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누가 능히 헤아리랴? (욥기 26장 1절 – 14절) 26: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네가 힘 없는 자를 참 잘도 도와 주는구나 기력 없는 팔을 참 잘도 구원하여 주는구나 3 지혜 없는 자를 참 잘도 가르치는구나 큰 지식을 참 잘도 자랑하는구나 4 네가 누구를 향하여 말하느냐 누구의 정신이 네게서 나왔느냐 5 죽은 자의 영들이 물 밑에서 떨며 물에서 사는 것들도 그러하도다 6 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 7 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 8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9 그는 보름달을 가리시고 자기의 구름을 그 위에 펴시며 10 수면에 경계를 그으시니 빛과 어둠이 함께 끝나는 곳이니라 11 그가 꾸짖으신즉 하늘 기둥이 흔들리며 놀라느니라 12 그는 능력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 지혜로 라합을 깨뜨리시며 13 그의 입김으로 하늘을 맑게 하시고 손으로 날렵한 뱀을 무찌르시나니 14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 (개역개정) 오늘의 성경 본문은, 욥이 당한 고난의 원인을 두고 친구들 간에 벌어진 3차 변론(22-31장)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빌닷의 변론(25장)에 대해서 욥이 반박(26장)하는 내용입니다. 욥과 친구들 간의 기나긴 변론이 끝나는 마지막 부분은(26-31장), 26장에서는 빌닷의 변론을 비웃는 욥의 답변이, 27장에서는 세 친구들을 향한 욥의 답변이, 28장에서는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에 대한 욥의 찬양이, 29장에서는 잃어버린 과거의 영광 회복을 갈망하는 욥의 희망이, 30장에서는 고통을 당하는 현재 처지에 대한 욥의 호소의 탄식이, 31장에서는 자신의 의로움에 대한 욥의 독백적인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욥의 고난에 대한 친구들 간의 변론이 끝나가면서, 고난을 당하는 친구인 욥에게 독설적인 정죄를 마다하지 않았던 소발은 침묵했고, 동일한 정죄를 일삼았던 빌닷은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에 대한 찬양과 이에 비할 수 없는 비천한 인간적 존재에 대한 증언으로 자기 변론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욥이 답변을 시작하면서 빌닷의 변론처럼, 갑자기 우주만물과 자연현상을 통해 드러내신 하나님의 장엄하신 능력을 찬양합니다. 이것은 빌닷이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에 대한 찬양과 비천한 인간적 존재에 대한 증언을 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빌닷이 그런 증언을 한 것은, 그가 욥에 대한 직접적인 정죄는 멈췄지만 간접적으로 빌닷이 욥에게 네가 하나님의 놀라우신 위엄을 알면 얼마나 알며, 벌레같이 비천한 인간인 욥 네가 감히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무죄함을 호소하는 행위가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라며 빈정대는 비유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빌닷의 의도를 간파한 욥이, 고난당하는 친구에게 힘과 위로와 희망이 되어주기보다, 자신이 아는 짧은 신앙적 지식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정죄하기밖에 할 줄 모르는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신앙에 대해, 하나님의 놀라우신 권능과 신비한 섭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26:14)라며, 모두가 하나님 앞에 겸손할 것을 고백합니다. 1. 욥은 빌닷의 변론을 어떻게 반박합니까? 오늘 본문을 빌닷에 대한 반론으로 보는 것은, 빌닷의 변론 후에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네가”(26:1-4)라는 2인칭 단수 표현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시험으로 말미암아 들이닥친 예기치 못한 고난을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 위문하러 온 친구들마저 욥의 힘이 되어주기보다 돌아가면서 내뱉는 질책을 모두 받아야 했던 욥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친구들은 욥이 당한 고난을 그가 저지른 죄악의 결과로만 보고, 자신들이 아는 편협한 인과응보 논리만을 도식적으로 적용시켜 욥을 회개시켜야 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욥은 친구들에게 자신이 당하고 있는 재앙과 고난이 단지 자신이 저지른 죄악 때문이 아니라, 자신도 잘 모르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가운데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의 팽팽한 대결이, 고난 가운데 힘들어하는 욥을 더욱 극심한 고통에 빠뜨리는 정죄를 일삼게 됩니다. 친구들이 비록 악한 의도로 행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가진 잘못된 신앙 지식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악행이었습니다. 이러한 오류와 실수는, 오늘날도 수많은 교회 안에서 동일하게 빚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의도와 진리 그리고 사람에 대한 사랑보다, 자신들이 아는 교리적인 편협한 신앙 지식의 노예가 되어있는 이들이 동일하게 행하는 악행입니다. 