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댓글1.초등학교 시절에 해마다 소풍을 갔다. 운동회는 해를 거르기도 했지만 가을 소풍은 거의 거르지 않았다. 기껏 가 봐야 동네 바닷가나 학교 근처 가까운 야산으로 갔다. 어떤 때는 전교생이 같은 장소로 가기도 했다. 그러면 좀 넓고 평평한 잔디밭이 있는 곳을 찾았다. 각 학년과 반 별로 노래 자랑을 하거나 줄다리기도 했다. 전교생이 한 장소에 모이려면 제법 큰 장소여야 한다. 아이들은 어딜 가나 장소가 문제 아니다. 그저 하루 공부 안하고 야외로 나오면 무조건 좋은 거다. 집에서 가져온 도시락을 쫙 펴놓고 아이들이랑 같이 먹는 김밥은 천하 일 미다 점심 먹고 노래 자랑 마치면 마지막 행사가 보물 찾기다. 선생님이 아이들 몰래 여기 저기 풀 섶이나 큰 바위와 나무 등 걸 같은 곳에 숨긴다. 보물 이래야 기껏 연필과 필통 연필 깎기와 지우개 정도다. 그래도 보물을 찾으면 얼마나 신이 나는지 모른다. 다 끝난 후에 하나도 못 찾은 아이들에겐 선생님이 남은 보물을 나눠주기도 했다. 반 별로 남녀 대표가 노래를 부르면 전부 나와 응원하고 같이 불렀다. 그러면 온 동네가 떠나 갈 듯이 요란하다. 흥겨운 노래 자랑이 끝나면 시상식으로 휘날레를 장식한다..=>
2.언젠가 가을 소풍을 맞은 편 육지의 항구 도시로 갔다. 큰 여객선을 처음 타고 한 바다를 건너는 것도 처음이라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른다. 항구에서 내려 꽤 먼 거리를 걸어서 갔다. 큰 도회지도 처음이라 모든 게 신기하기만 했다. 좁은 인도를 일렬로 걸으면 사람들이 무슨 구경거리인 양 쳐다 봤다. 어린 아이들이 쭉 줄지어 걷는 모습이 보기에 신기했던 모양이다. 좁은 다리를 한 줄로 나란히 걸으면 자동차는 못 가고 기다리곤 했다. 지금은 다리를 확장해서 차 도와 인도가 따로 있어 내 왕이 훨씬 빠르고 편해졌다. 아무튼 꽤 먼 거리를 정신없이 걷느라 구경은 둘째였다. 그 날 무엇을 보고 뭘 느꼈는지 기억에 별로 남아 있지 않지만 '언젠가 여수 오동도로 소풍을 갔었지' 하는 추억만 생생히 남아 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동네 친목회서 야유회를 갔다. 전 회원이 매월 정기 회 비를 모아 2년 주기로 가는 여행으로 여수와 남해 거제도를 둘러보고 왔다. 먼 추억을 되돌아 보는 뜻 깊은 여행이 되었다. 한 동네 동업자 친목회와 고향 향우회서 번갈아 십 수년을 다녔으니 전국의 유명 관광지는 거의 다 섭렵해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정도다..=>
3.고향의 모교인 초등학교도 폐교가 되었다. 오래 전인데 당시 전 동문이 나서서 막으려 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이전엔 면 내 초등학교가 넷이나 되었고 학년마다 60명 씩 두 개 반이었지만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 없었다. 당시 면 내 전체 초등학생이 채 50 여 명도 안 되니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저출산이 전 세계에서 초유의 기록을 세우며 압도적인 1위 국가라 한다. 어쩌다 자랑스럽지 못한 불명예를 안았는지 일 수 없는 일이다. 이전엔 후진국이 대개 출산율이 높은 국가였다. 그런데 이제는 선진국 뿐만 아니라 많은 국가들이 저출산의 늪에 빠지고 있다. 지구 상에서 가장 먼저 사라질 나라로 우리 나라를 꼽는다니 억장 무너질 일이다. 역대 정부에서 국가적인 정책을 세우고 온갖 지원 책을 쏟아 부었지만 백 약이 무용지물이니 큰 일이다. 급속한 경제 발전으로 황금 만능 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면서 나라도 국민도 변한 것 같다. 결혼을 안 하고 결혼을 해도 아이를 갖지 않으려는 젊은이가 늘어 간다. 무슨 획기적인 묘안과 묘 책이 없을까? 그냥 이대로 인구 절벽 국가로 내달리게 내버려 둬야 하는가? 답답하기는 국가와 국민 모두가 다 같은 심정이다..=>
4.시골 고향 마을이 이전엔 120 세대가 넘었는데 이제는 거의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군 전체 인구가 16~7만 명으로 국회의원 한 명이 나왔다. 그러다 이웃 두 개 군이 통합되더니 이제는 4개 시 군이 합해서 국회의원 한 명을 뽑는다. 그러니 지금은 자기네 지역구 국회의원이 누군지도 모른다. 그만큼 정치에 관심이 없기도 하지만 지역이 넓어진 만큼 애향심이 줄어든 것이다. 그러다 선거 철만 되면 난리가 난다. 전기가 없던 시절은 전기 끌어 온다는 공약이 가장 큰 공약이었다. 그 후에는 섬이라 다리를 놓는 것이 큰 사업으로 국회의원마다 단골로 써 먹는 공약이었다. 그 당시 시골은 거의 집권 당이 싹쓸이 하다시피 했던 시절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군 민의 숙원 사업이었던 다리가 놓였다. 준공 식 날 당시 대통령이 개통 테이프를 끊고 건너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뒤따르니 일시적으로 다리가 균형을 잃고 출렁거렸다. 방위 병으로 면사무소에서 행정 보조 요원으로 근무하던 때였다. 개통 식 날 군 내 모든 공무원이 총 출동 되었다. 그 날의 감격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다리가 놓이고 도로가 확장.포장 되면서 발전이 가속화 되었다..=>
