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子曰 善人吾不得而見之矣 得見有恒者 斯可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선한 사람은 내가 볼 수 없으니, 항상심을 가진 사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이것도 괜찮은 것이다.”라고 하셨다. 子曰字 疑衍文 恒常久之意 張子曰 有恒者 不二其心 善人者 志於仁而無惡 ‘자왈’이란 글자는 연문으로 의심된다. 恒은 항상 오랫동안이란 뜻이다. 장자가 말하길, “항상심을 가진 사람은 그 마음을 둘로 만들지 않는다. 선한 사람이란 仁에 뜻을 두어서 악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善人是資質好底人 自然無惡 有恒只是把捉得定 又未到善人 自然好處在 然善人有恒 皆未知學問者也 주자가 말하길, “善人은 자질이 좋은 사람이니, 자연히 惡이 없다. 恒心을 가진 사람은 그저 마음을 굳게 붙잡은 사람이지만 또한 善人이 자연스럽게 좋은 부분이 있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善人이나 恒心을 가진 사람이나 모두 아직 학문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다.”라고 하였다.
問善人是資質大 故粹美 其心常在於善道 所以自不至於有惡 有常者 則是箇確實底人否 曰 是 有常底 也不到事事做得是 只是有志於爲善 而不肯爲惡耳 善人則從來恁地好事事依本分 但人多等級 善人雖是資質好 雖是無惡 然不踐迹 亦不入於室 緣不甚曉得道理 不可以道聖人 只是恁地便住了 누군가 묻기를, “善한 사람은 자질이 위대하기에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고, 그 마음은 항상 善한 道에 있기에, 이 때문에 惡이 있는 지경에는 저절로 이르지 않는 것입니다. 항상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곧 확실한 사람이 아닐까요?”라고 하였다. 말하길, “옳다. 항상심을 가진 사람이라도 역시 하는 일마다 옳게 하는 경지에 이르지는 않고, 그저 선을 행하는 데에 뜻을 두면서 악을 행하고자 하지 않을 따름이다. 선한 사람이라면 곧 종래 이렇게 자질이 좋아서, 하는 일마다 본분에 의거한다. 다만 사람들에게는 많은 등급이 있으니, 선한 사람이 비록 자질이 좋고 비록 악이 없다고 할지라도, 이전 성현의 자취를 밟지 않는다면 역시 성현의 경지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道理를 대단히 환하게 깨우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성인이라고 말할 수 없고, 그저 이렇게 곧바로 멈추고 말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此但爲思其上者而不可得 故思其次之意 이는 단지 그 上等을 생각하였지만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 다음 것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雙峯饒氏曰 聖人是天生底 君子是學而成底 善人是氣質好底 有恒是有常守底 次乎聖人者 爲君子 次乎善人者 爲有恒 쌍봉요씨가 말하길, “성인은 하늘이 낸 사람이고, 군자는 배워서 이룬 사람이며, 善人은 기질이 좋은 사람이고, 항심을 가진 사람은 항상 지키는 사람이다. 성인에 다음가는 사람이 군자이고, 선인에 다음가는 사람이 항심을 가진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
3 | 亡而爲有 虛而爲盈 約而爲泰 難乎有恒矣 “없음에도 있는 체하며, 비었음에도 가득 찬 체하며, 작음에도 큰 체하면, 항상심을 가지기가 어렵다.”라고 하셨다.
三者皆虛夸之事 凡若此者必不能守其常也 이 세 가지는 모두 허황되고 과장하는 일이다. 무릇 이와 같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 일정함(常)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問亡而爲有 朱子曰 正謂此皆虛夸之事 不可以久 是以不能常 非謂此便是無常也 누군가 없어도 있는 체한다는 것에 대하여 물었다. 주자가 말하길, “바로 이것은 모두 허황되고 과장하는 일로서, 오래 갈 수 없기에, 이런 까닭으로 일정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지, 이것이 곧바로 일정함이 없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以亡爲有 以虛爲盈 以約爲泰 則不能常 謂如我窮約 却欲作富底擧止 縱然時暫做得 將來無時又做不得 如此便是無常 亡對有而言 是全無 虛是有但少 約是就用度上說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기고, 빈 것을 찼다고 여기며, 적은 것을 많다고 여긴다면, 항상 일정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내가 곤궁하고 적으면서도 도리어 부유한 행동거지를 하고자 한다면, 설령 잠시 할 수는 있겠지만 장래에는 無時로 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다면 바로 일정함이 없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亡은 有와 대비하여 말한 것이니, 전혀 없는 것이다. 虛는 있기는 하지만 다만 적은 것이며, 約(작음)은 쓰는 한도에 나아가 말한 것이다. |
4 | ○ 張敬夫曰 聖人君子以學言 善人有恒者以質言 愚謂 有恒者之與聖人 高下固懸絶矣 然未有不自有恒而能至於聖者也 故章末 申言有恒之義 其示人入德之門 可謂深切而著明矣 장경부가 말하길, “성인과 군자는 배움으로써 말한 것이고, 선한 사람과 항상심을 가진 사람은 자질로써 말한 것이다.”고 하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항상심을 가진 사람이 성인에 비하여, 높고 낮음은 본디 현격한 차이가 나지만, 그러나 스스로 항상심을 갖지 않고서도,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자는 아직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 항상심을 갖고 있다는 뜻을 거듭 말하여, 그가 사람들에게 덕에 들어가는 문을 보여주었으니, 깊고 절실하되 밝게 드러났다고 이를 만한 것이다.