이들은 놀랍게도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그분의 말씀인 성경보다는, 자신들이 맹종하는 지도자와 그들의 말을 더 절대시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분별력이 없다보니,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 지도 깨닫지 못하고 악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욥은, 처음에는 친구들에게 위로받기를 기대했지만, 친구들의 잘못된 대처로 인하여 진정한 위로와 도움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말미암는다는 것을 깨닫는 믿음과 소망의 사람으로 자라가게 됩니다. 이에 반해 친구들은, 욥의 호소에는 마음과 귀를 닫아버리고 자신들이 아는 편협한 신앙의 강요에만 갇혀 있다 보니, 안타깝게도 자신들의 믿음을 성장시키지 못한 채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욥은 친구들에게 또 빌닷에게, 지금 너희가 내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느냐고 탄식합니다. 첫째는, “네가 힘없는 자를, 참 잘도 도와주는구나! 기력 없는 팔을, 참 잘도 구원하여 주는구나!”(26:2)라며, 고난 가운데 있는 자신을 도와주러 위문을 왔다고 하는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는 것이냐며, 욥은 그들의 허구적인 신앙 행태를 빈정대며 반박합니다. “힘없는 자, 기력 없는 팔”은, 갑자기 닥친 재앙의 고통으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모든 기력을 잃고 쇠약한 상태에 있는 욥 자신의 처지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욥에게 오히려 고통만을 안겨주고 있는 친구들을 향해 “참 잘도 도와주는구나!… 참 잘도 구원하여 주는구나!”라며, 어떠한 위로도 도움도 되지못했다며, 그들이 자신을 방문한 본질을 잃어버렸음을 질타합니다. 둘째는, “지혜 없는 자를 참 잘도 가르치는구나! 큰 지식을 참 잘도 자랑하는구나!”(26:3)라며, 친구들이 자신들이 아는 작은 편협한 신앙 지식에 갇혀서 그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교만하게, 고난 가운데 있는 욥을 “지혜 없는 자”로 여겨 정죄의 충고만을 반복할 뿐, 위로와 격려는 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행태를 행했다고 반박합니다. 셋째는, “네가 누구를 향하여 말하느냐? 누구의 정신이 네게서 나왔느냐?”(26:4) 곧 “그런데 누가, 네가 한 그런 말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누구에게 영감을 받아서 그런 말을 하는거냐?”(새번역)라며, 빌닷의 변론이 욥의 문제와 상관이 없는 무가치한 것이었음을 꼬집으며, 자기 주관이 없는 빌닷이 남에게서 들은 말을 마냥 자기 말인 것처럼 읊조리면서 고통 받는 친구를 겁박하는 것이냐고 반박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분별력을 가지고,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4:6)고 깨우칩니다. 잠언서 역시도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잠17:27-28)고 일깨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알면 얼마나 압니까? “누가 능히 헤아리랴?”(26:14)라고 했던 욥의 고백처럼, 겸손한 신앙인들이 복됩니다. 2. 욥은 하나님의 능력을 어떻게 찬양합니까? 빌닷이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25:2,4)라며,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는 것 같았지만 실은 욥을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욥 자신도 이것을 인정했지만, 빌닷은 욥을 하나님 앞에 자기 의를 내세우는 자로 몰아가며 불의하고 불경건한 자라고 계속 정죄했습니다. 빌닷은 욥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신 섭리를 믿고 의지하고 인내하라는 위로와 격려가 아니라, 자신이 아는 편협한 신앙 지식의 논리로 비난과 정죄만을 일삼았습니다. 이러한 빌닷에게 욥은 하나님의 장엄하신 능력을 빌닷보다 자세하게 열거합니다. 그것은 신앙적 지식의 교만에 빠져있는 빌닷을 향해 욥이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대한 지식이 빌닷보다 더 우월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면서도, “누가 능히 헤아리랴?”(26:14)라며 욥은 겸손히 자신의 구원과 소망의 근거가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있음을 고백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첫째로, 욥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죽은 자의 영들이 물 밑에서 떨며, 물에서 사는 것들도 그러하도다. 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26:5-6) 곧 “저 땅 밑에서 그림자처럼 흐느적거리는 자들, 바다와 그 속에 갇혀 있는 자들이 어찌 떨지 않으랴! 그의 앞에서는 저승도 벌거숭이, 죽음의 나라도 그대로 드러나네.”(공동번역)라며, 죽은 자들의 영역까지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합니다. “멸망”은 “멸망의 웅덩이”(개역)를 가리키며, 음부에 악인들이 거하는 멸망의 처소를 의미합니다. 