5.이전에 다리가 놓이지 않고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던 시절에 고향 길이 서울서 보통 10시간 넘게 걸렸다. 지금은 강남 고속 터미널에서 4시간이면 간다. 가까이 비행장이 있으나 비행기를 타려면 더 멀고 시간도 많이 걸려 고속버스가 낫다. 작은 나라에서 지방 공항이 어쩌면 사치일 수 있다. 만년 적자인 지방 공항이 정치적인 이유와 정책이 더 클 것이다. 요즘은 고향 가는 일이 드물다 이전에 친인척의 관 혼 상제로 많이 다녔지만 이제 그런 일이 끝난 지도 오래 되었다. 객지를 나갔던 친구들 몇 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가까운 집안 친구도 15~6년 전에 귀향을 했다. 대개 벼 농사는 덤이고 마늘과 시금치 농사를 주업으로 삼는다. 마늘 농사는 손이 많이 가고 기계화도 어려워 부지런해야 한다. 섬이라 아직도 천수답이 많다. 요즘 농촌에서 젊은이 찾기가 사막의 오아시스 보다 힘들다. 한 세대가 흐르면 우리네 농촌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언젠가 주 곡인 쌀마저 수입할지 모른다. 농지 개발과 종자 개량으로 쌀이 남아 돈다. 지금은 너무 잘 먹어 비만을 걱정하는 시대다. 춥고 배 고팠던 시절의 '보릿고개'가 이제 잊혀진 단어가 되고 애즈린 추억이 되었다..^*^
첫댓글 1.초등학교 시절에 해마다 소풍을 갔다. 운동회는 해를 거르기도 했지만 가을 소풍은 거의 거르지 않았다. 기껏 가 봐야 동네 바닷가나 학교 근처 가까운 야산으로 갔다. 어떤 때는 전교생이 같은 장소로 가기도 했다. 그러면 좀 넓고 평평한 잔디밭이 있는 곳을 찾았다. 각 학년과 반 별로 노래 자랑을 하거나 줄다리기도 했다. 전교생이 한 장소에 모이려면 제법 큰 장소여야 한다. 아이들은 어딜 가나 장소가 문제 아니다. 그저 하루 공부 안하고 야외로 나오면 무조건 좋은 거다. 집에서 가져온 도시락을 쫙 펴놓고 아이들이랑 같이 먹는 김밥은 천하 일 미다 점심 먹고 노래 자랑 마치면 마지막 행사가 보물 찾기다.
선생님이 아이들 몰래 여기 저기 풀 섶이나 큰 바위와 나무 등 걸 같은 곳에 숨긴다. 보물 이래야 기껏 연필과 필통 연필 깎기와 지우개 정도다. 그래도 보물을 찾으면 얼마나 신이 나는지 모른다. 다 끝난 후에 하나도 못 찾은 아이들에겐 선생님이 남은 보물을 나눠주기도 했다. 반 별로 남녀 대표가 노래를 부르면 전부 나와 응원하고 같이 불렀다. 그러면 온 동네가 떠나 갈 듯이 요란하다. 흥겨운 노래 자랑이 끝나면 시상식으로 휘날레를 장식한다..=>
2.언젠가 가을 소풍을 맞은 편 육지의 항구 도시로 갔다. 큰 여객선을 처음 타고 한 바다를 건너는 것도 처음이라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른다. 항구에서 내려 꽤 먼 거리를 걸어서 갔다. 큰 도회지도 처음이라 모든 게 신기하기만 했다. 좁은 인도를 일렬로 걸으면 사람들이 무슨 구경거리인 양 쳐다 봤다. 어린 아이들이 쭉 줄지어 걷는 모습이 보기에 신기했던 모양이다. 좁은 다리를 한 줄로 나란히 걸으면 자동차는 못 가고 기다리곤 했다. 지금은 다리를 확장해서 차 도와 인도가 따로 있어 내 왕이 훨씬 빠르고 편해졌다. 아무튼 꽤 먼 거리를 정신없이 걷느라 구경은 둘째였다. 그 날 무엇을 보고 뭘 느꼈는지 기억에 별로 남아 있지 않지만 '언젠가 여수 오동도로 소풍을 갔었지' 하는 추억만 생생히 남아 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동네 친목회서 야유회를 갔다. 전 회원이 매월 정기 회 비를 모아 2년 주기로 가는 여행으로 여수와 남해 거제도를 둘러보고 왔다. 먼 추억을 되돌아 보는 뜻 깊은 여행이 되었다. 한 동네 동업자 친목회와 고향 향우회서 번갈아 십 수년을 다녔으니 전국의 유명 관광지는 거의 다 섭렵해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정도다..=>
3.고향의 모교인 초등학교도 폐교가 되었다. 오래 전인데 당시 전 동문이 나서서 막으려 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이전엔 면 내 초등학교가 넷이나 되었고 학년마다 60명 씩 두 개 반이었지만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 없었다. 당시 면 내 전체 초등학생이 채 50 여 명도 안 되니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저출산이 전 세계에서 초유의 기록을 세우며 압도적인 1위 국가라 한다. 어쩌다 자랑스럽지 못한 불명예를 안았는지 일 수 없는 일이다. 이전엔 후진국이 대개 출산율이 높은 국가였다. 그런데 이제는 선진국 뿐만 아니라 많은 국가들이 저출산의 늪에 빠지고 있다. 지구 상에서 가장 먼저 사라질 나라로 우리 나라를 꼽는다니 억장 무너질 일이다. 역대 정부에서 국가적인 정책을 세우고 온갖 지원 책을 쏟아 부었지만 백 약이 무용지물이니 큰 일이다.
