신다고 해도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나는 이미 죽고 다른
제자는 살아 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그것을 바라신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이 내가 주님을 따르는 데에 결코 장애가 될
수 없고 또 되어서도 안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황제의 판결을 받으러 로마에 도착하여 집에 갇혀
있습니다. 하지만 갇혀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에게
반대를 받는다 해도, 또 총독이 그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고 생각하였지만
자기가 계속 죄인 취급을 받는다 해도 그에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가
후대의 선교사들이 하듯이 그렇게 선교사 파견 예식을 하고 축복을
받으면서 떠났든, 죄인으로 호송되었든 그것은 그에게 상관이 없습니다.
더욱이 그것이 ‘방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끝납니다. 여기까지만 살펴보면 그의 앞날은
불확실합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그가 로마에서 순교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오로지 어떤 식으로든 하느님의 말씀이
세상의 중심인 로마까지 도달했다는 것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여기에서 멈추고 그다음에 전개되는 상황은 더 이상 쓰지
않습니다.
이러저러한 많은 일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대부분의 경우,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가 주님을 따르는 데에,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데에 ‘방해’ 사유가 된다는 점에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심 없이 사도들과 같은 담대함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믿음을 주시기를 청해 봅니다.
각 개인에게는 주님에게서 받은 고유한 소명이 있습니다. 바오로에게는
그리스도교의 개척자 모습이 두드러집니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한 위대한 선교사였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주님의 양 떼인
하느님의 백성을 부양하고 다스리는 목자의 모습이 돋보입니다.
요한에게서는 그리스도의 증인의 모습이 강조됩니다. 이처럼 베드로
사도가 주님의 양 떼를 양육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그의 소명이었다면, 요한 사도는 장수하면서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증언하는 것이 부활하신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소명과 능력은 서로 다릅니다. 또한 각 개인에게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고유한 길이 있기 때문에 상당히 서로 다르고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길과 나의 길을 비교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위험한 일입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 매일 미사 -
◈ [수도회] 주님은 삶의 방향이시다 -나를 따라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5월23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사도28,16-20.30-31 요한21,15-19
제1독서
<바오로는 로마에서 지내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8,16-20.30-31
복음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0-25
주님은 삶의 방향이시다. - 나를 따라라 -
주님은 아름답습니다. 진선미, 참되고 좋고 아름다운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따라 살수록 우리 역시 주님을 닮아 진선미의 사람이 됩니다.
요즘 수도원의 풍경이 참 아름답습니다.
주님의 진선미를 그대로 반영하는 풍경입니다. 어디를 찍어도 작품입니다.
지인들이 가끔 보내주는 그림들과 핸드폰으로 찍은 그림같은 사진과는
비교도 안됩니다.
하여 저는 카톡 사진을 일컬어 '하느님의 그림'이라 합니다. 복음 선포하는
마음으로 간혹 지인들에게 선물하는 아름다운 하느님의 그림입니다.
주님의 아름다움이 평화를 주고 마음을 감동케하여 정화합니다.
"명동지하 갤러리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풍경이어요. 매우 감사합니다.“
"진짜 평화가 물씬 풍기네요."
수도원의 풍경이 너무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낸 하느님의 그림인 사진에
대한 제자와 어느 화가의 답신 메시지입니다. 명동지하 갤러리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피에타'를 주제로 논문을 쓰는 제자입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반영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평생 따라야 하는 삶의 방향이신 예수님이십니다. 부단히 주님을
따를 때 방황하지 않으며 점차 확장되는 내적자유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의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 요한과의 미묘한 갈등이
재미있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베드로의 애제자 요한에 대한 불순한 동기를 알아 챘음이
분명합니다.
'이 사람'은 영어로 'this man'인가 하여 찾아 봤더니 아녔습니다.
'this man'은 예전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의 부시 대통령을 방문했을 때,
부시가 김 대통령을 가리켜 한 모욕적 지칭이라 널리 회자됐던
말마디입니다. 베드로의 심중을 살린 번역 같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으냐? 너는 나를 따라라.“
베드로의 심중을 꿰뜷어 통찰한 주님의 지혜로운 처방 말씀입니다.