新安陳氏曰 以學言者 兼乎質 以質言者 則未學者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배움으로 말한 자는 자질을 겸해서 말한 것이지만, 자질로 말한 자는 곧 아직 배우지 못한 자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聖人也只是這箇道理 但是他理會得爛熟後 似較聖樣 其實只是這道理 君子是事事做得去 所謂君子不器 善人則又不及君子 只是知得有善有惡 肯爲善而不肯爲惡耳 有常者又不及善人 只是較依本分 주자가 말하길, “성인도 역시 그저 이 道理일 뿐이다. 다만 그는 이해를 완전히 무르익게 한 후에 비교적 성인다운 모습과 흡사하지만, 사실은 그저 이 도리일 뿐이다. 군자는 일마다 모두 해나갈 수 있으니, 이른바 군자는 不器라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善한 사람은 또한 군자에 미치지 못하니, 그저 선과 악이 있음을 알아서 선한 것을 행하고자 하고, 악한 것은 행하고자 하지 않을 따름이다. 일정함이 있는 자는 또한 선한 사람에 못 미치니, 그저 비교적 본분에 의거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問此章 曰 吳氏曾氏說 亦得之 吳氏曰 君子蓋有賢德而又有作用者 特不及聖人爾 若善人則粗能嗣守成緖 不至於爲惡而已 非若君子之能有爲也 曾氏曰 當夫子時 聖人固不可得而見 豈無君子善人有恒者乎 而夫子云然者 蓋其人少而思見之也 及其見則又悅而進之曰 君子哉 若人 凡此類當得意而忘言 善人明乎善者也 有恒雖未明乎善 亦必有一節終身不易者 若本無一長而爲有之狀 此亦妄人而已矣 孟子所謂雨集溝澮 皆盈其涸 可立而待也 烏能久乎 曰 有無虛實約泰之分 奈何 曰 無絶無也 虛則未滿之名耳 二者兼內外 學之所至 事之所能而言 約之與泰 則貧富貴賤之稱耳 爲之云者 作爲如是之形 作爲如是之事者也 爲而無以繼 則雖欲爲有恒 不可得矣 누군가 이 장에 대하여 물었다. 말하길, “오씨와 증씨의 말이 역시 이를 잘 터득하였다. 오씨가 말하길, 군자는 대체로 현덕을 갖고 있지만 또한 작용이 있는 사람으로서, 단지 성인에만 미치지 못하였을 따름이지만, 만약 선한 사람이라면, 거칠지만 능히 이어서 지키고 실마리를 이루어낼 수 있어서, 악을 행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 따름이니, 군자가 능히 훌륭한 일을 도모할 수 있는 것과 같지는 않다고 하였다. 증씨가 말하길, ‘공자님의 시대에 당하여, 성인은 본래 만나볼 수 없다고 할지라도, 어찌 군자나 선한 사람이나 항심을 가진 자가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공자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아마도 그러한 사람이 적었고 또한 그들을 만나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을 만나보게 됨에 이르자, 또한 기뻐하고 그들을 나아가게 하면서 군자로다! 이 사람이! 라고 말하였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릇 이러한 부류에 대하여 응당 뜻대로 되어 기뻐하였을 것이지만 할 말을 잊은 듯하다. 선한 사람은 善에 밝은 자이고, 항심을 가진 사람은 비록 善에 밝지는 못하지만, 또한 반드시 종신토록 바꾸지 않는 한 마디를 가진 사람이다. 만약 본래부터 하나의 장점이라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갖고 있는 모습을 한 것이라면, 이 역시 망령된 사람일 따름이다. 맹자가 말한 이른바 ‘빗물이 도랑에 모여서 모두 가득 차더라도, 그 마르는 것은 서서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이니, 어찌 능히 오래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말하길, “유무와 허실과 약태의 구분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無라는 것은 절대로 없다는 것이다. 비었다는 것은 곧 아직 가득 차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이름일 뿐이다. 두 가지는 내외로 배움이 이른 곳과 일을 할 수 있는 바를 겸하여 말한 것인데, 約을 泰와 더불어 비교하자면, 貧富貴賤에 대한 지칭일 따름이다. 체 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와 같은 모습을 흉내 내고 이와 같은 일을 가장하는 것이다. 흉내를 내지만 계속 이어갈 수 없다면, 비록 항심이 있는 체 하고자 할지라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南軒張氏曰 聖人者肖天地者也 君子者具其體而未能充實者也 故聖人不得而見 得見君子 斯可矣 善人資稟醇篤無惡之稱 有恒者 則能謹守常分而已 故善人不得而見 得見有恒者 斯可矣 以善人之資而進學不已 聖蓋可幾 有恒而力加勉焉 亦足以有至也 若夫已無而以爲有 已虛而以爲盈 在約而以爲泰 則是驕矜虛浮 不務實者 豈能以有恒乎 未能有恒 況可言學乎 남헌장씨가 말하길, “성인이라는 사람은 천지와 닮은 사람이다. 