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고 기품 있는 주황색 여름꽃
봄을 알리는 꽃이 개나리, 진달래라면, 여름을 알리는 꽃은 단연 능소화다. 화려한 꽃송이가 눈에 잘 띄는데다 토담과 한옥에 잘 어울려 정서적으로 편안하면서 오래 기억되는 기품 있는 꽃이기 때문이다.
능소화(凌霄花)란 이름에는 ‘하늘을 능가하는 꽃’이란 뜻이 담겨 있다. 이름에서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 큼지막한 주황색 꽃을 주렁주렁 피우는 나무 덩굴의 기세를 엿볼 수 있다. 과거에 능소화는 아무나 기를 수 없는 나무이기도 했다. 양반들이 너무 좋아해서 일반 백성들은 심을 수조차 없었다. 기르다 발각되면 관가에 끌려가 벌을 받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양반꽃’이라고도 한다.
능소화는 남부지방에서 주로 심던 꽃나무다. 서울에서는 매우 보기 드물었다. 문일평은 『화하만필(花下漫筆)』에서 ‘서울에 이상한 식물이 있는데, 나무로는 백송이 있으며 꽃으로는 능소화가 있다’고 썼다. 서울에서 능소화는 그만큼 귀했다. 겨울 맹추위 때문에 월동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원산지 중국, 공해에 강해 도심에 심을 만
능소화는 중국 장쑤성 지방이 원산지이다. 능소화과에 속한 낙엽 덩굴성 목본으로 길이 15m 정도까지 자란다. 회갈색 나무껍질은 세로로 벗겨지고 줄기마디에 지네발처럼 생긴 부착근이 발달하여 벽면을 잘 타고 올라간다.
잎은 마주나기로 나며, 깃꼴겹잎이다. 작은 잎 7~9장으로 가장자리에 톱니와 부드러운 털이 있다. 꽃은 7~9월에 피고 겉은 적황색, 속은 노란색에 가깝다. 가지 끝에 5~15개가 원추형꽃차례로 달린다. 화관은 나팔 모양으로 통부는 길며 수술은 2강웅예(4~5개의 수술 중에서 2개가 긴 것), 암술은 1개이다.
열매는 삭과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열매를 못 맺는다고 보면 될 것 같다. 필자도 통영 한산도에서 처음으로 열매를 보고 감격했던 경험이 있다. 전년도 가지와 뿌리를 잘라 심으면 좋은 묘목을 얻어 증식할 수 있다. 공해에 매우 강한 나무여서 도심에 심어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해도 좋을 듯하다.
이야기 속 ‘기다리는 여인의 꽃’
2006년에 출간된 조두진의 『능소화』는 1998년 안동의 고성 이씨 무덤을 이장하던 중 남자 미라와 함께 발견된 「원이 엄마의 편지」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다. 1586년,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응태의 아내, 원이 엄마가 죽은 남편에게 쓴 편지로,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기도 했다.
소설 『능소화』는 주인공 여늬와 응태의 사랑이야기인데, 능소화가 배경이다. 능소화가 곱게 피던 날 만났고, 능소화가 만발하던 날 헤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남편 응태가 사망한 후 여늬는 운명을 거역하며 남편이 찾아올 수 있도록 능소화를 심고 기다린다.
슬픈 사랑의 전설도 있다. 소화라는 예쁜 궁녀가 있었다. 임금님의 사랑을 받게 된 소화는 빈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궁궐 한 곳에 처소를 얻는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후로 임금은 소화의 처소에 한 번도 들지 않는다. 소화를 시샘한 다른 빈들이 작당해 소화의 처소를 궁궐에서 먼 곳에 마련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소화는 담장 근처를 서성이며 이제나저제나 임금님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기다림에 지친 소화는 결국 병이 들고, 임금님을 기다리고 싶으니 담장가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죽는다. 시녀들은 소화를 담장 옆에 묻어주었고 그 자리에서 자라난 덩굴이 바로 능소화라고 한다.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어느 순간 후두둑 떨어져 버리는 꽃, 능소화는 바로 기다림의 꽃이다.
‘능소화 꽃가루 눈병 유발’은 오해!
몇 년 전에 능소화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능소화의 꽃가루가 갈고리 모양이어서 눈에 들어가면 각막 손상을 일으키고, 잘못 비비면 실명이 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때문에 전국의 학교나 공원에서 베거나 뽑아버리는 사태가 빚어졌다.
보통 식물의 꽃가루는 0.01~0.05㎜ 크기의 원형이나 타원형이다. 능소화의 꽃가루 크기는 0.02~0.03㎜의 타원형으로 전자현미경으로 보면 표면이 매끈한 그물 모양일 뿐 갈고리 같은 흉기는 없다.
사실 돌기가 있는 코스모스의 꽃가루도 너무 작아 일부러 눈에 넣고 비비지 않는 한 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능소화 꽃에서 추출한 물질은 독성이 없고 안전하다는 국립수목원의 발표도 있었다. 능소화의 억울한 누명이 벗겨져 다행이다.
트럼펫 닮은 꽃 ‘트럼펫 크리퍼’
능소화의 학명은 ‘캄프시스 그란디플로라(Campsis grandiflora)’이다. 독일의 식물학자 슈만(Schumann·1851~1904)이 붙인 속명 ‘캄프시스’는 그리스어로 ‘만곡(彎曲)’을 뜻하며 휘어진 수술을 강조한다. 종소명 ‘그란디플로라’는 ‘큰 꽃’이라는 뜻이다. 서양에서는 꽃 모양이 트럼펫을 닮았다 하여 ‘트럼펫 크리퍼(Trumpet creeper)’라고도 부른다.
이름은 능소화(凌霄花)에서 유래한다. 능초(凌苕), 여위(女葳)라고도 하며, 다른 이름으로는 ‘금등화(金藤花)’, ‘릉소화’, ‘자위화(紫葳花)’, ‘처녀꽃’, ‘양반꽃’이라고도 부른다. 한방에서는 꽃을 ‘능소화’, 뿌리를 ‘자위근’, 잎을 ‘자위경엽’이라 하여 술독과 부인병, 이뇨에 쓴다. 독성이 있어 사용할 때 주의해야 한다.
비슷한 식물로는 ‘미국능소화’라고 하는 ‘라디칸스능소화’가 있다. 능소화와 비슷하지만 잎의 끝이 길게 빠지며 꽃이 작고 꽃대가 길쭉한 나팔 모양이다. 주황인 능소화와 달리 진한 붉은색으로 줄줄이 달리지 않고 한곳에 모여 달리는 특징이 있다.
남사예담촌·천경사·불곡사 등에서 감상
산청군 남사예담촌 한옥마을의 능소화는 지나온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택과 돌담길, 고즈넉한 마을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꽃은 한여름 내내 감상할 수 있다.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골목길을 걸으며 과거로의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밀양 용두산 천경사 일주문 계단을 올라가면 짙은 녹음 속에 수천 개의 기왓장으로 공들여 쌓은 담장이 나타나고 갑자기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핀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그 밖에 창원 불곡사와 거창 수승대의 황산고가마을, 김해 수로왕릉, 함양 정여창고택, 하동 최참판댁에서도 아름다운 능소화를 감상할 수 있다. 전북 진안군 마이산 탑사에서는 깎아지른 절벽을 타고 올라간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능소화 줄기를 볼 수 있다.
글·사진 나영학 한반도식물자원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