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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1-11 아브라함 때에
이삭의 가족이 흉년으로 아비멜렉이 통치하는 영역 불레셋 땅 그랄 지방으로 이주합니다. 이것은 적지 않는 고생인데 인류 공통으로 당하는 고난에 하나님의 백성도 참여하게 되는 바 그 고통이 더 극심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여기 아비멜렉은 그곳 왕조의 이름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과 같은 이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은 막으십니다. 그리고 이삭이 그랄에 거하는 중에 당하는 시험을 물리쳐 주십니다. 이삭의 실수에까지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돌보아 주심이 역역합니다.
1. 본문 1절은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입니다.
이제 이삭은 아브라함이 두 번씩이나 겪였던 그와 거의 같은 종류의 시련을 겪게 됩니다. 이미 앞에서 이 재난의 피해가 얼마나 극심한 것인가를 설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종들에게 기꺼이 허락한 그 상황은 하나님은 그 땅을 주되, 그들이 거기서 나그네와 순례자와 같은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대단히 고생스럽고 어려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참기 어려운 것으로 보이는 일은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렇듯 방황해야 하고 불확실하며 변화무쌍한 그러면서도 굶주림 때문에 거의 죽을 지경인 그런 삶을 살도록 버려 두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에서 옵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도 못 먹인다 해서야 누군들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이전에는 가까스로 먹고 살 정도이긴 했어도 하나님은 그들을 특별히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종종 이런 식으로 성결한 조상들을 시험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본을 보고 시련을 당하더라도 비굴하게 겁을 먹지 않아야겠습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용어를 살펴보면 아브라함의 시대에는 두 차례 기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가장 최근에 있었던 한 사건만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2. 본문 2-4절은
“②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③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④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입니다.
1) 본문은 이삭이 아마 그에게 더 형편이 좋은 애굽으로 가지 않고 그랄 지방으로 갔는지에 대한 이유를 말해 주는 것이 분명합니다.
모세가 여기서 가르쳐 주는 것은 이삭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 선택이 그에게 주어져 있지 아니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가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는 그리로 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삭에게는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모세는 그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있다면 그 여행이 이삭에게 더 큰 위험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물론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처럼, 그 아들에게도 성령의 권능을 부여 하시사 애굽의 풍요와 세련미의 유혹으로 그를 타락시키지 않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신실한 백성을 대단히 온건하게 통제 하시사 그들의 잘못을 한꺼번에 시정하사 온전히 순전하게 하시지는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빠질 만한 악, 그들의 약점을 적절한 대응책으로써 도와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보다는 야곱이 더욱 연약하다는 것을 아시고 그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방치하지 않으려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자기 백성에게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아니하십니다(고전10:13). 이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우리에게 닥치는 시험이 아무리 가혹하고 고되더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우리 원기를 새롭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함부로 위험에 돌진해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람은 각자 자기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행동해야됩니다.
2) “땅에 거하라”는 말씀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약속된 땅에 정착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나그네로서 거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땅을 차지할 때가 아직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된 유산에 대한 소망으로 이삭의 마음을 붙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에 이 같은 영예가 주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즉 이삭이 외부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내적 안식을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진실로 우리 눈앞에 있는 현실을 초월하여 전적으로 여호와와 그분의 말씀을 의지하며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복을 신앙으로 깨닫는 것이 우리의 최대의 힘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전 약속을 다시 말씀하셔서 이삭이 더욱 신속히 복종하도록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종들로 그들의 탐닉에서 일깨우사 하나님을 위해 용감히 투쟁하게 하십니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아니할 것을 끊임없이 확증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롭고 자발적인 복종을 요구하십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자식에게 하듯 우리 능력의 미약성을 하감하시사 보상에 대한 전망으로써 우리를 독려해 주십니다.
3. 본문 5-6절은
“⑤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⑥ 이삭이 그랄에 거하였더니” 입니다.