군자라는 사람은 그 體를 갖추고 있지만 아직 가득 채울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성인을 만나뵐 수 없을지라도, 군자를 만나보는 것은 가능한 것이다. 善人이란 자품이 순수하고 독실하며 악이 없다는 것에 대한 지칭이다. 항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곧 떳떳한 분수를 삼가 지킬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善人을 만나뵐 수 없을지라도, 항심을 가진 사람을 만나보는 것은 가능한 것이다. 善人의 자질을 가지고 배움에 나아가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성인이라도 대체로 가까이 갈 수 있다. 항심을 갖고 있으면서 여기에 힘을 더하여 노력한다면, 역시 충분히 일정수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무릇 이미 없음에도 있다고 여기고, 이미 비었음에도 가득 찼다고 여기며, 쓸 것이 작음에도 크다고 여긴다면, 이는 교만하고 뻐기며 허황되고 떠도는 것으로서 실질에 힘쓰지 않는 것이니, 어찌 이로써 항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항심을 가지는 것도 할 수 없는데, 하물며 배움을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勉齋黃氏曰 亡爲有虛爲盈約爲泰 三者誇大欺妄之意 不實之謂也 人惟實也 則始終如一 故能有常 今其人不實如此 又豈敢望其有常哉 夫子稱聖人君子善人 不可得見而卒及乎此 又以明夫有恒者之亦不可見也 면재황씨가 말하길, “없음에도 있다고 여기고, 비었음에도 가득하다고 여기며, 작아도 크다고 여기는 이 세 가지는 과장하고 속이는 뜻으로서, 진실하지 않음을 일컬은 것이다. 사람이 오직 진실해야만 始終如一하기 때문에 능히 일정함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 그 사람이 진실하지 않기가 이와 같음에도, 또 어찌 감히 그에게 일정함이 있기를 바라겠는가? 공자께서는 성인과 군자와 선인을 만나뵐 수 없다고 칭찬하였으면서도, 갑자기 여기에 이르러서는 또한 저 항심을 가진 사람도 또한 만나볼 수 없음을 밝히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學至於聖人 則造乎極而無以復加矣 君子雖未及乎聖人 然其才德超出於衆 則其爲學亦以成矣 善人雖未必知學 然其資質之美 自然至於善而不至於惡 至於有恒者 則資質又有不及善人 但亦純固而不務虛誇 守其一端 則終身不易者也 경원보씨가 말하길, “배움이 성인에 이르면, 지극한 곳으로 나아가서 더 이상 더할 것이 없게 된다. 군자는 비록 성인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그 재주와 품덕이 뭇사람을 뛰어넘기 때문에, 그가 학문을 하는 것 역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선인의 경우, 비록 반드시 배울 줄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자질이 훌륭하여 자연히 선에 이를 뿐 악에는 이르지 않는 것이다. 항심을 가지고 있는 자에 이르면, 그 자질이 또한 선인에 미치지 않음이 있지만, 다만 역시 순수하고 견고하여 허황되고 과장된 것에 힘쓰지 않으니, 그 한쪽 끝을 지킨다면, 곧 종신토록 바꾸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入德有門戶 進德有閫奧 自有恒而入 學以充之 以造於極 有至聖域之理 虛誇無恒者 尙無入德之門戶 況敢望進德造於閫奧乎 末三句 言不常之失以明有恒之義 學者以希聖爲標準 而能以有恒爲入門 其庶幾焉 신안진씨가 말하길, “덕에 들어감에 있어 문호가 있고, 덕에서 진보함에 있어 최고의 지향점이 있으니, 항심이 있는 것으로부터 들어가서, 학문으로 그것을 채워 지극한 곳에 나아간다면, 성인의 영역에 이를 수 있는 이치가 있는 것이다. 허황되고 과장하여 항심이 없는 자라면, 여전히 덕에 들어갈 문호조차 없는데, 하물며 감히 덕 위에서 진보하여 곤오에 나아가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마지막 세 구절은 일정하지 않는 잘못을 말함으로써 항심을 가지고 있는 의의를 밝힌 것이다. 배우는 자가 성인을 바라는 것을 표준으로 삼고서 능히 항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들어가는 문으로 삼을 수 있다면, 이것에 거의 가깝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