불필요한 관심을 거두고 나를 따르는 일에만 전념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한 말씀으로 베드로의 복잡한 내면을 말끔히 정리해 주십니다.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마다 떠오르는 두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너나 잘해. 네가 뭔데.“
직설적인 말투이지만 주제넘게 불필요한 간섭을 즐기는 자들에 대한 아주
적절한 일침이 되는 말입니다. 아마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솔직한
심정도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나를 따라라.“
어제에 이어 반복되는 예수님의 베드로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니 베드로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예수닮기, 예수살기에 올인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진선미의 자유로운 삶입니다.
복음이 수제자와 애제자의 대조와 더불어, 독서와 복음의 바오로와
베드로의 대조도 재미있습니다. 두 사도는 가톨릭 교회의 양대 기둥입니다.
참 아름답고 자유로운 영혼의 사람, 바오로입니다.
오로지 주님만 따랐기에 어디에 머물든 자유롭고 편안한 고향입니다.
삶과 죽음을 넘어 영원한 파스카의 삶을 사는 바오로입니다.
바로 다음 구절의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희망 때문에 이렇게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육신은 사슬에 묶여 있지만 주님께 희망을 둔 자유로운 영혼까지는 묶어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여 셋집에서 만 이 년 동안 머무는 동안 바오로는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환대하여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르칩니다.
참 아름다운 영혼의 대자유인 바오로입니다.
베드로, 요한, 바오로는 각자 고유의 아름다운 몫과 역할을 지닌 주님의
사도들입니다.
우열의 비교 대상이 아닌 감사의 대상인 세 사도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은 각자
고유의 아름답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주님, 올곧은 이는 당신 얼굴 뵈오리다."(시편11,7ㄴ).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이미지 과잉 소비시대에
2015년 나해 5월23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요한 21,20-25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21,21)
"The Beloved Disciple"
이미지 과잉 소비시대에
오늘의 시대는 이미지 과잉 소비시대이다. 이미지는 실재를 표현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실재보다는 이미지를 앞세우고 이미지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이미지가 ‘악마의 힘’으로 나타나고 있다. 실재와 이미지의
거리는 점점 커져가는 현실을 부인할 수 없다. 부정부패를 저지른
인물이라 해도 자본을 이용하여 도덕적이고 청렴한 이미지를 정략적으로
만들어 권력을 창출해가는 것은 이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들뢰즈, 라캉, 맥루언, 보드리야르 등은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를 밝히려
했다.
이미지를 중시하는 시대에는 실재보다는 ‘보여지는 이미지’나 ‘보이기
위한 이미지’에 더 많은 시간과 돈을 쓴다. 현대인들, 특히 많은
한국인들은 이미지를 과잉 소비하면서 남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외모 지상주의, 내적 삶의 변화보다는 드러나는 이미지를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 이미지 소비시대는 자본의 힘과 결합하여 인격을 자본 아래 두려
한다. 과연 이런 삶이 진정 우리에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가 뒤를 따라오자 베드로가
그분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하고 묻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1,22).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보고 체험했으나
이 대목에서 그는 자신을 빼놓고 다른 이의 문제에 관심을 보인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수난을 예고하시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가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는 질책을
들었고(마태 16,23), 예수께서 체포되자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세번이나
그분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다 (26,69-74).
베드로는 주님의 눈에 들기를 좋아하고, 무모한 행동으로 다른 이들의
관심을 끌려하고 있다. 이런 태도야말로 매우 미성숙한 태도이다.
왜냐하면 자신에 대한 성찰이 없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채 어떻게 보일까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이미지
중심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의식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눈길이며,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이지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다. 그에게 우선적이고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시선이 아니다. 우리가 참으로 부족하고 연약하다 해도 주님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조건 없이 귀하게 여겨주시며, 당신과 관계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다. 진정으로
내가 행복의 길을 가려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또는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하는 것에 대해 신경을 꺼야 한다. 우리가
의식해야 할 분은 하느님뿐이며, 무엇을 하든 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주님의 눈길임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거기에
매여 있으며, 그런 것들을 의식함으로써 갈등과 번민과 분노가 일어나고
있다면 바로 그 순간 나는 하느님 아닌 것들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다.
그런 삶이야말로 하느님 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의 삶이다.