흔히들 하나님께서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망각할 때가 많습니다. 둘째로, 욥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26:7) 곧 “하나님이 북쪽 하늘을 허공에 펼쳐 놓으시고, 이 땅덩이를 빈 곳에 매달아 놓으셨다.”(새번역)라며, 우주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합니다. “북쪽”은 북반구 하늘로서, 북극성과 북두칠성과 오리온성좌 등 크고 많은 별자리가 펼쳐져 있는 곳입니다. 무엇보다 욥이 고대시대인 그 당시에 지구가 우주 공간에 떠있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1968년 12월에 아폴로 우주선이 우주 위에 떠있는 지구를 촬영하고서야 이 사실을 믿었습니다. 셋째로, 욥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그는 보름달을 가리시고, 자기의 구름을 그 위에 펴시며”(26:8-9)라며,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셔서 구름까지도 통제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합니다.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실 뿐만 아니라, “구름 속에 물을 채우시고, 물이 구름 밑으로 터져 나오지 못하게 막고 계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26:8,새번역)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구름으로 자신의 보좌를 가리셔서, 자신의 오묘하신 섭리를 인간에게 숨기기도 하신다고 증언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감히 측량할 수 없는 드넓은 우주 공간에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가득 차 있고, 이 땅의 자연현상조차도 놀라우신 하나님의 섭리 속에 운행되고 있음에 대한 증언입니다. 넷째로, 욥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수면에 경계를 그으시니, 빛과 어둠이 함께 끝나는 곳이니라”(26:10) 곧 “물의 표면에 둥근 금을 그으시어 빛이 끝나고 어둠이 시작되는 곳을 표시하셨네.”(공동번역)라며, 궁창 위와 아래의 물의 경계선을 그으셔서 빛과 어둠이 밤과 낮으로 교차하게 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주권을 찬양합니다. 수평선 위로 펼쳐지는 일출과 일몰을 통해, 저녁이 끝나고 아침이 시작되며 낮이 끝나고 밤이 시작되는 것을 찬양합니다. 다섯째로, 욥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그가 꾸짖으신즉 하늘 기둥이 흔들리며 놀라느니라”(26:11)라며, 천둥 번개와 폭풍과 지진으로 견고한 높은 산까지도 뒤흔드시는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합니다. 고대에는 높은 산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한 견고한 산까지도 한 순간에 자신의 뜻대로 무너뜨리시는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위엄과 권능에 대한 증언입니다. 여섯째로, 욥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그는 능력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 지혜로 라합을 깨뜨리시며, 그의 입김으로 하늘을 맑게 하시고, 손으로 날렵한 뱀을 무찌르시나니”(26:12-13)라며, 자연만물과 사단의 세력을 진멸하고 제압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합니다. “바다”의 흉흉한 파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입니다. 천둥번개와 비바람이 몰아칠 때는, 하늘 역시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라합”은 악의 세력을 상징하는 바다의 괴물로,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들을 숨겨준 기생 “라합”(수2장)과는 다른 존재입니다. “날렵한 뱀”은 “리워야단”(3:8,41:1,사27:1)으로도 표현되며, 사단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세상을 혼돈과 파괴 속에 몰아넣는 세력까지도 “깨뜨리시며…무찌르시”는 권능을 가지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욥은 증언합니다. 3. 욥은 인간의 한계성을 어떻게 고백합니까? 빌닷이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25:2)을 찬양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인간을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25:6)라고 극단적으로 비하했습니다. 하나님을 강조하다보니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선한 뜻과 사랑이 담긴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했습니다. 빌닷이 인간을 이토록 비하한 것은 욥을 정죄하기 위한 의도이기도 했지만, 문제는 자신은 이와 다른 예외적인 존재인 것처럼 인식하고, 마치 다른 사람을 심판할 권한이라도 가진 하나님이나 되는 것처럼 여겼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많은 이들이 흔히 저지르는 오류이자 죄악입니다. 욥은 빌닷과 달리 인간의 연약성과 한계성을,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26:14)라고 증언하며 고백합니다. 