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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원문보기 글쓴이: boly
내면의 판을 갈아 선경禪境을 찍는 그림수행
- 김준권의 수묵목판화의 길 -
김진수 / 화가
그림이든 삶이든
‘조화’이기 이전이라면
끝까지‘싸움’인 것이 진실
이기는 하다. 어쩌다 젊은 날에 변혁의
시대를 만나 초반 민중미술운동에 동참하였고,
교사로서 교육운동을 따랐으며, 같은 시기에 판화운동을
벌였고 오늘날 늙어 시골 창가에 앉은 것 하면 동시대 나와 이만큼
어슷비슷한 벗도 없지 않나 싶다. 다만 내 걸음새가 안짱다리라면 그의 뽄새는
밭장다리가 확실한 대목에서 길이 갈린 듯. 내가 광주에서 나니 그는 영암에서 났고,
내가 지방 대학을 다니자 그는 수도 서울을 나왔고, 내가 복직하자 그는 직을 던졌고, 내가
수묵으로 먹을 갈 때 그는 다색으로 판을 갈았고, 내가 통기타를 치면 그는 꽹과리를 뚜드리고,
내가 섬과 산골의 풀 약을 일삼자 그는 일본과 중국의 학업을 즐겼으며, 내가 아초에 쓰던 유화나
아크릴화로 돌아왔을 때 그는 어느덧 우키요에와 수인에 도달했다. 내가 나를 지키고 아끼는 방식의
날카롭고 선명한 언어로서의‘싸움’을 저간에 김준권의 작업을 바라보며 아껴 사용하고 싶다. 이는
그가 끈질기게 이끌어온‘자재로운 도전’에 대한 내 공부와 경의의 표현이기도 하다. 아무쪼록 그
림쟁이가 제 뼛속에 아우성인 恨이든 오기든 간에 한번 분지른다면, 김준권 어치는 또깍 되어야
한다. 내가 실은 누누이 인정하고 끄덕이던 것이 속내에 있다면 바로 이런 것들이기도 하다.
악산의 봉우리나 인적 없는 벼랑 끝에서 몸을 내던지는 칼새 한 마리의 삼매에 들어보는
거. 아, 고혹한 데가 있는 풍경이 그의 등 뒤에서 맑게 바라보인다. 내가 지금 비산비
야에 터를 잡고 갤러리며 연구소를 짓자 커니, 이제라야 남길 것들로 몇 건지자
싶다 커니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지난 십 수 년 사이 김준권이 그걸
이루고 있었다. 공간과 시차를 두고 함께 늙는 미소가 입가에 새콤하
다. 氣가 세니 그는 오래 살겠고 나는 동안 약초를 달였으니
이제 화실난로에 장작을 넣고 불을 댕길 차례. 아름다움
이든 행복이든‘완성’이기 이전이라면 끝까지
‘싸움’인 것이 분명 진실이기는 하다.
2010.10.13. 김진수
위 ‘꽃병’은 내가 운영하는 포털사이트 ‘다음’ 카페 <전남들꽃연구회>에 소개한
화가 김준권의 수인목판화전시회 《먹으로 찍어낸 허정의 산수미 - 이태호》의 맨 아랫단에 적은 에필로그다.
동시대 청춘을 고스란히 미술운동과 교육운동에 바친 그와의 전우애도 있고
이제부터 일껏 함께 늙어갈 ‘노인’도 있어 어쩌나보자 하고 한가로이 던져놓은 낚싯대였다.
“김형! 나 5월에 전시회 허는데 발문이나 하나 쓰소. 거 도자기도 참 이쁘던데~” 김준권이 내 미끼를 깨물어주었다.
바야흐로 우리는 침묵을 깨고 저 80년대를 건너 어언 30년의 강물 위에 도도록한 우정의 무지개다리 하나를 놓게 되었다.
그가 노는 충북 진천을 찾았다. 내 주름살은 한참 흐려도 늙수그레한 그의 수염은 확실했다.
우리 나이가 서로 얼마나 먼 데를 휘돌아온 철새들인지...
그의 공방에는 자고새면 직장에 가야하고 종일 그 일에 묻히고 돌아와 또 자식과 마누라에 잡히고
번거롭게 술벗들에 에워싸여 있는 자들에서는 가질 수 없는 품격의 것들로 가득했다.
깔끔하다는 그의 공간은 이미 갤러리와 아틀리에와 방구들의 경계가 사라진 듯 작품들로 넘쳐났다.