참으로 행복을 원하는가? 행복을 원하거든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남의
눈길을 의식하여 보여지는 이미지를 붙들고 거기에 연연하면 할수록
소유와 물질의 사람, 자기 중심의 사람이 되어 영적인 것으로부터 점점
멀어짐을 명심했으면 한다. 영의 눈이 아니고서는 영이신 주님을 알아볼
수 없다. ‘있는 그대로의 나’에 감사하고, 하느님 앞에서의 나의 실재에
만족하는 길 외에 행복으로 가는 길은 없다. 더는 비교하지 말자. 비교는
경쟁을 불러일으키고 자신을 우월감이나 열등감으로 내몰 뿐이다.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바로 나 자신이다.
성 프란치스코가 ‘소유 없이’의 삶을 살면서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여!’
라고 기도했던 것은 하느님을 향한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과 영의 시선
때문이었다. 바로 그런 시선과 삶의 방향이 누구보다도 그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나의 존재이유와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사랑이신
하느님의 눈길이요 말씀뿐이다.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길가에 있는
들풀이나 계절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나무들처럼, 우리도 이미지가
아닌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에 감사드리고 스스로를 사랑하며
살아가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수도회] 2015.05.23.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요한 21,22)
우리는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이라
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일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오늘도 이런저런 소식이 들려 올 겁니다.
누가 어떻다 하더라 그게 사실일까?
설마 그럴려고... 나에 관한 일이 아니기에 정확한 팩트가 무언지
알 수가 없기에 궁금증은 꼬리를 물고 일어나며
점점 확대재생산 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면 내가 구경꾼도 되었다가 중개자도 되었다가
재판관이 되기도 하지요.
저는 SNS가 점점 소통이 어려운 이 시대를 위한 최고의 소통도구라
감사하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남의 이야기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확대시키고 날라 사람을 무참히 매장시킬 수도 있는
무섭고 흉칙한 살인도구가 될 위험성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남의 일에 너무 개입하지 맙시다.
남의 일에 밤 놔라 대추 놔라 하지 맙시다.
그게 여러분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는 거저 묵묵히 주님의 길을 따르면 될 뿐입니다.
그게 진짜 중요한 일이고 우리의 구원과 연관된 일이
아닐른지요?
모바일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블로그앱에서 보기
[출처] http://blog.naver.com/osspaolo/220357913383
알타반의 말씀사랑
- 오상선 바오로 작은 형제회 신부 -
◈ [서울] 부활 제7주간 토요일
2015년 나해 5월23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제1독서
<바오로는 로마에서 지내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8,16-20.30-31
복음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0-25
가톨릭 사회교리에 대한 주제로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자유, 평등,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인류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과
생산자로 발전하였습니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은 족장, 왕, 영주,
귀족, 양반, 자본가가 되었습니다. 생산자들은 평민, 노예, 농민, 상놈,
백정, 어린이, 여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구조에서 정의는 생산수단을 가진
사람들의 몫이었습니다. 생산자들에게는 정의, 인권, 자유, 평등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보는 ‘사극’에서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처럼 죽지 않고, 로마에까지 가서 재판을 받은 것은 로마의
시민이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대혁명, 바이마르 헌법, 러시아 혁명은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인간의 자유, 평등, 형제애를 이야기 하였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인정하였고, 노동자가 주인인 세상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유감스럽게도 프랑스, 독일, 러시아에서 교회는 재산을 몰수당했고,
성직자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인간의 존엄성과 정의의
편에 서지 않았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새로운 사태, 어머니와 교사, 지상의 평화, 민족들의 발전, 현대의
복음 선교,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 ‘정의와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이고, 하느님의 백성은
‘가톨릭, 기독교, 타종교, 선의의 사람’들이 모두 포함된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한 하느님나라를 비로서 이야기 하였습니다.
‘묶인 이를 풀어주고, 감옥에 갇힌 이에게 해방을 알려주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입니다.’ 초대교회가 이루었던 교회입니다.
‘사람들은 가진 것을 함께 나누었고, 교회에서는 배고픈 사람, 가난한
사람이 없었으며,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서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교회는 ‘자선, 자비, 기도, 극기, 단식, 나눔, 봉사, 희생’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이것이 2000년 동안 교회를 지켜온 기둥입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교회는 ‘정의와 인권’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상은 ‘자유, 평등, 인권’을 말하였고, 그것을 실현하였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호소하고 있습니다. 전쟁과 폭력을 막을 수 있도록
연대하자고 이야기 합니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이야기 합니다.