모세의 말은 아브라함의 순종은 하나님 약속이 재 확증되는 이유가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앞에 나온 말(22:18)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신실한 자들에게 무상으로 주시는 것이 때로는 본인들의 공로를 초월하여 그 당사자들에게 귀속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뜻이 여호와에 의해서 긍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더 열심히 하나님의 일에 전념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삭에게 아브라함의 본을 따르고 싶은 충동을 일으켜 주기 위해서 이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순종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은 율법, 법도, 의식, 계율, 그리고 의식법이 글로 기록되지 아니했지만 모세는 그러한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기 삶을 대단히 성실하게 규제해 나갔다는 것을 보다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아브라함이 이방인들의 부정한 행위를 얼마나 주의 깊게 삼가 왔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성결의 길, 곧바른 길을 추구해 나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종종 우리의 지나침을 제재하시기 위해서 자기 율법에 이 같은 호칭을 붙임으로써 그것을 영예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마치 그분께서 내신 율법은 완전한 것이라서 절대 성결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다 함축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합당하게 그의 삶을 영위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순히 하나님의 사업에 헌신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3. 본문 7절은
“그곳 사람들이 그 아내를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나의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곳 백성이 리브가로 인하여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나의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입니다.
모세는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과 똑같은 유혹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삭은 자기 아내를 빼앗길까봐 겁이 났습니다. 의심할 것도 없이 그는 아버지의 본을 따랐습니다. 그러므로 주위 사정이 비슷함을 알고는 믿는 마음으로 아버지가 한 대로 하려 했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는 아버지의 실수를 모방하기 보다는 피하는 것이 옳았었습니다. 분명히 자기 어머니 사라의 정절이 두 번씩이나 큰 위험에 처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녀가 하나님의 손으로 기적적으로 구출되긴 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들의 불신에 대한 처벌을 받았었습니다. 따라서 이삭의 태만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했기 때문입니다. 이삭이 분명한 말로 자기 아내를 부인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비난을 받아야 됩니다.
첫째는, 그는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거짓말이나 다름없는 짓을 했습니다. 둘째는, 아내를 부부의 헌신에서 해제시켜서 간음할 위기에 처하게 했습니다. 셋째로, 무엇보다도 그의 실수를 악화시키는 점은 그가 집안의 사례에서 경고를 받지 않고 자기 아내를 자진해서 큰 위험에 빠지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 본성이 얼마나 심히 하나님을 불신하는 데로 향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난경에 처해서 지혜를 잃어버리는 일이 얼마나 쉬운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수많은 위험으로 사방을 포위 당할 때는 성령의 도우심을 간청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마음이 나약해지거나 겁을 먹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곧 후회하고 말 헛된 생각으로 말하고 번번히 행동하게 됩니다. 그럴 때는 구제책도 이미 너무 늦어지고 마는 법입니다.
4. 본문 8-9절은
“⑧ 이삭이 거기 오래 거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⑨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 하였음이로라” 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인내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의 종의 실수를 두 번이나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신속한 구제책을 펴시사 자기 종이 스스로 저지른 악을 놀랍도록 제거하셨기 때문입니다. 실로 아브라함에게서는 두 번이나 있었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내가 아브라함의 품을 떠나도록 묵과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방인의 왕을 감동시키사 그가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의 우매한 행동을 시정하도록 유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에게 자비의 본을 보이심으로써 신실한 자들은 그들도 언제든 넘어질 수 있지만 하나님이 온유하고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언제나 발견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당시 지상교회의 유일한 어머니였던 거룩한 여인은 특별한 대권 때문에 치욕을 면하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반면에 아비멜렉의 판단에 따르면 이삭의 처신은 지극히 경건하고 순수하여 아무런 악의도 의심할 수 없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 시대에 비하면 당시에는 정직한 자들이 더욱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삭이 누이라는 말로써 음흉하게 강요를 하고 고의로 그녀가 아내라는 사실을 부정했을 때 이미 어떤 범행이 은폐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이 음행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비난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그의 신앙과 그의 삶의 정직성이 그의 성품을 변호해 줄 수 있다고 봅니다. 이 실례를 통해서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삶 전체를 통해 의를 연마함으로써 우리를 조금이라도 사악하게 또는 불명예롭게 여길 수 없도록 해야 됩니다. 겸손과 절제 이상으로 우리 명예를 지켜 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음행이 그렇게 보편화되지 아니했기 때문에 왕도 정직한 나그네를 필요 이상으로 의심하는 생각을 갖지 아니했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 왕은 리브가가 부인이요 창부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쉽게 믿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그 지역 인근 사람들의 성숙성은 이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가 친밀히 노는 것은 그들이 결혼했다는 증거로 아비멜렉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같은 방황이 모든 속박을 파괴시켰기 때문에 남편들은 제 아내들이 낯선 자와 비행을 범했다는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만 있어야 하게끔 되었습니다.