사실 모든 미술가들은 이렇듯 집도 되고 작업실도 되면서 갤러리도 되고 카페도 되는 ‘만득한’ 공간을 꿈꾸며 산다.
아침에 흰 눈이 소복 쌓인 창가로 장작난로를 피우고 까치들 까작거리는 소리 외엔
가치작거리는 것 하나 없는 공간에서 날밤으로 사무치고 싶은 붓동가리들을 살아간다.
김준권은 뭇 가난한 화가들에 감사해야한다. 그러매 타고난 근기도 앞장서는 발등도
오늘날 그를 떠받든 질료며 서책들 앞에서도 넙죽넙죽 절을 해대야 한다.
그래야 ‘흰수염바다오리’의 그대 예술이 일본도 중국도 아닌 한국의 텃새로
진천군 백곡호숫가 모래톱에 남아 오래 사랑받지 않겠는가.
골목에서 광장으로 저자와 들판에서 산과 바다로 움직이며
스스로 숙제를 내이고 혼자 구시렁거리며 풀어나갔을 그의 근작들을 건성건성 들춰보았다.
음식이라고 다를까. 똑같이 칼을 들었지만 손맛은 저만의 노하우이고 특장이며 단골인 것.
낮에 그와 나눈 한방백숙오리집 아짐도 김준권과 퍽 닮은 손맛을 내어 여간 슴슴하고 칼칼하며
뭉근하고 담박한 것이 아니었다. 나오면서 나는 친구의 손가락을 좀 보자 했다.
나란히 갖다 댄 두 손가락은 칼을 쥐는 오른손 엄지가 기형적으로 컸다.
버드나무 아래
‘민중판화’ 이후 오랜 기간 김준권의 그림은 반벙어리가 되었다.
간혹 멀리 새떼가 날지만 기류는 없어 보이고, 풍경은 남되 풍경 속에 의당 깃들어있어야 할 인간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공기는 차고 햇살은 무거우며 빗줄기도 눈발도 풀잎을 스치는 바람 한줌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었다.
정말이지 80년대 초반 미술운동에 이어 교육운동기까지는 몰랐던 그의 고독과 정적의 입냄새가 지독했다.
가령 그가 인간 대신에 자주 등장시키는 소나무야 그렇다 치더라도 어쩌다 한번 선보인 ‘능수버들’에서까지인가!
전교조 복직이 이루어졌던 1994년 판화 『버드나무 아래』를 보고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천안 삼거리 흥흥, 능수야 버들은 흥흥, 제멋에 겨워서, 휘늘어졌구나 흥흥’ 경기민요도 있고,
바람에 흔들리는 실가지가 여인의 허리처럼 나긋나긋하고, 그리운 남녀가 연둣빛 교태로 사랑하고 헤어지는 나무인데
그의 늘어진 버들가지는 마치 커튼을 드리운 듯 한올의 바람결도 화면 안으로 허용하지 않았다.
역사는 그리되 안타까운 곳. 고향은 그리되 허전한 곳. 학교는 그리되 돌아가지 않을 곳.
마을은 그리되 인적 없는 곳. 꽃은 피되 향기 그친 곳. 새는 날되 미조迷鳥의 기항지...
글을 쓰기 전에는 대강이던 이런 의문들이 발문을 빌려 다시 들여다보니
그의 시간의 켜와 그의 공간의 주름이 내 옛 시에서처럼 쓸쓸했다.
이는 동시대 민중미술에 앞장섰던 벗들의 베껴 쓴 일기장 같은 것이기도 한데,
그대는 무엇을 애태우며 해 저문 강가에서 별만 띄우는가.
보이던 것들이 사라지고 모였던 것들이 다 흩어질 때까지 물수제비를 뜨며 아득히 먼 새떼를 바라보는가.
강가에 서면
빈 들을 서성이는 노을처럼
철따라 주홍 날개를 꺾는
쓸쓸한 꽃자리가 있다.
개똥불처럼
가물거리다 별 하나는 돋고
아무렇게나 되어 날아가는
돌팔매도 있다.
강가에 서면
아주 먼 데로 휘돌아가는 새들이 있고
소금쟁이처럼 물 위를 떠도는
허튼 맹세 같은 것들이 있다.
졸시 ⌜미조迷鳥 2 - 강⌟
한 때 거리와 광장을 부추기던 군중은 차차 세월의 풍경 속으로 잦아들고, 철새처럼 그도 참으로 먼 길을 휘돌았다. 우수와 고독과 적막과 부동은 민중시대 이후 그가 사랑한 미궁迷宮의 벗이었다.
