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한국고전번역원》
아래 <조원평(棗垣坪)>의 註를 보면 신니면 원평(院坪)으로 보는데 이는 잘못이다. 신니면 원평리(院坪里)는 1914년 원대리(院垈里)와 광평리(廣坪里)에서 한 字씩 따서 만든 신니면의 法定里 중 하나다.
원(垣)은 담장(墻)의 뜻이다. 조원(棗垣)은 대추나무 울타리란 뜻이고 坪은 들이다.
[조원평에는 푸른 하늘이 끝없이 펼쳐지네 /靑天不盡棗垣坪]라고 채제공은 읊었다.
<대추나무가 담처럼 둘러친 곳의 들 위에 푸른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고 풀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원(垣)은 관아(官衙)의 뜻도 있다. 조원평(棗垣坪)이 지명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㺚川路中<時自屛山衙入京>,
병산을 떠나 서울로 들어가고 있었으므로 원(垣)을 원(院)으로 보면 조원평(棗院坪)의 조원(棗院)은 지금 대소원면 소재지에 있었다는 경제원(敬濟院)이며 대조원(大棗院)으로 여겨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주목 역원(驛院)에 보면
[龍頭院。在州西十五里。
敬濟院。一名大棗。在州西三十里。
경제원(敬濟院) 일명 대조(大棗)라고도 한다. 주 서쪽 30리에 있다. ]
라고 나온다. 후에 대소원(大召院)이 되었고 대소원 면소재지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여러 읍지(邑誌)를 검토하면 이웃에 있는 金谷里와 거리가 재주서삼십리(在州西三十里)로 같으므로 경제원은 대소원(大召院)이 맞다.
대소원(大召院)을 달리 부르는 이름으로 <대초원, 대춘, 대촌>이 있고 <웃대춘>이란 지명도 보인다. <대초, 대촌, 대춘>은 대추(大棗)의 변한말로 대추니(니는 접미사)가 대촌, 대춘으로 변했다고 볼 수 있다.
훈몽자회에는 棗 대초 조로 써있으니, 대초로 발음했다. 대촌은 한자로 대촌(大村)으로 쓰기도 했다. 敬濟院이란 이름이 있었으나 대초(大棗)라는 말이 살아 남은걸 보면 토박이들은 대초라 했고, 경제원은 官에서 붙인 이름이다.
이는 근처에 있는 마산봉수(馬山烽燧)를 봉화산(烽火山)으로 부르는 것과 같다. 지역민들은 봉화둑산, 봉오독산으로 부른다. 대소원 면소재지에 가면 흥미롭게도 한자를 다르게 쓰지만 대춘(大春)이라는 중화요리점이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추는 한자 대조(大棗)에서 왔고 大棗로 쓴다. 멧대추는 산조(酸棗)로 쓴다. 그럼 대소원(大召院)의 소(召)와 대추(大棗)의 조(棗)는 무슨 관계일까? 召는 <부를 소>자도 되지만 <대추 조>자도 된다. 棗와 召는 성조(聲調)가 다를뿐 현대중국어 표준발음이 <짜아오>로 같다.
경제원(敬濟院)에서 대조원(大棗院)으로, 대소원(大召院)으로 변한 것이 지금 대소원면의 명칭 유래가 되었다. 이제 원래로 돌아가 채제공의 漢詩에서 조원평(棗垣坪)은 대조원평(大棗院坪)의 줄임말로 볼 수 있겠다.
번암집(樊巖集)/번암집 제8권
시(詩)○재필록(載筆錄)
달천 노중에〔㺚川路中〕
당시에 병산 관아에서 서울로 들어가고 있었다.
번역문
서리 내린 물가에서 피리 부니 북풍 이는데 /
霜洲吹角北風生
연나라 축은 달천 강가에서 아련히 우누나 /
燕筑依俙㺚水鳴
임경업 장군의 쇠갑옷은 지금도 전해 오고 /
金甲尙傳林慶業
조원평에는 푸른 하늘이 끝없이 펼쳐지네 /
靑天不盡棗垣坪
해를 이은 정역에 말 달리니 절로 우스워라 /
驅馳自笑連年役
날의 장단을 견주는 마음을 누가 가련해하랴 /
長短誰憐較日情
서기의 공명을 이루려 처음으로 검 배우니 /
書記功名初學劍
앞으로는 문장의 명성을 진정 후회하련다 /
向來端欲悔文聲
[주-D001] 병산(屛山) …… 있었다 : 번암은 북평사로 제수될 당시 모친의 병환이 위중하였으므로 병구완을 위해 병산에 머물고 있었다. 병산은 곧 비안(比安)으로, 번암의 부친 채응일(蔡膺一)이 비안 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주-D002] 연(燕)나라 …… 우누나 : 전국 시대 연나라 태자 단(丹)의 부탁을 받고 형가(荊軻)가 진 시황(秦始皇)을 죽이러 떠날 때 그의 절친한 벗 고점리(高漸離)가 축(筑)이란 악기를 두드리며 “바람이 소슬함이여, 역수 물이 차도다. 장사가 한번 떠남이여, 다시 돌아오지 않는도다.[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라고 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荊軻》 번암이 북평사로 부임하면서 마침 달천(㺚川)을 지나게 되었으므로 비장한 감개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주-D003] 임경업(林慶業) …… 오고 : 충주(忠州) 달천(㺚川)은 조선 후기의 무신 임경업(1594~1646) 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1697년(숙종23) 임경업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 세워졌고, 1727년(영조3)에는 충렬사(忠烈祠)로 사액(賜額)되었다. 이 시구에 따르면, 번암 당시에 임경업 장군의 갑옷이 전해 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D004] 조원평(棗垣坪) : 어디인지 미상이나, 현재 충주시 신니면에 ‘원평(院坪)’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으므로 그 부근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주-D005] 해를 …… 우스워라 : 전년인 1753년(영조29) 1월에 충청도 암행 어사가 되었다가 지금 다시 북평사에 임명되어 변방으로 가는 신세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6] 날의 …… 마음 : 부모님은 연로하여 모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군주를 섬길 날은 앞으로 많은 상황에서 항상 관직에 매여 있는 심정을 표현한 말이다.[주-D007] 서기(書記) : 북평사가 무관(武官)인 병사(兵使)의 휘하에 있는 문관이기 때문에 서기라고 표현한 것이다.
원문
㺚川路中
時自屛山衙入京
霜洲吹角北風生。
燕筑依俙㺚水鳴。
金甲尙傳林慶業。
靑天不盡棗垣坪。
驅馳自笑連年役。
長短誰憐較日情。
書記功名初學劒。
向來端欲悔文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