욥은 자신이 증언한 하나님의 크신 능력들이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26:14) 곧 “그분이 하시는 일의 일부에 지나지 않고”(새번역)라며, 자신은 하나님이 하시는 크신 일들을 다 알지 못한다고 겸손히 고백합니다. 우리가 보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사실은 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또한 우리가 두렵게 여기는 “큰 능력의 우렛소리” 조차도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만큼 우리 인간이 보고 듣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라는 것이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라며, 우리 인간이 안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한계성을 가진 것인가를 고백합니다. 결국 욥은 자신뿐만 아니라 “누가 능히 헤아리랴?”(26:14) 곧 “누가 능히 측량하랴?”(개역)라고 반문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그 능력의 무한하심을 인간이 측량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고백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그 어떤 일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판단할 수 없다는 고백이자, 하나님을 인간의 지혜와 사고와 논리 안에 가두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증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 역시도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라고 찬양하며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욥이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행하시는 일들에 대해서 “보라!… 누가 능히 헤아리랴?”(26:14)고 찬양했던 고백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자신이 아는 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욥이 “보라!… 누가 능히 헤아리랴?”(26:14)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가 아는 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한 자세가 진정한 믿음의 시작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고통당하는 친구의 아픔을 함께 나누려고 하거나, 친구인 욥이 당하는 아픔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 상황에 적합하지 않은 말로 충고만을 일삼다보니 더 큰 상처의 고통만을 안겨주었습니다. 인간이 당하는 고난이 그 사람이 저지른 죄악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모든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간과했습니다. 따라서 욥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돕는다고 한 것이, 오직 죄악에 대한 회개만을 강조했습니다. 그러한 자신들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욥을, 자기들 말대로 따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분노하며 급기야는 정죄하고 비난했습니다. 욥은 이들과는 달리, 자신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때문임을 믿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과연 무엇 때문인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답답하게 여겼습니다. 어찌되었든 친구들에게 정죄당하는 고난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간절한 믿음으로 성숙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 때문에 오늘 욥은 모든 창조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잘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욥은 천지만물에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느끼며, 장엄하면서도 세밀한 자연의 질서와 조화 가운데서 만물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결국 욥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우리 인간이 다 깨닫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철저하게 사랑과 공의에 입각해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며, 자신의 구원의 소망을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 인간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보라!… 누가 능히 헤아리랴?”(26:14)는 믿음의 고백으로 우리의 믿음을 성숙시켜가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들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