나는 그의 수묵 위주의 근작 목판화를 보면서 이전의 유성의 ‘다색’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움으로 설레기 시작했다.
귀티 나는 단색조의 중색효과에 공기원근법적 투과성이 이끈 여리고 감각적인 화면들이었다.
일반적으로 수묵화가 붓털에 의탁한 유연한 선이나 선염의 맛이라 한다면
그의 수묵인水墨印은 절제된 형상과 맑은 색면으로 가다듬은 담미의 호흡이다.
숭덩숭덩한 이미지의 목판화와 산들산들한 느낌의 묵화가 각각 제 영역에서
더 나아가기를 주저하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있었다.
예의 이런 작품들에도 관통하고 있는 묵언의 태도는 그러나 말길을 잃었던 과거의 것과는 완연히 달라진 느낌이다.
이곳에는 사람이 서 있지 않아도 되었으며 새를 날리지 않아도 되는 무언가가 숨을 쉬고 있었다.
『島』연작에서 나는 사실주의적 가치관을 옹호한 마음자리를 보았고 그의 판화날개 30년의 휴식도 보았다.
떡칠한 유성 프린팅에서는 맛볼 수 없는 가뿐하고 상쾌한 먹빛의 감색減色!
선이 사라진 자리에 단아한 면이 들어서고 면이 포개지는 섬과 섬 사이를 안개처럼 고요히 여백이 다녀갔다.
모든 인간적 배경을 거둔 선경仙景이기도하거니와 안개 속에서 옷을 벗은 세속의 풍경이기도 하다.
이곳이 그가 다다르고자 했던 종래의 판화경版畵境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목판이라는 물성의 한계이면서 목판만의 고유한 진화가 그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
이번 전시회에 또 그가 내인 판화들은 『靑竹』 연작이다.
대나무가 외투를 입은 청회색빛 ‘겨울’을 벗고 야들야들한 연초록빛 ‘봄’으로 새 단장을 하였다.
종종 그의 주제는 소재 속에 녹아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대상이 가진 상징의 언어는 결을 따르되 결코 과장하지 않는다.
그저 그것이 거기에 있어 날마다 그것을 따라 읽고 만지고 그리고 즐기며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대나무도 그렇다.
머리오리는 소쇄하니 바람을 쓸고 가슴은 텅 비어 무심한데 사계절 곧은 그림자는 밤마다 달빛을 희롱한다.
나무도 아니요 풀도 아닌 비목비초非木非草의 한 가운데를 살아 백년에 한번 꽃을 피운다면
어찌 새 세상의 봉황을 못 부를까! ‘봉황새’는 중국 최초의 황제인 황제黃帝 때 나타났다고 하여 전설이 되었다.
봉황은 출현할 성군을 위해 나타나고 대나무는 그 봉황을 맞이하기 위해 열매
(봉황새가 유일하게 먹는다는 ‘죽실’)를 예비한다는 ‘각본’.
대나무의 초고속 생장력(하루에 60~100cm를 자라 약 3개월 만에 성목이 된다.)이나,
마치 달이나 갈대 같은 것이 긴 세월을 치르는 동안 해뜩 변해버린 듯 기묘한 식물이라는 점도 관심거리지만
대나무다움은 역시 마디 속이 텅 비어 있는 ‘공동空洞현상’과
백년 만에 한번 꽃을 피우고 모두 죽는 미스터리의 ‘개화현상’에 있다.
단 한번 지핀 불길에 목숨을 건다? 사랑 말인가 깨달음 말인가...
그의 또 다른 연작 『산에서...』도 마찬가지다.
화면 구성으로 보자면 텅 빈 하늘에 매지구름 한 뗏장이라도 올려붙이고 싶은 충동이 이는데,
낮은 등성이마다 마치 어깨를 결은 사람들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물결처럼 포치하여 ‘땅의 근거’를 버리지 않았다.
만일 여기에서 조금 벗어나 구성주의적 데포르메로 커서를 옮겼더라면 힘들게 얻은 여백을 잃었거나
작품에 우려낸 피 같은 역사도 창백해졌을지 모른다.
모름지기 인간이 사는 이 평범한 공간과 원근이 주는 최소한의 긴장을 내려놓지 않는 바탕에서
비로소 그의 묵음과 여백은 뜻을 이루고 있었다.
작가는 산이면 산, 들이면 들, 나무면 나무가 인간군 위에 포개지고 있다는 내심을 들키고 싶지 않다.