‘아바타’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소유, 착취, 정복이라는
개념으로 다른 별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그 별에 사는 문명은 나눔, 공존,
자연과 하나 됨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문명을 더
사랑하실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의와 인권’이 실현되는 세상,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는 세상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뛰놀고, 사막에 샘이 넘쳐나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세상이 오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꿈꾸었던 세상이고, 하느님 나라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인천] 너 먼저 살아남아라.
2015년 나해 5월23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제1독서
<바오로는 로마에서 지내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8,16-20.30-31
복음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0-25
사람들에게 평생 보살펴야 할 대상 3명을 뽑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대체적으로 이 세 대상을 말합니다.
‘배우자, 자녀, 부모님.’
그런데 정말로 보살펴야 할 대상 한 명이 빠져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입니다. 원래 제일 먼저 보살펴야 할 대상은 자기
자신이지요. 이에 대해 어떤 분들은 의구심을 가질 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타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또 많이 하기
때문이지요.
아마 비행기 타 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이륙 전에 안전교육을 하면서,
비상 상황이 일어나면 머리 위에서 산소마스크가 내려오는데 누구부터
쓰라고 합니까? 또 미국 소방관의 화재현장 투입 시에 지켜야 할 첫 번째
원칙은 ‘너 먼저 살아남아라.’라고 하지요. 왜 이렇게 교육을 시킬까요?
나를 먼저 돌보아야 남도 돌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 안에서 나를 먼저 보살피지 않으면, 정말로
보살펴야 할 대상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이기적인 삶과는
다른 것이지요. 실제로 자기의 삶이 엉망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똑바로
살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의 삶이 안정적일 때, 어렵고
힘든 사람에게 큰 힘을 전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물질적인 여유를 갖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져야만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상태,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예수님께 어떤 한 제자를 가리키며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 제자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로 잘
알려져 있었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지금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할 시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인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지요. 하지만 아직 제자들은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본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이곳저곳에 알렸던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을 때, 남들에게 쓸데없는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욱 더 바라보고, 더욱 더 주님
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지요.
나를 보살피는 날. 특히 주님을 향한 내 마음이 안정될 수 있는 특별한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참된 사랑은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고 상대방에게 모든 애정을 쏟는
것이다(프로렌스 스코벨 쉰).
인천 문학산에 다녀왔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잘 알려진 우화 하나가 생각납니다.
토끼 한 마리가 길을 가다가 바로 옆에 사과 한 알이 떨어진 것입니다.
토끼는 너무나 깜짝 놀라서 달아나기 시작하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하나 생겼어요. 글쎄 이 토끼가 뛰는 모습을 본 숲 속의 다른 동물도
덩달아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숲 속은 일대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자의에 의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냥
쫓아 하는 것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래야 실수를 줄인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남의 눈치를 보면서
힘들게 사는 삶이 아니라, 자기의 주관을 내세우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2시간 정도 산행했는데 꽤 많이 걸었더라구여.
◈ [청주]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하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5월23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요한21,20-25)
제1독서
<바오로는 로마에서 지내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8,16-20.30-31
복음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0-25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해 줘
“남의 떡은 더 커 보인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자기 것보다도 남의 것이
훨씬 더 좋아 보인다.’는 말입니다. 자기 것에 만족하고 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면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과 비교하며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허세를 떨기도 하고 분수없이 지낼 때가
있습니다. 잘 보이려 하지 말고 지금 최선을 다하여 사는 것이 아름답건만
그것이 마음 같지 않아 힘들어 합니다. 나는 나의 삶을 사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그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해 주면 속을
끓일 이유가 없건만 안타까움이 큽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운명에 대한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하고 물었던 사람입니다
(요한21,20). 그런데 그 제자는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한21,21)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일생이고 너는 너의 갈 길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나를 따라라.”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 제자가 나의 사랑을
받았다고 해서 비교하지 마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각자가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열어주신 길이 있고 탈란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길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다른 제자의 운명에 관심을
갖는 것은 동료애를 발휘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쓸모없는
호기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여기서 영원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쓸모없는 호기심은 걸림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루카9,62) 되지 말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흔들림 없는 나의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걷는 발걸음에 복이 넘치시길 기도합니다. 요한복음의
핵심주제는 “서로사랑하자.”로 요약됩니다. 우리 삶을 사랑으로 물들이고
그 길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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