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몇 년 전부터 반재경 전도사님이 작성한 글이며 매년 교정 및 첨삭하여 올리고 있습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위와 같은 말씀을 읽을 때, 오히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패배감을 느낍니다. 우리 자신에겐 이렇게 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든, 성인이 되어서 주님을 만났든,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고민은 아마도 성경의 명령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일 겁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뜻대로 살고 싶지만 그렇게 할 능력도 없거니와 가끔은 자신에게 그렇게 할 의도조차 결여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할 능력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고...
쉽게 말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임을 알면서도 좀처럼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많이도" 발견하는 것 같은 상황 말입니다.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할 능력이 없어서 하지 못하는 경우 말고요 애초에 사랑하지 않기로 결정해 버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때는 "오, 주여 마음에는 원이지만 육신이 약합니다."라는 변명도 못 합니다. "주여, 저 사람 좀 때려주세요!"라고 하고 싶은데 참는 상황이니까요.
사랑하고 싶은데 못하는 상황이든, 애초에 사랑하고 싶지도 않은 상황이든, 괴롭긴 매한가지입니다. 그런데 제가 은혜의 복음을 배우면서 자유하게 된 것은 저 자신의 힘으로 사랑하려는 노력을 그만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되도록 빨리,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명령을 지키고 싶은데 저 사람은 사랑하고 싶지 않아요. 도와주세요."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얼른 주님의 능력에 나를 접속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의 능력만으로도 사랑할 수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우리의 능력으로는 그 어떤 누구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비교적 사랑하기 쉬운 사람들은 아마도 별로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일 겁니다. 원래 사랑스러운 사람들이죠. 그래서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고요.
진짜 사랑은 그 사람의 유익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은 구하지 않습니다(고전 13:5).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것을 우리는 '섬긴다'고 표현합니다. 바로 상대의 종이 되는 것인데, "내가 니 종이냐?"와 같은 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종이 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종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와는 아담의 돕는 배필이었는데, 돕는 배필이라고 하면 얼른 조수나 비서가 생각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자감으로 '현숙한 돕는 베필을 구한다'고 말하는 형제들을 보면, '아이구... 자기만 도와 달라네. 이기적인 사람이구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여기서 "돕다"라는 동사는 다음과 같이 쓰였습니다.
(시 121:1)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즉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는 그 도움이 바로 돕는 배필의 "에제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서는 돕는 자들(섬기는 자들)이 더 큰 자라는 말이 합리적으로 이해가 됩니다. 그 도움이란 마치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 것과 같은 섬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래의 예수님 말씀은 말장난이 아닌 것입니다.
(마 20:26)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섬기는 것은 큰 자가 할 수 있는 일이고 종이 되어 섬기는 것은 으뜸인 자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늘 아버지의 축복"에서도 잠깐 나눴지만 에서의 장자됨과 그의 축복을 둘째에게 넘겨준 것이 예언적으로는 예수님의 섬김을 예표한다고 생각합니다. (에서의 육신적인 면 제외)
(창 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즉 하나님의 첫 열매(장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릴 섬기신 것이며 그분은 우리의 도움이신 하나님 그분 자체이기 때문에 이 모든 논리가 딱딱 들어맞는 것입니다. 할레루야!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종의 형체를 입고 타인을 도우며 섬길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나의 정체성을 알 때만 가능합니다. 내 안에는 하나님의 영이 계시고 이 영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도와주실 때 주시는 그 도움을 가지고 계시며 그것은 나를 통해 밖으로 나가길 원한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이타적인 마음으로 타인을 섬길 수 있습니다. 즉, 내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타인을 돕는 하나님의 섬김이 나를 통해 표출되는데, 그때 기쁘게 나를 내어 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정체성을 모르면, "내가 니 종이냐?"라는 말을 내뱉게 되는데 이것은 낮은 자존감, 즉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데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나를 무례하게 부리려는 사람에게 이용당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에겐 오히려 따끔하게 "예의를 좀 배워라"고 말해 주는 게 사랑입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존감을 가지신 분이란 것입니다. 그분의 자기 인식(자아상)은 "하나님"이었습니다.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신이 하나님임을 아셨기 때문에 자존감에 있어서 자신감이 뛰어나셨을 것이고, 그러한 자아상을 가지셨기 때문에 자유롭게 낮아지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도 내가 누군지 진정으로 알 때, 기쁘게 겸손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복음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쥐어 짜내라고 하지 않습니다! '넘치도록 주었으니 조금만 흘려보내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 놀라운 진리를 열어 보여 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