이도 다분히 산의 기호와 힘이면 되었고,
대지 또는 자연이 제시하는 원시적 미감을 휘어잡는 것으로 충분해야하는 것이다.
짐작 컨데 18년전 교단의 복직을 거부하고 떠났던 중국행과
그 연장에서 힘입은 수묵水墨목판화의 방법론은 자신의 예술인생의 변화를 예감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낮게 깔았던 그의 눈꺼풀은 작품『霜降』에서 서서히 떠올라 마을을 지나 언덕을 오르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겹겹이 심원법으로 조감鳥瞰한다. 그의 다른 쪽 눈자위 하나는 또
바다 한 가운데로 풍덩 뛰어내려 수평선 멀리 작은 섬들로 시원스럽게 판을 갈아치웠다.
지난 다색판화류의 서양 회화적 정서로부터 돌아와 수묵의 본성으로 깨어난 듯
그가 새로 얻은 자기 공명적 도안은 이즈음에 단연 주목받을 만한 것이 되었다.
명지대학교의 이태호 교수는 그의 작품을 ‘묵음의 선미禪味가 물씬’ 한 ‘허정虛靜의 산수미’로 압축했다.
마치 칼과 목판 사이를 내리친 죽비소리로 바람 한 점 없는 묵음의 화두삼매에 빠진 듯하다.
선禪은 혓바닥이 필요 없는 세계다. 그의 ‘다색’에서부터 이어져 온 ‘말없음부호’의 찌랄까,
필경 담채형 산수미의 도달로 그가 동안 잡고 싶었던 물고기는 거의 다 낚은 듯하다.
김준권의 대나무 연작은 말하자면 이런 대나무의 유래와 성상과 빛깔을 무심히 껴안고 돈다.
그는 목판 위에 칼춤을 추면서도 무난하고 냉정하며 고독하다.
그가 그리고 파고 찍는 노동의 형태가 그러하고
묵언의 대화법을 감추고 있는 저 대나무 속 같은 ‘공동空洞의 마음’이 그러하다.
소나무와 버드나무의 중간에 놓인 다리쯤 될까, 조금 낭창낭창하다 싶지만
그렇다고 어떤 ‘바람’을 기대한 것은 아니니 이번에도 그는 과묵한 편이다.
가늘고 긴 대나무의 줄기든 가벼운 잎사귀든 그 그늘이든 그 볕이든 한 데 묶어 매 순간의 움직임을 차단한다.
대나무를 소재로 한 여느 수묵화들이 마치 대여섯 자의 거리를 두고
부분적으로 죽간의 크기와 길이를 정한 다음 잔가지와 이파리의 필력을 다듬는 짜임으로 흔했거나,
더러 뒤란이나 마을을 에워싼 대숲을 먹 번짐과 함께 넓게 담아내는 것들이었으되
아직까지 칼로 무수히 색점을 뜬 사례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가 몇 걸음 중경으로 물러나 전체 대숲을 잡아내고자 한 이유를 알만하다.
작품 『대나무 숲』에서 보듯 화면 하나를 댓잎의 파노라마로 즐기는 그의 한가로움이 멋지지만
숲 전체를 압도하며 정말 판각으로 도전하고자 한 담력과 그의 장인적 포부에서는 차라리 질린다.
그가 동시대 그림쟁이로서 80년대 이후 걸어온 길은 과시 솔숲 같고 대숲 같다.
그니까 ‘무심코 새기는 대나무 풍경 한 컷의 사실성’이야말로 “나무면 뭐하고 풀이면 뭐하냐.
사람이 무엇의 이름을 부르면서부터 분별하고 쪼개고 멀어지는 거 아닌가!
그러니 너희들은 더 이상 싸우지들 말고 그냥 열심히 살아라.”가 깔려있다.
곧 언어 이전의 자리로 돌아가 하나가 되자는 말씀이
금번 대나무그림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준권씨의 밑그림일 가능성이 높다.
마음에서 깊이 걸러진 것의 시적 아포리즘과 사실미의 메아리가 그 근본에서 다르지 않다.
그의 그림은 사의寫意와 사실寫實의 뿌리가 하나임을 보여주었다.
판각제판의 삼매三昧에 빠져드는 순간 몰아沒我하고 입도入道하는 것이다.
첫댓글 대단하신 솜씨네요. 입이 딱 벌어져요.
저두요 여영선생님
몰두하는 정신이 느껴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