급속한 경제 발전으로 황금 만능 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면서 나라도 국민도 변한 것 같다. 결혼을 안 하고 결혼을 해도 아이를 갖지 않으려는 젊은이가 늘어 간다. 무슨 획기적인 묘안과 묘 책이 없을까? 그냥 이대로 인구 절벽 국가로 내달리게 내버려 둬야 하는가? 답답하기는 국가와 국민 모두가 다 같은 심정이다..=>
4.시골 고향 마을이 이전엔 120 세대가 넘었는데 이제는 거의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군 전체 인구가 16~7만 명으로 국회의원 한 명이 나왔다. 그러다 이웃 두 개 군이 통합되더니 이제는 4개 시 군이 합해서 국회의원 한 명을 뽑는다. 그러니 지금은 자기네 지역구 국회의원이 누군지도 모른다. 그만큼 정치에 관심이 없기도 하지만 지역이 넓어진 만큼 애향심이 줄어든 것이다. 그러다 선거 철만 되면 난리가 난다.
전기가 없던 시절은 전기 끌어 온다는 공약이 가장 큰 공약이었다. 그 후에는 섬이라 다리를 놓는 것이 큰 사업으로 국회의원마다 단골로 써 먹는 공약이었다. 그 당시 시골은 거의 집권 당이 싹쓸이 하다시피 했던 시절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군 민의 숙원 사업이었던 다리가 놓였다. 준공 식 날 당시 대통령이 개통 테이프를 끊고 건너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뒤따르니 일시적으로 다리가 균형을 잃고 출렁거렸다. 방위 병으로 면사무소에서 행정 보조 요원으로 근무하던 때였다. 개통 식 날 군 내 모든 공무원이 총 출동 되었다. 그 날의 감격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다리가 놓이고 도로가 확장.포장 되면서 발전이 가속화 되었다..=>
5.이전에 다리가 놓이지 않고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던 시절에 고향 길이 서울서 보통 10시간 넘게 걸렸다. 지금은 강남 고속 터미널에서 4시간이면 간다. 가까이 비행장이 있으나 비행기를 타려면 더 멀고 시간도 많이 걸려 고속버스가 낫다. 작은 나라에서 지방 공항이 어쩌면 사치일 수 있다. 만년 적자인 지방 공항이 정치적인 이유와 정책이 더 클 것이다.
요즘은 고향 가는 일이 드물다 이전에 친인척의 관 혼 상제로 많이 다녔지만 이제 그런 일이 끝난 지도 오래 되었다. 객지를 나갔던 친구들 몇 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가까운 집안 친구도 15~6년 전에 귀향을 했다. 대개 벼 농사는 덤이고 마늘과 시금치 농사를 주업으로 삼는다. 마늘 농사는 손이 많이 가고 기계화도 어려워 부지런해야 한다. 섬이라 아직도 천수답이 많다. 요즘 농촌에서 젊은이 찾기가 사막의 오아시스 보다 힘들다. 한 세대가 흐르면 우리네 농촌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언젠가 주 곡인 쌀마저 수입할지 모른다. 농지 개발과 종자 개량으로 쌀이 남아 돈다. 지금은 너무 잘 먹어 비만을 걱정하는 시대다. 춥고 배 고팠던 시절의 '보릿고개'가 이제 잊혀진 단어가 되고 애즈린 추억이 되었다..^*^
유년 시절 소풍 갈 때면 화약총, 풍선,
와담아 과자, 꽈베기, 등등..
평소에 잘 못 먹던 것을
먹을 수 있는 기대감에 잠 못 이루는 시절이
아련합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늘이 더 없이 맑고 푸른 가을 아침입니다..
배낭 메고 훌쩍 등산이라도 가고 싶으네요..
언제나 건강하시고 힘찬 나날이 되세요..
감사합니다..^*^