5. 본문 10절은
“아비멜렉이 가로되 네가 어지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하기 쉬웠을 뻔하였은즉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입니다.
여호와는 마땅히 그랬어야 하지만 이삭을 징책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그는 그의 아버지처럼 커다란 인내심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가 아내를 빼앗기면 크게 상심할까봐 하나님은 자비롭게 사전에 그 일을 방저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방인으로 그의 주인과 그를 견책하는 사람으로 삼으신 것이 더 큰 책망이요 더 깊은 수치를 주었을 것입니다. 아마 아비멜렉이 해칠 의도에서가 아니라 나무랄 의도에서 이삭을 책망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건한 사람은 자기 잘못이 이교도의 판단에도 혐오스러운 짓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어둠에 둘려 싸였을 때라도 불신자들이 우리의 우매한 행동을 비웃지 아니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밝혀 주신 광명의 길을 가야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음성을 청종하는 일을 소홀히 할때는 소나 나귀에게 가서 배워야 마땅합니다. 아비멜렉은 이삭의 전 과오를 규명하거나 심문하지 않고 단지 그 일부만을 암시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한마디 말로 점잖은 충고를 들었을 때 자신과 아내의 변호인이 되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던 하나님께 자신과 아내를 맡기는 대신에 자기 불신에 의해서 불법적인 대응책을 의지한 자신을 깨달아 스스로를 책망했어야 했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한계를 지키도록 우리를 삼가도록 해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위와 허락을 벗어나는 일은 신도하지 않도록 해줍니다. 따라서 이삭이 남편의 의무를 이탈해 나가기 시작하자 이미 그의 신앙도 흔들거리게 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또 아비멜렉의 말을 미루어 보건대 모든 민족은 신성한 결혼을 파괴하는 것은 신의 진노를 살 범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자초할 것이라는 두려운 심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짙은 구름으로 인심이 어두워져 있으므로 사람들은 종종 기만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악을 분간하는 어떤 힘을 남겨 두시사 각자가 자기가 당하는 일을 책임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변명하거나 핑개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불신자들까지도 자기 법정에 소환하여 정당한 정죄를 피할 수 없게 하신다면 하물며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우리 신앙에 새겨 주신 지식을 우리의 악한 의지로써 고의적으로 외면하려 한다면 우리를 기다리는 벌은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6. 본문 11절은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나 그 아내에게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입니다.
이 나그네들을 침해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것을 발표한 것을 보면 아비멜렉은 이 칙령을 특수한 권한으로 반포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권리 침해가 그렇게 가혹한 벌을 받는 것은 일반 관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어떤 위엄이 그에게 나타나 이 같은 존경심을 불러 일으키지 아니했다면 어디서 그가 이삭을 모든 자기 주민들보다 더 좋아하거나 똑같이 대할 마음이 생겼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역시 자기 종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서 이교도 왕의 마음을 움직이사 어디서나 이삭에게 호의를 보이게 하셨습니다. 이삭의 일반적인 겸손이 왕으로 하여금 그를 사려깊게 보호하도록 조처하게 동기를 만들어 주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삭 그는 자기 아내를 향해서 자기 목숨을 살 정도로 겁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을 안 아비멜렉은 더욱 그를 그 위기에서 돕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통치 밑에서 안전히 살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통치의 손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얼마나 긍휼히 여기시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이 같은 성품으로 자기 택하신 자들, 곧 교회를 돌아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